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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군마사육목장' 녹양평(綠養坪).
의정부 녹양역 지명은.,'녹양평'에서 유래.
'세종실록지리지' 기록에 의하면
녹양평 규모가 동서7리 , 남북12리.
현재 흥복산에서 호원동 다락원까지 광대한 지역에 걸쳐 있었다.
이곳 목장은 세조때 폐지되었는데 호랑이가 출몰하여 목장의 말을
해치는 일이 자주 발생하면서 결국 목장을 폐지하기에 이르렀던 것.
녹양동주민센터는 역사적 사연을 살린
녹양평군마축제를 격년마다 개최해 온다.
...축제프로그램..
왕실 행차 퍼레이드,
경기도해병기마대 승마체험,
편자던지기 등으로 구성해 지역의
역사를 알리고 주민 자부심 고취에 기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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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국영 말목장이 설치된 지역은
맹수 피해가 없는 섬 또는 해안에서 방목.
한양 인근 해안가, 도서지역, 그리고 제주도.
마장동(馬場洞).
조선 초기부터
'국영목마장' 터
모진동
(毛陳洞)은
살곶이벌에
방목 양마장.
방목된 말이 실족하여 건국대학교 정문 근처
수렁에 빠져 죽으면 이곳 여인들이 수렁 위에
널빤지를 띄워 놓고 들어가 죽은 말을 건져 내어
말고기를 나눠먹었다 하여, 인근주민들이.,"모진년"
강진 마량(馬良)은
'고려~ 조선' 시대
탐라국(제주도)에서
배타고 온 제주마들이
휴식을 취하며 살찌운 곳.
조선시대에는 전쟁과 내란이 잦아
남자들은 군역, 성쌓기 노역에 동원
여자가 목자 일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한양에서 가까운 경기만 도서지역을 비롯해
전국의 해안가는 조선시대 국영 말목장 흔적.
조선은 전세계에서 'No 1' 군마 생산국이었다.
우리나라 여성 프로 골퍼가
세계 무대를 휩쓸고 있는 건
절대 우연이 아니고 필연이다.
조선시대 목자
DNA(유전자)가
계승된 결과이다.
.............골프 유래.............
'골프'는 카우보이 목동들 간에
소똥 말똥 치우기 시합에서 유래.
드넓은 목장 목초밭에 널려진 소똥 말똥을
18군데 모아 말리는 목자 간에 똥치우기 시합
목장주들이 상금을 내걸고 유능한 목자 선출대회.
목자들은 소속된 목장의 명예를 걸고 대회출전.
목장 내 18개 목초밭이 오늘날 '필드'가 되었고
18개 소똥 말똥 말리는 장소가 '그린'이 되었고
목초지 똥 치우는 막대기가 골프채로 진화된 것.
스코틀랜드에서 고안되어
영국에서 스포츠로 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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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목자 일을 여자가 대신하긴 힘에 벅차
대신, 멀리서도 정확하게 막대기로 똥을 치웠던 것.
말을 먹이고 재우고 목욕시켜주는 일은 여자가 우세.
조선시대 제주관기들은 승마에 능숙.
제주관아에 신관사또 부임 때 기마 쇼.
묘기에 가까운 다양한 기마술을 펼쳤다.
그당시, 말 뿐만 아니라 소. 나귀. 노새도
양반 신분이 아니면, 법적으로 탈 수 없었다.
백성이나 천민이 타면, 압수 당하고.,곤장 80대.
경국대전에 못 밖은., 중벌에 해당.
곤장을 맞다가 죽는 경우가 허다했다.
다만, 기생이 말을 타는 것은 예외로 인정.
양반가 규수들은
다리를 벌려 말 타는
행위를 금기로 여길 정도.
그러므로, 조선시대
기생이 말 타는 모습은
신관 사또에게 귀한 볼거리
당시 말 한필 가격은
하급관리 반년치 봉급.
남자 관비 2~3명의 가치.
여자 꽃관비 1명의 값어치.
조선시대 제주관기는
평양기생에 견불 만큼
한양에서도 명성 높았다.
조선시대 관기는
법적으로 8천민 신분이면서
고관대작과도 어울리는 특수한 존재.
제주관기 출신으로서.,김만덕 거상.
제주 대흉년때 궁휼미 500석을 내놓아
정조 임금의 부름을 받아 한양으로 상경
'의녀반수' 직위까지
신분 상승한.,김만덕.
조선시대 출륙금지령.
제주에서 뭍으로 나왔던
여성은 공식적으로.,처음.
그당시 강진 마량에서 한양까지
50 가까운 나이에 파발마로 달려와서
한양도성은 물론 조정 대신들도 놀랐다.
한양도성은 그녀를 보려는 백성들로.,인산인해
조정대신들은 말탄 그녀를 우러러보며 반길 정도.
그녀는 한양에서 말을 타고 설악산 유람을 다녀와서
다시 제주도로 돌아갈 때에도 파발마를 타고 귀향했다.
제주도는 고려 말부터 조선시대 내내
'공출용 군마'를 가장 많이 생산한 산지.
고려 말 13~14C '원나라 공출용' 군마 산지.
조선시대 '명나라, 청나라 일본' 공출마 산지.
제주도는 고려 말, 몽골대제국 백년 지배때
전세계 정복용 군마생산에 심혈을 기울인 곳.
특히, 일본 정벌에 사용할 군마를 사육했던 산지.
....표선 ~가시리갑마장 가는 길....
조선시대 제주도에서는 일반적으로
4,000~1만 필 내외 말이 사육되었으나,
대부분 중앙 정부에 공물로 진상되었다.
제주 목사-감목관(제주 판관· 정의 현감· 대정 현감)
- 마감 - 군두 - 군부 - 목자로 이어지는.,마정 조직.
'1392~ 1910년까지' 조선왕조 내내 지속된.,군마공출 .
제주는 독립성을 상실한채 중앙정부 지배를 받았다.
말의 특산지로 부각되면서 과중한 수탈이 이뤄졌다.
제주도 중산간 지역을 목장으로 만들어 개간을 금지.
해변 지역의 일부 땅만을 이용해 농사를 지어야 했다.
따라서 도민들은 좁은 경작지에다
척박한 농업 환경과 흉년이 겹쳐
굶어죽는 경우가 많았다.
조선왕조 500년간 제주인구 5만 내외.
여기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고 나아가
감귤 진상, 전복 등 해산물 진상, 약재 진상
등 온갖 진상과 잡역· 잡세에 시달려야 했다.
이에 제주도민들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
출륙하거나 민란을 일으켜, 중앙정부에 저항.
임진왜란기에 제주도민들은 자신들이 소유한
전마(戰馬)를 국가에 헌납함으로써 임진왜란을
승리에 일조, 대표인물이 산마장 개척자 김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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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선 민속마을
흑돼지 주물럭
성읍 민속마을.
