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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12주일설교 시편57:1-11(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본문: 시편57:1-11
제목: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오늘은 시편57:1-11의 말씀을 가지고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오늘 말씀 제목이 무엇입니까?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오늘 시편은 다윗의 믹담 시라고 되어 있습니다.
믹담이라는 말은 “속죄의 송가”라는 뜻입니다.
시편16편과 지난주부터 나누고 나누게 될
56-60편까지를 그렇게 부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인도자를 따라 “알다스헷”에
맞춘 노래라고 되어 있습니다.
“알다스헷”은 음악적인 곡조를 말합니다.
이 말은 “멸하지 마옵소서”라는 곡조입니다.
이 곡조의 배경은 신명기9:25-26절입니다.
모세가 하나님께 계명을 받으러
시내산에 올라 40일 동안 있었습니다.
그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가 보이지 않자
불안하여 아론에게 자신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신을 만들어 내라고 난리를 치게 됩니다.
그때 아론은 금송아지를 만들어 그들 앞에 놓고
그것이 애굽에서 인도여 낸 신이라고 하자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것을 섬기는
광란의 축제를 벌이게 됩니다.
그런 모습을 보고 여호와께서 진노하사
그들을 멸하시겠다고 합니다.
그 말씀을 들은 모세는 간구하여 속량해 달라고 구하며
멸하지 말아 달라고 구합니다.
왜 그렇게 기도합니까?
만일 이스라엘 백성 자신들이 망하면
애굽사람들이 여호와 하나님에 대해서
무엇이라고 하겠냐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도할 능력도 없으면서 인도해서
광야에서 죽게 했다고 여호와께서 욕을 먹을 것이
분명하기에 그렇게 기도했던 것입니다.
다윗도 그러한 심정으로 그러한 상황을 염두에 두고
부른 노래가 알다스헷의 곡조에 붙여 부르는 노래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룰 때까지
멸하지 말아 달라고 기도한 것입니다.
여호와께서는 다윗을 목동에서 불러
왕으로 기름 부어 세우셨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사울에게 쫓겨
죽을 지경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도대체 이해할 수 없습니다.
기름부어 세울 때는 언제고
지금을 죽을 상황에 처하게 하다니
이해할 수 없고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면서 생각되는 것이 무엇입니다.
뭐 하려고 기름 부어 세우시고
이렇게 죽을 상황에 부닥치게 하시는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기도하고 있습니다.
기도는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기도합니다.
자신을 불쌍히 여기시어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살려달라고 간구합니다.
물론 하나님은 죄의 대가에 따라
징계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멸하시는 분은 아닙니다.
여호와께서는 성경에서 많이 말씀하시는 것은
다 멸하지 않는다는 하십니다.
이사야65:8을 보면 “포도송이에 즙이 있으므로
---다 멸하지 아니하고”라고 말씀하십니다.
포도나무는 이스라엘을 상징합니다.
하나님의 택한 백성을 상징합니다.
이사야는 포도비유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최고의 것을 주고
최고의 조건을 갖추어 주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어떤 열매를 맺었습니까?
그들은 들포도를 맺었습니다.
쓸모없는 존재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멸망시킨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포도즙이 있으므로
다 멸하지 아니하였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이 잘못해서 그들의 나무를 베어 버리셨지만
그루터기를 남겨 두셨다고 말씀하십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자비하심입니다.
만일 하나님의 자비심이 없었다면
다 멸망 당해도 할 말이 없는 존재들이었습니다.
뿌리 채 뽑혀도 할 말이 없지만
그루터기를 남겨 두어서 다시 살아나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하나님이십니다.
참으로 보잘것없어도 우리 가운데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습이 하나라도 있으면
그것을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고
구원해 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렇게 찾고 찾으십니다.
소돔과 고모라는 멸하시려 하셨던 여호와 하나님은
그 멸망 받을 자들 가운데
구원할 자를 찾고 찾으셨습니다.
