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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세계가 하나의 공포 아래 집결한 것은 실로 오랜만이다. 인류는 자본의 탐욕이 불러왔던 경제 대공황을 다시 겪지 않기 위해 꾸준히 위기관리를 해왔고, 제1·2차 세계대전 같은 비극을 막기 위한 정치적·군사적 모색들도 나름대로 쓸모 있어 보였다. 세계는 아무렇지 않은 듯 무심하게 불공정한 역사의 수레바퀴를 굴렸고 인류는 눈감고 귀 막으며 미천한 일상과 비참함을 못 본 체하며 살아왔다. 그러나 균열은 뜻밖의 영역에서 시작됐다.
지난 한 세기 동안 괄목할 만한 발전을 보여준 현대 의학으로도 막을 수 없는 자연의 폭발적인 공격 앞에서 인류는 속수무책으로 공포에 떨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문을 닫아걸고 죽음이 지나가기를 기다려야 했던 이집트의 대재앙처럼 사람들은 코로나19가 역사의 무대에서 하루빨리 퇴장해주기를 숨죽이며 기다렸다. 2년여 시간이 지나면서 인류는 죽음이라는 공포와 공존하는 사회를 선택했고, 이것은 이 세계의 안정성에 균열을 선물했다. 모든 안정성에 대한 균열은 사회가 달라질 수 있는 하나의 기회이다. 그것이 전쟁이든 경제적 위기든 질병이든 안정성을 깨뜨리는 폭력적 이슈 앞에서 인류는 변화를 수용하는 일만이 다시 안정을 향해 나아가는 길임을 잠재적으로 깨닫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감히, 지금이야말로 진보를 위한 모든 저항 전선과 복음의 진영 역시 또 하나의 기회를 맞이하고 있다고 말하고 싶다. 코로나19로 인해 수면 위에 떠오른 세계의 불안정성이라는 오랜만의 기회 앞에서 ‘MZ세대’로 대변되는 청년 세대와 ‘어리석은 십자가의 복음’에 대해 간략히 이야기해 보고자 한다.
보잘것없음과 MZ세대
MZ세대가 소비의 주력 부대 중 하나로 떠오르면서 각종 광고나 기업의 관심이 쏠리고 있다. 10대 후반에서 30대의 청년층으로 규정되는 MZ세대는 변화에 유연하며 새롭고 이색적인 것을 선호하고 흥미와 재미를 추구하는 세대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정작 그들이 바라보는 자신들의 미래는 암울하다. 특히 부동산의 가파른 가격 상승을 경험한 대한민국의 MZ세대는 스스로를 ‘N포 세대’라고 자조적으로 지칭하기도 한다. 모든 것을 포기할 수밖에 없는 자신들의 보잘것없음을 그렇게라도 비웃어보는 것이리라. MZ세대는 이 세계가 자신들에게 선사한 절망을 극복할 길을 찾아 가상 세계에 몰입하기도 하고 가혹할 만큼 자신들을 몰아붙이며 경쟁 사회 속에서 짓밟으며 혹은 짓밟히며 달려가고 있다.
교회 청년들도 크게 다르지 않다. MZ세대와 기성세대의 갈등 속에서 향방을 잃어가던 대다수의 청년 목회는 코로나19라는 결정적 일격을 맞고 쓰러졌다. 가상 세계에 몰입하여 자신들의 보잘것없음을 잊어보고자 하는 자들에게, 혹은 보잘것없음을 뛰어넘고자 경쟁 구도 속에서 안식 없이 달려가는 자들에게 교회는 매력이 없다. 쉴 만한 물가로 자신을 인도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곳은 교회가 아니라 가상 세계이며, 주일성수는 경쟁에서 뒤처지게 하는 장애물일 뿐이다.
그러나 코로나19가 가져온 죽음의 공포는 생각지 못한 변수로 이 세계에 작용하고 있다. 먼 미래에 기다리고 있으리라 믿고 있었던 죽음이 코로나19라는 이름으로 성큼 다가왔고 그것은 청년 세대에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래서 지난 2년간 불안과 공포에서 함께 부대끼며 가치관의 흔들림을 경험한 모든 이들에게 기독교가 소중히 지니고 있는 ‘보잘것없음’의 가치에 대해 드디어 입을 뗄 수 있게 되었다.