..........성읍민속마을(城邑 民俗마을).................
서귀포시 표선면 성읍리(국가민속문화재 제188호)
제주 성읍마을은 제주시에서는., 남동쪽으로 약 34㎞,
표선에서 북쪽으로 9㎞ 떨어진.,해발 125m 중산간 마을.
성읍마을은 1416년(태종 16) 성산읍 고성리에
설치되었던 정의현청이 1423년(세종 5) 지금의
서귀포시 표선면 성읍리로 옮겨진 이래 1914년
군현제 폐지때까지 500년간 정의현에 의해 관리.
유형·무형 문화유산들이 보존된.,성읍마을.
옛마을 민속 경관은.,중요 민속자료 제188호.
1935년 동중면은 표선면으로 개칭 하여
1946년 군제 실시에 따라 남제주군에 속.
5세기 간 장구한 세월을 현청 소재지로서
성읍은 군현 폐지후 면사무소 소재지로서
명맥은 유지해 왔으나, 1934년 면사무소마저
표선으로 옮겨 성읍 마을은 잊혀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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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읍마을을 감싼 높이 4m성(城)은.,길이 900m.
조선 세종 때 성을 쌓고 동헌을 이곳으로 옮긴 후
정의현 중심지였지만, 20세기에는 작은 시골 마을.
성안에는 현재 90여 채 한옥이 있지만,
생활 제약 탓에 빈채로 사람을 맞는다.
벽랑국 세 공주를 여기까지 모셔와
탐라국을 세운 것도 아마도 바람일 것.
민속문화 연구가에게 성지 같은 제주도.
.
'무더운 중산간 지대에 왜 이리
앞뒤로 꽉 막힌 집을 지었을까?'
제주도 겨울이 바람타고 온다는 것을
곰곰 생각해 보면 궁금증은 쉽게 풀린다.
제주도 바람은 매섭기가 여간 아니기 때문.
이엉으로 지붕을 덮은 제주 한옥은
집으로 들어가는 대문부터 특별하다.
대문에 해당되는., 이문(간)과 정살문.
'정살문의 정주석에 거는 통나무'
'정낭'의 개수를 조정하여 집주인은
자신이 집에 있는지, 나갔는지 알린다.
통나무 3개가 정주석에 꽂혀 있으면
먼 곳에 갔으니 기다리지 말라는 의미,
1 꽂혀 있으면 가까운 곳에 나갔으니 곧
돌아온다는 뜻이고 가축도 그 신호를 감지.
올레로 이어지는 정낭은 신민이 바람이며
가축들과 어떻게 소통하며 살았는지 대변.
성읍마을 한옥들은 대체로 19~20c 초에 지어졌다.
그러나 그 때문에 집이 아름답지 않은 것은 아니다.
조선시대 시계바늘이 그대로 멈춘듯한.,시간 여행지.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표선면 성읍리.,성읍 민속 마을.
조선시대 행정체계 상으로
전라감영 관찰사의 관할 지역은
전라도와 제주도에 있는 산하 관청들.
조선시대 제주도 내
제주목, 대정현, 정의현.
3곳 관청은.,전라감영 소속 .
1416년(태종 16)성산읍 고성리에 설치되었던 정의현청이
1423년(세종 5) 지금 서귀포시 표선면 성읍리로 옮겨진 이래
1914년 군현제가 폐지 될 때까지 500여 년간 정의현에 의해 관리.
성읍 민속 마을은 유형, 무형의 문화유산들이 보존되어 있고,
옛마을의 민속 경관이 유지되고 있어 민속자료 제188호로 지정.
성읍 민속 마을은 제주시에서 남동쪽으로 34㎞,
표선리에서 북쪽 9㎞, 해발 125m의 중산간 마을.
제주도는 대부분의 용천수가 해안에 분포되어 있어,
유서 깊은 자연 취락은 대개 해안변 따라 발달해 있다.
해안에서 8㎞ 떨어진 중산간 마을은 제주에서는 드문 편.
고려 후기 원, 명 교체기에도 탐라에 큰 전란이 있었다.
목호의 난이었다. 이때 제주도 목호를 토벌하기 위하여
최영 장군 2만 군사들이 명월포를 통해 목호의 난을 평정.
...................목호의 난(牧胡의 亂)........................
고려 공민왕 23년(1374년), 원나라 목장이 있던 제주도
말을 기르던 몽골인 목자들이 일으켰던 반란.,'목호의 난.'
삼별초 항쟁이 여몽 연합군에 의해 평정된 1273년.
원나라는 탐라국에 군민총관부를 설치하여 다스렸다.
충렬왕(忠烈王) 3년(1277년) 탐라에 원 황실 방목장 설치.
탐라가 충렬왕 21년(1295년)에 고려에 반환된 뒤에도
원나라 황실 방목장이었는데 이곳 몽골인이.,목호(牧胡).
목호의 숫자는 많을 때는 1,400명에서 1,700명에 이르렀다.
약 1백년 간 제주도 현지 주민들과 섞여 살면서
말 기르는 기술을 전수하고 탐라 여인과 혼인하여
자식을 두었고, 고려에 대항하여 반란을 획책하였다.
공민왕의 즉위와 더불어 반원정책이 시행되면서
제주에서 목호와 고려 관리의 대립은 더욱 심해져
목호들이 고려 관리를 살해하거나, 원 본국에 요청해
만호부를 다시 설치하여 줄 것을 요구하는 일도 있었다.
원(元)이 북쪽으로 밀려난뒤 고려와 새롭게 수교한 명(明).
고려에게 북원(北元)을 치는데 필요한 제주마 2천 필을 요구.
제주 목호 지도자.,하치(哈赤) 석질리필사 초고독불화 관음보
등은 이에 반발하여 "우리가 왜, 세조(世祖) 황제(쿠빌라이 칸)께서
방목하신 말을 적국 명에 보내야 한단 말인가?"라며 350필만 내주었다.
명(明) 사신의 항의에 고려 조정에서
탐라국을 정벌하며 일어난.,'목호의 난'.
........................................................
탐라는 목호의 난 이후 완벽하게 고려에 귀속되었고,
제주는 예전보다 더 많은 마필 공납 요구에 시달렸다.
우왕(禑王) 5년(1379년)부터 공양왕 4년(1392년) 고려 멸망까지
명에 바친 약 3만 필의 말 가운데 2만 필 이상이 탐라국 말이었다.
목호의 난에는 탐라에 와있던 몽골인뿐 아니라
반(半)몽골화된 탐라인들도 상당수 가담하였으나,
반명 반란에서는 탐라 주민이 거의 동참하지 않았다.
제주 토착세력이 반명 반란을 진압하고
탐라인들은 점차 '목호.' 잔당을 배척하고,
과거, 몽골과 어울려 살았던 사실조차도 부정.
