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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제6주일
✠ 루카복음 6,17.20-26
오늘 복음의 행복과 불행에 관한 말씀을 마치 우리가 실행해야 하는 것으로 읽을 수 없습니다.
가난해야, 굶주려야, 울어야... 행복할 수 있다는 말로 알아들을 수 없습니다.
오늘의 말씀은 차라리 하느님께서 인간 역사 속에서 어떻게 행하시는가를 말씀해 준다고 보아야 하겠습니다.
옛날 모세를 통해 하느님께서 인간이 행해야할 바를 알려 주셨다면 이제 예수님을 통해 하느님께서 어떻게 행하시는지를 보여줍니다.
"머리둘곳조차 없다."(9,58)하실 만큼 예수님은 가난을 사셨습니다.
몹시 허기지셨고 (4, 2) 우셨습니다. (19,41)
미움받고 거부당하셨으며, 모욕을 받았고(22장 이하의 수난사 참조) 이렇듯 가난한 이와 하나되셨습니다.
그분은 부활로 하느님 나라의 행복을 이루어내시어 모든 고픔을 채워줄 하늘나라의 잔치에, 죽음에 대한 승리의 환호에 당신께 희망을 둔 모든 가난한 이를 불러주십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하늘나라를 위해 가난하고 허기지고 울줄 안다면
"사람의 아들(예수님 = 진리, 선, 정의, 사랑) 때문에 내쫓기고 모욕당하면 "(6,22)
행복합니다. 그분의 부활로 얻어낸 하늘나라의 행복을 맛볼 것이기 때문입니다.
부유하고 배부른 까닭으로 "사람과 인간의 힘에 믿음을 두고 그 마음이 하느님에게서 떠나" (1독서 예레 17,5) 있다면 참으로 불행합니다.
하늘나라의 행복이 무엇인지 결코 알 수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천 사비나 수녀님)
2월16일 [연중 제6주일]
루카 6,17.20-26
행복은 사랑해서 고생하는 것
오늘은 루카 복음의 행복 선언입니다.
그러나 이 행복 선언은 좀처러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예수님은 먼저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불행하여라, 너희 부유한 사람들!”이라고 하십니다.
가난한 사람이 행복하다니 말이 됩니까? 아무리 봐도 세상에 가난한 사람들이 행복해 보이지는
않습니다.
또는 “행복하여라, 지금 굶주리는 사람들! 불행하여라, 너희 지금 배부른 사람들!” 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배고픈 게 행복하다면 음식은 왜 먹어야 할까요?
굶어 죽어가는 사람들을 그러면 도울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행복하여라, 지금 우는 사람들! 행복하여라, 지금 우는 사람들!”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왜 우느냐면, 예수님의 “사람의 아들 때문에 너희를 쫓아내고 모욕하고 중상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라는 말씀대로 박해받고 모욕과 중상을 받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이 말씀은 ‘사랑’을 개입시키면 아주 잘 이해가 됩니다.
사랑하면 가난해지고, 굶주리게 되고, 겸손해지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사랑해서 고생하는 게 행복’이란 뜻입니다.
100세를 넘기고도 활발한 활동을 하신 김형석 전 연세대 교수가 내린 행복론의 결론입니다.
‘어린 왕자’는 작은 자신의 별에 꽃이 한 송이 피어난 것을 발견합니다.
어린 왕자는 그것을 위해서 가난해집니다.
자기 모든 에너지를 그 꽃을 보호하기 위해 쏟아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먹이려고 배고파지고, 그것의 짜증을 다 받아내며 슬프고 겸손해져야 했습니다.
그러다 도저히 참지 못하고 그 꽃이 피어있는 자기 별을 떠납니다.
여행하던 중에 각자 행복을 추구하는 많은 사람들을 만납니다.
자기 별에서 혼자 왕 노릇을 하는 사람, 자신에게 칭찬해 주고 손뼉 쳐 주기를 바라는 허풍쟁이, 세상 고통을 잊으려 온종일 술만 마시는 술꾼, 돈만 아는 사업가, 의미 없이 혼자 사는 별에서 일만 하는 가로등 켜는 사람, 지식을 뽐내는 지리학자 등입니다.
