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百濟, 數十萬, 기병병단(騎兵兵團)을 궤멸(潰滅)시키다 [4편-2-2, 南齊書:百濟]
〔백제(百濟) : 중원대륙(中原大陸)의 토착(土着) 왕조(王朝)〕
2026년 03월 20일
「남제서(南齊書) 백제(百濟) ‘1편’에 이어 ‘2편’으로 계속(繼續)합니다」
◎ 「반도사학계(半島史學界)」는, 「고고학적(考古學的), 서지적(書誌的) 증거(證據)를 아주 좋아하시는 분들이 모여 있는 곳이라고 전(傳)해진다.」
그러나 이건 미사려구(美辭麗句)【아름다운 말로 듣기 좋게 꾸민 글귀(-句)】일 뿐으로, 「반도조선(半島朝鮮)을 주장(主張)하면서 그에 합당(合當)하는, 입증(立證)하는 고고학적(考古學的), 서지적(書誌的) 증거(證據)는 없다. 오직 20세기(世紀) 이후(以後)에 등장(登場)하는 “한글 해설물(解說物)”만이 존재(存在)할 뿐이다.
그러나 중원대륙(中原大陸)에서 발굴(發掘)되는 여러 문헌(文獻)이나 비문(碑文)을 보면 : 옛 조선왕조(朝鮮王朝)가 반도(半島) 땅에 있었다는 것을 입증(立證)할만한 그 어떤 것도 없다. ➠ 「반대(反對)로 옛 조선왕조(朝鮮王朝)는, ‘중원대륙(中原大陸)의 토착세력(土着勢力)’이었다는 것을 증명(證明)하는 것들이다.」
☛ ‘무녕왕릉(武寧王陵)에서 발견(發見)되었다’라는 지석(誌石)은 : 무녕왕(武寧王, 462~523)과 왕비(王妃)의 일대기(一代記)를 기록(記錄)해 놓은 것이 아니라 : 「“땅을 사고팔았다.”라는 웃기는 내용(內容)으로 되어 있고, 또 명문(銘文) 한복판에는 구멍을 뚫어 놓았는데… …이것 또한 누구도 이게 무엇인지 모른다」라는 것이다.
또 이해불가(理解不可)한 것은, 일본서기(日本書紀)를 가지고 무녕왕(武寧王, 462~523)에 대한 여러 가지를 고증(考證)하고, 고증(考證)하려 하고 있다는 사실(事實)이다.
➥ 일본서기(日本書紀)[동북아역사넷] : 일본서기(日本書紀) : 《“일본서기(日本書紀)는 일본(日本)이라는 국호가 만들어지고 율령을 근간으로 하는 천황제 통일국가가 완성된 시점에서 편찬되었다.” 그 내용은 일본의 건국신화를 이야기하는 신대(神代)로부터 일본국을 건국했다는 초대 신무(神武)천황에서 지통(持統)천황에 이르는 7세기 말까지 일본의 역사를 천황 중심 편년체로 구성하고 있다. 한편 [일본서기]는 자료가 영성한 한국고대사를 밝히는데 중요한 사료로 인식되고 있다. 하지만 기년(紀年) 문제 등 신뢰성에 대한 이슈가 지속적으로 제기되기 때문에, 자료의 이용에는 엄정한 사료비판이 필요하다.》라고 “동북아역사넷” 스스로 문제점(問題點)을 말하고 있으면서,
이처럼 문제(問題)가 많은 일본서기(日本書紀)를 근거(根據)로 조선사(朝鮮史)를 해설(解說)하는 어처구니없는, 웃기는 사학계(史學界)가 바로 “반도사학계(半島史學界)”다.
「일본서기(日本書紀)」는, 19∼20세기(世紀) 초(初)에 만들어진 “위서(僞書)”라고 폄하(貶下)하는 학자(學者)들도 있어, 사료(史料)의 가치가 없다. 문제(問題)는 “일본서기(日本書紀)”는 : ☛ 「반도조선(半島朝鮮) : 열도일본(列島日本)」이라는 기막힌 한 수로 만들어져 있어, “옛 조선(朝鮮)이 반도(半島)에 없었다”라고 하면 : “열도(列島) 일본(日本)은, 파도(波濤)에 휩쓸려 스스로 무너져내리는 모래성(城)처럼 되어버린다.”」
이는 곧 「“옛 왜(倭) : 일본(日本)”은, “열도(列島)에 없었다.”」라는 뜻이 되는 것이다. 이런 “일본서기(日本書紀)”를 사서(史書)라고 할 수 있나? 또 〈이것을 이용(利用)하여 반도조선(半島朝鮮)을 입증(立證)하려 하는 대한민국(大韓民國) 사학계(史學界) 집단(集團)이 더 웃기는 것 아닌가! 곧 일제(日帝)의 광기(狂氣)에 휩쓸려 가는 정신(精神) 빠진 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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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建武二年, 牟大遣使上表曰 : 건무(建武) 2년(AD 495) 모대(牟大)가 사신을 보내 표문(表文)을 올려 아뢰었다. ➊「臣自昔受封, 世被朝榮, 忝荷節鉞, 剋攘列辟. : 신(臣)은 예로부터 분봉을 받아 대대로 조정의 영예를 입었고, 더하여 절부(節符)와 부월(斧鉞)을 받아, 여러 변방을 평정하였습니다. 