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들어가는 말
남송시대를 대표하는 두 학자인 주자와 육상산은 동시대 사람이자 똑같이 공맹의 유학사상을 계승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사상과 인간관은 상반된다. 그리고 이들의 이런 상반되는 인간관은 세계관과 수양방법의 차이에서 비롯되었다. 그러나 내 개인적으로 이런 차이점 외면적 이해의 차이에서 오는 것일 뿐 내면적 이해에서는 같다고 본다. 이 글에서는 이런 외면적 차이를 서양철학자인 칸트와 헤겔과 비교하고 동시에 이들 안에서 공통점을 찾음으로서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위대한 사상가들이 추구했던 인간관은 무엇인지를 고찰해보도록 하겠다.
이런 동서양의 사상가를 비교하는 방식은 단점과 장점을 모두 가지고 있다. 단점은 시대와 장소가 전혀 다른 철학자들의 사상을 연관시키는 것은 무리한 끼워 맞추기 식의 연관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 단점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비교는 동,서양의 철학방법의 단점을 보완해 줄 수 있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 일찍이 동양의 노자(老子)는 “道可道非常道, 名可名非常名” -도는 말할 수 있다면 항구 불변의 도가 아니며, 이름은 이름할 수 있다면 항구 불변의 이름이 아니다.-는 말을 통해 언어의 한계를 제시하고 깨달음을 강조했다. 이에 반해 서양에서는 아리스토텔레스 이후부터 논리학이 발전하면서 모든 것을 언어로 표현하려고 노력했었다. 따라서 동양의 사상은 심오하나 깨달은 자가 적고, 서양은 사상은 논리적이나 언어적으로만 이해될 뿐이지 인간 내면의 깨달음을 제시할 수 없는 경우가 많다. 이런 서로의 단점을 보완하여 과연 주자와 육상산이 말하려 했던 것이 무엇인지 좀 더 깊이 접근하고 아울러 칸트와 헤겔에 대한 이해도 진일보할 수 있을 것이다.
Ⅱ. 세계관의 차이
1. 객관적 관념론 - 주자와 헤겔
* 理(太極)는 形而上, 氣(陰陽)는 形而下 - 주자
주자의 세계관은 理 중심의 세계관으로 이해된다. 주렴계는 [태극도설]에서 무극과 태극, 음양, 오행, 팔괘 등을 제시하였다. 또한 이정(二程)형제는 주역의 “한번 음하고 한 번 양하는 것을 일컬어 도라 한다.(一陰一陽之謂道)”는 말을 통해 道를 형이상자(形而上者)라 하고 陰陽으로 나타나는 氣를 형이하자(形而下者)라 하였다. 주자를 이들의 사상을 계승해 태극을 理라하고 陰陽을 氣라 하였다. 그리하여 理를 사물의 근본이라고 주장하였다.
주자는 理가 氣보다 먼저 존재하여 형상으로 나타나는 氣를 가진 사물에 이를 내재시킨다고 주장하였다. 주자는 “천지가 있기 전에는 필경 理만 있었을 뿐이다. 이같은 理가 있기에 이같은 천지가 있다. 만일 이러한 理가 없다면 이러한 천지도 없고, 사람과 사물도 없으며, 그 어떤 것도 있을 수 없게 될 것이다. 理가 있으므로 氣가 있고, 氣가 유행하여 만물을 발육시킨다.”. [송명성리학] P 242
라고 말했다. 또한 그는 理와 氣의 관계를 말 타는 사람과 말로 비유하여 理는 형상이 없고 움직이지 않으나 말과 같은 氣를 조종하는 것처럼 사물의 운동의 핵심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이런 이가 천지를 움직이는 정신이라 하여 “천지에 하나의 법칙이 잇고 질서가 있다는 것은, 곧 천지에 정신이 있다는 증거이다.”라고 말했다.
