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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델, 에셔, 바흐>
- 더글러스 호프스태터 (까지, 2017)
8장 활자형 수론
- 괴델의 구성은 이 장에서 정리하려는 활자형 수론(TNT: Typographical Number Theory)이라는 형식체계 문자열의 내용과 형식의 기술에 의존한다. 괴델이 발견한 기묘한 일대일 대응 때문에, 문자열의 형식을 형식체계 자체 안에서 기술 할 수 있게 되었다.
- TNT가 공식화되었으므로, 임계점에 이르렀다. TNT는 [수학 원리]의 체계만큼이나 강력하다. 우리는 TNT로 수론에 관한 표준 논문에서 보게 될 모든 정리를 증명할 수 있다. 물론 TNT로 정리를 도출하는 것이 수론을 연구하는 최선의 방법이라고는 아무도 주장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느끼는 사람은 1000*1000이 얼마인지를 가로 세로 1000칸인 격자를 그린 다음 모든 네모 칸을 세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과 같은 부류에 속한다.
- 완전히 형식화한 다음에, 가야 할 유일한 길은 형식체계를 이완시키는 방법으로 가는 것이다. TNT를 더 넓은 맥락, 즉 도출 속도를 높일 수 있도록, 새로운 추론규칙을 표현하는 언어, 즉 메타언어의 형식화를 요구한다. 그렇게 하면 우리는 훨씬 더 멀리 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속도 증진 묘책들은 어느 것도 TNT를 더 강력하게 하지는 않는다. 그저 TNT를 좀 더 쓰기 쉽게 해준다.
- 이 장에서 다루려는 문제는, 우리가 명제 계산이 무모순성을 신뢰했던 것만큼 TNT의 무모순성을 신뢰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신뢰할 수 없다면, 우리가 TNT의 무모순성을 증명함으로써 TNT에 대한 우리의 신뢰를 확대하는 것이 가능하냐는 것이다.
- 아마 우리 자신의 사고과정, 즉 체계의 형식적인 규칙들로 포착하려고 했던 그 비형식적 사고과정들 자체가 모순적일지도 모른다. 물론 그것이 우리가 기대했던 종류의 일이 아니지만, 주제가 복잡해질수록 우리의 사고가 우리를 잘못된 길로 이끌지도 모른다는 것을 더더욱 상상할 수 있다.
- 그러나 어떤 증명수단이 사용되는 것을 보고 싶은가? 우리는 또다시 반복해서 나타나는 순환성의 문제에 부딪힌다. 우리의 체계에 대한 증명을 하는 데에 우리가 체계 속에 도입했던 것과 똑같은 도구를 사용한다면 우리가 무엇을 이루게 될 것인가?
- 우리가 TNT보다 약한 추론체계를 써서, TNT의 무모순을 확신하는 데에 성공한다면, 이 경우에 순환논증이라는 반박을 극복하게 될 것이다! 가는 밧줄에 매달린 가벼운 화실을 배 사이를 가로질러 쏜다. 일단 이 방식으로 두 배가 서로 연결되면, 무거운 밧줄을 끌어당길 수 있다. 우리가 가벼운 체계를 사용해서 무거운 체계가 무모순이라는 것을 보여줄 수 있으면, 정말로 무엇인가를 이루게 될 것이다.
- 다른 말로 하면, 정수들의 속성을 사용하지 않는다면(몇 개의 극히 간단한 속성만 사용한다면) 우리는 그 고유의 내적인 추론 양식보다는 약한 수단을 써서 TNT의 무모순성을 증명하려는 목표를 달성할 수 있다.
- 이것이 바로 20세기 초반 힐베르트가 이끄는 수학자와 논리학자의 학파가 품었던 희망사항이었다. 그들의 목표는 유한론적 추론 방법이라고 하는 매우 제한된 추론원리들을 적용해서, TNT와 비슷한 것인, 수론을 형식화한 것의 무모순성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그 제한된 추론원리들이 가는 밧줄이라는 것이다. 유한론적 방법에 포함된 것으로는 명제계산이 들어가 있는 모든 명제추론들이 있었고, 덧붙여 어떤 종류의 수치추론이 있다.