徃姐瑾等竝蒙光除, 臣庶咸泰. ; 지난 번에 저근(姐瑾) 등이 모두 영광스러운 관작을 제수받아 신하와 백성들이 모두 기뻐하였소. ➋ 去庚午年, 獫狁弗悛, 舉兵深逼. : 지난 경오년(庚午年)【AD 490】에도 험윤(獫狁)【魏虜: 北魏】이 잘못을 깨닫지 못하고 군사를 일으켜 깊이 핍박해왔소이다. 臣遣沙法名等領軍逆討, 宵襲霆擊, 匈犁張惶, 崩若海蕩. 乗奔追斬, 僵屍丹野. 由是摧其鋭氣, 鯨暴韜凶. : 신(臣)이 사법명(沙法名) 등을 보내 군사를 거느리고 역습케 하여 밤에 번개처럼 기습 공격하니, 흉리(匈犁)가 크게 당황하여 바닷물이 들끓는 것처럼 붕괴되었습니다. 달아나는 틈을 타서 쫓아가 베니 시체가 들을 붉게 물들였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그 예봉이 꺾여 고래처럼 사납던 것이 그 흉포함을 감추었습니다. 今邦宇謐靜, 實名等之略, 尋其功勲, 宜在裒顯. : 지금 나라가 조용해진 것은 실로 사법명 등의 지략 때문이니 그 공훈을 헤아려 마땅히 표창을 주어야 할 것입니다. ➌ 今假沙法名行征虜將軍·邁羅王 : 금(今) 임시로 사법명(沙法名)을 행정로장군(行征虜將軍)·매라왕(邁羅王)으로, ➍ 贊首流爲行安國將軍·辟中王, : 찬수류(贊首流)를 행안국장군(行安國將軍)·벽중왕(辟中王)으로, ➎ 觧禮昆爲行武威將軍·弗中侯 : 해례곤(觧禮昆)을 행무위장군(行武威將軍)·불중후(弗中侯)로 삼았고, ➏ 木干那前有軍功, 又拔臺舫, 爲行廣威將軍·面中侯. 伏願天恩特愍聽除. : 목간나(木干那)는 전부터 군공이 있는 데다, 또 성문[돈대]과 배를 공격하여 빼앗았으므로, 행광위장군(行廣威將軍)·면중후(面中侯)로 삼았소. 엎드려 바라건대 천은을 특별히 베풀어 관작을 제수해주시기를 청하오.」【建武二年牟大遣使上表曰臣自昔受封世被朝榮忝荷節鉞剋攘列辟徃姐瑾等竝𫎇光除臣庶咸泰去庚午年獫狁弗悛舉兵深逼臣遣沙法名等領軍逆討宵襲霆擊匃犁張惶崩若海蕩乗奔追斬僵屍丹野由是摧其鋭氣鯨暴韜㓙今邦宇謐靜實名等之畧尋其功勲宜在襃顯今假沙法名行征虜將軍邁羅王贊首流為行安國將軍辟中王觧禮昆為行武威將軍弗中侯木干那前有軍功又拔臺舫為行廣威將軍面中侯伏願天恩特愍聽除.】》
➊ 「臣自昔受封, 世被朝榮, 忝荷節鉞, 剋攘列辟. : 신(臣)은 예로부터 분봉(分封)을 받아, 대대로 조정의 영예를 입었고, 더하여 절부(節符)와 부월(斧鉞)을 받아, 여러 변방을 평정하였다【필자(筆者) 注 : 침탈한 적(敵)을 물리치고(剋攘), 제후(諸侯)들의 난(亂)을 평정하였다(列辟】」 라고 하였는데,
【參考 ‘例’ : 高麗史節要(고려사절요) 1권을 보면 : [高麗 太祖가] 詔曰 : 《朕知人不明,審官多失,寢興疚懷,職此而已 : 짐(朕)【天子를 지칭(指稱)하는 말이다】이 자나 깨나 걱정하는 것은 오직 사람을 밝게 알아보지 못하여 관직(官職)을 살핌에 실수(失手)가 많을까 하는 문제일 뿐이다.》라고 하였으니, 「“고려(高麗) 태조(太祖) 왕건(王建)”은, “천자(天子)”」였음을 밝히고 있다.】
위의 구절(句節)대로라면 : 「거친 적을 물리치고(剋攘), 나라의 난을 제거하였다(列辟)」라는 것인데… …이것을 설명(說明)하기를, 《북위(北魏)의 수십만(數十萬) 기마병단(騎馬兵團)을 물리친 것을 말하는 것이다.》라는 사족(蛇足)을 달아 놓았는데, ➠➠➠ 《그렇다면 자국(自國)을 침략(侵略)한 적군(敵軍)을 몰아내는 것도, 황제(皇帝)의 절부(節符)와 부월(斧鉞)이 필요(必要)한 건가?》 황당무계(荒唐無稽)하고 괴상망측(怪常罔測)한 이야기가 되는 것이다.
☛ “차라리 ‘모르면 : 모른다’라고 하는 것이 정상(正常)인 것이다.”
앞 구절(句節)을 보면 : 〈“황제(皇帝)의 절부(節符)와 부월(斧鉞)을 받았다”라고 함은, 「침공(侵攻)한 변방(邊方)의 거친 적(敵)을 물리치고 제후(諸侯)들의 반역(叛逆)을 평정(平定)하여 나라(天朝)의 안위(安危)를 지켰다.」〉라는 뜻이 되어야 함이 마땅한 것이다.
“백제(百濟)”에서 보면 : 남(南)쪽과 서(西)쪽은 바다(海), 동(東)쪽은 신라(新羅), 북(北)쪽은 고구려(高句驪)와 접(接)하고 있을 뿐, 여러 변방(邊方)은 존재(存在)할 수 없는 지리적(地理的) 형편(形便)이다.
「반도(半島) 서남(西南) 땅에서 황제(皇帝)로부터 절부(節符)와 부월(斧鉞)을 받고, 서해(西海)를 건너 중원대륙(中原大陸) 강좌(江左) 또는 강서(江西) 땅을 평정(平定)했다는 건가? 아니면 요서(遼西) 땅을 정복(征服)하고 진평(晋平) 2군(郡)을 두고 백제령(百濟領)으로 통치했다는 건가? 또 아니면 서융(西戎)이나 북호(北胡)를 정벌(征伐)했다는 건가?」 도대체 뭔가?
이는 곧 「백제(百濟)는 중원대륙(中原大陸)에 자리 잡고 있었다」라는 뜻이다.
