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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조 십제와 한강변 강동구 지역의 전방후원분들의 실체
[삼국사기/백제본기]에서 백제시조로 기록된 온조는 상식적으로 부여 동명왕(고두막 한)의 손녀인 소서노의 아들로 고추모가 부여왕에 즉위하여 국호를 고리(고려=고구려)로 바뀌며 부여권력을 장악하자, 소서노가 두 아들 비류와 온조를 데리고 지금의 대릉하 하류지역(환단고기/서쪽으로 바다와 접하고 번.진한의 경계지역이며 외진 곳)
[환단고기/고구려국본기]와 [삼국사기/백제본기]기록을 종합하면 소서노가 10년간 해양무역으로 하여 부를 축적하여 나라를 세우니 어하라다.소서노는 고추모에게 어하라를 바치며 고구려의 제후국이 될 것을 다짐했다.비류가 어하라 왕에 즉위하자, 온조는 마한이 쇠하니 나라세우기에 좋다는 측근들의 말을 듣고 선박을 만들어 미추홀(인천)에 도착하여 한수 이남에 나라를 세우니 십제다. 비류는 백성들이 따르지 않고 온조나라로 합류하게 되니 자책감에 자결을 하였다. 비류를 따르지 않았다는 것은 유리에게 고구려 왕위를 빼앗긴 나머지 고구려에 대적하려다 민심을 얻지 못했던 것은 아닐까? 그리고 소서노는 온조를 만나려 했으나 온조의 추종무리들에게 거부를 당하자, 위장하여 위례성으로 잠입하려다가 죽음을 당하였다. 어머니의 죽음을 슬퍼한 온조는 잠시 한산으로 천도했다가 다시 위례성으로 돌아와 어머니 사당을 짓고 국모로 삼았다.
온조가 마한왕이 내어 준 한강이남 땅에 십제를 세우고 동명왕 사당을 짓고 제사를 지냈다고 하였는데, 이 때 동명왕은 고두막 한을 의미하는 것인가? 아니면 고구려시조 고추모를 의미하는 것인가? 삼국사기/고구려국본기에는 고구려시조 고추모를 동명왕이라고 기록하고 있고, 광개토태왕비문에는 추모왕으로 기록하고 있다. 따라서 고구려의 개국시조 고추모의 역사적 칭호는 추모왕이 맞다할 것이다.
그럼 온조왕이 제사하기 위해 지은 동명왕 사당의 주인은 누굴까? 온조의 아버지가 고추모라면 고추모 추모사당이 맞을 것이고, 부여의 동명왕 고두막 한을 추모하는 사당이라면 고두막이 맞을 것이다. 그러나, [삼국사기]기록에서 비류왕은 자책감때문에 미추홀에서 자결하였고, 소서노까지 온조를 만나지 못하고 위례성에 잠입하다가 온조세력에 죽임을 당했다는 기록을 통해서 보면 온조는 고추모의 아들일 확율이 매우 높다. 한강지역의 초기 십제의 무덤양식이 바로 고구려의 무덤양식인 적석총이기 때문이다. 토광묘인 부여무덤이 아닌 것이다.
일반인들도 부모가 죽으면 재산가지고 칼부림을 하는데, 권력을 놓고 피가 같은 형제라도 칼부림이 일어나는 것이 동서고금을 통하여 역사가 보여 주는 진실이다. 왜 비류는 자결하고 소서노는 위례성을 잠입하려다 죽음을 당했다고 삼국사기 사료는 기록하고 있는 것일까? 김부식의 날조가 아니라면 어머니가 같은 온조가 비류의 관계가 고구려를 떠난 이후 나빠졌다는 반증이고, 그것은 백성들이 따르지 않을 정도로 비류의 통치력에 문제가 있었다는 것인데, 이는 비류가 온조의 아버지가 되는 고추모에 대적하려는 이유때문이 아니였을까 추측되기 때문이고, 소서노는 백성들이 따르지 않을 정도로 악화된 어하하국 상황을 방치했다는 이유때문에 온조로 부터 환영받지 못했지 않나 생각된다.
