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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18: 23. 결산하려 하던 임금 24. 일만 달란트 빚진 자 25. 갚을 것이 없는지라 26. 참으소서.
마 18: 23. 결산하려 하던 임금 - 그러므로 천국은 그 종들과 결산하려 하던 어떤 임금과 같으니 ( 이러므로 천국은 그 종들과 회계하려 하던 어떤 임금과 같으니 )
주께서는 용서를 가르치시기 위해 천국을 그 종들과 결산하려 하던 어떤 임금과 같다고 비유하셨다.
이 비유에서 천국은 신약교회를, 임금은 하나님을, 또 종들은 교인들을 가리킨다.
신약교회는 천국의 현재적 측면이다. 임금이 종들과 회계 즉 재무 결산을 하듯이,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된 신약교회 교인들의 행위에 대해 판단하신다.
1] 그러므로 천국은
마태복음에만 나오는 이 비유는 끝없는 용서에 대한 교훈을 뒷받침하는 구체적인 예화로서 제시되고 있다.
비유의 형식은 13장의 천국 비유와 같으나 비유의 내용은 25: 31 이하에 나오는 마지막 심판과 유사하다.
실로 예수께서는 용서의 기준을 이 지상의 현존하는 사회법에 근거하지 않으시고 '천국' 법에 따른 그 나라 백성들의 준수 사항을 역설하고 계신 것이다.
2] 그 종들과 결산하려 하던
'종들'(*, 둘로이)은 문자적으로 노예들은 가리킨다. 임금에게 빚진 액수가 지나치게 많은 것으로 보아 임금의 궁전에서 일하는 하급 관리나 노예들이 아닐 것이다.
왕의 영토 중의 일부를 다스리고 그곳에서 나오는 수입을 왕에게 상납해야 하는 지방 장관(Satraps)이거나 혹은 영주라고 보아야 한다(Herodotus).
예수는 그러한 신분에 대한 관심보다 천국 상속자들이 얼마나 많이 죄의 용서함을 받았는지를 분명히 하기 위해 이러한 과장된 신분과 빚을 예시 하셨다.
여기 제시된 '종들'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계를 다스리고 지배할 것을 위임받은 우리 자신을 가리키는 말이라고 볼 수 있다.
결산하려 한다고 하는 말의 헬라어 '쉬나라이 로곤'(*)은 '계산(*, 로고스)을 매듭짓다', '거래를 청산하다(*, 쉬나이로)'의 의미이다.
수지와 그에 따른 균형을 살피는 것을 말하고 있다. 특별히 본문에서는 종말론적 심판의 자리를 상징하는 말로 사용되었다.
말세에 모든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평생 자신들에게 맡기어졌던 일들에 대해서 결산하여야 한다.
* 고후 5: 10 -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3] 어떤 임금과 같으니
'임금'은 자신의 통치권 아래 있는 자들에게 절대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자를 가리킨다. 특히 35절과 연관되어 '천부' 곧 만유의 주관자요 심판주이신 하나님을 가리킨다.
이 비유에서
(1) 천국은 신약교회를 가리키고,
(2) 임금은 하나님을 가리키고,
(3) 또 종들은 하나님의 백성, 즉 신약교회 교인들을 가리킨다고 본다.
신약교회는 천국의 시작 혹은 현재적 측면이다.
임금이 종들과 회계 즉 재무 결산을 하듯이,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된 신약교회 교인들의 행위를 판단하신다.
마 `8: 24. 일만 달란트 빚진 자 - 결산할 때에 만 달란트 빚진 자 하나를 데려오매 ( 회계할 때에 일만 달란트 빚진 자 하나를 데려오매 )
한 달란트는 6,000데나리온이었다(한 달란트는 약 30킬로그램이었고, 한 데나리온은 약 5그램이었다)(NBD).
한 데나리온은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었는데(마 20: 2), 그것을 오늘날 품삯으로 10만 원만 치더라도, 한 달란트는 약 6억 원이며, 1만 달란트는 약 6조 원이 된다.
1] 결산할 때에 만 달란트 빚진 자
(1) 일만 달란트
달란트는 예수 당시의 유대와 로마 사회에서 통용되던 화폐 단위 중 가장 큰 것(무게 단위로는 약 34kg의 순금에 해당함).
1달란트는 노동자 한 사람의 일일 품삯인 1데나리온의 약 6000배에 상당하다.
일만 달란트에 대한 평가는 천이백만 달러에 해당된다고 하지만 여러 가지 물가 상승 요소를 감안한다면 오늘날의 통화로는 10억 달러 이상일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D. A. Carson).