'목호의 난.' 당시 개경에서는 공민왕이 시해되었고,
명의 사신은 호송을 맡았던 고려관리 김의에 의해 피살,
명이 고려에 일방적으로 철령위(鐵嶺衛) 설치를 통보하였다.
그리하여, 최영 등에 의해 요동 정벌 시도가 촉발되었다.
이때 팔도도통사로써 직접 군사를 지휘하려는 최영을 우왕은
"선왕(공민왕)이 시해된 것은 경(최영)이 제주로 정벌하러 나가
개경에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라며 자신의 곁에 붙잡아두려 하였다.
결국 최영 대신 요동정벌군을 지휘한 이성계.
위화도 회군으로 개경으로 쳐들어와 최영을 처형.
우왕을 폐위시킴으로써, 조선 건국의 단초를 마련한다.
조선 태종 17년(1417년)부터 세종 2년(1420년)까지
'대정현 판관'이었던 하담(河澹)은 목호의 난을 가리켜
"우리 동족도 아닌 것들이 섞여들어 목호의 난을 불러왔다."
"칼과 방패가 바다를 뒤덮었고 간과 뇌수로 땅을 발랐으니,
말하자면 목이 멘다."고 하며 치열하였던 전란을 술회하였다.
이후, 원의 세력은
제주도에서 축출되었다.
그러나 성씨, 언어, 문화 등에서
몽고 100년 지배 잔재는 남아 있었다.
탐라국은 조선에 합병되며 해체.
탐라국의 귀족들은 평민화 되었고
제주도는 '전라감영'의 제주목에 편입.
그래서, 조선시대 제주목 대정현 주민과
서귀포 정의현 주민과는 혼인하지 않았다.
정의현에서는 '대정현의 며느리를 맞이하면
치마에 뱀신을 품고와 가문을 망친다.'며 구박하고.
대정현에서는 탐라를 망친 근거지가 정의현이라며 비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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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고의 100년 잔재가 유독 많은.,'중산간지역.' 정의현.
조선시대 제주도에 대정현과 정의현을 따로 둔 이유는
제주목의 행정력을 섬 전역에 미칠 수 있도록 의도한 것.
행정 상, 전라감영에 속한 제주목
'전라감영'에 소속된 제주목사 아래
'대정현'의 군수 및 '정의현'의 군수.
정의현성이 있었던 고성리 지역이
제주도 동남부 지역을 관리 하기에는
지리적 위치가 적절치 않은 것으로 판단.
정의현
지금의 성읍으로 행정 중심을 옮기게 된 것.
이렇게 고성 지역에 정의현성이 있었던 기간이
1416년(태종 16)에서 1423년(세종 1)까지 겨우 7년.
14세기 초 고려시대에., 동도현을 두었던 지역.
조선 초까지, 본래 탐라국의 영역이었던.,정의현.
서귀포 성읍마을은 조선이 개창하며 만든 행정구역.
역사서에는 제주도민의 필요에 의해 관청이 세워졌다지만
당시 제주도민에게 관청이 필요한 이유는 그다지 많지 않았다.
조선의 관청이 없이도 잘 지내왔던.,'남제주 중산간지역' 정의현.
1273년 여몽연합군에 의한 삼별초 토벌후
제주도는 원나라의 직할령으로 편입되었다.
원명교체기 제주도의 목호의 난이 진압될 때까지
약 100년 동안 원은 이곳 제주도를 목마장으로 삼고
대제국 경영의 전초기지화를 시도하다 다시 고려에 환속.
100년간 몽고의 제주 지배는 언어, 풍속,
목마 등 고유한 자취를 남긴.,정의현 일대.
조선 초, 기록에는 관청이 너무 멀리 떨어져있어
관청을 세워달라는 민원이 자자했기 때문이라지만
고려때 원나라 직할령이었기에 조선 조정에 대한 반발.
하여, 조선이 정의현을 장악하기 위해 만든.,성읍 민속마을.
제주 성읍 지역에서는 1914년 조선의 군현제가 폐지될 때까지
약 500년간 정의현청의 관리를 받아온 유서깊은 마을이기도 하다.
1864년(고종 원년) 8월 정의현과 대정현으로 승격하였을때.
성읍마을은 제주목 관할에서 벗어나서, 전라도 관찰사의 관할.
정의현과 ·대정현에 각각 변지군수를 두니
제주도의 특수한 지정학적 사정으로 말미암아
제주목과 양군간의 체통이 문란하여 행정상 불편.
그리하여 1880년(고종 17년) 2월에는 양읍을 다시
현으로 환원하고 과거 방식대로 현감을 두게 했다.
1895년 (고종 32)에는 지방 제도 개편에 따라
제주를 부(府)로 고쳤으며 목사를 관찰사로 바꾸고
판관 제도를 참사 제도로 고쳐 군수를 겸하게 하였다.
아울러, 제주부 경무청도 신설하였다.
1894년 갑오경장으로 관제가 개편됨에 따라
종래의 좌·우 포도청을 합쳐 설립한 관청의 하나.
대한 제국기,
경찰과 감옥에 관한
일을 맡아본.,제주부 경무청.
1906년(광무 10년)에는 1896년(고종 33) 부활했던 목사제도 폐지,
군수를 두었으며 1914년 정의, 대정 2군을 폐지하여 제주군에 합병.
1423년(세종 5) 이후 '정의현 도읍지' 성읍은 현청 소재지 역할을 마감.
1915년 5월 1일을 기하여 제주군 제도가 폐지되고
도제(島制) 실시로, 현재 표선면이.,동중면(東中面).
성읍리는 동중면 면소재지가 있는 하나의 리(里)로 전락.
1935년 동중면은 표선면으로 개칭하게 되었으며
1946년 군제 실시에 따라 남제주군에 속하게 되었다.
조선시대 5세기 동안 장구한 세월을 현청 소재지로서
번화롭던 성읍은 군현 폐지 이후에도 면사무소 소재지.
1934년 면사무소마저 표선으로 옮겨짐에 따라
성읍 마을은 행정 중심 마을에서 잊혀지게 되었다.
성읍 민속 마을은 제주도 동남쪽 중산간 지대
해안에서는 9㎞, 해발 125m의 높이에 위치한다.
성읍 마을의 성곽의 크기는
동서로 160m, 남북으로는 140m
규모로 귀 죽인 네모꼴을 하고 있다.
성은 객사의 대문을 중심으로 정남축 축상에
남대문, 내대문, 기두정(장군대)를 일치시키고,
동서 대문도 객사 대문과 동서 버금축을 함께 한다.
성읍 민속 마을이 정의현의 도읍지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성읍 주변이 여느 마을들과 다른 풍수적 여건을 갖춘 때문.
마을의 북쪽으로 한라산 영주산이 병풍처럼 애워싸고 있다.
성읍 마을에서는 천미천 건너로 남산봉이 다가서며,
한라산을 조산으로 하고 영주산은 진산, 남산봉은 안산.