➋ 「去庚午年, 獫狁弗悛, 舉兵深逼. : 지난 경오년(庚午年)【AD 490】에도 험윤(獫狁)【魏虜: 北魏】이 잘못을 깨닫지 못하고 군사를 일으켜 깊이 핍박하였다.」 : ➠ 이 항목(項目)이 바로 “북위(北魏)=후위(後魏)=북로(北虜)=험윤(獫狁)”이 ‘수십만(數十萬) 기마(騎馬)’를 동원(動員)하여 백제(百濟)의 변경(邊境)을 침공(侵攻)한 것을 말하는 것이다.
「수십만(數十萬) 기마병단(騎馬兵團)이 서해(西海)를 건너왔다.」라는 문제(問題)는, 무려 ‘1,500’ 여년(餘年)이 지난 뒤의 21세기(世紀) 작금(昨今)에도 불가능(不可能)한 일이다. 뇌세포(腦細胞)를 활용(活用)해 보시라!
「수십만(數十萬)의 ‘보병(步兵)’이 서해(西海)를 건넌다.」라는 것도 불가능(不可能)한 상황(狀況)에서 「기마(騎馬) 수십만(數十萬)」이라면… …병사(兵士)와 말(馬)과 군량(軍糧), 마량(馬糧), 전투기계(戰鬪器械) 등을 생각해 보면 : 「불가능(不可能)한 것이다」라는 것이다.
☛ 「그러나 ‘뭍(陸地)에서 접경(接境)’하고 있었다면 : ‘3일분, 5일분’을 싣고 전격적(電擊的) 기습공격(奇襲攻擊)을 감행(敢行)하는 병법(兵法)은, 전쟁사(戰爭史)에서 수없이 등장(登場)하는 기습전법(奇襲戰法)일 것이다.」
➥ 〈‘백제(百濟)의 세작(細作) 및 정탐병(偵探兵)’들은 ‘북로(北虜)’의 선발(先發) 기마부대(騎馬部隊)가 북위(北魏)를 출발(出發)하자마자, 급보(急報)를 띄웠을 것이고, 조정(朝廷)에서는 전군(全軍)에게 전시계엄(戰時戒嚴)을 선포(宣布)하는 동시(同時)에, 여러 정예부대(精銳部隊)를 요소요소(要所要所)에 매복(埋伏)시켜 : 영토(領土) 안으로 수십만(數十萬) 기마(騎馬)가 들어오도록 유인(誘引)하고 : 요소요소(要所要所)에 매복(埋伏)된 수십만(數十萬) 병사(兵士)들이 전격적(電擊的)으로 기습공격(奇襲攻擊)을 감행(敢行), 궤멸(潰滅)시켰다〉라고 보는 것이 타당(妥當)한 것이다.
「반도(半島) 백제(百濟)」라는 것은, 허구(虛構)의 날조(捏造)된 엉터리 역사해설(歷史解說)이다. 단(但), 하나의 가능성(可能性)은 있다. 북로(北虜)의 수십만(數十萬) 기마대(騎馬隊)가 C-130 수송기(輸送機) ‘5∼6천(千)’ 대를 동원(動員)하여 기습(奇襲), 공중투하(空中投下)되었다면… …이래서 반도사학(半島史學)을 “사학(史學)”이 아닌 “사학(死學)”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➌ 「今假沙法名行征虜將軍·邁羅王 : 금(今) 임시로 사법명(沙法名)을 행정로장군(行征虜將軍) 매라왕(邁羅王)」으로,
“정노장군(征虜將軍)”이라는 관직(官職)의 이름은 ‘대륙사(大陸史)’에 등장(登場)한다. 아래의 “예문(例問)”을 보면 : 「유수(劉粹 : 375∼427)는, 정노장군(征虜將軍)·건위장군(建威將軍)·유격장군(遊擊將軍)·관군장군(冠軍將軍) 등을 역임(歷任), 또한 “광릉태수(廣陵太守)”【백제(百濟) 역시(亦是) 광릉태수(廣陵太守)를 두었다고 하였다.】가 되었다.」라고 말한다.
➥➥➥ 「백제(百濟)의 광릉태수(廣陵太守)」, 「송(宋)의 광릉태수(廣陵太守)」는, 무엇이 어떻게 다른 건가?
《반도사학(半島史學)도 입(口)이 있으니 말을 해보시라! 도대체 백제(百濟)의 광릉태수(光陵太守)는 어디에 있었고, 송(宋)의 광릉태수(光陵太守)는 어디에 있었을까?》
《광릉군(廣陵郡) : 반도(半島) 땅엔 없다. 「광릉군(廣陵郡)의 광릉군(廣陵君)」이 바로 광릉태수(光陵太守)를 말하는 것이다. 오늘날의 「장강(長江)의 하류(下流)의 남북안(南北岸) 곧 양주시(揚州市)와 그 주변일대(周邊一帶)」를 말하는 것으로, 수당(隋唐)의 강도군(江都郡) 땅을 말하는 것이다.》
☛ 전회(前回)에서 말씀드린 “백제(百濟)는 강좌(江左)에 걸터앉아 있었다”라고 원문(原文)을 근거(根據)로 주장(主張)했는데, 똑같은 사안(事案)이다.