그래서 롯과 그의 가족을 구원하셨고
홍수로 세상을 멸망을 시키면서도
그 중에서 아론의 가족을 구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서 포도즙을 발견하시려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조금이라도 있는지 찾으십니다.
우리 가운데 하나님을 향한 선한 것이 있는지 찾으십니다.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이 있는지 찾으십니다.
오늘도 우리에게서 찾으십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어떻게 하든지 우리에게서 살려줄 뭐가 있는지
살피고 살피십니다.
왜 찾으십니까?
어떻게 하면 살려 주실까 찾으십니다.
그렇기에 하루를 천년같이 우리를 기다리고
천년을 하루같이 우리를 구하십니다.
하나님이 기다리지 않는다면
우리는 죽고 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붙잡아 주지 않는다면
우리는 멸망하고 맙니다.
그런 하나님을 아는 자는
하나님께 불쌍히 여기어 달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런 마음을 가지고 드린 기도가 오늘
시편 57편의 기도입니다.
불쌍히 여기어 주소서!(1절)
오늘 시편의 기도는 다윗이 사울을 피하여
굴에 있을 때 지은 시입니다.
굴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곳입니다.
그저 두려움 속에 아무것도 못하는 상황입니다.
발각되면 어디로 피할 수 없이
죽어야 하는 상황입니다.
자기로서는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두려울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긍휼함을 아는 다윗이었기에
오직 하나님께 긍휼히 여기어 달라는
기도밖에 다른 것을 할 수 없었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긍휼의 날개만을 바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긍휼밖에는 없기에
그렇게 기도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그 상황이 절실하겠습니까?
그래서 지존자 주님께 호소합니다.
주님의 크신 능력을 나타내 달라고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이라면
그런 상황 속에 다윗처럼 기도해야 합니다.
모든 일이 잘될 때는
모든 것을 다 예측할 수 있고 준비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기대할 수 있고 소망할 수 있습니다.
그런 때는 자신이 뭔가 해서 잘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가슴 뿌듯하고 행복해 보일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지금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잠잠히 있어야 합니다.
쥐 죽은 듯이 가만히 있어야 합니다.
조금이라도 부스럭거리면 끝장나는 상황입니다.
그래서 당신께 온전히 의탁한다고 말하고 있고
하나님께서 날 감싸서 이 고난의 시기를
건너게 해 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일을 완벽하게 이루실 분이기 때문에
이렇게 기도하고 있습니다.
나를 삼키려는 무리를 하나님이 도와주시어
나를 삼키지 못하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내게 하나님의 사랑을 베풀어주시어
나를 해하는 완악한 자들을 좌절케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하나님은 합력해서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입니다.
지금의 상황을 통해서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상황을 통해서
하나님은 선을 이룰 수 있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모세도 부르셨고
다윗도 부르시고 아브라함도 부르셔서 선을 이루십니다.
구원은 하늘에서 옵니다.
사람에게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한번 부르셨으면
끝까지 책임지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나를 부르셨으면
뜻하신 걸 끝까지 이루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나를 지키시는 하나님은 내가 할 수 없는 일을
하나님은 인자로 충실히 이행하시기 위해
진리를 보내십니다.
여기서 진리는 어떤 상황이라도 흔들리지 않는
그런 우리의 신념일 수 있고 원칙일 수 있습니다.
타협해서 안 되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중심이 흔들리지 않는 그런 법이 자리 잡아야 합니다.
우리는 상황에 따라 원칙이 바뀌는 경우가 많습니다.
또 때로는 원칙을 희생하기도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자리를 지키기 위해서
그리고 그 자리를 모면하기 위해서 그렇습니다.
지금 다윗은 이런 상황 속에서
초조하고 불안하고 죽음의 위협 속에
갈팡질팡하고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기 위해서 기도합니다.
그런 마음이 올라올 때 기도합니다.