모지오름· 따리비오름· 설오름 ·갑선이오름.,우백호
남산봉 밖으로는 풍수지리상 좌청룡으로 연결된다.
동헌 앞 나무그늘이 가장 크고
사람들도 많이 모이는 장소이며,
그 다음은 길이 만나는 벌원 방죽.
성읍 민속 마을의 가옥들은 길에 면한 경우에는
짧은 올레를 두었고, 살림집은 길과 비켜서 앉혔다.
길 안쪽 집은 긴올레를 두고 문을 두지 않기도 하였다.
일반적으로 긴올레는 농촌에서 많이 이용되는 방식인데,
짧은 올레가 많은 성읍은 도시형 마을이라고 할 수 있다.
성읍 민속 마을의 정의현성 안에는 약 110호 가옥이 있다.
성 밖에도 많은 가옥들이 있는데
성읍 마을은 오백년 동안.,도읍지.
유형 무형의 문화재가 꽤 많이 있다.
천연기념물 제161호.,느티나무 & 팽나무
중요 민속 문화재로 조일훈 가옥, 한봉일 가옥,
고평오 가옥, 이영숙 가옥, 고상은 가옥이 있다.
제주도 지정 문화재로 정의향교와 일관헌 등 건축물
민요와 돌하르방, 초가집 등 숱한 문화유산들이 있다.
이러한 지정 문화재 이외에도, 정의현성의 성곽과
남산봉의 봉수대, 풍부한 전설, 고유의 민속 자료 등
아직도 보호하고 보존해야 할 가치 있는 유산들이 산재.
성읍 민속 마을은 조선 시대 도시주거의 모습.
성읍의 가로 체계 및 주요 시설물의 배치 방식 등은
당시의 도시 계획의 원리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또 마을 내 많은 문화재와 유산 등이 있어
그 자체를 잘 보존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성읍민속마을 '뒷산'은 영주산(瀛洲山: 326.4m).
말발굽 분화구 형태를 지니고 있는.,오름측화산이다.
대부분 초지이고 동쪽 기슭에.,성읍 민속마을 공동묘지.
..................영주산(瀛洲山: 326.4m)................
성읍민속마을 북쪽 약 1.8㎞ 지점에 위치한.,"뒷산."
면적 1,338,920㎡, 둘레 4,688m, 표고 326.4m, 비고 176m
분화구 동쪽 안사면의 능선에는 용암노두가 노출되어 있다.
오름 동쪽 기슭에는 동쪽으로 터진 소형 분화구가 딸려 있다.
영주산 서녘 기슭을 흐르는 천미천에는 '가매소'라는 못이 있다.
오름 전체에 걸쳐 억새가 우점하고 있는 영주산.
가을철에 억새가 풍부하여 찾는 탐방객들이 많다.
성읍 민속마을에서 수산리 방향 700m 지점에 승마장.
그곳에서 북쪽으로 600m 더 올라가면 오름 입구에 도착.
정상까지 30분 걸리며 목장, 성읍민속촌, 성산일출봉.,조망.
원래는 한라산을 영주산이라고 하였는데
그 이유는 중국의 『사기』에서 비롯되었다.
바다 가운데, '봉래, 방장, 영주' 삼신산(三神山)
'불로불사(不老不死) 약초가 있어
신선들이 살고 있다고 하는.,삼신산.
기원전 서불이 불로초를 찾으러 왔던 곳.
제주도 영주산.,시로미.
그때 서불이 찾은 곳이 성읍민속마을의 뒷산.
이곳 영주산 연못도 신선들이 흰 사슴을 타고
노닐다가 물을 마시게 하던 곳이라 하여.,백록담.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영주산'의 속명은 '영모루'
정의현 북쪽 4리에 있으며 산 북쪽은 곧 정의 김녕 등.
옛 기록에 '정의 · 김녕 · 함덕에 신선이 많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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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의 훌륭한 유산을 보존하는 것은
현재 그곳에서 생활해야하는 주민들의 삶과
어떻게 조화롭게 할 것인가 염두에 두어야 할 것.
현재, 차량이 마을 중심을 관통하는 점.
슬레이트 가옥이 여전히 혼재하고 있는 점,
시멘트 도로가 민속경관과 어울리지 않는 점.
성읍 민속 마을의 구조를 이해하는데
방해가 될 수 있는 문제점이기도 하다.
또한 본래 성읍 마을이 가지고 있던
주요 도로 및 쉼팡과 같은 휴게 시설,
연자방아 등은 현재에도 높은 인지도.
성읍민속마을에서는 매년 초가을
초가에 엉을 얹는 날에는 굿을 한다.
뱀을 무서워하면서도 신성시 여긴 고려시대 이곳 주민들.
뱀신(칠성신)을 모신 밧칠성을 집안에 두었다고 전해온다.
조선 초, 이곳 하례리 481번지는 '알당들왓' 밧칠성 당굿 터.
하례리 밧칠성, 위미리 마메기동산, 보목리 '조노기'.
각각 예촌본당, 위미마매기본당, 보목리 조노기 본당.
해마다 15살 마을처녀를 뱀신에게 바쳤다던.,알당들왓.
조선왕조의 숭유억불정책 음사철발령에 따른 1702년
제주목사가 절500, 당500을 없앴다는 말과 연관이 깊다.
1515년(중종 10) 3월 제주판관 서린(徐燐)이
뱀신을 퇴치한 김녕굴 전설을 형상화 한.,조각.
김녕굴 & 만장굴은 세계에서 가장 긴.,용암동굴.
김녕사굴 .
만장굴
...............인근 볼거리................
김녕굴 & 만장굴, 성산일출봉, 한라산.
천지연폭포, 비자림, 표선 해수욕장 등.
성읍민속마을에서 1시간 내 차량 이동거리.
..........................................................
김녕굴
만장굴
성산 일출봉
비자림
천년숲 비자림
제주 가시리 유채길.
제주 가시리 녹산로길.
.
나름 제주를 안다는 뭍사람도 남동쪽 표선에서
중산간쪽에 거친 생태를 탐한 사람은 많지 않다.
가시리 벗꽃 유채길.
표선 해변에서 한라산을 바라보면서 걷다가
세화리와 역지동을 지나면 말이 뛰어오르는
모양의 조각상과 함께 가시리를 만난다.
가시리 풍력단지
조선시대 국내 최고 말목장(목마장)
갑마장과 녹산장이 모두 이곳에 있다.
갑마장이 있던 가시리 공동목장에는
조랑말 박물관, 승마장, 캠핑장 등이
어우러진.,조랑말 체험공원이 있다.
국궁장, 큰사슴이오름, 유채꽃프라자, 가시천,
따라비오름으로 이어지는 갑마장길은 제주만의
특별한 숲길인 곶자왈은 물론이고, 억새로 유명.
곶자왈
따라비오름
따라비오름.,억새
가시리에는 국영목마장 경계를 표시한 돌담 ‘잣성’.