* 절대이념은 자연을 통해 자신을 발현시킴 - 헤겔
이러 주자의 세계관은 정신적인 것이 물질적인 것보다 시간적으로 먼저 있으며 전자가 후자 안에 내재하여 후자를 움직인다는 면에서 헤겔과 유사점을 갖는다. 헤겔은 처음에 절대이념이라는 것이 관념으로만 존재한다고 보았다. 이런 상태를 즉자적인 상태라 한다. 이런 즉자적인 절대이념은 자신을 발현시키고자 자연을 창조하고 자연 안에 내재하여 움직인다. 이것이 대자적인 존재이다. 그리고 절대이념이 발현된 자연의 정점에 인간이 존재한다. 인간 안에 존재하는 절대이념은 관념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의 대립에서 통일을 지향하고 이런 지향은 양자의 통일성을 띄게 되어 유기체적인 것(생명적인 것으로) 탈각한다. 즉 양자는 이념 안에서 통일되어 즉자대자적인 존재가 된다.
2. 현상은 대립하여 진일보한다.
* 陰陽의 대립 - 주자
주돈이의 [태극도설]을 계승하여 음양을 현상이고 태극을 실체로 해석한 주자는 음양의 대립 역시 받아들인다. 음양의 대립은 고대 중국에서부터 존재하였었다. [주역]에서는 “한번은 음이 되고 한 번은 양이 되는 것을 도라 한다”라고 말했다. 주돈이는 태극도설에서 “태극의 움직임이 양을 낳고 움직임이 극에 달하면 고요함이 되고 고요함이 음을 낳는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런 음양의 변화는 대립되지 않고 대립 속에서 진일보한다. 주역의 계사전에는 “역의 원리란 무엇이나 극단적인 한계에 이르면 막다른 길의 정체와 난국에 이르나 그렇게 궁핍해지면 변화가 온다. 변화는 결국 해결로 통하고 통하면 오래가는 것이다”라며 대립을 통한 변화를 말한다.. 김경동의 [한국사회의 변동과 통합의 원리] 참조
* 正反合의 변증법적 원리 - 헤겔
이런 음양의 대립은 헤겔의 변증법의 원리와 흡사하다. 헤겔은 그의 변증법에서 정반합의 원리를 말한다. 그는 현상에는 반드시 대립이 존재한다고 주장하였다. 즉 어떠한 정이 있으면 그 안의 모순성 때문에 반이 존재하고 그 대립이 극대화되면 변혁이 이루어져 합으로 지향한다. 이런 변혁의 안에는 절대이성의 의도가 들어있는데 이것은 마치 음양의 대립을 理가 주도하는 것과 같다.
3. 인간 안에 세계가 있다.
* 宇宙便是吾心, 吾心卽是宇宙 - 육상산
육상산 철학의 특징은 우주의 통일성을 탐구하려는데 있다. 그리고 이런 우주의 통일은 마음속에 있는 心에서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그는 “우주가 바로 내 마음이고 내 마음이 곧 우주이다.”라고 말했다. 이것은 육상산이 인간의 마음이 세계를 구성하는 주체적 존재로 본 것이다. 그는 우주(宇宙)라는 말에서 ‘宇’를 四方上下의 공간적 개념으로 ‘宙’를 古今往來의 시간적 개념으로 해석한 것은 칸트가 세계를 시간과 공간의 감성의 형식을 통해 인식되는 대상이라고 본 것과 유사하다. 육상산은 이런 心은 사람마다 같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육상산의 心은 우주와 나 사이에 그리고 나와 타인 사이에 통일성으로 연결되는 일원론적 세계관의 근거가 된다.
* 인간의 마음이 세계를 구성한다. - 칸트
칸트 이전의 유럽은 인간의 관념 안에 존재하는 세계와 그 관념의 대상세계가 일치하냐 , 하지 않느냐가 가장 큰 문제였다. 그리하여 경험론자들 사이에서는 자신의 관념을 제외하고는 결코 아무것도 직접 지각하지 못한다는 주장이 우세 되었고 결국 흄에 이르러서는 관념과 대상세계가 같다는 것을 인간은 증명할 수 없다는 극단적인 회의론에 빠진다.
