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솔사 多率寺
다솔사(多率寺)라는 사찰 이름의 유래에 대하여는 두 가지 설이 있다. 첫째는 글자 그대로 소나무가 많은 곳이었기 때문이라는 설인데, 이에 대한 문헌적 근거는 발견되지 않는다. 둘째는 이 절이 위치하고 있는 주산(主山)이 대장(大將)과도 같아 '군사들을 많이 거느리고 있다 '는 의미에서 유래하였다는 설이다. 이러한 내용은 '다솔사명부전대양루사왕문중건기'에 전하는데, 그 관련 부분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다솔사의 주악(主嶽)은 마치 전후좌우에 대궐을 지키는 병사들이 둘러처져 있는 것과 같은 대장(大將)의 모습으로 앉아 있다. 사찰의 이름을 이렇게 지은 것은 ' 많은 군사(軍士)를 거느리고 있는 것과 같다 '는 데에서 뜻을 취한 것이다.
다솔사의 창건
다솔사의 창건연대는 503년 설과 511년 설이 있다. 먼저 각종 사전류와 안내 자료에는 511년(신라 지증왕 12) 창건설이 실려 있다. 연기조사(緣起祖師)가 이 해에 영악사(靈嶽寺)라는 이름으로 창건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다솔사의 역사를 전하는 대표적 자료로, 1704년에 세운 '북지리산영악사중건비(北智理山靈嶽寺重建碑) ... 위 사진'가 있는데, 이 비에서는 503년에 창건되었다고 한다. 이 중건비는 지금까지 발견된 다솔사 관련 자료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이다.
多率寺, 이름의 변화와 유래
다솔사는 여러 차례에 걸쳐 사찰의 이름이 변화되었다. 1704년에 건립된 ' 북지리산영악사중건비 (北智理山靈嶽寺重建碑)'에 의하면 다솔사는 처음 영악사(靈嶽寺)라는 이름으로 창건되었으며, 이후 다솔사(多率寺) - 영봉사(靈鳳寺) - 다솔사 - 영악사의 잦은 변화를 거쳤다고 한다. 하지만 네 번 째 중창주인 도선국사(道詵國師)가 9세기 중후반 경 다시 영악사로 명명한 이후 오랫동안 이 이름을 유지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을 비롯하여 가람고, 범우고 등의 자료에는 모두 영악사로 기록되어 있는데, 이로 미루어 본다면 적어도 18세기 후반 무렵까지는 영악사의 이름으로 존속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뚜렷한 이유는 밝혀져 있지 않지만 18세기 후반 경부터 다솔사라는 이름이 다시 등장하고 있어 주목된다.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다솔사(多率寺)의 이름이 유지되고 있다.
어금혈봉표 御禁穴封表
수많은 병사를 거느리고 있는 형국이라 하여 다솔사(多率寺)라고 하는데, 천년고찰임을 입증이라도 해줄 듯이 초입부터 울창한 장송(長松)들이 하늘을 뒤덮고 있다. 그 오솔길을 한참 오르다 보면 오른쪽 길가의 커다란 바위를 만나게 된다. 이 바위에는 조선시대 고종(高宗) 22년에 쓴 비명(碑銘)이 새겨져 있다. ' 어금혈봉표 (御禁穴封表) '라는 커다란 글씨와 ' 광서십일년을유구월일 (光緖十一年乙酉九月日) ' 이라는 작은 글씨이다.
어금혈봉표(御禁穴封表)란, 어명(御命)으로 다솔사 경내에 무덤을 쓰는 것을 금지한다는 의미의 표지석이다. 그리고 광서십일년을유구월일(光緖十一年乙酉九月日)에서, 광서(光緖)란 청나라 연호로 고종 22년 9월을 의미한다.
어금혈봉표의 유래
1882년 구식 군대의 차별대우에 대한 불만이 폭발하여 일어난 임오군란(壬午軍亂)으로, 여흥민씨(驪興閔氏)들이 살해 당하였다. 임오군란 당시 구식 군대의 추대로 흥선대원군이 재집권하고, 명성황후는 홍계훈(洪啓薰) 등의 도움으로 이천, 장호원을 거쳐 충주로 피신하였다가 여주로 숨었다. 청나라의 군사적 압력으로 임오군란은 진압되고, 흥선대원군은 청나라 텐진으로 끌려가고, 명성황후는 한성으로 돌아왔으나, 권력투쟁으로 조정은 매우 어수선하였다.
