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들 하신지요. 오늘 2018년 3월 25일 독일시간 새벽 2시를 기하여 여름철 시간을 사용합니다 Daylight-savingtime 이라고 학창시절에 배운 기억은 있으나 우리들은 그냥 Summer-time 이라고 했었지요 사실 햇볕이 밝아오는 시간에 맞추어 빨리 일과를 시작하고 밤의 어두운 시간에 불켜놓고 일하지 말고 에너지 절약이라든가 여러가지 경제적인 측면을 고려하여 시행한 제도 이지만 요즈음은 시간을 봄 가을 두번씩이나 땡겼다 늦추었다 하는데 따른 불편함과 (비행기나 열차시간을 변경하는것등을 생각해 보십시오) 또 경제적인 비용이 에너지 절감하는 경제적인 효과 못지않다는걸 인식한 사람들이 이제 시간을 가만 놔두자는 주장을 하여 어쩌면 몇년안에 실행이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쩻건 오늘부터 유럽과 한국의 시차는 7시간 차이 입니다 참고 하시기 바랍니다
어제 저녁에 趙夕浦兄이 올린 사진설명에 대구시 달성군 화원면 본리동 이라고 나오던데 내가 대구서부국민학교를 6년간이나 다녔었지요
그런데 원래 서부국민학교의 주소는 비산동 인데 아시다 시피 6 25 사변때 북괴 김일성이란 놈의 남침(쏘련의 외교문서에 적혀있어 증거가 있지요)으로 인하여 본교를 징발당하고(대한민국 공군본부로 사용) 이리 저리 돌아 다니면서 공부를 하다가 평리동에 假校舍를 지어서 6 학년때 본교를 되돌려받아 들어 갈때까지 평리동 가교사에서 공부를 했었답니다
그런데 내가 아는 바로는 서부국민학교 본교가 비산동 끝자락이고 바로 옆에 논이 몇마지기 있고 그 옆이 사리못이란 제법 큰 못이 있었는데(지금은 못을 메워 시장이 되었다고 합디다 알고보면 대구 서문시장터도 조선시대 말기에 계산동 동산동 인교동 쪽에서 옮겨오기 전에는 못이 었다고 들었던 기억도 있지요 아무튼 사리못에서 부터 시작되는 평리동이 한참 걸어가야 서부국민학교 가교사가 나온답니다 그곳에서 또 상당한 거리를 가면 중리동이 나온다고 하더군요 나는 어릴때 내 외할아버지 할머니 산소가 중리동에 있어서 해마다 산소에 따라다닌 기억도 있어서 동네 이름도 기억하는데 내가 외할아버지 산소에 갈때는 평리동 서부국민학교 가교사 앞길이 아니라 남쪽으로 백여미터 평행으로 난 길을 다녔답니다 중리까지는 내가 다녀봐서 아는데 그 이상은 가 보질 않았지만 학교친구들이 中里 다음엔 上里가 있다고 했었지요 그 다음은? 하고 물으면 이현동 이라고 했고요 그러니 내 그 어릴때 생각에도 이현동은 거의 臥龍山 가까운곳이 아니겠나 싶었답니다
상리나 이현동은 듣기만 했지 가본적은 없습니다
그런데 어떤 애들은 내당동에 산다는 얘들도 있었고 성당동에 산다는 애들도 있었고 본리동에 산다고 하는 애들도 있었답니다 그 아이의 이름은 기억을 하지 못하나 본리동에서 학교엘 다니는 친구는 틀림없이 있었답니다
내가 국민학교 1 학년때 우리반 출석번호 1번학생 이름이 최표 이었고 2번학생 이름이 양형길 이었다는걸 기억하고 있는데 최표라는 아이집이 감삼못 부근 어디메란 걸 들어서 알았고요 이 친구가 본리동이 어디쯤 있다고 설명을 했었는데... 내가 생각하기론 어쩌면 地番이 달성군 화원읍 본리동 이었다면 화원국민학교엘 갈것인데 싶군요 畏友 김진수 학우는 어디에 살았는지 물어보고 싶네요 내 생각은 달성군 화원읍 본리동 이라기 보다는 대구시 달서구 본리동이 더 합당하지 않을까 하는 나의 생각입니다
자 이제 나의 생각 한토막을 얘기할까 합니다
月餘전에 금천 형께서 達城이라는 이름의 상징성 때문에 아마도 달성군을 완전 대구시로 편입시키지 않고... 그런 설명을 하신걸 기억하고 있지요