• 정로장군(征虜將軍) : 【劉粹[維基百科,自由的百科全書] : 劉粹(375年—427年)字道沖,沛郡蕭人。持節、監河中軍事,征虜將軍劉恢之孫,劉毅族弟。劉粹家住京口。擔任州從事、參建武軍事。跟隨劉裕討伐桓玄,轉參鎮軍事,不久加封建武將軍、沛郡太守,又兼任下邳太守,又任車騎中軍參軍。跟隨劉裕北伐南燕,受封西安縣五等侯。班師回朝後,轉中軍諮議參軍,後任游擊將軍、建威將軍、江夏相。受封灄陽縣男,食邑五百戶。因母親去世而離職。劉裕討伐司馬休之時,任命劉粹為寧朔將軍、竟陵太守,不久進號輔國將軍,升任相國右司馬、侍中、中軍司馬、冠軍將軍,又升任左衞將軍。永初元年(420年),改封建安縣侯,食邑千戶。二年(421年),因違規差遣監吏而遭到免官。不久又出任督江北淮南郡事、➠征虜將軍、廣陵太守。三年(422年),以征虜將軍督豫司雍並四州南豫州之梁郡弋陽馬頭三郡諸軍事、豫州刺史,兼任梁郡太守,鎮守壽陽。∼中略∼. / 征虜將軍:漢光武帝任命的祭遵。三國時蜀漢的張飛也曾任此職.】
• 매라왕(邁羅王) : 역시(亦是) 지명(地名)인지, 관직(官職)의 이름인지 알 수 없으나, “매라(邁羅)”라는 글자만을 놓고 보면 : 지명(地名)일 가능성(可能性)이 있다.
➍ 「贊首流爲行安國將軍·辟中王, : 찬수류(贊首流)를 행안국장군(行安國將軍)·벽중왕(辟中王)」으로,
• 벽중왕(辟中王) : 역시(亦是) 지명(地名)인지, 관직(官職)의 이름인지 알 수 없으나, “벽중(辟中)”이라는 글자만을 놓고 보면 : 지명(地名)일 가능성(可能性)이 있다.
• 안국장군(安國將軍) : 「삼국(三國) 때의 ‘오(吳)’나라의 ‘주치(朱治)’는 오군태수(吳郡太守)였으며, AD 223年에는 ‘안국장군(安國將軍)’이 되었다」라는 기록(記錄)이 있다.
➎ 「觧禮昆爲行武威將軍·弗中侯 : 해례곤(觧禮昆)을 행무위장군(行武威將軍)·불중후(弗中侯)」로,
• 무위장군(武威將軍) : 【武威將軍 : 劉尚(?—47年?),《東觀漢記》、《續漢書》作「劉禹」,是中國東漢時代初期武將以及漢朝宗室人物。】
• 불중후(弗中侯) : 역시(亦是) 지명(地名)인지, 관직(官職)의 이름인지 알 수 없다.
➏ 「木干那(中略), 爲行廣威將軍·面中侯. : 목간나(木干那)를 행광위장군(行廣威將軍)·면중후(面中侯)」로
• 면중후(面中侯) : 역시(亦是) 지명(地名)인지, 관직(官職)의 이름인지 알 수 없다.
• 광위장군(廣威將軍) : 【卜天與(?—453年3月16日),吳興餘杭人。南朝宋軍事人物。卜天與官至廣威將軍,多年來都在宮中任職,劉劭弒父奪位當日曾率眾討伐劉劭,但失敗被殺。 卜天與父親卜祖本身也是軍人,中略.卜祖死後,天興承襲關中侯爵。卜天與擅長射箭,挽弓的氣力倍於常人,而且面容嚴肅,即使笑時也不會開顏大笑。宋文帝因著他是劉裕舊將的兒子,就命他教諸皇子射箭。多年以後,天與以白衣領東掖防閤隊。後遷領輦後第一隊。卜天興因為撫恤士卒,故很得眾心,二十九年(452年)獲廣威將軍,領左細仗,兼帶營祿。】
☛ 「‘북위(北魏)=북노(北虜)’의 ‘수십만(數十萬) 기마병단(騎馬兵團)’이 바다(海)를 건너지 않았다」라는 서지적(書誌的) 근거(根據)를 찾아보자. 곧, 《백제왕(百濟王)은 말하기를 : 木干那前有軍功, ➠ 又拔臺舫, 爲行廣威將軍·面中侯. 伏願天恩特愍聽除. : 목간나(木干那)는 전부터 군공이 있는 데다, 또 성문[돈대]과 배를 공격하여 빼앗았으므로, 행광위장군(行廣威將軍)·면중후(面中侯)로 삼았소》라고 하였는데… …,
《➠ 又 拔 臺 舫 : 또 성문[돈대]과 배(舫)를 공격(攻擊)하여 빼앗았다》라고 하였는데,
• ‘대(臺)’는, 돈대(墩臺)를 말하는 것이고,
• ‘방(舫)’이란 : 「방(舫) : 방주(舫舟) 방(舫) / 방주(方舟: 네모진 모양의 배) / 釋義 / 舫 : 並排串連的兩艘船. 有船室的船.」이라고 하였으니,
•「내륙(內陸)의 강(江), 하천(河川)을 운행(運行)하는 네모난 배, 또는 선실(船室)이 있는 배, 곶(串)에 배 두 척(隻)을 연결(連結)하여 묶어 놓은 배」등을 말하는 것이다. 【곶(串) : 바다(海) 또는 호수(湖水) 등에서 부리 모양으로 뾰족하게 뻗은 육지(陸地)를 말한다.】
☛ 이로 보면 : 백제(百濟) 장수(將帥) ‘목간나(木干那, ?~?)’는, 「침공(侵攻)하여 북위(北魏)가 선점(先占)한 성(城)의 돈대(墩臺)를 공격(攻擊), 빼앗고, 곶에 정박(碇泊)해 있는 방주(方舟 : 네모난 배)를 공격(攻擊), 빼앗은 공(功)이 있다」라고 말하는 것으로 보아,
『당시(當時)의 ‘북로(北虜)=험윤(獫狁)’으로 표현(表現)되던 ‘북위(北魏)’의 수십만(數十萬) 기마병단(騎馬兵團)은, 도해(渡海)하지 않았다.』라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 이것은 『백제(百濟)·고구려(高句驪)·신라(新羅)는 반도(半島) 땅에 없었다. 이들 삼국(三國)은, 중원대륙(中原大陸)의 토착왕조(土着王朝)로 주인공(主人公)이었다』라는 역사적(歷史的) 사실(事實)을 서지적(書誌的)으로 증거(證據)하고 있는 것이다.