그러다보니 지방관리의 기강이 해이해질 것은 당연하였다. 당시 경상감사가 봉명산 다솔사 자리가 풍수지리적으로 장군대좌혈인데, 이곳에 부친의 묘를 쓰면 가문(家門)이 일어난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다솔사에 사람을 보내 이장(移葬) 준비를 지시하면서 다솔사는 발칵 뒤집혔다.
당시 수도승인 봉암스님을 중심으로 이와같은 탐관오리의 비행(非行)을 조정에 직소하기 위해 승려와 신도들의 연명을 맏은 탄원서를 모아 상경(上京)을 결행하였다. 기록에는 때마침 청나라로 가는 동지사(冬至使)를 만나 그 관리에게 하소연하였다고 되어 있으나, 그 시기를 고려할 때 동지사가 아니라 그 해 8월 국경회담을 위해 청나라로 향하던 토문감계사(土門勘界使) 행렬을 만난 듯하다. 동지사란 조선시대에 해마다 정기적으로 명나라와 청나라에 보내던 사신을 말한다. 당시 토문감계사 대표는 이중하(李重夏)이었는데, 그는 성품이 강직하고 청렴하여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강직한 인물이었다. 이중하는 승려들로부터 이같은 지방관리의 비행을 전해 듣고 즉석에서 서찰을 적어주며 이를 경상감사에게 전하라며 행렬을 돌려 후에 高宗에게 보고하였다고 한다.
승려들은 기쁜 마음으로 문경의 한 주막에서 밤을 보내게 되었는데 우연히 곤양군수로 부임해 가는 신임 목민관을 만나게 되었다. 인사를 고하고 그간의 사정을 아뢰자, 그 군수는 서찰을 자신에게 맡길 것과 부임 보고를 할 때 전하겠다는 약속을 하였다. 마침내 부임 보고를 마친 신임 곤양군수는 다솔사(多率寺)의 일을 논하자, 경상감사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하지만 신임 군수는 그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며 ' 어명이요 ' 라고 외치며 ' 어금혈봉표(御禁穴封表)'라고 외쳤고, 경상감사는 무릎을 조아리고 벌벌 떨며 일어나지 못하였다.
그래서인지 거대한 바위에 쓰인 '어금혈봉표'의 '표(表)'가 일반적인 봉표(封標)의 '표(標)'와 같지 않음은 어명의 서찰을 옮겨 쓴 것이기에 그런가 추정하고 있다. 즉, 어금혈봉표는 임금께서 무덤을 막을 것을 명한다는 친서인 셈이다. 그렇기 때문에 일반 봉표는 어명의 행정적 지휘인 반면에 다솔사 봉표는 직접적 지휘서신인 셈이다. 이후로 다솔사 경내에는 어떤 무덤도 쓸 수 없었다.
근대의 다솔사
다솔사는 독립운동의 거점이자 현대 차문화(茶文化)의 산실로 근대 역사에서는 빼놓을 수 없는 역사적 사찰이다. 효당 최범술(曉堂 崔凡述)과 만해 한용운(卍海 韓龍雲)이 이곳 다솔사와 깊은 인연을 맺으면서 다솔사는 일제강점기 민족독립운동의 거점지와도 같은 위상을 지니게 되었다. 즉, 만해 한용운 스님이 이곳 안심료(安心寮)에서 독립선언서의 초안을 작성하기도 하였다.
이곳에는 단지 불교인들 뿐만 아니라 당시 우국지사와 문인(文人)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던 것으로 전한다. 효당(曉堂)스님은 1934년부터 다솔사에 초등교육과정의 광명학원(光明學院)을 세워 그 인근의 농민 자제들을 교육시키고 있었는데, 당시 그 학원의 강사는 김동리(金東里)가 주로 담당하였다고한다. 이러한 경험과 불교와의 만남을 통하여 그의 대표적 소설인 '등신불 (等身佛) '이 탄생하였다는 사실은 유명한 이야기이다. 김동리(金東里)는 1934년 신춘문예 당선 이후 집필에만 전념하기 위하여 다솔사 안심료(安心寮)에 머물렀다. 이때 다솔사 주변의 배경과 이야기들을 소재로 한 황토기, 역마, 바위 등 주옥같은 작품들이 쓰여졌다. 김동리의 대표작품으로 꼽히는 '등신불(等身佛)'도 만해 한용운과 효당스님이 나누는 등신불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훗날 소설로 발표한 것이다.