보잘것없음: 선택받은 자의 표징
27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28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29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고전 1:27-29)
바울은 기독교가 가진 ‘보잘것없음’에 대한 두 가지 관점을 제시하고 있다. 이 주제가 향락과 소비의 도시로 대변되는 고린도교회를 향해 쓴 편지에서 나타났다는 사실은 상당히 흥미롭다. 전혀 보잘것없어 보이지 않는 부유한 도시의 교회를 향해 바울은 연약하고 작은 것들의 가치를 전파했다. 첫째, 바울은 보잘것없음을 선택의 관점에서 바라보았다. 하나님께서 고린도교회의 구성원으로 선택한 사람들은 교육을 받거나 시간이 넉넉했던 부유 계층이 아니었다. 하루의 시간 중 대부분을 노동으로 바쳐야 했던 가난한 하층민이었다. 복음에 귀를 기울일 만한 시간적 여유도 심리적 여유도 없었던 이들이 복음을 받아들였다. 학력과 권력과 가문은 예나 지금이나 사람의 평가 기준에서 중요한 역할을 차지하고 있다. 세상은 많이 배운 자들, 힘을 행사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자들, 가문이 위세 있는 자들을 선택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선택은 다르다. 학력과 권력과 가문의 보잘것없음은 하나님에게 선택받는 중요한 기준이 되었다. 이것은 우연이 아니었으며 분명한 하나님의 의도가 존재했다. 지혜 있고 강한 자들이 아니라 미련하고 약한 자들이 선택될 것이다. 있는 자들이 아니라 천하고 멸시받고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자들이 선택될 것이다. 세상이 가진 선택의 기준에서 우위를 점한 자들은 하늘의 선택 앞에서 더는 자신들의 ‘있음’을 자랑치 못할 것이다. 보잘것없음 때문에 선택에서 배제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선택받을 수 있게 되는 것이 바로 복음이며 하나님 나라이다.
이 진리에도 불구하고 현실은 녹록지 않다. 분명 보잘것없는 자들의 일상은 미천하다. 많은 청년은 선택받지 못한 자들이 느껴야 하는 일상의 미천함 속에서 괴로워하고 있다. 그들은 학력과 외모와 경제적 빈곤이라는 큰 짐을 머리에 이고 복음 앞에서 느리고 천천히 반응한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기에는 다른 짐이 너무 많은 것이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나는 선택받지 못했다.” 이 현실 속에서 사람은 서서히 무너진다. 가정과 사회와 자신으로부터 자신의 가치와 존재가 부정당하는 자들은 우울증이라는 병마에 쉽게 노출된다. 보잘것없음의 고통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깊고 쓰라리다. 이들은 빈 지갑으로 괴로워하는 것이 아니다. 빈 지갑이 상징하는 보잘것없는 자신 때문에 괴로워하는 것이다. 학력 때문에 외모 때문에 이성이나 회사에서 선택받지 못한 자들이 가지는 일상의 미천함은 인간성을 조금씩 갉아 먹는다. 그리스도인들은 이들의 짐을 벗겨줄 수 있다고 쉽게 말해서는 안 된다.
다만 함께 아파할 수는 있다. 보잘것없음이 선택의 증거이니 위대하다고 말하기 전에 아프고 쓰라린 일상을 함께 공유하는 일이 먼저이다. 밥을 먹고 웃고 즐기며 시간을 보내고 충분히 아파하며 사랑하라. 그리고 우리가 가진 십자가를 높이 들어야 한다. 그 안에는 일상의 미천함이 녹아있다. 목수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갈릴리의 한 시골 지역에서 성장했고, 아버지 없는 아들이 됐을지 모를 불운한 가정사를 가지고 하루하루를 살아가던 미천한 일상이 있다. 하나님의 기름 부음 받은 일상은 약하고 미련했다. 예수님이 이러한 일상을 살아가셨다는 사실은 모든 보잘것없는 자들에게는 환희의 송가이다. 예수님은 두 번째 아담으로서 새로운 인류를 위한 삶의 첫걸음을 떼신 분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삶은 우리에게 외치고 있다. 세상의 보잘것없음은 하늘의 관점에서 위대함이며, 미천함이야말로 선택받은 자의 표징이라고.