칸트는 코페리니쿠스적 전회를 통해 이 문제를 해결하는데 그것은 대상세계가 먼저 있고 우리가 그것을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선험적 인식구조의 틀을 통해 대상세계를 인식한 다음에 그것에 맞추어 대상세계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즉 칸트에게 있어서 인간의 마음은 더 이상 세계를 수동적으로 인식하는 단순한 마음이 아니라 대상세계를 능동적으로 인식하고 그 인식자료를 능동적으로 구성하는 자아이다. 그리고 칸트는 이런 대상세계에 대해 각 사람간에 의사소통으로 전달될 수 있는 것은 사람마다 같은 선험적 인식구조를 타고 낳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또한 이런 인간의 마음은 현상적인 세계만을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예지계를 통하여 물자체의 세계도 인식할 수 있는 선험성을 가지고 있다.
Ⅲ. 수양방법(인식방법)의 차이
1. 외부의 사물이나 사건을 통한 체득
* 格物窮理 -주자
주자의 理에 대한 인식방법은 격물궁리라고 말할 수 있다. [대학]에는 격물치지(格物致知)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는 사물의 이치를 끝까지 탐구하여 이치에 이른다는 말이다. 정명도는 이를 계승해 理가 각 사물에 내재되어 있고 사람 안에 내재된 것을 性이라고 하는데 理를 탐구하기 위해서는 사물 하나의 이치를 탐구하여 그 사물의 이치를 탐구하고 또 다른 사물의 탐구하는 식으로 계속 각 사물의 이치를 탐구하다 보면 어느 순간 각 사물의 이치가 관통하여 보편적인 이치를 깨닫게 되는데 이를 물리(物理)가 터졌다고 말한다고 했다. 주자는 이를 계승하여 “太極(理)은 사물에 있다. 그러므로 모름지기 사물에 나가서 리를 구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처럼 리를 탐구하여 그 지에 다다르고, 작은 것을 쌓아서 큰 것에 이르고, 낮은 데서부터 높은 데에 미치며 더욱 나아가기를 그치지 않는다면 어느날 아침 환현히 관통할 수 있다” [중국철학사] P 406
고 말했다.
* 변증법을 통한 이념의 목적 인식 - 헤겔
주자의 격물궁리는 헤겔의 변증법을 통한 이념의 인식방법과 유사하다. 헤겔은 이념이 자신을 실현시키기 위하여 정신과 자연의 현상으로 나타나 진다고 말했다. 이런 현상들의 이념의 의도대로 정반합의 변증법의 원리로서 이념이 목적하는 데로 진행해 나간다. 그리고 그 목적은 자유의 실현이다. 따라서 인간은 세계사의 큰 사건과 각각의 사회현상의 외면에만 치중하지 말고 그 사건의 내면에 나타나는 정신의 의도가 무엇인지를 인식하는데 주목을 해야 한다. 그러다보면 모든 사건이 변증법적 반복을 통해 단계적으로 지향하면서 자유의 실현을 향해 나간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이것이 바로 헤겔이 말하는 지혜이다.
2. 내면적 직관
* 性卽理 - 육상산
그러나 육상산의 수양방법은 주자나 헤겔과는 상반된다. 그는 인간의 내면적 수양을 통하여 理에 도달하려 한다. 여조겸의 주선에 의해 주자와 육상산 형제들이 학술적인 토론을 한 아호(鵝湖) 모임에서는 둘의 수양방법의 차이가 극렬하게 대비된다. 주자는 두루 살핀 후에 그것을 요약하여 理에 도달하려하였고, 육상산은 먼저 본심을 드러낸 뒤에 널리 보게 하려했다. 그리하여 주자는 육구현의 가르침이 너무 간단하다고 생각했고, 육상산은 주장의 가르침이 너무 지리하다고 생각했다.. [송명 성리학] P 288 참조
육상산이 영향을 받은 정이천. [송명 성리학]에서 진래는 정이천을 心學의 원류로 정명도를 理學의 원류로 보는 견해에 반대하여 둘의 사상의 차이를 내면적 체험과 외면적 체험의 강조의 차이일 뿐이라고 말했다.(P 141) 그러나 [중국철학사]에서 가노나오키는 자료를 주자는 이천, 구산의 학문을 전했고, 상산은 명도, 상채의 영향을 받았다고 주장한다.(P 411) 내 개인적 견해도 가노나오키와 동일하다.
