논산(論山) 서원기행(書院紀行)
2017년 5월 30일(端午단오)
성균관유도회 천안서부지회
노강서원(魯岡書院)은 충청남도 논산시 광석면에 있는 서원이다.
1675년 충청도 노성(魯城)에 문정공 윤황(文貞公 尹煌)을 모시기 위해 지어졌고, 1682년 사액을 받았다.
윤문거(尹文擧), 윤선거(尹宣擧), 윤증(尹拯)이 추가배향되었다.
1871년 서원철폐령에도 훼철되지 않은 47개 서원 중 한 곳으로, 전학후묘식 배치로 공간의 위계성을 유지하는
서원 건축의 특성을 잘 보여주고 있어 역사적·학술적 가치가 높다.
마당 한켠의 향나무 노거목
새끼 가지는 아직도 잎을 피우며 살아있는데 죽은 부분도 썪지 않는다고 한다.
충청남도 논산시 연산면에 위치한 돈암서원(遯巖書院).
입구의 배롱나무
산앙루(山仰樓)
입덕문(入德門)
사적 제383호이며, 지정 면적은 5590㎥이다. 1634년(인조 12)에 지방 유림의 공의로 김장생(金長生)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창건 이전 연산면에는 김장생의 아버지인 계휘(繼輝)가 설립한 경회당(慶會堂)이 있어 문풍(文風)이 크게 진작되었고,
김장생은 양성당(養性堂)을 세워 학문 연구와 후진 양성에 힘을 기울였다.
이에 1634년 양성당과 경회당을 중심으로 서원이 건립하게 되었고, 1660년(현종 1)에 ‘돈암(遯巖)’이라고 사액되어
사액서원(賜額書院)으로 승격하였다.
1658년(효종 9)에 김집(金集)과 1688년(숙종 14)에 송준길(宋浚吉), 1695년에 송시열(宋時烈)을 각각 추가 배향하였다. (자료)
응도당(凝道堂)
본 서원은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도 훼철(毁撤)되지 않고 존속한 47개 서원 중의 하나이며, 경내의 건물로는
사우(祠宇)·양성당·응도당(凝道堂)·장판각(藏板閣)·정회당(靜會堂)·산앙루(山仰樓)·내삼문(內三門)·외삼문(外三門) 등과
하마비(下馬碑)·송덕비(頌德碑)가 있다.
문화해설사의 해박한 설명
정회당(靜會堂)은 고요하게 몸소 실천하며 수행한다는 뜻으로 사계 선생 부친인 황공(煌公)께서 강학하던 건물이며
대덕산자락의 고운사 터에서 1954년에 옮겨온 것이다.
응도당의 양옆으로 달아낸 지붕을 눈썹처마라 한다
마당을 지키는 향나무 노목(老木)
숭례사에 제향을 지내기 위해 출입하는 내삼문(內三門). 문과 문 사이에는 담장이 쳐져 있다.
담장의 글씨가 특이한데 '지부해함(地負海涵)' "땅이 온갖 것을 지고 바다가 모든 물을 받아주듯 포용하라."
박문(博文), "지식은 넓히고"
약례(約禮), "행동은 예의에 맞게 하라"
서일화풍(瑞日和風)
"좋은 날씨 상서로운 구름, 부드러운 바람과 단비 즉, 다른 사람을 편안하게 해주고, 웃는 얼굴로 대하라"
김장생과 그의 후손들의 예학정신을 가장 잘 보여주는 12개의 글자이다.
숭례사
응도당 원경
산앙루
이 장면이 좋다.
돈암서원 원정비(遯巖書院 院庭碑,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366호).
서원을 세우게 된 배경과 위패를 모신 조선시대 문인 사계 김장생(1548∼1631) 선생의 행적 및 사원의 구조
등에 관해 적고 있다. 조선 현종 10년(1699)에 세운 것이다.
송시열(宋時烈)이 비문을 짓고, 송준길(宋浚吉)이 글씨를 썼으며, 두전(頭篆)은 김만기(金萬基)의 글씨이다.
20여년만에 다시 더듬어 보는 송준길(宋浚吉)의 필적
조선중기 문인(文人)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 선생의 문하생들이 돈암서원을 세운 사연과 사계와 그의 아들인
신독재(愼獨齋) 김집(金集) 부자의 학문과 업적을 적은 비이다.
이들은 예학과 성리학의 대가로 고향에 돌아와 주자학을 연구하였는데 비문에는 장중하고 온화한 사계와 치밀한
신독재의 성품을 기리고 그들의 높은 학문을 적고 있다.