보잘것없음: 역전의 신비
9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10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고후 12:9-10)
바울이 제시한 보잘것없음이 가지는 또 하나의 신학적 관점은 역전이다. 세상의 자랑은 교회 안에서 종종 다른 모습으로 둔갑한다. 너무나 교묘하게 신앙으로 포장되어 그것이 자랑이며 교만이라는 사실을 미처 눈치채지 못할 만큼 은밀하다. 바울은 고린도교회 안의 모든 세속의 자랑에 대항하며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했다. 바로 약한 것들, 보잘것없음에 대한 자랑이다. 바울 자신조차 이 진리를 바로 습득하지 못했다. 바울조차도 연약함이 가지는 가치를 깨닫기 전에는 자신의 연약함이 사라지기를 간구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분의 은혜가 연약함 속에서 완성된다는 것을 가르쳤다. 바울은 자신의 약함을 통해 보잘것없음의 가치를 직접 체휼했다. 그리스도인에게 보잘것없음은 앞으로의 삶의 위대함을 결정짓는 기준이다. 그리스도의 능력은 약한 곳에서 온전해지기 때문이다.
연약함은 여러 모습으로 나타난다. 육체의 연약함, 능욕, 궁핍, 박해, 곤고가 삶을 강타한다(고후 12:10). 모든 것을 휩쓸어버리는 토네이도처럼 우울증, 간음, 강간, 성폭력과 같은 비극과 죄가 사람을 압도한다. 그리고 모든 사람은 강력한 죄 앞에서 보잘것없음을 느낀다. 통곡하고 쓰러지거나 도망가고 급기야는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강력범죄들은 신문 지상에만 존재하지 않고 우리의 삶에 이미 들어와있다. 백 개의 가정이 있다면 백 가지 죄가 있다. 다만 이를 숨기고 포장하고 가리고 있을 뿐이다. 얼마나 많은 가정 안에서 아동을 향한 학대와 방임과 성폭력이 발생하고 조용히 묻혔는가. 얼마나 많은 가정 안에서 배우자를 향한 어리석은 폭력과 가혹한 고문이 반복되고 묵묵히 덮어졌던가. 연약해지거나 보잘것없어 보이지 않기 위해 가정은 죄를 파묻고 가두고 포장한다. 삶의 비극으로 치명상을 입었더라도 작은 기술들을 동원해 상처를 감추고 덮는다. 강해지고 싶기 때문이다. 그러나 십자가는 우리에게 외치고 있다. 삶의 비극으로 연약해진 그 순간이, 십자가에 매달린 자가 되어 모든 저주가 우리 인생에 쏟아진 것 같은 그 순간이 그리스도의 능력이 정오의 빛처럼 나타날 때라고. 보잘것없음을 기뻐하라고 말하고 싶지 않다. 이것은 선언적 명령으로 실천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보잘것없음을 기뻐할 날은 반드시 온다. 우리의 약함 속에서 그리스도의 능력이 발휘되어 삶의 모든 비극이 역전되는 날이.
그대들, 포기하지 않아줘서 고맙다
교회학교 아이들이 청년부로 넘어올 때 그 인원은 상대적으로 초라하다. 더 획기적인 아이디어를 내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다. 이 시대가 너무 악하기 때문도 아니다. 향락과 소비의 도시 고린도에서도 교회는 세워졌다. 답은 간단하다. 교회학교를 거치면서 그리스도인이 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보잘것없음이 가지는 위대하고 놀라운 가치와 능력을 경험하지 못한 것이다. 이 가치는 지식으로 가르칠 수 없다. 말씀과 기도로 경험해야 하며 삶으로 체휼해야 한다.