또한 효당(曉堂)스님은 '한국의 차도 (韓國의 茶道)'라는 우리나라 최초의 차도(茶道) 개론서를 저술하였으며, 다솔사에서 재배하는 차를 독특한 제다법으로 반야로라는 정제증차(精製蒸茶)를 생산하고 전수시키는 등 효당스님은 현대 차문화를 확립하는데 일조를 하였다. 지금도 다인(茶人)들 사이에서 다솔사는 차문화 유적지로 널리 알려진 곳이다.
대양루 大陽樓
다솔사는 대웅전(적멸보궁), 응진전, 극락전 등 10여동의 건물이 있다. 이 가운데 대양루(大陽樓)는 현존하는 건물 가운데 가장 오래된건물로, 1749년(영조 25)에 세워진 2층 맞배지붕 양식으로 건평이 106평에 이르는 규모이며, 경상남도유형문화재 제83호로 지정되어 있다.
다솔사의 현존 건물 가운데 가장 오래된 누각(樓閣)으로서 1748년에 건립된 대양루는 맞배지붕의 중층누각(重層樓閣)으로 건평이 106평이 이르는 규모가 큰 건축물이다. 아래 위층의 높이가 모두 13m에 달하며, 36개의 아름드리 큰 기둥이 그 육중한 몸 전체를 떠받치고 있다.
아래 층은 본래 출입문 구실을 하였으나, 누각 왼편에 새로 돌계단이 생기면서 지금은 칸막이로 창고와 기타 용도로 이용되고 있고, 2층은 승려들의 수도장일 뿐 아니라 불교 신자들의 집회장으로 널리 사용되어 왔다고 한다. 511년에 세워진 다솔사는 1592년 임진왜란 때 폐허화되어 방치되다가 1686년에 원래의 모습을 되찾았으며, 1914년에 다시 대화재로 모든 전각이 소실되었는데, 이때 대양루만은그 화(禍)를 면하였다.
광복 전에는 민족정신 함양의 도장이었을 뿐 아니라, 광복 후에는 좌우익의 혼탁한 사회질서를 바로 잡기 위하여 지역사회 청년들의 교육도장이 된 때도 있었다. 또한 6.25 한국전쟁 때에는 서울에서 피난온 동여중학교가 이곳으로 옮겨와 학생들의 교실로서 4년간이나 활용된 적도 있었다.
다솔사의 가람배치
다솔사에는 현재 일주문이나 천왕문이 따로 없고 대양루(大陽樓)를 통하여 경내로 들어서게 된다. 경내에 들어서면 본전인 적멸보궁을 중심으로 오른쪽에 극락전과 응진전이 자리하고 있으며, 극락전과 마주보면서 대양루가 있다. 대양루 양쪽에는 요사가 각각 위치하고 있다.
오른쪽에 있는 요사는 안심료(安心寮)인데, 지금 종무소와 식당을 겸하고 있다. 안심료 뒤에도 승방 등 여러 채의 요사가 있다. 다솔사의 건물 대부분은 1914년 12월7일 발생한 화재 이후 3년에 걸쳐 중건(重建)한것이다. 근래에 이르기까지 대양루 위에는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의 필적인 '유천희해 (游天戱海) '라는 편액이 걸려있었으나 지금은 그 행방을 알 수 없다.
적멸보궁 寂滅寶宮
다솔사 적멸보궁(寂滅寶宮)은 다솔사의 금당(金堂)으로 경내보다 훨씬 높게 쌓은 축단 위에 자리하고 있다. 앞면 3칸, 옆면 2칸 규모이며 다포계(多包系)에 내외 3출목의 팔작지붕을 하고 있다. 본래는 대웅전 건물이었는데, 1978년 당시 대웅전 삼존불상의 개금(改金) 불사 때 후불탱에서 108과(顆)의 사리(舍利)가 발견되자 적멸보궁으로 바꾸고 불사리(佛舍利)는 사리탑을 적멸보궁 뒤에 새로 만들어 봉안하였다.
적멸보궁(寂滅寶宮) 안에는 닫집과 불단을 마련하여 부처님이 열반에 드시기 전의 모습인 와불상(臥佛像)을 금동으로 조성하여 봉안하였고, 그 뒤로 안상(眼象) 모습의 유리창을 내어 적멸보궁 안에서 뒤에 있는 사리탑을 바라보고 친견(親見)할 수 있도록 하였다.