- 그러나 괴델의 작업은 TNT의 무모순성이라는 무거운 밧줄을 유한론적 방법이라는 가느다란 밧줄을 사용하여 간격을 가로질러 끌어당기려는 모든 시도는 실패할 수밖에 없음을 보여주었다.
9장 무문과 괴델
- 대학교 1학년 때 영어교수님이 수업 시간에 조주의 무(無)를 큰소리로 읽어준 이래로 삶의 선적인 측면과 씨름해왔고, 아마도 결코 멈추지 않을 것이다. 나에게 선은 지식의 모래함정, 무정부 상태, 어둠, 무의미, 혼돈이다. 선은 감질나게 하고 화가 나게도 한다.
- 선불교의 기본 교의 중의 한 가지는 선이 무엇인가를 규정하는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선을 어떠한 언어 공간에 가두려고 하든지 간에, 선은 그것을 거부하며 넘쳐흐른다.
- 선의 공안은 말로 되어 있지만, 선 연구의 중심 부분을 이룬다. 공안 자체가 깨달음을 전달하기에 충분한 정보를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 아마 우리 마음속에 있는 깨달음에 이르게 하는 메커니즘을 시동하기에 충분한 "방아쇠"로 간주될 수 있다.
- 공안:
한 스님이 남전 화상에게 물었다. "그 어떤 선사도 설하지 않은 가르침이 있습니까?"
남전이말했다. “있다.”
"그게 뭘니까?" 스님이 물었다.
남전이 대답했다. "그것은 마음도 아니고 부처도 아니고 물건도 아니다."
무문의 주석:
남전 화상은 자신의 보물-언어를 다 내주었다. 그는 몹시 당황했음이 틀림없다
무문의 시:
남전은 너무나 친절해 자신의 보물을 잃고 말았네.
진실로, 말은 힘이 없네.
비록 산이 바다가 될지라도
말은 타인의 마음을 열 수 없으리.
- 무문은 이 시에서 무의미한 진술을 하는 것이 아니라, 선의 핵심적인 어떤 것을 말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그런데 기묘하게도 그 시는 자기-지시적이다. 따라서 그것은 남전의 말에 대한 주석일 뿐만 아니라, 그 자신의 무력함에 대한 주석이기도 하다. 이런 유형의 역설들은 선의 두드러진 특징이다. 그것은 "논리의 마음을 분쇄하려는" 시도이다.
- 아마도 혼란을 야기하는 것이 선의 정확한 목적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혼란한 상태에 있으면 어느 정도까지는 우리 마음이 비논리적으로 작동하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그 이론에 따르자면 논리로부터 벗어날 경우에만 깨달음으로 도약할 수 있다. 그러나 논리의 어떤 점이 그토록 문제인가? 어째서 논리는 깨달음으로 도약하는 것을 방해하는가?
- 이원론에 대한 선의 투쟁 : 그에 대답하려면 우리는 깨달음이 무엇인가를 이해해야 한다. 깨달음을 가장 간결하게 요약하면 아마 다음일 것이다. 이원론(dualism)을 초월하는 것. 그러면 이원론은 무엇인가? 그것은 세계를 개념적으로 나누어 범주화하는 것이다. 이렇게 아주 자연스러운 경향을 초월하는 것이 가능한가?
- "나누어"라는 낱말 앞에 “개념적으로”라는 낱말을 붙임으로써. 나는 아마 나누는 것이 지적인 또는 의식적인 노력이며, 그래서 아마 간단히 생각을 억누름으로써 이원론을 극복할 수 있다는 인상을 주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세계를 범주들로 쪼개는 것은 사고의 위층 훨씬 아래에서 일어난다.
- 사실 이원론은 개념적으로 나누는 만큼이나 세계를 지각적으로 나누어 범주화하는 것이다. 바꾸어 말하자면, 인간의 지각은 본질적으로 이원론적인 현상이며, 이것은 깨달음의 추구를 힘겨운 투쟁으로 만든다.