☛ 「‘반도사학(半島史學), 식민사학(植民史學)’을 어찌하리까? 100년(年)이란 시간(時間)이 지났음에도 변함없이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가 만들어준 그 해설서(解說書)를 달달 외우고만 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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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又表曰 : 또한 표문(表文)을 올려 아뢰었다. 「臣所遣行龍驤將軍·樂浪太守兼長史臣慕遺, 行建武將軍·城陽太守兼司馬臣王茂, 兼參軍·行振武將軍·朝鮮太守臣張塞, 行揚武將軍陳明, 在官忘私, 唯公是務, 見危授命, 蹈難弗顧. : 신(臣)이 보낸 행용양장군(行龍驤將軍)·낙랑태수(樂浪太守) 겸(兼) 장사(長史) 신(臣) 모유(慕遺), 행건무장군(行建武將軍)·성양태수(城陽太守) 겸(兼) 司馬(사마) 신(臣) 왕무(王茂), 겸참군(兼參軍)·행진무장군(行振武將軍) 조선태수(朝鮮太守) 신(臣) 장새(張塞), 행양무장군(行揚武將軍) 진명(陳明)은, 관에 있으면서 사사로움을 잊고 오직 공적인 것에만 힘써, 나라가 위태로운 것을 보면 목숨을 바치고 어려운 일에 처하면 자기 몸을 돌보지 않습니다. 今任臣使, 冐涉波險, 盡其至誠. : 지금 사신의 임무를 맡아서는 험한 파도를 무릅쓰고 바다를 건너 그 지극한 정성을 다했습니다. 實宜進爵, 各假行署. 실로 관작을 올려주는 것이 마땅하여 임시로 관직을 주었습니다. 伏願聖朝特賜除正.」詔可, 竝賜軍號. : 엎드려 원하건대 성조께서 특별히 은혜를 내리시어 관직을 제수해주시오.」하니, 조서를 내려 허가하고 아울러 군호(軍號)를 내려주었다.【又表曰臣所遣行龍驤將軍樂浪太守兼長史臣慕遺行建武將軍城陽太守兼司馬臣王茂兼參軍行振武將軍朝鮮太守臣張塞行揚武將軍陳明在官忘私唯公是務見危授命蹈難弗顧今任臣使冐渉波險盡其至誠實宜進爵各假行署伏願聖朝特賜除正詔可竝賜軍號.】》
➊ 「행용양장군(行龍驤將軍) 낙랑태수(樂浪太守) 겸(兼) 장사(長史) 신(臣) 모유(慕遺)」
• 용양장군(龍驤將軍) : 수군장군(水軍將軍)의 관직(官職) 이름이다. 【龍驤將軍,兩晉南北朝的將軍稱號。晉武帝伐孫吳,因為吳國童謠「阿童復阿童,銜刀浮渡江。不畏岸上獸,但畏水中龍」,拜益州刺史王濬(小字阿童)為龍驤將軍,派他造船備戰。龍驤將軍的稱號從此時開始。南北朝沿用,地位高下不一,北魏、北齊都是第三品,南朝梁有將軍名號二百四十位以上,龍驤將軍在次位一百七十以後,隋朝廢除。】
• 낙랑태수(樂浪太守) : 반도조선사(半島朝鮮史)에서 등장하는 낙랑군(樂浪郡)과 낙랑(樂浪)이라는 곳은 :「첫째는 고구려(高句驪)의 평양(平壤) 중심(中心)의 낙랑군(樂浪郡)」, 「두 번째로는 신라(新羅)의 ‘경주(慶州)=계림(雞林)’을 낙랑(樂浪)이라고 했다」, 「세 번째는 심양(瀋陽)을 한(漢) 때에 낙랑군(樂浪郡)이라 불렀다」라는 것이다.
그런데 또 백제(百濟) 역시(亦是) ‘낙랑군(樂浪郡)’이 있었다는 것이다. 낙랑태수(樂浪太守)가 있었으니 말이다.
【燕薊紀程[戊子年 : 1,828, 純祖 28) 12월 5일] : 《瀋陽古肅愼挹婁之地。渤海大氏。始置瀋州。漢曰樂浪郡。: 심양(瀋陽)은 옛 숙신(肅愼), 읍루(挹婁)의 땅으로 발해(渤海)의 대씨(大氏)가 비로소 심주(瀋州)를 두었다. 한(漢) 나라 때에는 낙랑군(樂浪郡)이라 불렀다》라고 하였다. 연원직지(燕轅直指)에도 같은 기록이 있다.】
☛ 그러나 「백제(百濟) 또한 낙랑군(樂浪郡)을 다스리는 낙랑태수(樂浪太守)가 있었다」라는 것이다. 이를 어찌 이해(理解)할 수 있을까? 「양직공도(梁職貢圖)」에 의하면 : 백제(百濟)를 칭하기를 “낙랑(樂浪)”이라고 하였다.
➋ 「행건무장군(行建武將軍) 성양태수(城陽太守) 겸(兼) 司馬(사마) 신(臣) 왕무(王茂)」
• 성양태수(城陽太守) : 성양군(城陽郡) 역시(亦是) 반도(半島) 서남(西南) 땅에 존재(存在)할 수 없는 고을 이름이다. 여국(莒國), 제국(齊國), 성양국(城陽國)이 있었던 곳을 말하는데, 산동성(山東省)의 ‘여현(莒縣) 중심(中心)’이라고 전해진다.
