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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도 땅에서 지리산 노고단 다음으로 높고 깊은 산세를 가졌지만 의외로 세간엔 널리 알려 지지 않은 비경의 광양 백운산으로
우리 느림보 벗님들이 선수를 돌렸다는 첩보를 접하곤 강 대장님을 은밀히 개인적으로 접견을 하여 갠신히 방부를 드리 밀었다.
첫째 산행중엔 여성회원들의 유무에 개의치 않고 시도 때도 없이 대물을 뽑아 들고 뿜어 대던 몰상식한 행위와
둘째로 비이코스나 씨이코스를 선택하여 남들 하는 산행 반도 제대로 아니 하곤 언능 내려 와서 뒷풀이 음식과 쏘주를 거덜내는
파렴치한 행동을 결코 하지 않겠다는 각서를 물론 형식적이긴 하지만 제출을 하긴 했구먼요.
영남의 빼여난 기상을 안고 영호에 유유한 정신을 담아
태화봉 동녘에 홀연히 서니 거룩한 존재여 안동중학꾜오오 ...
어렴풋이 떠 오르는 모교 안동중학교의 교가엔 자랑스럽게도 서두에 영남이라는 말이 가장 먼저 나오고
각개전투를 비롯하여 기초 유격훈련 꺼증 받았던 호남땅 광주의 31 예비사단의 사단가는 호남의 넓은 들을 바라 보면서 ...
이 역시 호남이라는 말과 넓은 들녘이 가장 먼저 나오는데 의외로 호남과 영남이라는 말의 어원에 대해서 잘 모르시는 분들이
상당히 많은 걸로 알고 있다.
수도 한양에서 갱상도 땅으로 가는 가장 빠른 지름길이 바로 문경 새재 즉 조령을 넘는 일이다. 그래서 과거 급제를 위해서
한양천리로 떠났던 유생들의 급제한 경사스런 소식을 경상도 땅에서 가장 먼저 들을 수 있는 곳이라서 해서 문경 (聞慶) 이라는
지명이 생겼고 바로 이곳 문경 조령 아래땅 이라고 해서 경상도 땅을 영남이라고 하고
융기해안으로 이루어 져서 태백의 준령이 치솟은 영남과는 달리 침식해안으로 이루어져 넓은 벌판이 잘 발달된 곡창지대
호남땅은 예로 부터 논농사를 위한 수리 관개시설이 잘 정비되어 호 즉 저수지가 많을 수 밖에 없었으리라.
어느 어느 호수 구체적으로 말하면 김제의 벽골제 혹은 또 다른 호의 아래땅이라고 해서,중국에서 동정호 아래땅을 호남이라고
하는 것 처럼 우리도 전라도땅을 호남이라고 불렀다는게 거의 정설이라고 한다.
기호지방(機湖)이라고 하면 당근 경기도와 충청도를 아우르는 지명이다.
고다꾜 졸업하기 무섭게 출세 쬼 해 볼려고 낙동강을 건너 온 이후로 안동땅에서 올라 온 권 돌삐 라며 낯선 사람들과 처음으로
통성명을 하노라면 늑달같이 화답을 해 오는 말이 바로 어이구 안동 권씨면 양반 중의 알양반 아니냐는 것이다.
꼬옥 양반이 아니라꼬 박박 우길 수도 없고 이때 쯔음이면 난처하기 그지 없다.
양반이란 말은 벗님들도 잘 아시다싶이 임금님이 사시는 궁궐을 중심으로 동쪽에 많이 모여 살았던 문인들과 서쪽 방향에 주로
거처하였던 무인들의 집안 즉 문반과 무반을 통칭하는 말인데 사대부 즉 벼슬을 하는 관료집안을 일컫는 말로 구체적으로 따악
찝어서 얘기를 하면 본인이나 아니면 최소한 아래로 손자, 위로는 할아버지대에선 과거에 급제를 하여 벼슬을 하여야만 지대로 된
양반이라고 할 수가 있다.
내 대가빠리에 터래기가 나면서 부터 선친으로 부터 귀에 딱정이가 눌러 붙도록 얻어 들었던 말이 바로 우리 안동 권문은
양반이따.
난 우리 안동 권문이 증말로 양반 중에서도 알양반인줄로만 알았기 때문에 군바리 훈련 받을 적에 배가 고파서 절절 헤매던
시절에도 남들 처럼 밥을 많이 얻어 먹을려고 식당으로 뛰어 가거나 새치기를 결코 하지 않았다.