6년 전 나는 한 교회의 청년 목회를 시작했다. 무기력하게 서있는 한 무리의 청년들과 대면한 순간 나는 도망가고 싶었다. 피리를 불어도 애곡을 해도 반응하지 않는 청년들과 기도를 시작하면서 나의 보잘것없음에 한없이 눈물을 흘렸다. 기도도 하지 않고 말씀을 읽지 않아도 하나님 뜻대로 살 수 있다는 굳은 신념을 가진 자들을 마주 대하면서 한탄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교회 청년부 리더는 4명이었다. 단 4명의 헌신자가 이리 뛰고 저리 뛰며 교회를 세워보고자 애쓰고 있었다. 그들의 헌신을 밑거름 삼아 청년부는 나름대로 부흥했다. 2년이 지나자 청년부 출석 인원은 100명이 됐다. 그리고 나는 깊은 고민이 빠졌다. 이 100명의 청년은 여전히 보잘것없음을 사랑하지 않았다. 그러던 중 기도와 말씀을 함께 나누는 훈련 프로그램을 도입했다. 훈련 프로그램의 목적은 세 가지였다. 첫째, 신학적 사고가 가능한 그리스도인을 양육한다. 둘째, 말씀 묵상과 기도가 생활화된 그리스도인을 양육한다. 셋째, 함께 기독교 가치관을 공유하고 저항 이데올로기를 생산하는 마을 공동체를 양육한다.
혼자서는 사고체계 변화가 거의 불가능하다. 그러나 같이 변화되는 것은 쉽다. 그것이 바로 공동체의 힘이다. 나는 청년부의 마을 모임을 위해서 이탈리아의 한 작은 마을에서 유래된 ‘레지오 에밀리아’라는 교육 방법의 일부를 도입했다. 레지오 에밀리아의 기록 작업은 세 가지 단계가 있다. 첫째, 의미를 찾는 과정이다. 배움에서 객관적 사실이 아니라 의미가 있는 중요한 것을 기록한다. 둘째, 생각과 의미를 재방문한다. 이 재방문을 위해 기록을 남기는 일이 중요하다. 셋째, 저항 헤게모니를 형성한다. 보잘것없음은 이 세계를 향한 저항 헤게모니이다. 각 개인이 보잘것없음 속에서 삶의 의미를 찾고, 자신들의 생각과 의미를 끊임없이 재방문하며 삶 속에서 이것을 정교화하는 작업을 해야 한다. 그리고 공동체가 함께 저항 헤게모니를 생산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기록 작업은 흥미롭다. 지금까지 청년부 마을 공동체는 주로 글이나 말을 중심으로 신앙을 고백하고 소통해왔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말과 글로 소통하는 것을 선호하지는 않는다. 특히 MZ세대는 사진, 그림, 연극, 노래, 연주 등 다양한 방법으로 자신을 표현한다. 설교를 들은 후 마을이 함께 토의하여 공동의 가치를 합의하고 다양한 매체를 통해 기록 작업을 한 후 모든 마을이 모여 함께 발표한다. 세상의 가치관이 무너지고 성경적 가치관이 재건되며 청년부 공동체는 천천히 그리고 위대한 걸음을 시작했다. 보잘것없음의 가치를 발견하기 시작했다. 진정한 부흥은 보잘것없는 자들이 선택되고 보잘것없음 속에서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는 과정이다. 젊은 세대는 올바른 방향을 깨우치면 포기하지 않는다. 이 세계를 향해 보잘것없음이라는 깃발을 들고 힘차게 전진할 것이다. 이 깃발을 들고 행진하는 모든 젊은 세대를 향해 기성세대는 진심으로 고개를 숙이고 감사를 표해야 한다. 그대들, 포기하지 않아줘서 고맙다.
십자가의 위대함 앞으로
2년 동안 ‘코로나 블루’로 지치고 피폐했던 MZ세대는 한 번이라도 다시 교회에 발걸음을 옮길 것이다. 작은 소망을 기대하며 혹은 그 소망이 얼마나 처연한 것이었는지를 확인하기 위해서라도 교회에 발을 들여놓을 것이다. 십자가를 품에 간직하고 숨겨서는 안 된다. 이 십자가의 진리를 분명히 보여줘야 한다. 이 시대 청년들에게 말하고 싶다. 지금까지 삶의 고통 속에서 교회로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세상이 줄 수 있는 위로만 베풀었던 교회를 용서하라. 그대들 일상의 미천함과 삶의 비극이야말로 십자가의 위대함에 한 걸음 가까이 갈 수 있는 통로이며 기회이다. 더는 물러서거나 의심하지 말고 십자가의 어리석음을 들여다보라. 그곳에서 참된 지혜와 영생을 발견하리라.
첫댓글 보잘것없음 때문에 선택에서 배제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선택 받을 수 있게 되는 것이 바로 복음이며 하나님나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