요세푸스(Josephus)의 증언에 따르며 유대 전역에서 각출된 1년 세금이 고작 800달란트에 불과했다고 하니 이 일만 달란트의 가치가 얼마만 했는가를 가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액수는 하나님께 대하여 인간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갚을 수 없는 정도로 큰 죄악을 상징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28절의 일백 데나리온이 '소액'(少額)을 나타내기 위하여 사용된 한정수인 것처럼 이 일만 달란트도 많은 액수의 돈을 나타내기 위한 최소한의 한정수에 해당한다.
(2) 빚진 자(*, 오페이레테스)
'빚'은 공금을 횡령한 것이라기보다는 금액이 지나치게 큰 것으로 보아 상납하지 못한 세금과 같은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는 '아켈라오가 해마다 유다와 사마리아에서 600달란트를, 헤롯 안디바는 갈릴리와 베레아에서 200달란트를 징수하였다'(Lenski)는 사실에서도 알 수 있다.
이 엄청난 양의 부채는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죄를 상징한다.
본문의 '오페이레테스'라는 헬라어는 주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문에도 언급되었다. 그곳에서는 '죄'(*, 오페이레마)로 번역되었다.
그런 점에서 다음과 같이 죄와 부채의 차이점과 유사점을 찾아볼 수 있다.
차이점 :
① 죄는 한 번 지은 이상 항상 죄이지만 부채는 갚고 나면 더 이상 부채가 아니다.
② 자신이 지은 죄는 누구에게도 전가할 수 없으나 부채는 제 삼자가 대신 감당할 수 있다.
③ 죄는 쌍방간의 쌍무 계약을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지만 부채는 쌍방간의 동의를 일방적으로 어긴 것에서 발생된다.
유사점 :
① 죄나 부채는 모두 의무를 다하지 못한 것이다.
죄는 하나님께, 부채는 채권자에게.
② 죄나 부채는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더 무거워지고 증가되어 가는 것이 일반적 현상이다.
죄는 죄를 낳고 부채는 부채를 낳는 악화 현상이 계속된다.
③ 죄나 부채는 모두 면제될 수 있는 특성을 지닌다.
채권자는 채무자의 부채를 취소, 탕감해 줄 수 있는 권한이 있으며, 아무도 그것을 법으로 금지할 수는 없다.
그것은 그의 특권에 속하는 일이다. 마찬가지로 죄도 하나님에 의해 취소, 용서받을 수 있다.
"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 네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사 43: 25).
본문에서는 부채를 담당할 제삼자의 개입이 없이도 탕감이 가능했으나,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악을 용서하시는 일에는 그리스도의 공로가 전적으로 개입되어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을 하나님께 화목 제물로 드려 사람의 죄악을 말소시키는 일을 담당하셨다. 따라서 인간의 의인(議認)은 예수의 피 흘림이 없이는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었다.
* 엡 1: 7 -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2] 하나를 데려오매
이는 빚진 자가 자발적으로 자신의 빚을 신고한 것이 아니라 그 사실을 숨겨오다가 마침내 타인에 의해 발각되었음을 시사한다.
어쩌면 하나님께서 종말에 성도들이 이 세상에서 이미 고백한 죄에 대해서는 묻지 않으시지만 스스로 참회치 않고 묻어 둔 죄악에 대해서는 철두철미 찾아 물으신다는 종말론적 심판의 장면을 예시한 것이 아닐까.
마 18: 25. 갚을 것이 없는지라 - 갚을 것이 없는지라. 주인이 명하여 그 몸과 아내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갚게 하라. 하니 ( 갚을 것이 없는지라. 주인이 명하여 그 몸과 처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갚게 하라. 한 대 )
그 종이 어떻게 그렇게 많은 빚을 졌는지 모르나 그 빚은 한 개인이 갚기에 불가능한 액수이다.
주인은 그 몸과 아내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갚게 하라 명했다.
1] 갚을 것이 없는지라.
그 종이 어떻게 그렇게 많은 빚을 졌는지 모른다. 그 빚은 한 개인으로서 갚기에 불가능한 액수였다.
2] 주인이 명하여 그 몸과 아내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갚게 하라. 하니
주인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일만 달란트의 빚은 가족 모두를 노예로 판단해도 결코 다 갚을 수 없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당시의 노예의 값은 약 1달란트였고 대부분의 경우는 10분의 1달란트나 그 이하가 일반적인 수준이었다.
빚 때문에 자신과 가족을 파는 일이 구약에도 명기되어 있는 일반적인 법이었다.