양반 체면에 그럴 수는 없다면서 느릿 느릿 여덟 팔자 걸음으로 식당으로 향하는 놈은 나 혼자 뿐이였다.
물론 성장하는 과정에서 이씨 조선을 통털어 왕족인 전주 이씨를 제외하곤 파평 윤씨 다음으로 우리 안동 권가가 과거에 가장
많이 급제를 하였다는 기록과 70년대 초반 한국일보 사회면 톱기사로 읽었던 안동시와 군을 통털어 안동 권 성씨를 가진 사람이
거의 20 프로대에 육박한다는 기사를 분명히 기억을 하면서 사회 초년병 시절 어느 날 안동땅 울 안방에서 그때 꺼증도
양반과 족보 타령으로 세월을 보내시는 울 선친과 나눈 대화는 아래와 같다.
아부지요! 우리 안동 권가가 양반 이라꼬 케샀는데 우리 직계 어느 할아버지가 어떤 벼슬을 했니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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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럼 학문에서 명성이 높았던 할배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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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때 독립운동을 했거나 근자에 들어서 무공훈장을 받은 조상이 호옥 있니껴? 아니면 육이오 전쟁이나 월남전 그도 아니면
무장공비를 토벌하다가 순직하신 분은?
역시 묵묵부답이다.
( 속으로만 궁시렁 거려 본다. 쌍놈 중에서도 돌쌍놈 집안이 호옥 아닌가?)
선친께선 이미 오래 전에 문중에서 발행하는 안동권씨 복야파세보 라는 대백과사전 크기로 아홉권이나 되는 족보책을
아들용으로 구입을 해 두셨기 때문에 명절 때 고향엘 갔다가 집으로 돌아 올 즈음에는 부자지간에 약정이나 한듯이 언성이
높아 진다.
이번엔 꼬옥 족보책 차에 실어라.
전 족보책 같은거 안보니더.
자신의 뿌리와 근거를 알아야 댄다.
나이 오십이 넘도록 학교,군대 그리고 사회생활을 하면서 우리 할아버지 함자가 무었이냐고 물어 보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니더.
그래도 족보는 연구를 해야 댄다. (족보를 연구하는 학문을 보학 이라고 합니다.)
가주 가 바야 보지도 안을껄 왜 자꾸 가주고 가라 그라니껴? 하면서 횅 허니 차 시동을 걸었던 내가 선친 돌아 가시기 몇년 전
어느 명절날 지팽이를 휘 젓으며 주차장으로 따라 나오신 아버님 체면을 생각해서 마지 못해 차에 싣기는 실었는데
서울 가는 즉시 헌책방에 팔아 치웠뿐다꼬 중얼 중얼 거렸던 모양이다.
그날 이후로 이틀에 한번 꼴로 내 딸아이에게 전화를 돌려 대는 아버님께선 딸아이에게 니 애비 혹시 족보책을 고물상에 팔아
먹지나 않나 감시를 잘 하라고 신신당부를 하신다는 것이다.
조선시대를 통 털어 정승 판서를 가장 많이 배출한 학맥이 바로 퇴계 이 황 선생의 도산 서원 출신들인데 파당으로 말하면 동인,
동인중에서도 남인이다. 임진 왜란 발발시 영의정으로서 국난 극복에 지대한 공을 세웠던 서애 류 성룡 대감이 퇴계 선생의
대표적인 수제자인데 이 시대를 끝으로 서인으로 나중에 노론의 영수가 되는 기호 지방의 우암 송 시열이 득세를 할 즈음에는
영남 출신은 벼슬길에서 씨가 마를 지경에 이르기를 거의 200년이나 지속 된다.
권력에서 철저히 소외를 당하였는데 대원군이 세력을 잡을 무렵 권력을 한손에 틀어 잡았던 외척 안동 김씨 세력은
또 무어냐구요?