【성양군(城陽郡) : 城陽郡 [維基百科,自由的百科全書] : 中國古郡名。西漢高帝時始置,郡治在莒縣,屢改為城陽國。東漢初省併,漢末曹操復置。西晉末年廢。秦代其地屬齊郡。漢高帝時為劉肥齊國支郡,曾為呂后女魯元公主之湯沐邑。漢文帝元年(前179年)復歸齊國。文帝二年,分城陽郡置城陽國,封劉肥之子朱虛侯劉章為城陽王。文帝十二年(前168年),徙城陽王劉喜為淮南王,城陽除為郡。十六年,又徙淮南王喜為城陽王。此時城陽國大致相當於今山東省莒縣、五蓮縣、沂水縣、沂南縣、莒南縣、臨沭縣、費縣、棗莊市山亭區一帶,國都為莒縣。漢武帝以後,從城陽郡分封出東莞、雷、闢土(壁土)、利鄉、有利、南城、東平、運平、山州、海常、騶丘、廣陵、杜、昌、蕢(即費縣)、虖葭(雩殷)、原洛(石洛)、挾(校、祓)、校、鱣(襄賁)、彭、瓠、虛水、麥、巨合、挾術、文、庸、翟、東淮、拘、淯、江陽、高鄉、茲鄉、都平、棗、箕、即來、籍陽、庸(譚、談)、崑山、折泉、博石、房山、式、要安、石山、都陽、參封、伊鄉、桃共五十三個侯國,分屬琅邪郡、東海郡、泰山郡、北海郡,是漢代分封侯國最多的一郡。漢成帝元延四年(前9年),城陽國僅餘四縣:莒、陽都、東安、慮,轄境大致相當於今莒縣、沂南及沂水部份地區。漢平帝元始二年(2年),全國有56642戶,205784人。屬兗州刺史部。王莽改城陽為莒陵。東漢建武十三年(37年)省城陽國,其地併入琅邪郡。[維基百科,自由的百科全書]】
• 건무장군(建武將軍) : 역시(亦是) 중원대륙(中原大陸) 조정(朝廷)에서 사용(使用)되던 관직(官職)의 이름이다. 【建武將軍:曹魏王淩。】
➌ 「겸참군(兼參軍)·행진무장군(行振武將軍) 조선태수(朝鮮太守) 신(臣) 장새(張塞)」
• 진무장군(振武將軍) : 【振武將軍:曹魏吳質、蜀漢費觀。】
• 조선태수(朝鮮太守) : 백제(百濟)에 “조선(朝鮮) 태수(太守)”가 있었다는 말은, “조선군(朝鮮郡)”이 있었다는 뜻이다.
➍ 「양무장군(揚武將軍) 진명(陳明)」
• 양무장군(揚武將軍) : 역시(亦是) 중원대륙(中原大陸) 왕조(王朝)의 관직(官職) 이름이다. 沈勁(?∼365年),字世堅,吳興武康(今浙江德清縣武康鎮)人。東晉時期將領,官至揚武將軍、冠軍長史,因獨領五百兵防禦洛陽而被前燕軍俘殺。
◆ 필자(筆者)는 반도사학자(半島史學者)들에게 아래의 것들을 찾아보라고 권한다. 즉(卽),
● 〈畿內〉 : 천자(天子)가 직접(直接) 다스리던 지역(地域)을 말하던 것으로 왕성(王城)으로부터 ‘5’ 백리(百里) 이내(以內)를 말하는 것으로, 동서(東西) ‘1’ 천리(千里), 남북(南北) ‘1’ 천리(千里)에 이르는 땅을 말하는 것으로,
그 면적(面積)을 현대적(現代的)으로 환산(換算)하면 : “160,000”㎢에 달하는데, 현(現) 대한민국(大韓民國)【남한(南韓) 및 그 부속도서(附屬島嶼)】의 면적(面積)은 겨우 “100,413㎢”에 불과(不過)하다. 여기에 ‘황해도(黃海道)와 평안도(平安道)’ 땅까지 포함(包含)하면 “기내(畿內)”와 비슷하지 않겠나? 이제 ‘기내(畿內)’라는 단어(單語)의 정체(正體)를 아시겠는가!
● 〈右賢王•左賢王〉 : 예시(例示)된 「우현왕(右賢王)과 좌현왕(左賢王)」은, 어디선가 많이 보고 들었던 관직(官職)의 이름이다. 곧 ‘험윤(獫狁)=험윤(玁狁)’으로, 또는 북호(北胡)로, 서융(西戎)으로 막연(漠然)하게 “흉노(匈奴)”로 불렸던 종족(種族), 부족(部族)의 나라(國)에서 흔하게 불렸던 이름이다.
그렇다면 “반도(半島) 백제(百濟)”가 저 멀리 “막남(漠南), 사막지대(沙漠地帶), 막북(幕北)의 땅”에 기마(騎馬) 수만(數萬)을 출정(出征)시켜, 번개처럼 기습공격(奇襲攻擊), 이곳을 식민지(植民地)로 삼았다는 건가? 그래서 동서(東西)의 양(兩) 국가(國家)를 다스리기 위하여 ‘右賢王•左賢王’을 두었다는 건가? 도대체 뭔가?
● 〈面中王•都漢王•阿錯王•邁盧王•邁羅王•辟中王〉 : 똑같은 사안(事案)이다. 겨우 「한강(漢江) 이남(以南)+충청도(忠淸道)+전라도(全羅道) 땅」에서 올망졸망 살았다던 손바닥만 한 백제(百濟) 땅에… …제후국(諸侯國)을 두고, 제후왕(諸侯王)을 두었다는 건가? “왕(王)”이라면 나라의 우두머리가 아니더냐! 아니면 그저 과시용(誇示用)으로 만들어 놓은 것이었다는 건가? 뭔가? “반도(半島) 백제(百濟)”로써는 100% 불가능(不可能)한 일이다.
● 〈八中侯•弗斯侯•弗中侯•面中侯〉 : 똑같은 사안(事案)이다.
● 〈征虜將軍•安國將軍•武威將軍•廣威將軍•振武將軍•揚武將軍•都將軍•建威將軍•廣武將軍•宣威將軍•冠軍將軍•輔國將軍•龍驤將軍•寧朔將軍•建武將軍。駙馬都尉〉 : 이러한 관직(官職)의 이름은 위에서 말씀드렸듯이… …반도(半島) 땅에서 이루어질 수 없었던 중원대륙(中原大陸)에서의 역사적(歷史的) 사실(事實)임을 잊지 말아야겠다.