은 “仁은 만물과 일체가 되고, 혼연히 만물과 한 몸이 되는 경지이다.(與萬物爲一體, 渾然與萬物同體)”라고 말했다. 즉 인의 경지는 우주의 모든 부분을 자신과 직접 연계된 것으로 생각하고 심지어는 나의 일부분으로 여긴다. 그리고 공자와 안연의 즐거움이 이런 나와 우주의 일치에서 왔다고 생각했다.. [송명성리학] P 129 참조
* 물자체를 외부의 감각을 통해 이식하려면 이율배반에 걸린다. - 칸트
칸트는 시간과 공간의 인식구조로 인식할 수 있는 세계는 현상세계에 한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물자체의 세계는 우리가 대상을 인식할 수 있게 하는 선험적 인식구조의 근거이기 때문에 물자체로 부여받은 한계적인 인식구조로 물자체를 인식하려하면 이율배반에 빠진다고 주장하였다. 따라는 우리는 인간 내면의 또 다른 이성인 예지계를 통해 물자체를 선험적으로 인식해야 하는데 이것은 경험적 인식과는 다른 인간의 내면성에 의한 직관이다. 그리고 이런 내면적 직관을 통해 물자체나 선험적 도덕과 일치할 때만 인간이 진정으로 자유로워진다고 말했다. 내 개인적 견해로는 이런 칸트적 자유가 공자와 안연이 즐거워했던 이유인 것 같다.. 육상산과 칸트의 세계관과 이런 세계를 인식하는 방법에 대한 공통점을 제시하면서 한 가지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그것은 기존의 해석대로라면 육상산은 일원론자이고 칸트는 이원론자인데 둘이 어떻게 세계관이 같을 수 있느냐는 문제이다. 그러나 내 개인적으로는 칸트를 일원론자로 보고 있다. 칸트가 세계를 물자체의 세계와 현상계의 세계로 나눈 것 때문에 후세의 학자들의 칸트를 이원로자로 해석한다. 그러나 이런 해석은 플라톤의 이데아와 현상계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한 해석이다. 칸트는 우리 인간이 선험적 인식구조라는 틀로 인해 세계를 틀에 맞추어서만 인식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런 인식되는 세계가 현상계이다. 그러나 현상계를 물자체란 세계의 시각적 인식일 뿐 물자체가 아니며 물자체와 동떨어진 세계는 더더욱 아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달의 앞모습밖에 볼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달을 보면서 달의 보이지 않는 모습까지 상상해서 둥근 달을 관념 안에 표상한다. 달의 보이는 부분이 현상계이고 달의 완전한 모습이 물자체인 것이다. 그리고 달의 완전한 모습을 상상할 수 있는 인간의 능력이 예지계이다. 따라서 칸트는 이원론자가 아니라 일원론자이다.
Ⅳ. 인간관과 윤리관 차이
이런 각 사상가들의 차이는 인간관에서는 공통점을 지니게 된다. 주자와 육상산 모두 인간 안의 선험적 도덕을 인정했고 그 선험적 도덕을 지키기 위해서는 인욕을 제거해야 한다고 보았다. 다만 주자는 마음을 도심과 인심으로 나누고 인심을 제거하며 도심을 보존해야 한다(存天理去人慾). 주자는 자신의 사상을 통해 주자는 인간의 性을 本然의 성과 氣質의 성으로 나눈다. 본연의 성은 아직 발하지 아니한 것이며 天理에 속한다. 그러므로 지극히 선하고 순수하다. 그러나 기질이 되면, 선약의 구별이 있음을 면할 수 없다. 그리하여 우리 인간이 추구해야 할 것은 이런 본연의 성을 보존하고 기질의 성을 억제해야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고 말한 반면 육상산은 도심과 인심을 나누는 것을 거부하고 시대와 장소와는 상관없이 인간의 본심은 하나인데 그것이 가리워질뿐이라고 주장하고 수양을 통해 가리워진 자신의 본심을 밝게 할 것을 주장하였다.