이 분들은 본관만 안동이지 사실은 한양에서 주로 거주를 하였던 분들로서 경복궁의 인근에 있는 장동이라는 동리에 주로 살았던
탓에 장동 김씨라고 불리웠던 분들이다. 선친의 말씀에 의하면
우리 조상들은 머리가 영민하여 과거에는 많은 수가 급제를 하였지만 야합을 하지 못하는 강한 성정 덕분에 삑 하면
다 때려 치우곤 낙향을 해 버렸다는 것이다. 집안이 융성할 이유가 사라진 것인데 이런 와중에서도
우리 직계 할아버지 중 한분이 어떤 사유로 삼취를 하여서야 겨우 자식을 보게 되었다고 하는데 양반가에서는 정실 부인이
아들을 낳지 못하는 등의 사유로 재취 즉 새장가를 들어서 아들을 낳을 경우엔 정상적인 자손으로 인정을 하지만 이유 여하를
불문하고 삼취 즉 세번째 장가를 들어서 낳은 자손은 홍 길동이 신세를 면치 못했다고 하는데 삼취를 하여 낳은 후손인 우리
직계는 일년에 한번 거행되는 안동 권 시조 할배 제사 때도 다른 족친들 보다 한계단 아래에야 겨우 도열할 수가 있었을 뿐 아니라
제사를 집행하는 유사 즉 임시 집행관 자리는 언감 생심 꿈도 꾸지 못할 일이 였다고 한다. 이런 와중에
울 선친의 야마를 입빠이 돋구워 올리는 말들이 따로 있었다.
양반가에서 행세를 쬼 했다 하면 의례 별도의 정자를 건립하거나 종갓댁 대청마루에 무슨 무슨 당이라고 하여 현판을 내 건다.
그리곤 이 집안이나 현판을 최초로 내 건 할아버지를 지칭할 땐 의례 x x 당 할배 아니면 구냥 x x 당 이라고만 하면서 의시대기
시작한다. 주눅이 들지 않을 수가 없는데 물론 우리 직계 할배 중에서는 변변한 현판을 내건 할배는 단 한분도 업따.
사람이 살면서 받는 설움 중에서 가장 큰 설움이 까막눈에 배 고푼 설움이라고 하는데 이 보다 약간은 덜 하지만 어델 가서
신분적인 차별 대우를 받는 것 또한 감내하기 어려운, 일순간 야마가 삑 도는 일인지라 울 선친의 양반이 되고져 하는 몸부림이
전혀 이해가 되지 않는 건 아니다. 구럼
벼슬도 변변히 하지 않았던 안동 권문이 양반으로 널리 회자된 이유가 무어냐구요? 대한민국에서 어느 집안 못지 않게
오래 된 족보책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그 사유라고들 합띠다.
이곳 호남 출신 김 대중 대통령 집권시 어느 날 고향땅엘 내려 가니 선친께서 머뭇 머뭇 거리면서 자그만 봉투를 한장 꺼내
드시는데,나라에서 수여한 참전용사증 이다. 참고로 우리 집안에는 육 이오 전쟁 때 경찰관으로서 참전을 하신 울 선친과
나중에 알콜 중독으로 급사를 한 개망나니 육촌 형님이 육군 하사로 월남전에 참전을 한 것이 나라와 민족에 기여한 전부이다.
참전 용사에게는 국립묘지(현충원)에 안장 될 수 있는 특권을 비롯하여 다달이 작은 돈이긴 하지만 연금 형태로 지급이 되는데
난 내 아버님 일이여서 구태여 편가름을 하는 건 아니지만 한장의 참전 용사증이 아홉권이나 되는 족보책 보다 헐 소중하게
느껴 진다.
울 선친은 어머님이 누워 계시는 문중땅엘 가시질 않았고 내가 입에 개거품을 물면서 가문의 자랑이라며 강추를 했었던
경북 영천에 있는 국립묘지에도 후일 자식들이 자주 찾아 오지 않을 것을 염려하여 결국 가시질 않곤 선친 생전에 미리
장만해 둔 성남 인근의 납골당으로 가셨는데 선친이 돌아 가신 그날 장례 준비를 위하여 모인 우리 가족들 앞에서 장남인
내 형님께서는 폭탄을 터 뜨려 버렸다. 오늘 이후로
우리 집안에서는 돌아 가신 분을 위해서 음식을 차리는 등의 행위는 일체를 금한다는 것이다. 꼬옥
제사에 대해서 관심이 많은 가족이 호옥 있으면 아버님 기일날 각자가 알아서 산소로 가서 각자 알아서 제사를 지내란 것이다.
이 푹탄 한마디로 선친께서 일생을 공 들였던 어떤 부분이 일순간에 물거품이 되어 버린 것이다.