● 〈郡將 : 猶刺史也。【新唐書。黑齒常之爲達率。兼風達郡將。猶唐之刺史者是也】〉 : 군장(郡將)이라는 말은 곧 태수(太守) 또는 자사(刺史)와 같은 지방행정관(地方行政官)의 최고(最高) 우두머리를 말하는 것인데… …「한때 유명세(有名稅)를 딴 흑치상지(黑齒常之)의 관직명(官職名)이 바로 풍달군장(風達郡將)이었다」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반도(半島) 서남(西南) 땅 어디가 “풍달군(風達郡)”이었다는 건가? 논거(論據) 하나 없이 그저 하기 좋은 말로… …홍성(洪城)으로 추정(推定)된다? 천안(天安)이나 예산(禮山)으로 추정(推定)된다? 왜 부여(夫餘)나 공주(公州)는 아니고… …지금 전(全) 국민(國民)을 상대(相對)로 추정(推定), 추정(推定)으로 무엇을 하잖은 것일까?
● 〈西河太守•廣陽太守•帶方太守•朝鮮太守•廣陵太守•淸河太守•樂浪太守•城陽太守〉 : 정말 답답(沓沓)한 현실(現實)이다. 예시(例示)를 든 것이 8곳이다. 백제(百濟)를 보면 : “군국제(郡國制)와 봉건제(封建制)를 혼용(混用)하고 있다”라고 보아 지는데… … 기내(畿內), 근간지지(根幹之地) 등(等)에는 군현제(郡縣制)를, 그렇지 않은 곳에는 분봉제(分封制)를 시행(施行)한 것으로 보인다. 담로제(擔魯制) 역시(亦是) 것이다.
예시(例示)된 “8곳의 지명(地名) 및 그 태수(太守)”를 보면 : 「반도(半島) 땅에 있었다」라고 할 곳은, 단 한 곳도 없다.」
반도(半島) 땅의 한강(漢江) 이남(以南), 충청도(忠淸道), 전라도(全羅道) 땅의 면적(面積)으로 보면 : 위에서 ‘예(例)’를 든 8곳 중에서 겨우 한, 두 군데의 땅에도 제대로 미치지 못하는 것이다.
역사적(歷史的) 사실(事實)로 : 「삼남(三南 : 下三道)과 한강(漢江) 이남(以南)이 백제(百濟)의 영토(領土)였다」라고 한다면 : “가능(可能)한 시나리오는 한 가지가 있다.”
☛ 즉(卽), 〈본국(本國)의 백제(百濟)가 이곳 땅을 개척(開拓)하고 충성심(忠誠心)이 강(强)하고 공(功)이 많은 신하(臣下)를 책봉(冊封)하여 왕사(王使)로 파견(派遣), 그곳 땅을 다스리도록 했다.〉라는 것이다.
◎ 그러나 이러한 추정(推定) 역시(亦是) 고고학적(考古學的)인, 서지적(書誌的) 증거(證據)나 근거(根據)가 명백(明白)하게 나타나지 않았음에 비춰보면 : 그저 “그럴 것이다”라는 수준(水準)에 그치는 것이다.
「오늘날의 반도(半島)【한반도(韓半島)=조선반도(朝鮮半島)】땅에서, 토착(土着) 왕조(王朝)가 수천(數千) 년(年)을 이어왔다」라는 것에 대해 : 그 어떤 논리적(論理的) 근거(根據)는 없다. 발견(發見)되지 않았다. 이러한 여러 논거(論據) 중의 하나는… …,
☛ 여기서 심각(深刻)하게 고려(考慮)해 보아야 할 문제(問題)는, 바로 AD 1,910 전후(前後)의 반도(半島) 땅에 살고 있었던 일반백성(一般百姓)들과 노비(奴婢)의 구성비율(構成比率)과 문맹율(文盲率)이다.
㈠ 「반도(半島) 문맹율(文盲率)」이 : AD 1,910年 전후(前後) 약(約) “90% 이상(以上) 이었다”라는 것이 무엇을 의미(意味)하는지를 알아야 한다. 【➊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 조사(調査) 자료(資料). ➋ 동아일보 / 2009.10.10. [이동욱 칼럼] 일본 지식인의 역사왜곡 : 《물론 그 당시 문맹률이 90%를 웃돌았다는 사실도 도움이 됐을 것이고… …》 ➌ 조선일보 / 유석재 역사문화전문기자 / 입력 2025.08.15. 00:57 : 광복 당시 문맹률 78%… 중학교만 가도 엘리트 대우】
㈡ 반도(半島) 땅의 노비(奴婢) 비율(比率) : 「AD 1,910年 전후(前後) 약(約) “40∼60%” 정도(程度)였다」라는 주장(主張)이 있으나, 인용(引用) 출처(出處)가 불분명(不分明)하다. 그러나 확실(確實)한 것은, 성씨(姓氏)가 없는 천민(賤民), 노비(奴婢)들이 그 수를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程度)로 많았다는 사실(事實)이다.
오죽하면 : 「일제(日帝)가 반도(半島) 땅의 노비(奴婢)를 해방(解放)시켰다」라는 말이 인구(人口)에 회자(膾炙) 되었을까!
즉(卽), 《일제(日帝)가 AD 1,912年 호적(戶籍) 제도(制度)를 개편(改編)하면서 성씨(姓氏)가 없는 많은 백성(百姓)에게 성씨(姓氏)를 선택(選擇)하도록 하고 이들을 해방(解放)시켰다는 것에 따르면 : 「최소한(最小限) 당시(當時) 전체(全體) 인구(人口)의 40∼50% 이상(以上)이 노비(奴婢)였다」》라는 주장(主張)이 설득력(說得力)이 있다.