목장 경계를 이루던 돌담을 따라 걷는 편백 숲길은
국내에서 대표적인 생태 힐링 산책로이다.
잣성.,돌담길
4월이면 길의 시종점인 녹산로를 따라
벚꽃터널과 유채꽃밭이 장관을 이룬다.
이곳에는 가시리 마을 공동체가 운영하는 숙박,
체험 시설인 유채꽃 프라자, 붉은 오름 자연휴양림,
서재철 사진작가 갤러리는 옛 가시초등학교터에 위치.
'가시리 갑마장길 종점' 따라비 오름은 ‘오름의 아버지’.
주변에 모지오름, 장자오름 등을 낀., 가장 격인 오름.
가시리마을.,산책
가시리 주민들은 문화예술인 창작지원센터를 만들어
국내외 예술가들이 이곳에 살며 창작활동을 할수 있는
레지던스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그러다 보니 온 동네에
예술인들이 개설한 다양한 교육, 주민 동아리 활동이 활발.
마을사무소 ‘더 재미진 마을 가시리’
팻말이 마을 공회당 간판을 대신한다.
코스는 조랑말체험공원~가시천(곶자왈)~따라비오름
~잣성길~큰사슴이오름~꽃머체~조랑말체험공원이다.
.
조선시대 - 제주도.,'가시리 갑마장길'
.
.
제주마(천연기념물 제 347호)
......................조선시대 제주도.......................
조선시대 독립성을 상실, 조정의 지배를 받았던 제주.
특히, 말 특산지로 부각되며 경제적으로 중요한 지역으로
인식되어 중앙 정부에 의해 과중한 경제적 수탈이 이루어졌다.
제주도 중산간 지역을 목장으로 만들어
개간을 금지했기에 제주인들은 해변 지역의
일부 척박한 땅만을 이용해 농사를 지어야 했다.
따라서 도민들은 좁은 경작지에다
척박한 농업 환경과 흉년이 겹쳐
굶어죽는 경우가 많았다.
이에 따라 조선 519년간 제주 인구는
5만명 내외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나아가 감귤 진상, 전복 등의 해산물 진상,
한라산 곳곳에서 생산되는 약재 진상 등
온갖 진상과 잡역·잡세에 시달려야 했다.
이에 도민들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출륙하거나 민란을 일으켜 조정에 저항.
조선이 개창된 이후 조정은 1392년(태조 1) 제주 향교 설치.
1394년(태조 3) 우마적을 작성, 1404년(태종 4) 노비적 작성.
1408년(태종 8) 공부(貢賦) 정하기 등을 통해 강력한 통치력.
아울러 실질적인 지배력을 행사하기 위해
제주 목사 겸 도안무사 오식(吳湜)의 건의를 수용.
1416년(태종 16) 삼읍[제주목· 대정현· 정의현]을 설치.
이에 따라 수령으로 제주목에는 목사[정3품],
정의현과 대정현에는 현감[종6품]이 파견되었다.
특히, 제주목에는 제주목사 부관에
해당하는 판관이 파견되기도 했다.
조선 전기에 관권과 토착 세력 간에 갈등이 나타나면서
조정은 토관 세력에게 토관직을 주어 회유하기도 했다.
아울러 제주의 유력층을 서울에 올라오게 하여
재경사족(在京士族)으로 삼아 회유하기도 했다.
그당시 재경사족(在京士族))으로 대표적인 인물은
고봉지(高鳳智)와 그의 아들 고득종(高得宗)이었다.
고득종은 명나라 사신으로 2회,
일본 통신사로 1회 파견되었을 뿐만 아니라,
지금의 서울특별시장인 한성부 판윤을 역임하는 등
조선 시대 제주인으로서는 가장 높은 관직에 오른 인물이다.
조선 전기 제주 교육을 담당한 관학 교육 기관으로
제주 향교·정의 향교· 대정 향교가 있었으며, 이들 향교들은
문묘 중심으로 교화기능과 명륜당 중심으로 한 교육 기능을 담당.
대표적인 사학기관 서원에는
국가가 공인한 사액 서원으로
귤림 서원과 삼성사가 있었다.
제주서원은 선현에 대한 제사와 인재 양성
및 향촌민 교화라는 기능을 가지고 있었다.
조선 전기 제주는 지역이 좁고 인구가 적은 데 비해
잡역·잡세가 많아 도민이 져야할 역(役)이 매우 많았다.
특히 이중 도민들이 가장 꺼렸던 역으로는 소위 6고역(苦役)
목자역·
과원직·
선격역·
답한역·
포작역·
잠녀역
따라서 도민들은 이러한 고역에서
벗어나기 위해 경상도 해안에 정착.
13~16세기에는 왜구 침입에 대비
방호소, 봉수와 연대를 설치· 정비.
1555년(명종 10) 6월 제주 을묘왜변이 발생.
60척 선박에 분승한 왜구들이 화북포에 상륙,
제주성을 둘러싸고,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제주 을묘왜변은 단순한 약탈의 성격을 떠나
제주를 왜구 본거지로 삼으려는 계획적인 침략.
이에 제주에서는 더욱 튼튼한 방어를 위해
9진성을 설치, 25봉수, 38연대(煙臺)를 정비.
조선 전기에 제주 역사 상에서
목장사(牧場史) 비중은 매우 높다.
제주 역사가 곧 목장의 역사인 셈이다.
15세기 초 고득종의 건의에 의해
토대가 마련된 국영 목장[10소장]을
관리하기 위해 중앙 정부는 의정부-병조-
사복시-전라도 관찰사-제주 목사-감목관
[제주 판관·정의 현감·대정 현감]-마감-군두
-군부-목자로 이어지는 마정 조직을 만들었다.
조선 시대를 통틀어 제주도 목장에는
일반적으로., '4,000~1만필' 말을 사육.
대부분 중앙 정부에 공물로 진상되었다.
국영목장 우마를 훔쳐 팔아먹는 우마 도적이 발생하자
중앙정부는 이들을 색출하여 평안도로 집단 이주시켰다.
제주도는 조정에서 멀리 떨어진 절해고도.
그리하여, 조선시대 대표적인 유배지였으며,
제주에 유배된 사람은 대략 200명 내외로 추정.
제주인들은 고기잡이, 미역 채취,
제주도 연안 항로를 이용한 물품 운반,
감귤이나 말 등의 공물 운반, 과거 응시나
장사 등을 위해 육지로 가다가 중국· 일본·
오키나와· 안남 등지에 표류하기도 했다.
당시 표류인들의 견문은 『표해록』으로 전해져
주변국에 대한 중요한 정보를 얻을 수 있게 했다.
1477년(성종 8) 귤 진상을 위해 한양을 향해 출항했던
김비의(金非衣) 일행이 태풍을 만나 '유구국'에 표류해
유구국(오키나와)에 대한 자세한 정보를 들을 수 있었다.