자신의 마음에 하나님의 진리가 자리 잡게
원칙이 자리 잡게, 말씀이 자리 잡게
그리고 그 원칙이 어떤 상황에도
변하지 않아야 할 것이 있음을 알게 기도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울은 어떻게 살았습니까?
상황에 따라 달라졌습니다.
두려울 때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물질이 필요할 때는 사람들의 말이나
자신의 욕심을 따라 살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를 움직인 것이 아니라
어느 때는 말씀을 따랐지만
어느 때는 자신의 욕심과 사람들의 말을 따랐습니다.
왜 사울에게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요?
그에게는 원칙이 없었습니다.
그에 반해 다윗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사울을 죽일 수 있는 기회가 여러 번 있었습니다.
하지만 왜 죽이지 않았습니까?
원칙 때문에 죽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름부어 세운 종을
자신의 손으로 해할 수 없다는 원칙이
사울을 죽이지 않도록 했습니다.
그렇기에 자신이 그 자리에 있었다는 표식을 하기 위해
굴에 들어온 사울의 옷자락을 조금 자른 것만 가지고도
회개하고 슬퍼하였던 자가 다윗이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에게 주님이 주신 원칙
말씀의 원칙이 있었기에 그렇게 할 수 있었습니다.
그것이 진리입니다.
어떤 상황에도 변하지 않는 것
그것이 그의 마음에 있기를 기도했습니다.
우리에게 그런 진실이 있습니까?
어떤 상황에도 변하지 않는
그런 진리가 여러분의 삶을 주관하고 있습니까?
어떤 사람들을 보면 신앙적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자신의 문제만 결부가 되면
전혀 다른 사람이 됩니다.
다른 사람이 볼 때는 신앙인 같은데
가족들에게는 전혀 신앙인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그에게 진리는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말씀일까요?
사람들의 눈일까요?
하나님께서 슬퍼하시는 것은
우리에게 그런 진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랑이 없다는 것입니다.
어떤 상황에도 변하지 않는
하나님이 주신 진리가 여러분을 주관하고 있는지
그것을 하나님은 찾고 있습니다.
왜 수많은 교회가 있고
왜 수많은 성도가 있지만
이 세상이 점점 더 어두워가고 악해질까요?
이런 지식이 우리를 주관한다면
그렇게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기도하고 있습니다.
당신의 사랑을 베풀어 달라고 합니다.
그 사랑이 무엇입니까?
어떤 구체적 행동이 아닙니다.
나에게 인자와 진리를 보내달라고 합니다.
문제는 우리에게 그런 인자와 진리가 없어서
문제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에게 그런 것이 없음을 하나님은 아파하십니다.
사울이 왜 막살았을까요?
그것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그에게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없고
하나님의 사랑도 없습니다.
어떻게 이스라엘 왕이 그럴 수 있습니까?
어떻게 목사가 장로가 집사가 권사가 그럴 수 있습니까?
잊었으니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법을 잊어버리고
하나님의 진리와 사랑을 버렸으니 그렇게 사는 것입니다.
그러니 다윗을 원수라고 생각하고 창 던지고
죽이겠다고 쫓아다녔던 사울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이 구원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을 알아야 구원받은 자로 살게 됩니다.
그것을 잃어버리면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히는 자로 살게 됩니다.
그래서 먹이는 노리는 사자가 되고 창과 칼을 가지고
사람을 해하려고 노력하게 됩니다.
그것이 사울에게 보여지고
다윗은 그렇게 하지 않으려고
기도하고 하나님 앞에 있으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5절에 이렇게 기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여 주는 하늘 위에 높이 들리며
주의 영광이 온 세계 위에 높아지기를 원하나이다.
“주님의 위엄 하늘보다 높사오니
주의 영광 세상 만민 두루 비추소서”
7절에도 이렇게 기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여 내I 마음이 확정되었고
내 마음이 확정되었사오니
내가 노래하고 내가 찬송하리이다”
주님이 계시니 무엇이 위험하랴?