이들은 부자이고 배부르고 인정받습니다.
그러나 외로워 보입니다.
지구에 내려온 어린 왕자는 비행기 조종사와 사막여우를 만나 우정을 싹틔웁니다.
사막여우는 관계를 위해 큰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그리고 그 관계가 깊어질 때 그 노력이 무색할 정도의 기쁨을 맛볼 수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이 경험을 통해 자신의 별에 있는 자기를 괴롭혔던, 그 사랑스러운 꽃 한 송이를 다시 기억합니다.
어린 왕자는 비록 가난해지고, 배고프고, 멸시의 대상이 될 수 있지만, 참 행복은 그것을 쏟을 수 있는 사랑하는 누군가가 존재함임을 깨닫고 다시 죽음으로 나아갑니다.
그러니 관계에서 오는 행복을 안다면 참행복은 ‘사랑해서 십자가를 지는 것’임을 알게 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가난해지셨습니다. 하느님의 지위를 내려놓으시고 한 인간으로서
사시기를 선택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 사랑으로 변화됩니다.
안젤로라는 의사 선생님은 학생 때 삶의 의미를 발견하지 못해 힘들어했습니다.
성령 안수 기도를 받는 중에 가난한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분의 뚫어진 손과 찔린 가시관이 곧 자신 때문에 가난해진 예수님임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것으로 예수님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저에게 예수님은 저의 배를 불리시는 분이셨습니다.
말씀을 깨닫고 싶었고 하느님이 저를 사랑하심을
느끼고 싶었습니다.
하느님은 어쩔 수 없이 양식을 내어놓으셨습니다. 어머니의 배를 채워야 할 젖을 아기에게 주는 것과 같습니다.
저는 그 양식을 먹으며 배가 부르게 되었습니다.
“그래, 너 나에게 많이 주었니? 난 네게 다 주었다.” 이런 행복을 추구하시는 분이 그리스도이셨고, 그 행복에 우리를 초대하고 계신 것입니다.
배불리려면 배고파져야 합니다.
마더 데레사는 수많은 배를 곯는 사람들 앞에서 항상 배가 고플 수밖에 없었고 그것이 행복임을 알았기에 행복하셨습니다.
김희아 씨에게 나타나신 예수님은 어떠실까요? 희아 씨는 모반 때문에 부모에게 버려지고 친구들에게 괴물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래서 손이 지우개가 되게 해 달라며 자기 얼굴이 까지도록 문지르셨습니다.
이때 예수님이 보였습니다.
자신보다 더 슬피 우시는 예수님을. 그분이 나의 처지를 위해 울어주시지 않으셨다면, 우리가 어떻게 그분이 우리를 덮어주기 위해 세상에 오셨음을 믿게 될 수 있을까요?
모든 순교자들은 이 세상의 지위를 버리고 그리스도 때문에 고통과 멸시를 선택하신 분들이었습니다.
어떤 강의에서 이런 내용을 들었습니다.
사랑을 배우게 하기 위해서는 우선 작은 십자가를 질 줄 아는 것부터 배우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일단 어린아이에게 햄스터를 한 마리 선물해 줍니다.
그 햄스터는 너무나 사랑스럽습니다. 정성을 다해 먹를 주고 아프지 않도록 보살펴 주었습니다.
사랑하면 십자가를 지는 것은 당연합니다.
하지만 햄스터의 평균 수명은 2~3년입니다.
금방 죽습니다.
이때 아이는 큰 상처를 받습니다.
부모는 “또 햄스터 키울 거니?”라고 묻습니다. 아이는 울면서 절대 안 키운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1~2년 지나면 또 키우고 싶다고 말합니다.
이번에 아이가 햄스터를 대하는 방식은 조금
다릅니다.
이제 내가 열심히 해 주어도 햄스터가 곧 죽을 것을 압니다.
그래도 열심히 행복하게 살게 해 줍니다.
사랑을 위한 자기희생만이 사랑하지 않는 것보다 행복함을 알기 때문입니다.
언젠가 ‘추적 60’분이란 프로그램에서 오토바이 교통사고로 사망한 한 사제의 이야기가 방영된 적이 있었습니다.
