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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월일 |
한국공산주의운동사 |
세계사 |
1927. 5. 7 |
신간회 일본지부 설립 |
1927- 중국 난징에 국민정부 수립 |
1927. 12 |
소련, 제 1차 5개년 경제계획 채택 | |
1928. 4 |
일본당국이 동경조선무산자동맹의 해산 명령 |
1928- 파리조약 조인 |
1928. 8. 27 |
켈로그-브리앙 조약 | |
1928. 8. 29 |
8. 29사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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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9. 5. 1 |
상조회(동경친일한구인단체) 습격 |
1929- 뉴욕 주가 대폭락, 세계 대공항 시작 |
1930 |
헤이그 회의 | |
1931. 2. 17 |
고경흠, 영등포회의 참석 |
1931-마오쩌둥, 중화 소비에트 임시정부 수립 |
1931. 8 |
조선공산당재건협의회 일본지국을 설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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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1. 9. 18 |
만주사변 발발 | |
1931. 12.23 |
일본 공산당의 기관지 <적성>을 통해 한국공산당의 일본 공산당에 가입을 공식적으로 발표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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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일본에서의 공산주의운동이 과연 가능했을까하는 의문을 품고 있었는데, 다른 학우들도 그러한 의문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일본사회에서도 좌익은 존재했었고 일본사회의 다원성, 민주주의적 전통은 사회주의운동에 긍정적으로 작용을 했습니다. 저는 일본에서 공산주의 이론의 교육이 활발하게 이루어졌으며, 그리하여 일본은 한국 공산주의운동가들이 공산주의 이론을 학습하고 또 공산주의운동의 이론적 바탕을 완성하는 곳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이와 동시에 한국을 식민지로 하고 있는 국가이기 때문에 갖는 한계도 있었을 것이라고 봅니다.
발표 잘 들었습니다. 국외 일본에서의 공산주의 운동이 쉽지않았을텐데 일본에서 공산주의 운동을 전개 하는 모습을 보며 공산주의 운동가들의 끊임 없는 노력을 다시 확인 할수 있었습니다. 그 노력에도 결국 공산주의 운동의 붕괴를 보며 안타까움을 느꼈고 상해에서 처럼 일본에도 공산주의 운동가들이 모여서 했다면 좋은 결과가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댓글은 간명한 발표 내용과 더불어 공동 삶의 원리를 찾아야 합니다.
발표 잘 들었습니다. 일본은 사회주의자들에게 우호적인 시선을 보내면 사회주의 운동에 긍정성을 보여주었습니다. 하지만 일본에서도 한국 공산주의 활동은 한계가 있었습니다. 일본의 협조가 무한하게 이루어지지 않았고 이들 안에는 국가주의의 성향이 더욱 강했기 때문입니다. 결국 일본에서의 한국 공산주의자들의 활동은 실패로 끝나게 됩니다. 일본에서까지 한국 공산주의자들의 노력은 별다른 성과를 보이지 못합니다. 하지만 이들은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끊임없이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이런 이들의 노력이 한국 공산주의의 특성을 잘 나타내고 있으며 한국 공산주의를 이해할 수 있는 기반이 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번 발표에서는 일본에서의 한국 공산주의 운동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일본은 국내와는 달리 한국 공산주의자들에게 많은 압박을 주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한국 공산주의자들을 변호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더 깊게 생각해 보면, 표면적으로 심한 억압을 하지는 않았지만, 계속적인 감시와 통제를 했습니다. 조선공산당이 국내에서 많은 어려움에 직면하고 결국 실패하게 되지만, 만약 국내에서 조선공산당이 존재했더라면 일본에서의 활동이 조금은 수월하지 않았을까요.
국내에서 당 재건 노력이 실패하게 된 것에 또 한 번 안타까움을 느낍니다. 근본이 제대로 서 있어야 무슨 일이든지 성공을 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번 절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우리가 무슨 일을 할 때에도 근본을 바로 잡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할 것입니다. 발표 잘 들었습니다.^^
공산주의의 또 다른 국외지부인 일본은 아시아의 국가 중에서는 비교적 발전된 나라였습니다. 일본 사회는 학문적 다원성이 허용되는 사회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국내에서보다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공산주의 활동이 전개될 수 있었습니다. 신간회의 조직을 이끌었던 사람들도 바로 일본에서 유학을 한 한국 학생들이었던 것을 생각해 봤을 때 일본에서 공산주의운동은 순탄하게 전개 될 것만 같았습니다. 그러나 해외지부가 단순히 그 나라 상황이 안정적이라고 해서 성공을 이루는 것은 아닙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공산당의 존재입니다. 그들은 국내 공산당과 긴밀히 연계되어 있었습니다. 조선공산당이 실패한다면
해외 지부에서 많은 성과가 있더라도 성과가 있다고 할 수 없습니다. 일본에서의 공산주의운동은 국내 공산당의 해체로 인해 구심점을 잃고 맙니다. 그 결과 얼마 후 일본 지부는 사라지게 됩니다. 이것으로 다시 한 번 국내 공산당의 중요성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공산주의 구심체인 국내 공산당의 단단한 기반과 강력한 지도력을 바탕으로 할 때 해외에서도 활발한 활동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양세현 학우 발표 잘 들었습니다. 이번 절에서는 조선공산당의 해외지부의 하나인 일본 총국의 활동에 대해 알 수 있었습니다. 이들은 해외에서 공산주의운동을 펼쳤지만, 그들의 목적이 국외에 있는 우리 한국인을 공산주의화 시키는 것이었고, 국외에서의 활발한 세력 확장으로 국내의 공산주의운동을 영속화 시키려는 것이었기 때문에 조선공산당의 한 지부로서의 역할을 하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이들 해외지부는 다른 나라의 공산주의운동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한국공산주의운동만의 특수성을 보여준다는 점에 의의가 있습니다. 그리고 일본공산주의자들과 국내의 한국공산주의자들 간의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 정신을 가지고 끊임
없이 협력하고 활동했다는 것이 중요한 특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시기적으로 보았을 때 일본의 정치색이 친사회주의계열에 가까웠기 때문에 일본에서의 공산주의 활동은 상대적으로 좋은 조건에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국외 공산주의자들은 국내보다 방대한 지역에서 활동해야 했기에 국내의 당과의 상호연락이 미숙했고, 효과적인 지도와 방침을 받을 수 없었기에 조선공산당이 붕괴되면서 방향성을 잃게 된 일본지부는 결국 실패하게 됩니다.