칸트와 헤겔 역시 인간의 욕구를 억제하고 인간 안의 선험성이나 정신을 의욕 할 것을 주장한다. 다만 칸트는 인간의 욕구를 이성과 대립하는 것으로 보고 욕구를 억제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반면, 헤겔은 이성과 욕구의 통일을 주장한다.
칸트는 필연적이고 보편적인 정언명법을 제시한다. 인간 안에는 선험적 도덕이 존재하난 이것은 인간의 욕구와 경향성 때문에 인간 안에서 완전히 실현될 없다. 따라서 인간은 항상 이런 선험적 도덕을 의욕하며 경향성과 욕구를 억제하고 정언명법을 추구해야 한고 주장한다. 반면 헤겔은 인간 안에는 정신과 물질이 대립을 일으키는데 이것을 정신을 중심으로 물질적이 면을 통일해야 진정한 자유에 이룰 수 있다고 보았다. 이런 면에서는 오히려 칸트가 주자 쪽에 가깝고, 헤겔이 육상산 쪽에 가깝다. 윤리관에서는 주자나 헤겔이 외적인 예나 국가를 통한 인륜들을 강조하는 반면 육상산이나 칸트는 동기주의적인면을 강조한다.. 육구연은 어떤 사람이 군자인가, 소인인가를 결정하는 것은 주로 그 사람의 표면적 행위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내심의 동기에 달려 있다고 보았다. 그리고 도덕이란 인간 밖에서 찾을 수 없고 인간 안에서 찾을 수 있다고 하였다. 칸트 역시 결과주의에 반대하여 동기주의를 주장한다. 칸트는 자신의 행위가 특정한 결과를 바라거나 개인적 욕망이 들어갔을때는 참다운 도덕행위가 아니고 오직 자신 안에서 진정으로 도덕법칙을 의욕하고 행위할 때만이 참다운 도덕적 행동이라고 말한다.
* 각 사상가의 공통점
칸트
헤겔
주자
인간의 욕구를 제거해야만 天理나 보편적 도덕에 도달할 수 있다.
객관적 관념론(理, 절대이성)
외부의 사물이나 사건을 통한 수양방법
현상을 대립의 관계로 파악
국가나 법과 禮를 중요시 함
육상산
세계를 구성하는 보편적 마음(心,理性)
내면적 직관을 중요시
선험적 도덕의욕, 동기주의
인간 안의 갈등은 이분법적으로는 해결될 수 없고 내적 통일을 통해 가능하다.