오토바이를 탄 한 학생이 건널목을 건너는 신부님을 치어 사망하게 했습니다.
교구에서는 신부님이 살아 계셨더라면 그 학생을 용서했을 것이라며 학생이 감옥에 가지 않도록 배려했습니다.
그 신부님의 유품을 정리하던 중 찾아낸 물건이라고는 낡은 라디오 하나가 전부였습니다.
통장에도 적은 돈이 있었지만, 그것은 안 받으려던 강의료를 억지로 받아서 나중에 학생들에게 한꺼번에 선물하려고 모아놓으신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실제로 당신을 위한 재산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이 이야기가 매스컴에 보도되었고 세상 사람들은 사제의 그런 가난한 모습에 감동했습니다.
왜일까요? 느닷없이 준비도 못 하고 돌아가셨는데도 가난했기 때문입니다.
가난했다는 것은 그만큼 많이 베풀었다는 증거입니다.
그리고 그만큼 행복했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선택의 갈림길에 섭니다. 사랑해서 고생하는 행복을 추구할 것인지, 사랑 없이 편한 삶을 선택할 것인지.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2월16일 [연중 제6주일]
복음: 루카 6,17.20-26
참된 행복은 축척을 통해서가 아니라 버림을 통해서 옵니다!
얼굴을 보아하니 ‘이 세상에서 나처럼 불행한 사람 있으면 나와 보라!’는 표정으로 살아가는 분이 계십니다.
그런데 하시는 말씀을 가만히 들어보니, 그 정도면 이 혹독한 세상에서 꽤 괜찮은 편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습니다.
자신의 삶에 대한 기대치가 너무 높기에 그리도 불행한 삶을 살아가며, 살아생전 연옥체험을 하고 계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반대로 제가 보기에도 ‘정말이지 하느님께서도 너무하시지?
정말 하느님이 계시긴 한 건가?’ 할 정도로 힘겹고 참담한 삶을 살아가시는 분인데도 불구하고
그 얼굴은 ‘이 세상에서 나처럼 행복한 사람 있으면 나와 보라 그래!’하는 얼굴이었습니다.
저는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
‘행복과 불행은 참으로 상대적인 것이로구나!’ 하는 것을 말입니다.
그래서 떠오른 한 가지 생각, 그리 길지도 않은 우리 인생, 너무 그렇게 심각한 얼굴로 살아가지 말아야겠다는 것입니다.
너무 그렇게 사소한 일에 핏대까지 올리며 아등바등 살아가지 말아야겠다는 것입니다.
그 대신 어쩔 수 없이 제한된 우리네 인생 안에서 하루하루 가급적 만족하고 살려고 노력하며
작은 것에서 기쁨을 찾아야겠습니다.
사실 우리네 인간의 삶, 뭐 그리 대단히 기대할 것도 없습니다.
기를 쓰고 올라가 봐야 그 끝에 대체 뭐 그리 대단한 것이 있겠습니까?
수백 수천억을 모아봐야 그것이 우리의 행복을 보장해주지는 않는다는 것을 깨달아야겠습니다.
내 가장 가까운 사람들, 가족들, 동료들, 친구들과 일상 안에서 나누는 사소한 기쁨, 사실 그것보다 큰 행복은 찾기가 힘듭니다.
함께 걸어가는 이웃이 자신의 상처와 한계를 극복하고 당당히 자신의 길을 걸어가는 모습을 본다는 것, 그것처럼 제게 있어 큰 행복은 다시 또 없었습니다.
행복과 관련해서 지금에야 깨닫는 바가 한 가지 있습니다.
우리네 삶 가운데 행복의 순간은 의외로 많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행복의 씨앗은 우리의 일상생활 속에 깊이 숨어있는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많은 경우 행복은 결핍 가운데, 부족함 가운데, 시련이나 역경 가운데 숨어있다는 것입니다.
언젠가 한 공동체를 방문할 때였습니다. 감사하지만 부담스러운 극진한 환대가 매일 계속되었습니다.
매 끼니가 상다리가 부러질 정도였습니다.