사계선생 김장생 묘소 일원
김철산[金鐵山, 태조 2년(1393)∼문종 즉위년(1450), 58세], 본관은 광산, 증조는 광성군 김정(金鼎),
조부는 충청도관찰사 김약채(金若采), 아버지는 검열 김문(金問), 어머니는 대사헌 허응(許應)의 따님 양천허씨,
배위는 성천도호부사 김명리(金明理)의 따님 안동김씨, 아들이 좌의정 김국광(金國光), 좌참찬 김겸광(金謙光),
첨정 김정광(金廷光), 판교 김경광(金景光)이다.
음사로 벼슬길에 나아가 세자참군, 인수부승, 예빈시 직장, 풍저창부사를 거쳐 사헌부감찰에 이르렀다.
천품이 순후하고 강직하여 남과 다투지 않았고 서로 비교하지 않았으며, 좋고 나쁜 일을 들어내지 아니하니
모두가 숨은덕이 있다고 칭송하였다.
순충적덕병의보조공신에 책봉되고 대광보국 숭록대부 영의정부사 광성부원군에 추증되었다. (자료)
*** 특히 배위 정경부인 안동 김씨에 눈이 가 찾아보니 부친 김명리(金明理)는 오호,
우리 선조 고려국(高麗國) 문하시중(門下侍中) 상락군개국공(上洛郡開國公) 김방경(金方慶)의 5대손이자
김구용(金九容) 척약재(惕若齋) 선조의 아드님이니 김철산(金鐵山) 광성부원군(光城府院君)은
바로 외손(外孫)이 된다.
양천 허씨 묘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 묘
사계종가
굴뚝을 낮춘 뜻은..?
명재고택(明齋故宅)
윤증(尹拯, 1629~1714)은 조선 후기의 학자 정치인 사상가이며 당색은 서인, 소론의 영수이다.
윤선거의 아들이며 자는 자인(子仁), 호는 명재(明齋)·유봉(酉峰), 시호는 문성(文成)이다.
학문 연구로 일생을 보냈으며, 그는 성리학 외에도 양명학과 실학사상을 접하고 연구하기도 했다.
명재 윤증의 초상화 <출처; www.cha.go.kr.korea, 위키백과>
사람들은 명재 윤증을 ‘백의정승’이라고 불렀다. 숙종임금이 대헌사, 우참찬, 좌의정 등의 벼슬을 내렸으나
효행과 학문에 열중하기 위해서 끝까지 사양했기 때문이다.
명재 윤증은 우암 송시열의 사문(師門)에 들어갔으나 나중에 노론의 영수인 우암과 서로 첨예하게 맞서기도 했다.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분파하는 원인이 됐던 이른바 ‘회니시비(懷尼是非)’의 발단이 됐던 장본인들이다.
당시 우암은 ‘회덕(懷德)’에, 명재 윤증은 ‘니산’(노성·尼城)에 살았기 때문에 그렇게 유래됐다고 전해진다.
연못은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나다'는 천원지방(天圓地方) 사상을 형상화한 것으로
네모난 연못을 만들고 그 가운데에는 둥근 섬을 만들었다
이은시사(離隱時舍)
'세상을 살면서 떠날 때와 머무를 때를 아는 사람이 사는 집'
허한고와(虛閑高臥)
"모든 것을 비우고 한가로이 누워 하늘을 본다"
솟대의 의미
새는 모든 신화에서 천상과 지상을 연결하는 매개체이자 의미있는 상징물이다.
儒林尊道德(유림존도덕) 유림은 도덕을 숭상하고
小子亦甞欽(소자역상흠) 소자도 일찍이 흠앙했네.
平生不識面(평생불식면) 평생 한 번 만나 보지 못했기에
沒後恨彌深(몰후한미심) 사후에 한이 더욱 깊어지네.
- 숙종(肅宗)의 추모시(追慕詩)
***
강경 별미 '우여회무침'
밀복국
첫댓글 푸른 목백일홍꽃 나무가
시선을 사로잡아
혹시나 했더니 역시나 였군요
목백일혼꽃이
붉게 피는 날 가기라
기다리는 고택을
미리 이만큼 이라고
알려주시는 듯 합니다..
고택은
언제나 편안합니다..
7,8원쯤 목백일홍 필 때 다시 가보고 싶습니다.
특히 명재고택의 연못 주변의 경관이 가대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