조선시대 이국인들의 제주 표도가 나타나기도 했다.
이국인들은 남동풍·남서풍이 부는 여름에 표착하였다.
표류인은 중국· 일본· 유구국· 안남국(화란)
1627년에는 네덜란드인 J. J. 벨테브레( 박연),
1653년에는 H. 하멜] 등 서양인들이 표도하였다.
임진왜란기에 제주도민들은 자신들이 소유하고 있던
전마(戰馬)를 국가에 헌납해 임진왜란 승리에 일조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산마장 개척자인 김만일(金萬鎰)이었다.
임진왜란 영향으로 제주에는
1601년 소덕유 길운절 역모 사건,
이로 인해 호남원병이 폐지되고 말았다.
소덕유 ·길운절 역모 사건은 1589년 정여립 사건에 가담했던
소덕유가 임진왜란이 발생하자 말을 산다는 구실로 청포(靑布)를 갖고
길운절과 함께 제주도에 들어와 일으킨 사건이다.
호남 원병은 본래 제주 방어를 위해
전라도에서 제주에 파병된 군인들로,
군인 수 감소로 인해 제주도에서는
파병할 여력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조선 후기 제주도에는 조선 전기와 같이
1목 2현 행정 체제가 그대로 유지되었으며,
그 이하는 면리제(面里制)로써 수령[지방관]을
통한 간접 통치가 이루어졌다. 관청 조직은 수령과
그 예하 조직으로서 6방 체제의 이청(吏廳), 군사기구인
장청 및 지방행정 보좌기구인 향청(鄕廳)으로 삼분되었다.
그 밑에는 면리임(面里任)과 최하단위
오가작통(五家作統)으로., 연결되었다.
극심한 생활고와 고역 등으로 출륙하는 도민들의 수가 증가.
조정에서는 제주도민들의 출륙을 원천적으로 봉쇄하기 위해
1629년(인조 7)부터 출륙 금지령[1629~1823]을 내리기도 했다.
1813년(순조 13) 12월에 제주인 양제해는
1811년(순조 11)에 홍경래 난이 일어났다는
소식에 자극받아 변란을 도모했고 조선 후기
제주 지방군은 아병(牙兵)[제주 방어영의 대장을
수행하여 부대의 후미를 경비하는 친병]과
마대(馬隊)[마병], 속오군으로 구성되었다.
제주도의 수취 체제는 토지를 대상으로 하여
곡물을 부과하는 조세인 전세(田稅), 제주영에
소속된 영둔전에 대한 세금인 영전세, 산전(山田)을
새로 일구어서 세금을 거두는 가경세,
그리고 장세미·화전세 등이 있었다.
제주도에는 예외적으로
대동법이 시행되지 않았기 때문에,
남정 1인당 매년 전미(田米)[좁쌀] 5되씩을
대동미(大同米)로 대신 받았다.
제주인들은 요역과 군역에 시달려야 했으며,
환곡(還穀) 운영에 따른 폐단 때문에 고통을 당했다.
환곡 운영을 위해 사창(司倉)[군량미의 비축과
진휼 재원을 보관]과 민고(民庫)[진휼 목적으로
환곡 대여와 수취를 통해 운영]를 설치·운영했다.
17세기 중엽의 『탐라지』에는 제주목에
제주사창·동별창[별방]·서별창[명월],
정의현에 정의사창, 정의 서별창[서귀],
대정현에는 대정사창 등 6개 창고가 있었다.
그러나 조선 후기 제주도 내의
환곡 제도는 부실하게 운영되었다.
제주 고을 수령들은 자비곡을 마련한 다음,
그것을 본전으로 하여 민고를 설치·운영했는데,
진휼창·보민창·고마고·목자고·견역고·장세고 등이 대표적.
18세기 말 흉년과 가뭄 등 자연재해가 발생했을 때
김만덕은 굶주린 백성들을 위해 뭍에서 쌀을 사다가 구휼.
조선 후기에도 제주도는 여전히 유배 지역이었다.
왕족이나 고관현직 사람은 주로 제주성 내에 안치.
대정현에는 광해군 때의 정온, 헌종 때의 김정희,
정의현에는 광해군 때의 김덕룡, 인조 때의 원종,
제주목에는 중종 때 김정, 명종 때 보우, 인조 때 광해군,
숙종 때 송시열·김춘택, 고종 때의 최익현·김윤식·박영효 유배.
제주도에 있어서 19세기는
오랜 잠에서 깨어나는 자각의 시기요,
온갖 부조리와 억압에 저항해나가는 변화의 시기.
실학사상과 개화사상이 태동하면서
전국 곳곳에서 오랫동안 억압당했던
농민들의 울분이 민란으로 분출했다.
제주도에서도 1862년 강제검·김흥채 등이
주동한 임술(壬戌) 농민 봉기를 시작으로,
1890년에 김지가 주동한 경인(庚寅) 민란,
1896년 강유석과 송계홍 주동 병신(丙申) 민란,
1898년에는 방성칠이 주동한 무술(戊戌) 민란,
1901년에는 이재수의 난[신축 천주교란]이 발생.
특히 이재수의 난은 프랑스 함대, 일본 함대까지
끌어들여 한때 제주도에 전운이 감돌기도 했다.
19세기 말엽
제주도에 대한
일본어업 침략은
매우 위협적이었다.
이때 한·일간 조일 통상 장정(朝日通商章程)과
조일 통어 장정(朝日通漁章程)이 성립되었다.
그런데 이를 빌미로
일본 어선들이 제주 근해에서
조업을 하면서 행패를 부렸고, 이에
제주도민들은 거세게 집단적으로 항의.
....................................................
......................
가시리 갑마장길.
........................
제주 표선.,가시리 갑마장길.
가시리.,쫄븐갑마장길.
1274년(원종 15년) 공녀 역사 시작과 더불어
1276년 원나라 직할령이 된.,탐라 국영방목장.
고려시대 방목장 역사가 시작된.,'가시리 갑마장.'
조선시대에는 제주도 정의현 10소장 중에서
가장 우수한 말들을 모아놓은.,갑마장(甲馬場).
제주도에서는 선사시대부터 이미 갑마장을 두어
산마들 가운데서 골라낸 품질이 가장 뛰어난 '갑마'를
따로 관리하여 교잡을 통해 최우수 품종 종자마로 개량.
몽골말과 서역마(西域馬)의 교잡을 통하여 개량된.,제주마.
제주마는 제주 재래마 '조랑말.'이란 이름이 더 친숙하다.
'상하 진동없이 매끄럽게 달리는 주법.' 조로모리(몽골어).
'조로모리' '조랑말' '제주마'.,'과하마(果下馬).
"'제주에서는 선사시대부터 말을 기르고 있었고
과일나무 아래로 지나갈 수 있을 만큼, 키가 작았다.'