- 선에 따르면 이원론의 핵심에는 말이, 그저 평범한 말이 있다. 말의 사용은 모든 말이 아주 분명하게 개념적인 범주를 나타내기 때문에 본질적으로 이원론적이다. 따라서 선의 요체는 말에 대한 의존을 극복하려는 투쟁이다. 말의 사용과 싸우는 데에 가장 좋은 무기 중의 하나는 공안이다.
- 공안에서는 말을 상당히 오용하기 때문에 만일 공안을 심각하게 받아들이면 정신이 어질어질한 상태가 된다. 따라서 깨달음의 적이 논리라고 말하는 것은 아마 틀린 것이고. 그 적은 오히려 이원론적이고, 언어에 의한 사고이다.
- 그런데 사실, 언어에 의한 사고보다 더 기본적인 것이 있는데 바로 지각이다. 어떤 대상을 지각하자마자, 우리는 그 대상과 그 밖의 세계 사이에 경계선을 긋는다. 세계를 인위적으로 부분들로 쪼개며 그로 인해서 진정한 길을 놓치는 것이다
- 참에 도달하기 위하여 말에 의존하는 것은 참에 도달하기 위하여 불완전한 형식체계에 의존하는 것과 같다. 형식체계는 참을 제공할 것이다. 그러나 곧 보게 되는 것처럼 제 아무리 강력하다고 해도 형식체계가 모든 참으로 인도할 수는 없다.
- 지각을 억누르는 것, 논리적, 언어적, 이원론적 사고를 억누르는 것, 이것이 선의 본질이다. 선의전일주의(holism)를 자기논리의 극단으로 밀고 갔다. 전일주의의 주장이 사물은 부분의 합으로서가 아니라 전체로서만 이해될 수 있다는 것이라면 선은 한 술 더 떠서, 세계가 전혀 부분들로 쪼개질 수 없다고 주장한다. 세계를 부분들로 나누면 망상에 빠져 깨달음을 놓친다.
- 선사는 분명히 깨달음의 상태란 자기 자신과 나머지 우주 사이의 경계선이 사라지는 상태라는 생각을 전달하고 싶었다. 이것이야말로 진정 이원론의 종식일 것이다. 왜냐하면 그가 말한 것처럼, 지각이 갈망하는 어떤 체계도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면 그 상태는 어떤 상태인가, 죽음이 아니라면? 어떻게 살아 있는 인간이 자기 자신과 외부 세계 사이의 경계를 없앨 수 있다는 말인가?
- 수학자들이 참을 얻는 방법으로서 공리적 방법론의 한계를 인식하기를 배운 것처럼 선은 자신의 한계를 인식한다. 이것은 선이 선 너머에 있는 것에 대해서 답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수학자들이 형식화의 바깥에 있는 유효한 형식을 명확히 이해하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10장 기술층위와 컴퓨터 체계
- 우리는 인간이 어마어마하게 많은 수(약 25조 개)의 세포로 이루어져 있고, 따라서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을 원리적으로는 세포 차원에서 기술 할 수 있다는 것을 안다. 또는 심지어 분자의 층위에서 기술할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는 병이 나면 의사한테 간다. 의사는 우리가 우리 자신이 대해서 생각하는 것보다 더 낮은 층위에서 우리를 관찰한다.
- 우리 자신에 대한 현미경적 기술을 우리가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느끼는 것에 결부시킬 수 있는 방법이 거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자신에 대한 별개의 표현들을 우리 마음속에 완전히 별개인 "구역"에 것 저장하는 것이 가능하다.
- TV 화면으로 웃고 있는 셜리 맥클레인의 동영상을 본다고 생각해보자. 우리가 그 영상을 볼 때, 실제로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은 어떤 여자가 아니라, 평면 위에서 점멸하고 있는 점들이라는 것을 우리는 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알지만, 전혀 그런 방식으로 생각하지는 않는다. 화면 위에 나타난 것에 대해서 극단적으로 대립하는 두 개의 표현이 있지만 우리는 그로 인해서 혼란을 겪지는 않는다. 우리는 한 표현은 차단하고 다른 표현에 주의를 기울일 수 있다.