매일 저녁 밤늦은 시간까지 성대한 파티가 계속되었습니다.
먹고 또 먹고, 마시고 또 마시고...그 대신 운동량은 지극히 제한적이었습니다.
한 일주일 정도 반복되니 세상에 지옥이 따로 없었습니다.
반대로 바쁜 일이 있어 본의 아니게 몇 끼니를 건너뛰었습니다.
이윽고 촉각을 다투는 일들을 대충 마무리 짓고 나니 너무나 배가 고팠습니다.
가까운 순대국밥 집에 가서 김이 무럭무럭 나는 8천원짜리 순대국밥 한 그릇을 마주 대하니
너무나 행복해서 눈물이 다 나왔습니다.
우리가 매일 느끼는 결핍, 갈증, 배고픔, 부족함, 피곤함, 외로움, 슬픔...이런 요소들이 사실은
행복의 원천이라는 사실을 잘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오늘 우리가 지니고있는 행복에 대한 개념, 곰곰이 한번 되새김질해보면 좋겠습니다.
가난한 사람들, 슬퍼하는 사람들, 박해받는 사람들이 행복하다는 예수님의 말씀도 곁들여
묵상해보면 좋겠습니다.
산에 오르신 예수님께서는 군중들을 향해 장엄한 어조로 행복의 길을 선포하십니다.
천국에 오르는 길을 아주 쉽고도 명료하게 가르치고 계십니다.
천국에 이르는 길은 소유가 아니라 가난임을, 창이나 칼이 아니라 사랑과 자비임을 선포하십니다.
참된 행복은 축척을 통해서가 아니라 버림을 통해서 온다는 것, 참된 기쁨은 올라감이 아니라
내려섬을 통해서 온다는 것을 설파하십니다.
비록 죄인이고 너무나 보잘 것 없고 비참한 우리라 할지라도, 하느님께서 언제나 굳건히 내 안에 자리하시고 내 인생을 동반해주시니 깊이 감사드려야 하겠습니다.
부족하고 부끄럽더라도 나를 소중하게 여기고, 내 인생에 가치를 부여하고, 있는 그대로의 나를 사랑하고, 매 순간을 감사하면서 충만하게 살아가려고 노력한다면 어느새 행복은 우리 손안에 들어와 있을 것입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연중 제6주일 강론>
(2025. 2. 16.)(루카 6,17.20-26)
<‘행복론’이 아니라 ‘구원론’입니다.>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하느님의 나라가 너희 것이다.
행복하여라, 지금 굶주리는 사람들! 너희는 배부르게 될 것이다. 행복하여라, 지금 우는 사람들! 너희는 웃게 될 것이다.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면, 그리고 사람의 아들
때문에 너희를 쫓아내고 모욕하고 중상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그날에 기뻐하고 뛰놀아라. 보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사실 그들의 조상들도 예언자들을 그렇게 대하였다.
그러나 불행하여라, 너희 부유한 사람들! 너희는
이미 위로를 받았다. 불행하여라, 너희 지금 배부른 사람들! 너희는 굶주리게 될 것이다. 불행하여라, 지금 웃는 사람들! 너희는 슬퍼하며 울게 될 것이다.
모든 사람이 너희를 좋게 말하면, 너희는 불행하다! 사실 그들의 조상들도 거짓 예언자들을 그렇게 대하였다(루카 6,20-26).”
1) 이 말씀의 ‘행복’은 구원받은 사람들이 누리게 될 영원한 기쁨과 영원한 행복을 가리키는 말이고, ‘불행’은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이 당하게 될 심판과 멸망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따라서 이 말씀은, ‘행복론’이 아니라 ‘구원론’입니다.
<‘어떻게 하면 행복을 얻는가?’에 관한 가르침이 아니라, ‘어떻게 해야 구원받는가?’에 관한 가르침이라는 것입니다.>
2) 루카복음 16장에 있는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는 이 말씀을 생생하게 설명해 주는 비유입니다.
그 비유에 나오는 ‘라자로’는 아주 가난했고, 날마다 굶주렸고, 그리고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면서 날마다 울었을 것이고, 사람들로부터(나쁜 부자들로부터) 무시당하고 모욕당하면서 살았을 것입니다.