'5세기 경, 과하마(果下馬)라 불렀다.'는.,벽랑국 품종.
"나는 동해 벽랑국(東海 碧浪國) 의 사자로
우리 임금께서 三女를 낳아 장성하게 되자
배필을 구하지 못함을..." - 탐라국 탄생 설화 -
'그 사자가 승천하며 남겨진
백마 발자국이 온평리..'황루알'
그후
오곡을 심고
우마(牛馬)를 길러
탐라국(耽羅國)을 이루었다.
'과연, 탐라국의 탄생 설화 속
벽랑국은 어디에 있던 나라일까?'
1. 대마도(大馬島),
2. 일본 북규슈
3. 전남 강진.
역사 학자들 사이에서는
오늘날까지도 의견이 분분하다.
1,2,3, 다 벽랑국일 가능성이 높은 탓.
'즐길 耽, 그물 羅, 나라 國., 탐라국(耽羅國)
'푸를 碧, 물결 浪, 나라 國'., 벽랑국(碧浪國)
1. '탐라~ 대마도 ~ 우산국(울릉도) ~발해.' 교역 항로.
2. '탐라 ~ 일본 북규슈'는 7세기 이전 백제와의 교역 항로.
3. '탐라 ~ 탐진(전남 강진) '은., 7세기 이후 통일신라 교역로.
상고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중국, 일본, 오키나와, 대만, 등을 잇는
동북아시아 해양문화 교류의 축.,제주도.
조선시대 공출된 제주마가 선적되었던.,제주시 화북포구.
'육지의 첫 기착지' 강진 인근의 '마량'을 연결한.,고대 항로.
마량(馬良)이란 제주에서 장시간 배 타고 건너온 말들이
육지에 적응하기 위해서 일정 기간을 머물게 하던 곳이다.
이에 따른 온갖 시설이 마량 지역에 있었던 것으로 전한다.
마량은 공출된 제주마에게 없어서는 안될 지역.
제주마를 돌보며 많은 경제적 혜택을 받았던 곳.
제주도민은 '마량~제주' 간 조선시대 항로가
벽랑국'을 찾는 계기가 될 것을 기대하고 있고
탐라국의 기원을 옛 탐진(강진) 지역에서 찾는다.
...........강진군 마량면(馬良面)............
1908년 완도군 고금면을 분면하여 대구면.
1989년 4월 1일, 전남 강진군 마량면으로 분면.
................................................................
가시리 갑마장길.
제주도의 목축문화는 다른 지방에서 볼 수 없는
독특하고 다양한 전통적인 목축방식을 갖고있다.
그중에서도 대표적인 특징은 울타리 없는.,방목장.
1980년대 한라산 백록담 근처에서까지
들판에서 뛰노는 소와 말을 볼 수 있었다.
제주도 시조가 삼성혈의 구멍에서 솟아난 후 이들과 결혼하는
벽랑국 3공주가 오곡 씨앗, 송아지, 망아지를 들여왔다고 전한다.
제주 성산읍 혼인지마을이라 불리는 온평리.
혼인지는 탐라의 옛 신화 중 하나인 '삼성신화'.
한라산 북쪽 고, 양, 부 삼신인과 혼인을 맺었다.
조선이 개창하며, 탐라를 지배할 때 만들어진.,전설.
기록 상으로, 탐라국의 역사는 전설보다 구체적이다.
신라(B.C57∼A.D935)에 입조한 '탐라국'
그후, '고을나 15대 후손 3형제 (후, 청, 계).
벽랑국 3공주와 혼인을 맺었다.'는.,역사 기록.
탐라국은 우산국과 더불어.,해상 소국.
삼국시대 발해의 '주요 교역국'인 탐라국.
'1105년 고려에 예속되어 탐라군이 되었으나,
왕통은 그대로 존속하여 통치하였다.'는., 탐라국.
탐라(제주)에 말 국영 방목장이 처음 운영된 시기는
여몽연합군이 탐라에 들어와 '삼별초의 난'을 평정할 때
고려군과 함께 온 몽골군이 그후 탐라를 지배하면서부터이다.
가시리 방목장은 고려 충렬왕 2년(1276년)에 설치.
1933년에 116개소 '마을공동목장'이 결성될 때까지
국영 방목장으로서 무려 658년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세계 역사 상에서
'국영 방목장'으로서는
전무후무한 기록이 아닐까?'
지금도 몽골의 초원을
그대로 옮겨다 놓은듯한
고려 때, 원나라 국영 방목장.
제주도에는 맹수가 없고
겨울철에도 날씨가 온화해
연중 방목이 가능한.,자연 환경.
1276년 원나라가 일본 침략 전진기지로 설치한.,방목장.
그당시에는 고려의 왕자가 원나라에 가서 살아야만 했고,
원나라 공주와 혼인이 되어야만, 고려왕 즉위가 가능하였다.
약 1세기 동안, 원나라의 속국이었던.,고려.
충열왕, 충선왕. 충숙왕, 충혜왕, 충목왕, 충정왕.
고려의 25대왕부터 30대 왕까지는 충자로 시작된다.
31대 공민왕은 왕자때 원나라에서 10년을 살아야 했다.
원나라에 인질이 된 고려 왕자가
원나라 황실에 충성을 맹세해야만
귀국 후, 고려왕 즉위가 가능한 시기.
가시리 갑마장.,'방사탑
....... 방사탑((防邪塔 : 제주도 민속자료 제8호)........
마을 어느 한 방위에 불길한 징조가 비친다거나 허하면
그것을 막아야 마을이 평안하게된다고 하여 쌓아 올린 탑.
탑을 쌓아 올릴 때는 그 속에 밥주걱이나 솥을 묻고,
그위에 돌담을 사람 키 이상 쌓아야 된다고 전해온다.
밥주걱을 묻는 이유는 솥의 밥을 긁어 담듯이
외부의 재물을 마을 안으로 담아 들이라는 뜻이요,
솥을 묻는 것은 불에도 끄덕 없이 이겨내라는 뜻이다
방사탑은 속칭 '거욱대', '거욱', '거왁', '극대' 라고 하며,
마을에 따라서 탑과 다소 다른 의미로 구분하기도 한다.
풍수지리적으로 남북이 허하다 하여 '南坮北塔(남대북탑)'
즉 남쪽에는 '거욱대'를 세우고 북쪽에는 '방사탑'을 세웠다.
.........................................................................................
고려 고종 때부터 7차례에 걸찬 원나라의 고려 침략.
고려는 강화도로 천도한 후, 무신정권 삼별초로 항쟁.
고려 국토는 쑥대밭이 되고, 쿠빌리아 칸에게 항복한다.
1259년, 고려 태자(원종)는
몽골 제국과 강화를 하기 위해
칭기즈칸 손자 쿠빌라이를 찾았다.
그는 다음과 같은 약속을 받아 내고
당당한 고려인 복장으로 귀국하였다.
