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묘를 쓴 내력에 관하여, 당나라 주호선사는 811년 공주순방길에 금강나루 뱃사공 이방이가 효심있고 덕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가서 이방이의 나룻배를 타고 강을 건느달라고 하여 반대편 강변에 이르자 다시 되돌아 가자고 요구하기를 10여차 반복하였음에도 이방이가 싫은 기색없이 요구에 따랐다. 이에 주호선사는 탄복하여 이방이의 죽은 아버지 이석재의 묏자리를 잡아주고는 말하기를, 이 자리는 반개화(半開花)와 같아서 2백년후부터 자손이 번창할 것이라 하였다. 과연 120년뒤 이치가 탄생하여 고려 태조의 군사들이 금강을 도강하는 것을 도와주고 태조로부터 도(棹)란 이름을 하사받고 태사 삼중대광에 봉직되고 3남을 두어 그 이래 자손이 번성하고 명문가가 되었다.
또 설화로, 주호선사는 묘를 이장하지 말라고 당부하였는데 후손들이 국풍 박상의(1538~1621)의 말을 듣고 이장하려고 파묘해 보니 “박상의가 래룡일절이 끊어진줄 알고 만대영화지지인줄은 모른다”고 새긴 지석이 출토되었다는 것이다. 전의이씨들은 주호선사를 작은 석상으로 조각하고 진양각을 지어 모시고 있으나 박상회를 언급한 지석은 남아 있지 않다. 전의이씨는 수군(水軍)혈통인가? 수군절도사를 13명이나 배출했다
* 공주 신광동 산10(금강홍수 통제소 부근에 주차하고 임도를 따라 3백미터 올라간다)을 답사해보니 청룡 백호가 없고 전순을 쌓아 올리고 월아를 만들어당판을 보충하였다. 사신사(四神砂)로 바람을 막는 전형적인 명당과는 많이 다르다. 다수는 조선백대명당에 포함시키고 있으나 이 묘는 특정인이 차지해야 효용이 있는 혈이다. 주호선사의 말과 발복을 종합해보면 알 수 있다. 즉,
이방인 이하 4~5대 후손이 뱃사공을 하면서 선행을 하면 후손이 임금을 만나 개국공신이 되고 이후에 후손들이 벼슬길에 나아가서 번창한다. 다시 말하면 이도가 탄생하는 기반이 되는 역할을 한 것이다. 이 묘가 속발하여 부유하게 살았다면이도가 고달픈 뱃사공으로 살지 않았을 것이고 그렇게 되면 이도가 태조를 만나 공을 세울 수도 없었을 것이다. 이석재가 전의이씨의 시조가 되지 못하고 이도가 시조로 된 것도 음미해 볼만하다. 주호선사는 하필 나룻배를 타고 10차례나 인내심을 시험해 보았겠는가? 150년 동안 발복을 기대릴 수 있는 인내심이 있는 혈통인가를 시험한 것이다.
묘쓴지 8백년후에 박상의가 와서 이장을 권할 것이라는 족집게 같은 말은 거짓이 분명하다(지석이 현존하지 않는다). 만대영화지지라는 말 또한 이 묘 자체로는 성립되지 않는다.
* 이태사의 묘 지형---
2. 시조 이도의 묘
* 전의(全義)는 전성(全城) 전산(全山)이라고도 하며 현재 전의면 일대를 말한다. 고려 왕건이 후백제를 정벌하려고 군사를 이끌고 금강에 이르렀을 때 이도가 주변 배들을 모우고 금강의 지형을 잘 알기에 병사들을 도강시키는데 큰 공을 세웠다. 이에 태조는 개국공신으로 인정하여 전의 땅을 하사하고 도(棹)라는 이름도 하사하였다. 이도의 선조인 이석재가 도시조가 되아야 하는데 도시조로 부르지 않고 태사로 칭한다. 인구는 16만 59위(2015년)이다.
* 시조 이도의 묘는 세종시 전의면 유천리 산3-1에 있다. 마을 길옆에 크다란 신도비가 있고 그 뒤 조금 가면 동그란 원판위에 묘가 있다. 입수가 좋으나 북향인 탓에 봉분에 이끼가 많다. 도선국사가 소점한 복호혈이라는 말이 있다. 그러나 태조(877~943, 918 즉위)는 도선국사(827~898)가 사망할 때 27세이었고 이도가 태조를 만난 것은 궁예를 축출하고 고려를 건국한 이후이라고 추측되므로 도선국사가 소점하였다는 말은 사실이 아니다. 중등상급(202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