백제 초기 도읍지가 되는 위례성 지역인 강동구 지역에서 세계 최대규모의 전방후원분 10여기가 발견되었는데, 문화재청이 산이라는 이유로 발굴을 하지 않아 언론에서 문제제기를 하기도 했는데, 오사카 지역의 응신.인덕천황릉보다 더 규모가 크고 연대가 높다는 사실이다. 고구려의 적석총들이 아니라 거대한 전방후원분들이 강동구 지역에 존재한다면 이는 황제급의 무덤이 분명하다.그리고 전방후원분은 열도이주와 함께 고대 일본무덤의 상징이 되어 버린 서남해 마한지역의 무덤양식인데, 마한에 백제국을 세운 후에 마한을 통합하고 나가 십제를 통합한 후에 한강지역을 도읍지로 삼은 이후 백제왕들의 무덤들이라고 해야 정확히 맞다.
[삼국사기/백제본기-근초고왕 편]기록에 따르면 근초고왕이 고흥에게 명하여 [국사]를 편찬하라 했다는데, 이 때 백제가 백제의 연대을 높이고 범부여세력의 통합을 위하여 온조를 시조로 삼고 백제왕 계보를 날조하지 않았다 싶다. 마치 박혁거세의 사로국을 무너뜨리고 흉노신라왕조를 세운 후 진흥왕 때 거칠부를 통하여 [국사]를 편찬하게 되는데, 흉노인 김일제가 시조임에도 불구하고, 신라의 연대를 높이고 국가통합차원에서 부여인 박혁거세를 시조로 삼은 것 처럼 말이다.
그러나, 고구려 장수왕 때 한성이 초토화되고 개로왕이 참살당하고 웅진으로 천도하면서 국가위기에 빠진 백제는 백제강토를 회복한 동성왕과 무녕왕을 거치면서 부흥을 실현하였고, 성왕시기에는 자신들의 뿌리를 잊지 않기 위해 국호를 남부여로 칭하였다. 북부여에 뿌리를 두고, 고추모가 북부여을 차지하자, 저항한 부여집단이 구태집단이고 남하하여 한반도 서남해에 백제를 건국하니 남부여가 된 것이다. 신라 역시 당나라와 군사동맹으로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후에 자신들의 뿌리를 비문에 기록하는데, 태종 무열왕 김춘추의 아들인 문무왕(김인문) 비문에 자신들이 투후(흉노인 김일제)의 후손임을 기록한 사실이 그것이다.
고구려와 신라의 세작들에 의해 권력내분과 국력분열로 망한 부여나라 백제
북사(北史)』에는 백제의 건국을 다음과 같이 애기합니다.
"동명의 후손에 구태(仇台)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어질고 신의가 깊어 따르는 사람들이 많아 대방(帶方) 땅에 나라를 세우고 공손도(公孫度)의 딸을 아내로 얻어 동이들 가운데 큰 세력을 떨치게 되었다. 처음에 백(百) 집의 사람을 거느리고 강을 건넌[濟] 까닭에 백제(百濟)라고 한다. 동쪽에는 신라와 고구려가 있고 서쪽에는 바다가 있다(『북사(北史)』94권 「백제」)."
"건안 연간(후한 헌제 때) 공손강이 남쪽 지방 거친 땅을 대방군이라고 하였다(建安中公孫康分屯有縣以南荒地爲帶方郡 : 『三國志』卷30)"
『북사(北史)』에서 "동명(부여왕 고두막 한)의 후손 중에 위구태(仇台)라는 사람이 있었는데"라는 말은 울구태(蔚仇台)를 의미하겠지만 "대방(帶方) 땅에 나라를 세우고" 라는 부분은 공손도와 구태(仇台)의 합작품이며 "공손도(公孫度)의 딸을 아내로 얻어 동이들 가운데 큰 세력을 떨치게 되었다."는 사람은 백제가 시조로 삼은 '구태'임을 알 수 있습니다.
『삼국지』(부여전)나 『후한서』(부여전), 『삼국사기』(고구려본기)를 토대로 보면 부여왕은 부태(夫台) - 울구태(蔚仇台) 등의 순서로 왕위를 승계한 듯이 보입니다. 즉, 실질적인 백제왕의 계보가 되는 셈입니다. 이름들이 비슷하여 매우 혼란스럽지요. 특히 울(蔚)이나 위(尉)는 중국식으로 하면 발음도 같습니다.
따라서 부여왕(위구태)은 공손도-공손강-공손연에 이르는 요동반도 세력과는 떼려야 뗄 수 없는 혈맹 관계가 되고 말았습니다. 만약 공손연이 대역무도한 죄로 몰락하게 되면 위구태의 세력도 성하지 못하게 된다는 것이지요. 적어도 요동지역으로 확장된 부여세력(요동부여, 또는 남부여)은 '바람 앞의 등불'이 되고 만 셈이지요.