達城이란 이름은 達城公園, 達城郡 정도가 잘 알려져 있지요 그냥 저만의 생각이니 들어 보시구려 여러분 黃山伐(황산벌) 들어 보셨지요? 화랑 관창과 계백장군의 오천군사들이 목숨을 걸고 싸운전장 황산벌, 신라와 백제의 사생결단을 낸 싸움터가 황산벌 이었지요 지금의 경주가 옛날 신라시대 신라의 首都였는데 옛 지명이 徐羅伐(서라벌) 이었다는건 다 아실것이고... 오늘날 대구의 옛지명은 달구벌 이었답니다 達句伐로 표기를 했는지 達丘伐로 표기를 했는지는 내가 문헌을 뒤적이지도 않아서 모르겠으나 나의 추측으로는 達丘伐이 아니었을까 싶네요 지금 大邱의 표기를 보아서 말입니다
황산벌이 백제와 신라의 싸움터 였지만 달구벌도 후고구려와 후백제의 싸움터 였었답니다 우리 벗들이야 다 아시겠지만 그 당시 견훤과 왕건의 싸움때의 역사적인 사실들 때문에 생긴 地名들이 대구에는 상당수가 있지요 군대를 주둔했다던 屯山이라던가 반야월 등등 절이름도 더러 있고... 견훤에게 쫓겨 달아나다 잠시 쉬어갔다는 절도 있었고 여러분 達西여학교 라느니 達西川 (서울의 청계천 처럼 대구의 내당동에서 달성공원앞을거쳐 흐르는 개천이름) 들어 보셨는지... 대구에는 德山川, 東山川도 있었지요 동산천은 지금도 있기는 할것입니다 다 덮었을지는 몰라도... 이 동산천이 달성공원에서 조금 북쪽으로 내려가면 그곳에서 달서천과 합류를 하여 아마도 어디쯤에선 신천과 합류하여 금호강으로 흘러 들어 갈것입니다 옛날 대구의 물길이 덕산동 쪽으로 흘렀는데 영남감사 누구가 새로 防川을 쌓고 물길을 돌려 新川이라 이름 하였다고 하더이다
여러분 달서란 이름은 대구 사람들에겐 익숙한데 達東 達南 達北 들어 보신적이 있습니까?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여러분, 오늘날의 대구를 머리속에서 싹 지우시고 옛날 조선시대의 달구벌을 상상하시면 그 답이 나옵니다 현재의 동성로 서성로 남성로 북성로를 연결해 보시면 大邱城의 城內이지요 대구는 盆地로 알려저 있지 않습니까 남쪽은 앞산(대덕산인지 비슬산인지) 북쪽은 팔공산 동쪽은 야산들로 둘러쌓여 있는데 그나마 서쪽으로는 와룡산까지 약간의 평지가 있는데 이름하여 八達伐이라고 부르기도 했고 史學者 김사엽씨가 쓴 서부국민학교 교가 歌詞에도 기름진 팔달벌 이라는 句節이 나온답니다
대구에서 칠곡 동명 쪽으로 나가는 도로에 금호강을 건너는 다리 이름이 팔달교 아닙니까 지금도 다리야 새로 튼튼하게 만들었겠지만 다리 이름은 그대로 팔달교 이리라고 사료됩니다 통할 通字 통할 達字 通達 四通八達 八達橋...
말 하고자 하는것은 達城은 대구의 상징성을 갖는 말이 아니라는것 이지요
달성 서씨들이 사용했던 토성정도일뿐...
대구성의 서쪽평지 즉 달구벌의 서쪽터전이 達西가 아니었을까 하는 나만의 생각을 피력해 보았습니다
오늘 아침에도 컴퓨터를 켜니까 온통 시뻘겋게 물이 들어 있다가 차차 사라졌는데 그 원인이 있었지요 어쨋건 저년놈들을 씨를 말려야 하는데...
또 내 입에 자꾸 욕이 나올려고 해서 글을 맺어야 겠습니다
이재오, 김무성, 유승민, 권성동 등등 자기당의 대통령을 야당과 작당을 하여 탄핵을 시켜놓고 인명진, 손학규, 김문수 등이 옛날에 사회주의 한다고 껍죽거리면서 대한민국을 망처 놓는데 한몫을 했지요
그리고 입은 비뚤어져도 말은 바로 하랬다고...
이명박이를 보십시오 말을 하지 않으려 해도 않을수가 없네요
사람이 信義로서 사람을 對해야지 자기의 이익만을 생각하니 누가 그를 위하여 총대 메겠다는 사람이 있나요? 지근 거리에서 국록을 먹은 몇몇사람을 빼고는? 솔직히 당해도 싸다는 생각조차 듭니다
교회장로면 뭣 합니까? 한 짓을 보십시오 현대건설에서 제가 한게 뭣인데?
유인촌이를 보십시오 연속극 주연으로 이명박이 역을 맡아 출세한 놈들이 아니더냐? 적당히 했어야지...
문재인 이란자식, 임종석 이란자식, 조국 민정수석이란 자식들 빨리 끌어내서 나라가 더 망하기 전에 빨리 벌을 주어야 하거늘...
군대생활을 할때 전우의 모자에 쓰였던 한구절이 떠 오릅니다
생각을 말자
나는 생각을 말드라도 여러분은 생각들 좀 해 보십시오 제발-
첫댓글 요샌 모든것을 보류해두고 한가지에만 매진하고 있어 자주들리지 못해 미안해요 꾸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