Ⅴ. 나오면서 - 바람직한 인간관
이런 주자, 육상산과 헤겔과 칸트의 비교는 위에서 제시한 공통점은 각 개인의 사상에 깊이 들어가다 보면 무리한 접목이 있을 것이다. 또한 주자와 칸트, 육상산과 헤겔의 공통점도 있다. 결국 이 네명의 사상가는 어떠한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다. 이런 공통분모는 그들의 차이점보다 훨씬 많은 양을 차지한다. 내가 이 글에서 동서양의 철학자를 비교하려한 의도 역시 시대와 장소와 상관없이 인간, 특히 위대한 사상가는 어떠한 세계의 내면과 인간 안에 있는 보편성을 인식한다는 점을 증명하고 싶어서이다. 육상산은“동해에서 성인이 나온다 해도 그 마음(心)은 같을 것이요, 그 이치(理)도 같을 것이다 서해, 남해, 북해에서 성인이 나온다 해도 또한 그렇지 아니함이 없을 것이다. 수백, 수천년 이전에 성인이 나왔을 때도 이 마음과 같고 이 이치와 같았다. 앞으로 수백 수천 년 후에 성인이 나온다 해도 이 마음, 이 이치와 같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 말은 인간의 보편성을 말하는 것과 동시에 이런 보편성의 근거가 어떠한 형이상학적 원리가 실재함을 이야기하는 것일 것이다.. 이런 형이상학적 원리를 언어로 표현하고 그 언어의 표현에 집착하다 보면 그 원리는 더 이상 형이상학적 원리가 아니게 된다. 예를 들어 어떠한 패쇄된 공간에 네모난 상자가 있다고 가정하자. 그리고 아직까지 어떤 인간도 그 상자를 본 자가 없다. 그런데 어느 순간 특별한 능력을 가진 두 사람이 그 공간 안에 들어가 상자를 보고 나왔다. 한 사람은 그 사람은 개인적 경험과 사회,문화적 여건 때문에 책상이라는 사물을 주로 접해왔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은 의자라는 사물을 주로 접해왔었다. 이 둘은 한 번도 본적이 없어 언어로 표현되지 못하는 네모난 상자를 가지고 한 사람은 책상같다고 주장하고 한 사람은 의자 같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결국은 그 두사람을 따르는 무리에 의해 둘의 사상은 대립되고 책상이나 의자라는 언어의 틀에 갖쳐서 네모난 상자의 실체에 대해서는 까맣게 잊고 만다. 이것이 바로 주자와 육상산의 학파가 대립되게 된 원인일 것이다. 네모난 상자는 책상같이 생기기도 했고, 의자같이 생기기도 했지만 책상도 아니요 의자도 아니다. 다만 책상과 의자는 그 네모난 상자의 한 단면일 뿐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런 단면을 통해 네모난 상자의 실체에 접근하려고 노력해야지 그런 언어나 사물에 집착해서는 않된다. 만약 우리가 이런 언어나 현상의 한계를 극복하게 된다면 주자나 육상산, 헤겔과 칸트의 사상의 공통점에 접근할 수 있을 것이고 그런자만이 깨달은 자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런 형이상학적 원리를 내재하고 있다는 의미에서 인간은 하늘과 같이 존엄한 존재이다. 따라서 아무리 못나고 무능해 보이는 인간 역시 그 인간 안에는 선험적인 천리와 절대이념을 가지고 있다. 다만 기질이나 경향성 때문에 그 선험성이 각자 다르게 나타나는 것 뿐이다. 따라서 인간을 겉으로 보이는 외면적 행위의 기준으로만 판단해 군자나 소인, 도덕적인 사람이나 비도덕적인 사람으로 나눌 수는 없는 것이다. 그것은 인간 안에 잇는 선험성에 대한 무시이자 인간을 이해하지 못한 행위이다. 따라서 우리는 각자를 선험적인 존재로 인식함과 동시에 타인 역시 그런 존재로 대우해야 한다. 공자는 “자기가 하기 싫어하는 일을 타인에게 시키지 말라”고 하였고, 칸트는 “너 자신의 인격에 있어서나 모든 타인의 인격에 있어서 인간성을 단순히 수단으로서만 사용하지 말고 동시에 목적으로 사용하도록 행위 하라”고 말한다. 이것은 바로 인간 안에 있는 선험성에 대한 존중에서부터 비롯된 것일 것이다.
참 고 문 헌
[송명 성리학] 陳來 著, 안재호 譯 (예문서원)
[강좌 중국철학] 周桂鈿 著, 문재곤 譯 (예문서원)
[중국철학사] 가노나오키 著, 오이환 譯 (을유문화사)
[서양철학사 下] 요한네스 휠스베르거 著, 강성위 譯 (이문출판사)
[칸트의 도덕철학] H.J. 페이튼 著, 김성호 譯 (서광사)
[철학강요] 헤겔 (을유문화사)
이영철의 [도와 언어] 철학과 현실 36호
김경동의 [한국사회의 변동과 통합의 원리] 세계문학 66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