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거운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여러분의 자유로운 생각을 듣고 싶습니다.
이것을 하는 이유는 광개토왕비문의 391년 신묘년조 사건이 일어난 달이 왜 봄 3월인지를 이해하기 위함입니다. 당시 삼한사회의 기본 구조와 관련된 것입니다.
1) 1세기에 한강유역 전체 통치
삼국사기 백제본기를 보면 1세기 초 마한을 멸망시킨 후 온조왕 때부터 국경이 임진강(북)-춘천(동)-웅천(남)-서해(서)라고 하여 한강유역 전체를 통치하고 있습니다. 중국사서가 百濟는 국초에 百家濟海하여 국명을 따왔다고 하고, 신라본기도 기루왕을 백제왕이라고 호칭하고 있어서 국명이 百濟였고 그 통치자를 벡제왕이라고 불렀음이 틀림 없습니다.
2) 3세기에 한강유역 일부 통치
고이왕 때인 3세기 중반의 한반도를 묘사한 삼국지 동이전을 보면 당시 한강유역에는 10여개의 소국이 있었고 백제는 그 중에 1국에 불과합니다. 더군다나 국명도 큰 집을 뜻하는 百濟가 아니라 작은 집을 뜻하는 伯濟입니다. 이는 삼국사기와도 일치하여 백제가 신라에 사신을 보내면 백제의 사신이 왔다고 하지 백제왕의 사신이 왔다고 하지 않습니다. 백제의 사신과 백제왕의 사신은 같습니까 다릅니까? 만일 둘이 다르다면 어떻게 다릅니까? 2~4세기 초고왕~계왕 사이 2백년 동안 백제가 한강변 마한 1국에 불과했다는 것은 당시 동원하는 군사 숫자가 3천명 이하라는 것으로부터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백제는 언제 어떤 계기로 한강유역 전체의 통치권을 상실했습니까?
3) 4세기에 한강유역 전체 통치
근초고왕이 고구려와 전쟁하는 369년을 보면 한강유역에 소국들 따위는 없고 전체를 통치하는데 황해도 남부까지 백제영토입니다. 그러니 고구려가 공격해 내려올만 합니다. 그런데 백제본기를 보면 어디에도 한강유역 정벌 전쟁은 없습니다. 백제는 언제 어떻게 한강유역 전체를 통일하였습니까? 근초고왕 때 동원하는 군사 숫자가 3만명 규모라는 것으로부터도 당시 백제가 한강유역 전체를 통일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백제에서 사신이 오면 백제왕의 사신이 아니라 백제의 사신이라고 하던 삼국사기가, 무려 250년 만에 다시 백제의 사신이 아니라 백제왕의 사신이라고 불러줍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국명이 다시 百濟인데 언제 어떤 이유로 국명이 伯濟에서 百濟로 되돌아왔습니까?
4) 5세기 후반에 금강유역과 영산강유역 통치
근초고왕의 손자인 진사왕이 사냥 갔다가 죽은 구원이 지금의 수원-화성 지역인데 4세기 백제본기에 나오는 남쪽 한계선입니다. 그 남쪽은 삼국사기에 안 나옵니다. 즉 수원이 백제의 남쪽 국경이었는데, 그러면 수원 남쪽에는 무엇이 있었습니까? 문주왕의 475년 웅진천도 때 드디어 삼국사기에 금강유역이 출현하고, 동성왕의 498년 무진주 출병 때 드디어 영산강유역이 출현합니다.
첫댓글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저도 3월이라 생각합니다
반갑습니다. 저하고 결과가 같군요. 392년부터 시작되는 광개토왕의 백제에 대한 공격 원인은 그 전 해인 391년 봄 3월에 발생하였습니다.
그러면 하나만 더 일치하는지 보겠습니다. 369년에 고구려가 최초로 백제를 공격한 전쟁의 원인은 몇 년 몇 월에 발생하였습니까?
4세기 백제가 경기도만 차지하고 충청 전라도를 차지 못했다면 거대한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고국원왕을 전사시키는 등의 전과를 낼수 있는지요 4세기에 백제가 충청 전라도를 영유하고 있지 않다면 장수왕의 한성 함락으로 백제는 웅진으로 천도하기가 불가능 했을 것이지요 자국 영토가 아니고 중앙 정부의 지배력이 확고하지 못한 지역에 천도하기가 쉽겠습니까? 병합된 타지역의 대한 지배력은 몇백년이 지나야 확고한 법이지요 5세기까지만 해도 충청지역이 백제 부여씨 왕조정부의 지배력이 약했다면 본거지인 한성 함락으로 멸망한 백제 지배층을 충청 지역이 받아줄리가 없고 고구려에 넘겨 주었을 것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