마음은 참으로 평안하구나
내 마음 주님의 자비를 새기며
입 열어 주님을 찬송합니다.
그래서 다윗은 어떤 삶을 살았습니까?
하나님께 욕을 돌리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았습니다.
우리는 삶을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 하나님을 믿는 자들이 살아야 할 모습입니다.
자녀로서 진정한 삶은 부모에게 기쁨을 드리는 삶입니다.
어떻게 그렇게 살 수 있습니까?
부모의 뜻을 높이며 사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하나님에게 찬송을 드리기 위해서
하나님을 높이 들려주셔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면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된 길입니다.
주의 영광이 온 세계 위에 높아지길 원한다면
하나님의 말씀이 하나님의 진리가
우리의 삶 속에 이룩되어야 합니다.
시편57편은 5절과 11절이 같은 구절입니다.
찬송의 후렴구처럼 사용되고 있습니다.
찬송에서 왜 후렴구가 있습니까?
자주 불려야 할 만큼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주님께 영광을 돌려 드린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다윗의 기도가 무엇입니까?
나를 불러 주셨으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게 해 달라고 합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주님의 뜻을 이루는 것입니다.
나의 삶을 통해서 주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십자가를 지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굴속에 비참하게 숨어 있는 다윗이
어떻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단 말입니까?
다윗이 굴에 있으면서 무엇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습니까?
다윗이 굴에 있으면서 하나님께
영광 드릴 만한 것이 무엇이 있나요?
아무리 생각해도 별수가 없는 것은 아닌가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에서
무슨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것입니까?
그런데 여기에 아주 중요한 부분이 있습니다.
우리가 이것을 잘 이해해야 합니다.
다윗이 그 상황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진리를 구한 그 마음대로
그 말씀대로 그 마음에 하나님을 따라 행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슨 이야기인지 잘 이해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은 내가 막 북치고 장구치고
그래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드리는 방법도 있습니다.
내 마음 가운데 죄짓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품성을 갖게 되는 것 다시 말해 어떤 상황 가운데서라도 그 중심에 흔들리지 않는 그 마음 하나님께 향한 마음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7절에 무엇이라고 외칩니까?
“내 마음이 확정되었사오니”라고
그렇게 이야기한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여러분의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 그 신앙이 있습니까?
그 어떤 상황에서라도 거짓을 말하지 아니합니까?
또 죄를 짓지 않고, 미워하고 보복하지 않고
말씀의 중심의 삶을 살고 있습니까?
이렇게 사는 것이 바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것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그저 말로 하나님께 영광 영광할 수도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아무도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그리고 보이지 않는 내 마음속에서
내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진실하심을
그 진리를 내 마음에 품을 수 있을 때 가능합니다.
또한 다윗처럼 어쩔 수 없는 상황 속에서
그곳이 비록 굴일지라도
하나님의 날개 아래 피하는 마음으로
그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찾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바로 그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높여드리는 일임을
다윗은 그렇게 지금 여기 시편에서 고백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삶을 살고 있습니까?
어떻게 돌리고 있습니까?
나는 가진 것도 없고 할 것도 없어서
하나님께 영광 돌릴 수 없다고 하시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누구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습니다.
지금 여러분의 자리에서
지금 여러분이 사는 삶의 모습을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주신
진리 사랑 말씀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어떤 상황일지라도 어떤 일이 있어도
그 진리 사랑 말씀을 따라 사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다른 사람에게
하나님의 살아 있음을 드러내는 것
그러한 태도로 다른 사람을 대할 때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십니다.
저와 여러분이 오늘이라는 삶 가운데
우리의 삶을 통해서
우리 중심에 있는 말씀을 따르는 진실함을 통해서
사람을 대하고 행동하여
하나님의 이름이 높임을 받으시게 되는
삶이기를 간절히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