여기서 주목(注目)되는 것은, 우리나라 현재(現在)의 성씨(姓氏)의 상위(上位)에 포진(布陣)하고 있는 몇 개 성씨(姓氏)는, “1,912년 호적(戶籍) 개편(改編) 때에 : 성씨(姓氏)가 없었던 백성(百姓)들이 입적(入籍)한 결과(結果)였다”라는 사실(事實)이 이를 간접적(間接的)으로 증명(證明)하고 있다는 사실(事實)이다.
이 땅에서, ‘족보(族譜) 자랑’은 스스로 어리석음을 일깨우는 말이 되는 것이다. 「이 세상(世上)에서 족보(族譜) 장사치들이 한때 떼돈을 벌었다」라는 유일무이(唯一無二)한 나라였다는 사실(事實)이 우리를 서글프게 한다.
㈢ 위의 결과(結果)를 종합(綜合)해 보면 : 『반도(半島) 땅에 반만년(半萬年) 토착(土着) 왕조(王朝)가 영위(營爲) 및 흥망성쇠(興亡盛衰)를 거듭했다』라는 것은, 생각할 수 없다.
「삼국사기(三國史記)·고려사(高麗史)·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동사(東史)·동국지리지(東國地理志) 등등(等等)의 많은 사서(史書)와 사대부(士大夫)들이 기록(記錄)했다는 숫자를 셀 수 없이 많은 개인(個人)의 문집(文集) 등(等)에 비춰보면 : 〈「반도(半島) 땅에 반만년(半萬年)의 역사기록(歷史記錄)은 존재(存在)하지 않는다」라는 것이고, 「토착(土着) 독립(獨立)된 옛 봉건왕조(封建王朝)는 없었다.」〉라는 것이다.
㈣ ‘반도조선왕조(半島朝鮮王朝)’를 주장(主張)하려면 : “식민사학(植民史學)”은, 위에 열거(列擧)된 문맹율(文盲率)과 노비(奴婢)에 대한, 상위(上位) 성씨(姓氏)의 대량분포(大量分包)에 대한 설득력(說得力) 있는 설명(說明)이 먼저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 「반만년(半萬年)을 금수(禽獸)와 다름없는 삶과 문맹(文盲) 백성(百姓)들의 자손(子孫)이요, 성(姓)조차도 갖지 못했던 노비(奴婢)들의 자손(子孫)이라는 오명(汚名)에서 벗어날 길이 없다.」
◇ 다음 편(篇)은, 고고학적(考古學的)인 증거(證據)인 묘지석(墓地石)으로 보는 중원대륙(中原大陸) 토착왕조(土着王朝) 백제(百濟)에 대한 역사해설(歷史解說)을 하고자 합니다. 말로만이 아닌 주장(主張)의 논거(論據)【고고학적(考古學的) 증거(證據)】를 가지고 이에 대하여 : 「반도(半島) 백제(百濟)는 없었다」라는 것을 증명(證明)하려 합니다.
2,026년 03월 20일 [글쓴이 : 문무(文武)]

첫댓글 * "백제(百濟)는 한반도에 없었다"라는 설명은 많은 국민들에게 "민족주의자 또는 국수주의자" 정도로 취급받는 세상이다.
거기다가 "그럼 어쩌라고!" 되묻는 세상이다.
지금처럼 살면 되지... ...뭔 백제타령?
백제가 대륙 땅에 있었으면 뭐 하고, 반도 땅에 있었다면 : 뭐가 달라지나? 한다.
그렇다.
필자와 같은 자들이 고리타분한 것이다.
백제가 중원대륙에 있었다면?
또 이 땅, 반도에 있었다면?
그게 뭐가 중요한가?
대륙 땅에 있었다면 뭘 어쩌려구? 참 할 말이 없는 답변이요, 질문이다.
* 오늘, 지금, 현실이 중요하지 1,500년 전의 이야기를... ....혀를 찬다.
맞는 말이다.
지금 살고 있는 이 땅, 오늘 내가 살아가는 그것이 중요한 것이지... ...그것보다 더 중요한게 뭐가 있나?
* 그런데... ...이 땅에 살고 있는 우리와 같은 국민들인 사학자들은 무엇 때문에 "반도백제"에 그렇게 집착하고 있는 것일까?
"그야 뭐... ...먹고 살기 위한 것이겠지" 한다.
배운 것이 그게밖에 없으니... ...반도백제의 증거를 찾기 위해, 국고를 받기 위해... ...먹고 살아야 하니 말이다.
그렇다.
맞는 말이다. 먹고 사는 문제다.
* "먹고 사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
* 백제(百濟)의 근원을 따지는 사람들은 먹고 사는 것에 초월한 자들인가?
인간이 먹고 사는 것에 초월한다면 : 인간이 아니라 '귀신'이다.
* 사명감일까?
아니면 누구 말처럼 오지랍이 넓은 헛빨짓?
* 그래도 조선사에 조금이나마 관심을 가진 분들이 계시다면 : 필자는 그것으로 족한 것이다.
우리 카페의 회원님!
손님으로 방문하시는 분들!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늘 건강하시길... ...다음 게재는 "중원대륙의 토착왕조 백제"에 관한 고고학적인 유물인 '묘지석의 기록'에 대하여 : '대륙 백제'를 해설해보고자 합니다. 반도사학이 좋아하고 중요시하는(?), 서지적 증거와 고고학적인 증거를 가지고 논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조선은 병자호란 이전 까지는 만주를 관리 하였습니다
그러나 여진족의 반란을 관리 못하는 바람에 여진족이 청을 세우고 처 들어 옴으로서 사실상 만주는 청으로 넘어 갔습니다
그 후 간도 땅만 관리 하다가 일본의 간도 조약으로 만주를 완전 상실 한 겁니다,,,,
고리(고려)시대에는 대륙 반 쪽인 동부 지역을 다스린 것으로 나옵니다
백제가 대륙에 있음을 알고 있어야 우리에 대의명분이 생깁니다
반도 땅만 알고 있으면 고토 회복시에 침략으로 비난 받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