요즘 개콘 깐족거리 잔혹사란 코너에서 유행하는 말이 생각 난다. 모든 것이
" 끝 "
아들 자식이란 건 본시 내 슬하 즉 무릎팍 아래에서 재롱을 부릴 적이나 여태 꺼증도 사타구니에서 퀴퀴한 날좆 냄새가
푹푹 나서 꼬추도 따 묵고 담배도 따 묵는 놀이를 할 적에는 구래도 내 자식이랄 수가 있지만 부랄 까고 장가를 가는 그 순간
이후엔 어느 낯선 여자의 X쟁이 노릇을 하는 인간이 되어 버린다는 사실을 직시 하질 몬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너무도 안타깝다.
아들이 과거에 급제하여 집안을 양반 가문으로 둔갑 시키던 얘기는 이미 전설이다.
아들놈 출세하고 돈 벌어 밧짜 지 예폔네 명품가방 숫자만 늘어 날 따름이다.
사람이 살아 감에 마주칠 수가 있는 가장 험악한 꼬락서니가 먼질 아세요?
자식놈이 자신의 분신이나 아바타 정도는 되는 줄로 알고 사교육 시키느라 허리가 휘어 졌다간 말년에 이르러서 사전 상속으로
전 재산을 탕진하곤 꿰재재하게 사는 인간 군상입니다. 이룬
어리석기 짝이 없는 인물은 말년에 반드시 험한 꼴 봅니다. 사전 상속할 돈이 혹시 있스문
차라리 뺑덕어미 같은 년이라도 괜찮습니다. 적당히 잘 사귀면서 다달이 쪈이라도 낙낙하게 주어 보셔요 싸비스가 끈내 줍니다.
이 계절에 이곳 광양땅으로 산행지를 잡은 건 아마도 이 계절에 만발하는 매화를 구경하라는 강 대장님의 배려인 듯 하다.
경상도 촌꾸석에서 자란 나는 느림보 산악회를 따라 다니기 전에는 제대로 된 매화꽃을 구경해 본 적이 사실 없다.
느림보 리무진이 남녘으로 거의 접근 했을 무렵에는 예상되로 제법 많은 비가 뿌리고 있었다. 당초의
산행 들머리 진틀에서 오랫만에 미리 와서 기다리고 계시던 시나브로님을 반가이 만나곤 우중산행을 개의치 않다고 하시는
세 분의 용감한 느림보 전사님을 진틀에서 떨구어 드리고선 남은 본진은 동백과 풍수사상의 대가이신 도선 국사로 유명한
운암사와 옥룡사지로 발길을 돌린다.
사실 난 느림보를 따라 다니기 전에는 동백꽃 조차 제대로 본 적이 단 한번도 없었다 그리고 겨우 본 동백도 사람 키 높이 정도의
동백일 따름이였었는데 이곳 옥룡사지의 동백은 참으로 우람차다.
마치 쥬라기 공원을 연상하여 금방이라도 숲에서 공룡이 뛰쳐 나올 것 같은 분위기다.
광양 불고기로 배를 든든히 채우곤 홍쌍리 매실농원으로 차를 돌렸으나 흐미 몰려 든 인파로 접근 자체가 용이치 않다.
그 매화가 그 매화일텐데 언론의 힘이 무섭다는 걸 실감케 된다. 사실 이곳 남도땅 그중에서도 섬진강을 끼고 도는 골골 어느 곳
기화요초가 만개치 않은 곳이 없는데 말입니다.
고사마을 인근에서 백운산을 우중 산행 하신 세 분의 전사님을 픽업하여 무릉도원을 연상시키는 섬진강변을 한 없이 달려
본다.
차창 밖으론 영원토록 머무르고만 싶은 꽃천국이 아쉽기만 한 내 나이와 함께 참으로 야속하게도 자꾸 자꾸만 스쳐 지나 간다.
괜스래 눈물이 피잉 돈다.
사람 산다는 것이 별것 아닌 줄을 몰랐던 건 물론 아니지만 구래도 자꾸 자꾸만 눈물이 난다. 피ㅣ잉.