* 레 25: 39 - 너와 함께 있는 네 형제가 가난하게 되어 네게 몸이 팔리거든 너는 그를 종으로 부리지 말고
* 왕하 4: 1 - 선지자의 제자들의 아내 중의 한 여인이 엘리사에게 부르짖어 이르되, 당신의 종 나의 남편이 이미 죽었는데 당신의 종이 여호와를 경외한 줄은 당신이 아시는 바니이다. 이제 빚 준 사람이 와서 나의 두 아이를 데려가 그의 종을 삼고자 하나이다. 하니
* 느 5: 5 - 우리 육체도 우리 형제의 육체와 같고 우리 자녀도 그들의 자녀와 같거늘 이제 우리 자녀를 종으로 파는 도다. 우리 딸 중에 벌써 종 된 자가 있고 우리의 밭과 포도원이 이미 남의 것이 되었으나 우리에게는 아무런 힘이 없도다. 하더라.
* 사 50: 1 -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내가 너희의 어미를 내보낸 이혼 증서가 어디 있느냐? 내가 어느 채주에게 너희를 팔았느냐? 보라. 너희는 너희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팔렸고 너희의 어미는 너희의 배역함으로 말미암아 내보냄을 받았느니라.
* 암 2: 6 -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이스라엘의 서너 가지 죄로 말미암아 내가 그 벌을 돌이키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은을 받고 의인을 팔며 신 한 켤레를 받고 가난한 자를 팔며
* 암 8: 6 - 은으로 힘없는 자를 사며 신 한 켤레로 가난한 자를 사며 찌꺼기 밀을 팔자 하는도다.
노예들은 50년마다 반복되는 희년에 해방되었다.
이 비유에서 노예와 그의 가족을 파는 것은 빚이 갚아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종의 절망적 상황과 탄원을 강조하는 요소가 되고 있다.
비유에서 임금이 채무 불이행자에게 무자비할 정도로 요구 조건을 내세운 것은 그 채무자로 하여금 스스로 자신이 얼마만한 빚을 가지고 있으며, 스스로의 힘으로는 도무지 갚을 수 없음을 인정하고 끝내 임금에게 호소하여 자비를 간구하게 하려는데 그 목적이 있었다.
그 임금에게는 빚을 탕감해 줄 마음의 여력이 충만해 있었다(Chrysostom).
이처럼 막대한 빚을 지불할 수 없는 전적 무능은 하나님 앞에서의 인간의 영적 파산(破産)을 그대로 묘사해 주는 것이라 볼 수 있다.
마 18: 26. 참으소서. 다 갚으리이다 - 그 종이 엎드려 절하며 이르되, 내게 참으소서. 다 갚으리이다. 하거늘 ( 그 종이 엎드리어 절하며 가로되, 내게 참으소서. 다 갚으리이다. 하거늘 )
그 종은 엎드리어 절하며 “내게 참으소서. 다 갚으리이다”라고 말했지만, 빚을 갚을 가능성은 없었다.
주님의 비유는 하나님의 백성된 우리 모두의 과거의 영적 처지를 암시한다. 성도들이 구원받기 전의 죄의 빚은 스스로 갚기 불가능한 양이었다.
그 죄 때문에 우리는 지옥 형벌을 받아야 마땅하였다. 우리가 천국에 들어간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죗값은 지옥 형벌이었다.
1] 그 종이 엎드려 절하며 이르되,
상대방에 대한 절대적 권위를 인정하는 동시에 자신의 신분을 최대로 격하시키는 고대 세계의 예법이다.
특별히 본문의 헬라어는 미완료 과거형을 취하고 있는데, 이것은 엎드려 절하는 동적이 끊임없이 상대방으로부터 정을 일으킬 정도로 실행되었음을 암시한다.
이것이 빚의 청산에 전적으로 무능한 종이 취할 수 있는 최선의 행동이었다.
2] 내게 참으소서. 다 갚으리이다. 하거늘
'참으소서'에 해당하는 헬라어 '마크로뒤메오'(*)는 '먼', '긴'의 뜻인 '마크로스'(*)와 '강한 감정, 분노'를 뜻하는 '뒤모스'(*)의 합성어이다.
그 빚을 임금 자신의 분노나 격정을 일으키기 전에 그 일을 오랫동안 잊으시라고 하는 뜻을 나타낸다(Trench).
이 채무자는 임금에게 그의 막대한 빚을 갚을 시간을 간구하였지만 이는 어떤 가능성 있는 약속이 아니다. 다만 임금의 노여움과 그 형벌을 일순간이나마 모면해 보려는 임기응변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는 우리의 모든 소유를 다 팔아도 죽음과 영원한 지옥 형벌로부터 우리 자신을 구원할 수 없다. 나의 몸, 나의 아내와 자식들, 나의 재산을 다 팔아도 나의 죄와 형벌을 갚는 데 부족할 뿐이었다.
신약 성도는 이 사실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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