극락전 極樂殿
극락전(極樂殿)은 경상남도유형문화재 제 148호로 지정되어 있다. 다솔사는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으나, 1680년에 크게 중건하였는데, 이때 극락전이 건립되었다. 그 후 1748년에 소실되었고, 1914년에 다시 소실되었다가 이듬해 다시 복구하였다. 극락전의 규모는 정면 3칸, 측면 2칸이며 구조는 익공계에 속한다.
가구(架構)는 대개 지대석 위에 마룩 없으며 기둥 사이에 넉살문이 셋이고 주심포식 건물이다. 단층 맞배지붕이며, 정면 좌우 측간의 창호, 마름, 벽체가 특이하게 설치되어 있다. 극락전은 정토종 계통의 절에서 아미타불을 봉안해 둔 법당이다. 이곳에는 모든 중생을 제도하려는 부처인 아미타불좌상을 안치하고 있다. 양쪽에는 극락정토의 아미타불 협시(脇侍)로서 부처의 교화를 돕는다는 관세음보살상이 안치되었다.
응진전 應眞殿
안심료 安心寮
다솔사 안심료(安心寮)는 1930년대에 지은 단층의 평범한 요사(寮舍)이지만, 만해 한용운 스님이 이곳에 기거하면서 한국 불교의 법맥을 이은 유서 깊은 장소이다. 안심료 앞에는 측백나무 세 그루가 높다랗게 서 있는데, 한용운스님의 회갑 때 지인(知人)들과 하께 심은 것으로 '황금측백나무'라고 부르고 있다.
안심료는 만해 한용운(萬海 韓龍雲) 스님이 독립선언서의 초안을 작성한 곳이며, 소설가 김동리(金東里)가 그의 대표 소설인 '등신불(等身佛)'을 집필한 곳이기도 하다. 그리고 일제강점기에 만해 한용운, 효당 최범술, 변영태, 변영만, 변영노, 김범부, 김범린 등의 수많은 우국지사(憂國志士)들이 민족의 독립운동을 위한 정신교육의 장으로 활약하던 곳이다.
보안암 普安庵
보암암(普安癌)은 봉명산(鳳鳴山)에 자리하고 있다. 일명 미륵암(彌勒庵)이라고 했으며, 창건연대는 명확하게 전하지 않는다. 그러나 1336년 무렵에 이곡(李穀. 1298~1351)이 쓴 기록에 의하면 지금은 터만 남은 봉일암(鳳日庵)의 남쪽 천령(天靈) 위에 석굴(石窟)을 만들어 미륵석상을 봉안하였으니, 이는 신라 신문왕(신문왕)의 두 왕자가 창건한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17세기 중엽의 기문에도 미륵보의 석실(石室) 안에 장륙석불상이 봉안되어 있다고 되어 있다. 이러한 기록으로 미루어 보아 보안암(普安庵)의 창건연대는 신라 때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보안암은 본래 서봉사(瑞鳳寺)에 부속된 암자이었으나, 서봉사(瑞鳳寺)가 폐사(廢寺)됨에 따라 다솔사로 귀속되었다.
석굴 石窟
보암안의 석굴(石窟)은 판형(板形)의 사암질(沙岩質) 자연석을 쌓아올린 석실(石室)로서, 앞에 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석조의 가구(架構)를 짜올렸다. 통로로 들어가면 주실(主室)은 거의 정사각형을 이루고 있으며, 천장은 장대석(長大石) 두 개를 동서로 걸치고 다시 그 위에 또 하나의 장대석을 걸쳐 놓았다.
현재 석굴(石窟) 안에는 결가부좌(結跏趺坐)한 석조여래좌상과 16나한상(羅漢像)이 봉안되어 있다. 전실(前室)의 목조가구 수법을 본뜬 석조 가구(架構)는 우리나라의 석굴이나 마애불(磨崖佛)의 앞면에 설치하던 전통적인 방식을 보여주고 있어 경주 토함산 석굴암의 구조를 따르고 있는 고려시대의 중요한 축조 석굴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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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김규봉 ... 사는 이야기 원문보기 글쓴이: 非山非野
첫댓글 절이름처럼 예쁜 도량 잘 보고 가네요 ^*^
좋은절 보게 해 주심에 감사 인사 드립니다 _()_
편히앉아 아주 잘 도량을 돌고 갑니다. 감사합니다._()_
좋은 도량 잘 보고 갑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