『후한서』(부여전)에는 후한(後漢) 헌제(獻帝 : 190~219) 때 부여왕이 요동에 속하기를 요구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기록은 그대로 『삼국지』(부여전)에 나타납니다.
"부여왕 울구태는 다시 요동군에 복속되었고 당시 구려(고구려)와 선비가 강성했는데 공손도는 부여가 두 적 가운데 위치하므로 종실(宗室)의 딸을 울구태에게 시집보냈다(『三國志』「魏書」東夷傳)."
결국 백제의 시조라는 분이 바로 부여왕 울구태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결국 역사적 사실로 보면, 백제의 건국 주체는 바로 부여왕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부여왕 울구태는 공손도의 딸과 결혼함으로써 요동 지방에서 큰 세력이 되고 이 세력을 바탕으로 백제도 건국했다는 말이 됩니다. 그렇다면 서남해 마한땅에 정착하여 동아시아 해양강국으로 성장한 백제 건국의 바탕이 되는 곳은 바로 송화강 지역의 부여와 요동반도가 되는 것입니다.
후한의 요동태수인 공손탁 세력과 군사적 동맹을 맺고 고구려에 맞서고 있던 반고구려 집단인 부여왕 위구태 집단이 100가를 거느리고(만주원류고:후한말기)발해만을 건너, 남3한 중에 서남해 지역의 마한 땅에 나라를 세우고(후한서 한전:마한 중심의 남3한78여개의 읍단위 국가들 중에 하나/"백제는 마한의 제후국에서 출발하여 마한을 통합하고 바다를 건너 요서에 진출하였다"-양나라 양직공도/"백제의 영토는 서쪽으로 바다를 건너 월주에 이른다.."-구당서 백제전) 마한을 통합한 후에 서남해 해상권을 장악하고 마한(마조선)의 해상세력으로써 고대부터 선박제조술과 해양개척정신이 뛰어나 일찍부터 해상루트를 장악했던 서남해 해상세력을 기반으로 서해를 건너 요서에 진평군을 설치하여 중국 동해안 지역를 차지하였고, 남해를 건너 열도로 진출하여 야마토왕조를 기반으로 열도에 담로을 두어 동아시아 해양강국이 되었다.
바다를 장악하고 나라의 영토와 인구를 키운 백제의 꿈은 고구려가 차지해 버린 옛 부여의 회복이였다. 오죽 했으면 성왕 시기에 국호를 남부여로 바꾸었겠는가! 근초고왕 시기에는 백제 비류왕 시기부터 고구려와 치열하게 영토분쟁을 벌인 황해도지역(대방:요동태수 공손강이 후한이 쇠퇴한 후한말기에 세운 나라/백제 책계왕은 대방왕의 딸 보과와 혼인관계를 맺고 고구려 침략에 맞서 대방과 군사동맹을 맺었다.그러나, 만주와 북한지역에 존재하고 있던 중국군현지역을 회복하게 되는 고구려 미천왕 시기에 고구려에게 상실하고 말았다.)을 차지하면서 남평양성에서 고국원왕까지 전사시키며 고구려을 제압했다.이 때 백제 근초고왕은 노란깃발을 휘날리며 백제가 황제국가(황국)임을 천하의 중심국가를 내세웠다.
그러나 그러한 기재가 있는 만큼 그를 다루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신이 들으니 성충이 고구려에 사신으로 갔을 때에 연개소문과 친밀해서 연개소문더러, ‘고구려에 공이 있고 백제에 성충이 있으니 우리 두 사람이 힘을 합하면 천하에 얻지 못할 것이 있겠소? ’ 하여 엄연히 백제의 개소문을 자처하고, 개소문은 성충에게 ‘나나 공이 아직 대권(大權)을 잡지 못하였음이 한이오. ’ 하며 성충을 매우 후하게 대접했다고 합니다. 성충이 이같이 불측한 마음을 가지고 이웃나라의 권세있는 신하와 정의가 매우 가깝고, 또 그의 아우에 윤충 같은 명장이 있으니, 신은 대왕께서 만세(萬歲)하신 후에는 백제는 대왕 자손의 백제가 아니요 성충의 백제일 것으로 생각합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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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백제의 시작과 끝에 대해 명확하게 전달되는것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