- 인공지능 연구의 주요 문제들 중의 하나는 이 두 기술 사이의 간격을 이어줄 방법, 측 한 층위의 기술을 받아서, 다른 층위의 기술로 출력할 수 있는 체계를 구축하는 방법을 찾아내는 것이다.
- 이 간격이 인공지능에서 어떻게 다루어졌는지는 체스를 잘 두도록 컴퓨터를 프로그래밍하는 데에 대한 지식의 발전이 잘 보여주고 있다. 1950년대와 1900년대에 들어서서는, 기계가 체스를 잘 두도록 하는 묘책은 나뭇가지처럼 분기하는 가능한 경우의 수를 체스의 고수 삶보다도 기계가 더 멀리 내다보도록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 목표가 차츰 달성되어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컴퓨터의 체스 수준이 급성장하지 못했고, 따라서 체스 고수를 능가하지 못했다.
- 이에 대한 이유는 사실 이미 수년 전에 출간되었다. 1940년대 네덜란드의 심리학자 아드리안 드 흐로트는 체스 초보자와 고수가 체스 판세를 어떻게 인식하는가에 대해서 연구했다. 결과를 간략히 말하면. 고수들은 체스 말들의 배치를 “덩어리”로 인식한다는 것이다. 고수는 초보자와는 다른 층위에서 생각한다. 수를 내다보는 것에 의존하는 컴퓨터 체스 프로그램은 더 높은 층위에서 생각하는 것을 배우지 못했다.
- 아마도 덩이지어진 모델에는 중요한 약점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그 모델은 통상적으로 정확한 예측능력이 없다는 집이다. 즉 우리는 덩이지어진 모델을 사용함으로써 인간을 쿼크(또는 가장 낮은 층위에 있는 아무것)의 집합으로 보는 불가능한 과업으로부터 우리 자신을 구하지만, 그런 모델들은 우리가 말하거나 행동하는 것을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느끼고 반응하는가에 대한 확률적 추정만을 전달해줄 뿐이다. 우리는 높은 층위의 덩어리지어진 모델들을 사용하면서 단순성을 위해서 결정론을 희생시켰다. 덩이지어진 모델은 행동이 수행될 것으로 기대하는 "공간"을 정의한다. 그리고 그 행동이 그 공간의 어느 부분에서 수행될지 확률을 명시한다.
- 오래된 금언이 있다. "컴퓨터는 당신이 명령한 것만 할 수 있다" 이것은 어떤 점에서는 맞는 말이지만, 핵심을 놓친 말이다. 우리는 컴퓨터에 명령을 내린 결과를 미리 알지 못한다. 따라서 컴퓨터의 행동은 마치 사람의 행동처럼 당혹스럽고 놀라우며 예측하지 못할 수 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출력이 떨어질 영역을 미리 알지만, 어디에 떨어질지 상세히 알지는 못한다. 예를 들면 원주율을 소수점 100만 자리까지 계산하는 프로그램을 만들 수 있다. 그 프로그램은 인간보다 훨씬 빨리 값을 토해낼 것이다. 그러나 컴퓨터가 프로그래머를 앞지르고 있다는 사실에는 아무 역설도 없다. 우리는 출력이 떨어질 영역 즉 0과 9사이의 숫자 영역을 미리 알고 있다. 그것은 우리가 프로그램의 행동에 대해서 덩이지어진 모델을 가진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우리가 그 나머지도 알았더라면 그런 프로그램을 만들지 않았을 것이다
- 이 오래된 금언은 또 다른 의미에서 녹이 슬어 있다. 그것은 우리가 더 높은 층위의 언어로 프로그래밍할수록 컴퓨터에 무엇을 명령했는지 점점 더 정확하게 알지 못한다는 사실과 관련이 있다! 겹겹의 번역 층은 복잡한 프로그램의 최전선을 실제의 기계어 명령들로부터 분리할 것이다. 우리가 생각하고 프로그래밍하는 층위에서는, 작성하는 문장의 강제나 명령이라기보다는 선언이나 제안에 가까울지 모른다. 그리고 높은 층위의 문장을 입력했기 때문에 야기된 내부적인 모든 덜컹거림은 외부에서 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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