"복식은 고려의 풍속을 따르고
몽골식으로 고치지 않도록 하겠다."
그로부터, 원나라 지배를 받게 된 고려.
1271년, 원에서 귀국한 고려 세자(충렬왕).
몽골식 개체 변발을 하고 호복을 입고 있었다.
개체변발은 정수리부터 앞이마까지 머리를 빡빡 깎고
가운데 머리카락은 뒤로 땋아 내리는 스타일., ‘겁구아’
당시 세자의 모습을 본 고려 사람들은 탄식하며 울었다.
충렬왕은 원나라 세조 '쿠빌리아 칸'의 사위.
당시 세자는 강제로 원나라에 머물다가 왔는데,
그러는 동안에 몽골식 복장이 익숙해졌던 것이다.
이때부터 폐하는 전하로, 태자는 세자로
황제에게 부르는 만세는 천세로 바뀌게 된다.
족도리도 고려 때 몽골에서 들어온 것.
원래 몽골 여인이 쓰던 외출용 모자로서,
원나라 황태후가 고려 왕비에게 보낸 선물.
왕과 왕비 등 궁중 최고 어른에게 붙이는 ‘마마’,
세자와 세자빈을 ‘마누라’, 임금의 음식은 ‘수라’,
궁녀를 뜻하는 ‘무수리’ 등은 본래 몽골 궁중 용어.
몽골어가 궁중 용어로 쓰인 것은
원나라 제도를 수용한 탓도 있지만,
1백여 년 동안 7명의 원나라 공주가
고려 왕비로 생활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원나라 공주에게서 태어난 왕자와 공주는
어릴 때부터 자연스럽게 몽골어를 사용하였고,
원나라 궁중에 들어가 생활하여 몽골어에 익숙했다.
벼슬아치, 양아치, 가파치, 등의 '치.'는
몽골 집정관 '다루가치'의 ‘치’에서 온 것이다.
치는 임무, 직업을 뜻하며 고려왕 경호군이 '홀치',
청소부를 가리키는.,조라치,
거지를 가리키는 말.,화니치,
매를 길들이는 이.,시파치 등.
족두리 쓰고 연지 곤지 찍고 시집가는 풍습
사랑하는 연인끼리 떠나며 증표를 주는 풍습.
상추쌈, 고기를 튀기거나 지지는 등 조리 방법.
만두를 뜻하는 ‘쌍화’는 몽골어를 한자 음으로 표기한 것.
만두는 몽골족 주식으로 고려 여성이 몽골에서 배워 전파.
원나라의 속국이 된 고려는 원종15년(1274년)부터
고려 처녀를 원나라에 바치는 공녀 역사가 시작된다.
고려에서 보낸 공녀로서 원나라 황후까지 오른.,기황후.
당시, 원나라 황실 자금성은 고려궁녀, 내시가 장악.
원나라 황실에서는 거꾸로 고려 풍속이 유행하였다.
고려시대 공녀와 함께 원나라에 보낸 공물은
고려청자, 도자기, 인삼, 산삼, 홍삼, 백삼 등.
원나라는 답례품으로 고려에 비단을 보냈다.
원나라 황실에서는
고려의 풍습이 유행.
그당시 원나라 고관 대작 이라면
고려 여인을 한 두명 쯤은 거느려야
명문 가문으로 행세할 수 있었을 정도.
보통 설렁탕은 선농단에서 제사를 지낸 다음
그 제사에 올렸던 소를 잡아 우려낸 ‘선농탕’에서
비롯되어 설렁설렁 삶아 먹었다고 해서 ‘설렁탕’이다.
설렁탕도 몽골어인 ‘슐루’에서 왔다.
비슷한 음식으로 만주에서는 ‘실레’.
몽골인이 초원을 떠돌다 물가에 이르러서
양을 잡아 적당히 뜯은 다음 삶아먹는 음식.
매사냥, 산길 길가에 돌무더기를 쌓는 풍습.
우리나라에서는 들녘에서 일하다가
먹는 첫 음식을 숟갈로 떠서 던지며
‘고시레’하고 외치는 것도 몽골 풍습.
몽골에서도 한 사람이 ‘고수레’하면
다른 사람도 함께 외치고 술잔을 든다.
몽골에서 들어온 것으로 소주가 있는데,
안동 소주는 원이 일본 정벌을 준비하면서
이 지역 몽골군에게 소주를 공급하면서 주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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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의종 24년(1170)부터 원종 11년(1270)까지
100년간 무신들에 의해 수립된 무신정권 고려 정부.
문치주의에 입각한 고려의 귀족정치는 무신시대에 몰락.
1225년 고려가 몽골사신 '저고여'를 암살한 사건을 빌미로
'1231년~1259년' 강화할 때까지 고려를 6 차례 침략한 몽골.
1259년 고려 종속 후에도, 삼별초는 항복하지 않았다.
.........................삼별초(三別抄)......................
삼별초는 약 40년 간 지속된 대몽 항쟁의 핵심부대.
이들은 원나라에 굴복해 강화를 맺은 정부에 반기를 든
1270년(원종 11) 최씨 무신정권(武臣政權) 사병(私兵) 조직.
좌별초(左別抄) 우별초(右別抄) 신의군(神義軍).
경찰, 전투 등 공적(公的) 임무를 수행한 군사조직.
원래는 하나의 단일한 단체가 아니었다.
다른 반란군과는 달리 원래는 비정규군인데
정규군으로 재편된 뒤, 삼별초의 난을 일으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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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72년 1월 진도에서 삼별초를 토벌한
몽고인 백양(白羊)이 원나라로 개선 행군.
그 행렬에는 고려 부녀자들도 섞여 있었다.
원나라 개선장군 백양은 마치 전리품을 취하듯
고려의 부녀자들을 오랏줄로 꽁꽁 묶어 끌고 갔다.
그녀들은 개경을 지날 때 구해달라 소리치면서 통곡.
“도와주세요.
우리는 강화도에서
삼별초에 강제로 끌려간
고려 관리의 부인들 입니다.”
부녀자들은 개경에 이르자
사람들을 향해 울면서 하소연
그러나, 고려인들은 몽골군에게
끌려가는 부녀자들을 모두 외면했다.
그녀들은 강화도에서 배중손에 의해 진도로 끌려갔다가,
배중손이 패하자 몽고군에게 포로가 되어 끌려가고 있었다.
1270년 삼별초 항쟁을 이끌었던 배중손은 삼별초의 지휘관.
삼별초가 진도로 남천한 이후에
진도정권 수령으로 추대된 배중손.
그녀들은 진도에서부터 걸었기에
입은 옷은 누덕누덕 해어져 있었고
날씨는 살을 에일듯 추운 겨울인데도
그녀들은 신발조차 신지 못하고 있었다.
밤이면, 몽고 군사들에게 겁탈을 당하였고
낮이면, 고된 행군으로 죽는 여자도 많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