매화라고 하면
흐 흐 뜰에는 함박눈이 소리도 없이 내릴 때 머리맡 소반 위에 놓아 둔 매화 꽃망울 터 뜨리는 소리 듣는 쏠쏠한 재미
이에 더하여 건넌방에서 첩년 속고쟁이 벗어 내리는 소리 마져 들리면 나랏님이 부러울 것이 없을 지경인데 행랑채에서
종년부부가 흑탄 백탄을 태우면서 꺼억 꺽 꺽 거리며 숨 넘어 가는 소리 마져 들릴 적에 이에 화답이라도 하듯이
움무 움무우우우.... 하며 외양칸의 암소 마져 구성지게 울어 주는 밤이면..... 쪕 쪕 괜히 입맛이 다셔 지내용.
마지막으로 매화하면 떠 오르는 유명한 글귀가 있어 잠시 소개해 올립니다.
동 천년노 항장곡 이요 매 일생한 불매향 이라
재질이 뛰어 나서 장농을 만들면 자동으로 습도 조절이 가능하고 거문고를 비롯한 각종 악기 제작에 쓰이는 오동 나무는
봉황이 오직 오동에만 찾아 든다는 신령스런 나무인데 오동은 천년을 살아도 그 아름다운 곡조를 늘 울린다는 것이요
꼿꼿한 선비의 기개를 상징하는 매화는 비롯 일평생을 춥고 배 고푸게 살지언정 그 고고한 향내를 팔지 않는 다는 것이다.
분당 탄천변에서 불천위가 되고져 하는 돌삐 드립니다.
첨언 : 사대부 집안에선 부,조부,증조부 그리고 고조부 까지 사대를 제사를 지내며 모시는데 사실은 사대 까지 제사를 지낼려면
최고의 반열에 오른 집안만 가능했다고 한다. 신분의 고저에 따라서 겨우 조부 까지만 제사를 지내는 경우도 많았다고 하는데
집안에 돈이 많다고 자기 조상을 자기 멋대로 사대 까지 제사를 지낼 수가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제사를 지내는 것이
힘든 고역이 아니라 집안의 권세를 드러 내는 특권이란 것인데 불천위란 것이 있다.
나라에 지대한 공헌이 있었거나 학문이 특출했을 경우에 자자손손 다시 말해서 기한이 없이 제사를 지내도 좋다고 국가에서
인정을 하는 제사를 바로 불천위라고 하는데 안동 지방에는 바로 이 불천위를 모시는 집안이 상당히 많다.
명문 중의 명문 집안들이다.
안동에는 안동 권,김 그리고 장씨만 있는 것이 아니다.
99칸 고택 임청각 건물이 있는 석주 이 상룡 선생의 고성 이씨, 퇴계 이 황 선생의 진성 이씨, 그 제자인 서애 류 성룡의 하회 류씨,
또 다른 제자인 학봉 김 성일의 의성 김씨 등 등이 있는데 학봉 대감은 잘 아시다싶이 임진 왜란이 발발하기 직전에 적정을 탐색키
위해서 일본으로 건너 간 통신사의 부사로서 적정을 탐색하고 돌아 와서 반대당파인 정사 황 윤길의 도요또미 히데요시의
표독스런 상판데기와 일본땅의 분위기를 보아 왜란은 틀림없이 일어 난다는 보고와는 달리 왜란은 결코 일어 나질 않을 것이란
허위 보고로 유명하신 분이다.
물론 내앞 김씨 혹은 천전 김씨로도 불리우는 의성 김씨는 근세에 들어서도 독립투사를 여럿 배출한 명문 중의 명문 집안인데
학봉 김 성일 대감의 13대 종손의 반전 드라마는 근세에 들어 더욱 유명한 일화를 낳았다.
자신의 할아버지인 김 성일 대감은 학봉이고 자신은 난봉이라며 일평생을 파락호이자 난봉꾼 행세를 하며 투전으로 문중 재산
일체를 거덜 냈던 김 용환 종손이 1995년도에 독립 유공자로 당당히 그 본연의 모습을 나타 낸다.
문중 재산을 노름으로 탕진한 것이 아니라 독립군 군자금으로...
유교 이야기로 호옥 재미가 없을 까 염려 되는 바 이만 글을 줄이긴 하는데 앤콜 요청이 있다면 다음 산행기 편에 소상히 소개를
해 올리기로 하져 무어 아주 잼 납니다.
오늘 산행기는 어찌 어찌 하다가 역사 이바구로 흘러 버렸네요.
건강하신 몸으로 다음 산행 때 우리 모두 즐거이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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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또 올 려 주시면 공부가 되겠네요.
너무 해박하시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