반대로, 그 비유에 나오는 ‘부자’는 날마다 즐겁고 호화롭게 살았습니다(루카 16,19).
그는 배고픔이 무엇인지도 몰랐을 것이고, 날마다 웃으면서 살았고, 주변 사람들의 아첨에 취해서 살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두 사람의 처지는 저승에서 정반대로 바뀌게 됩니다.
“부자가 저승에서 고통을 받으며 눈을 드니,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곁에 있는 라자로가 보였다.
그래서 그가 소리를 질러 말하였다. ‘아브라함 할아버지,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라자로를 보내시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제 혀를 식히게 해 주십시오.
제가 이 불길 속에서 고초를 겪고 있습니다.’
그러자 아브라함이 말하였다.
‘얘야, 너는 살아 있는 동안에 좋은 것들을 받았고 라자로는 나쁜 것들을 받았음을 기억하여라. 그래서 그는 이제 여기에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초를 겪는 것이다.
게다가 우리와 너희 사이에는 큰 구렁이 가로놓여 있어, 여기에서 너희 쪽으로 건너가려 해도 갈 수 없고 거기에서 우리 쪽으로 건너오려 해도 올 수 없다.’(루카 16,23-26)”
3) 저승에 있는 ‘큰 구렁’은, 한 번 심판이 이루어지면 번복되지 않는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전능하신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에 변경과 취소는 없습니다.
그런데 사실 그 ‘큰 구렁’은 이승에서 이미 부자 자신이 만든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부자들과 가난한 사람들 사이를 막고 있는 ‘큰 구렁’은, 가난한 사람들의 힘으로는 도저히 건너갈 수도 없고 극복할 수도 없는 ‘현실적인 장벽’입니다.
이승에 있는 그 장벽은, 또는 그 ‘큰 구렁’은 부자들이 만든 것이고, 그것을 없애는 것은 부자들 자신들이 할 일입니다.
4) ‘가난’과 ‘굶주림’이 행복의 원인이 될 수는 없지만, 하느님 나라를 갈망하게 만드는 힘으로 작용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하느님의 나라가 너희 것이다.” 라는 말씀은, “지금 가난하더라도 좌절하지 않고, 또 재물에 눈을 돌리지 않고 하느님 나라만 추구하는 사람은
그 나라를 차지할 것이다.” 라는 뜻입니다.
‘라자로’가 가난하다는 이유만으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간 것이 아니라, 착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 나라에 들어간 것처럼, 단순히 가난하다는 이유만으로 구원을 받는 것은 아니고, 하느님 뜻에 합당하게, 의롭게 살아야 그 나라에 들어갑니다.
<가난하기 때문에 더 탐욕에 사로잡히는 경우도 있습니다.>
5) ‘부유함’은 그 자체가 ‘구원’을 방해하는 걸림돌이 됩니다.
사람들 중에는 “부자로 사는 것 자체가 죄는 아니다.
착한 부자도 많다.” 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런 주장을 하기 전에 먼저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더 쉽다(루카 18,25).” 라는
예수님 말씀을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 교회의 성인 성녀들 가운데에는 ‘부자였던’ 분들이 분명히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부자인 채로’ 성인품에 오른 분들은 없습니다.
인간적으로만 보면 ‘착한 부자’로 보이는 사람들이 있긴 한데, 예수님의 기준으로도 과연 ‘의인’으로 인정받을 수 있을지는 좀 더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착한 부자’ 라는 칭찬과 존경을 받는 것에 취하면
금방 교만해지고 위선자가 됩니다.
그것보다 더 큰 문제는 ‘부유함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부유함을 유지하려고 애쓸 때, 그것이 악한 일이 아니고, 죄가 되는 일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마음이 이미 재물 쪽으로 기울어져 있는 상태가 되어버리기 때문에 그만큼 하느님에게서 멀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받는 방법’을 묻는 부자에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어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루카 18,22).” 라는 말씀은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살아 있는 말씀’입니다.
<지금 부유하든지 가난하든지 간에, 누구든지 재물에 대한 애착심을 버리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