발표 잘 들었습니다. 일본 사회는 군국주의에 앞서 사회주의계열에 가까웠습니다. 다른 지역의 공산주의운동처럼 저해하는 요인이 많지 않았고 분파주의에 대한 대립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일본에서도 경관의 끊임없는 억압이 있었고 일본의 지속적 피해서 인해 일본공산주의자와의 관계 유지가 힘들어지게 됩니다. 여러 활동을 통해 일본총국의 부활을 진행하였지만 결국 지압되고 붕괴하게 됩니다. 한국인의 기질적 특성을 파악한 일본의 승리라고 생각됩니다.
발표 잘 들었습니다. 이번 절은 국외에서의 활동 2번째로 일본총국에서의 활동이었는데, 처음 딱 듣고 의아해 하였던 것은 국내에서도 쉽지가 않은데 어떻게 일본 본토에 가서 공산주의 운동을 할까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공부를 하면서 배우게 됐습니다. 일본에서 공산당이 활동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일본경찰이 재일 한국인에 대해서 비교적 관대한 대우를 하였고, 좌익 일본인 변호사들이 한국 공산주의자들을 변호하였습니다. 또 이들은 선전 선동에 집중되었고, 선전물을 만들어서 출판하였습니다. 하지만, 이런 조건에서도 일본에 의해 진압되었습니다. 그래도 국내의 경우에 비하면 적게 체포됐고 판결도 비교적 가벼웠습니다.
발표 잘 들었습니다. 이 절에서는 일본에서의 공산주의 활동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국외에서의 당 설립을 위해 일본으로 간 공산주의자들은 반가울 수 밖에 없었을것이라 생각합니다. 개인주의의 성향이 강한 일본인들에게 공산주의를 알리는 일은 쉬운 일이라 생각합니다. 이렇게 일본에서 성공을 거두나 싶었지만 일본이 아시아 제패를 위해 군국주의 체제로 바뀌면서 일본에서의 활동 또한 실패로 끝이납니다. 만약 우리나라에 굳건한 조선공산당이 있었다면 일본에서도 성공 할 수 있지 않았나 생각하게되었습니다.
우리나라 조선공산당인데 국외에 뿌리를 내린다는것 자체가 조선공산당 재건의 노력을 감소 시키는 역할을 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발표 잘 들었습니다. 일본 내에서 한국공산주의 운동은 일본경찰의 관대한 대우, 분파주의에 빠지지 않으려는 노력 그리고 좌익 일본인 변호사들의 변호 등 분명 다른 지역보다 이점이 많았습니다. 또한 시기적으로도 일본사회가 군국주의로 변하기 전이였다는 이점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활동했던 지역이 일본이라는 점은 그들의 실패를 예고하고 있었으며 결국 만주에서와 같은 결과를 갖게 됩니다.
하지만 일본 내에서의 한국공산주의 운동은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에 입각하여 일본 공산주의자들과 협력하였다는 점은 매우 의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일본에서의 공산주의운동과 국내의 공산주의운동에 있어 다른 점은 분파주의가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과 선전과 선동에 집중했다는 점 특히 고경흠이 12월테제를 받아들이는 태도였습니다. 먼저 재일 유학생들에 의해 주축을 이뤘던 일본에서는 여러 지역적 특색을 가진 국내의 공산주의 세력에 비해 통합하는데 쉬웠을 것입니다. 그리고 공산주의혁명에 있어서 가장 기초적인 단계인 선동과 선전에 집중 하위계층을 위한 노력을 한 것도 국내의 무력투쟁과 같이 긴박했던 상황이 없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러한 특징은 국내가 아니라 일본에서 활동하는 공산주의자들이 경험할 수 없었으므로 가능했을 것입니다.
저는 12월테제를 받아들이는 고경흠의 태도에 눈길이 갑니다. 국내의 공산주의자들은 파벌주의로 인한 주도권 싸움에서 밀리지 않기 위해 코민테른에게 맹신적인 태도를 취했습니다. 하지만 고경흠은 12월테제를 받아들임에 있어 테제의 주지는 받아들이지만 한국공산주의자들이 직면한 문제와 장애라는 관점에서 테제를 재해석 했다는 것에 의미를 두고 싶습니다. 이것은 한국의 고유한 상황을 이해함으로써 공산주의의 발전을 위한 문제점을 강조한 것입니다. 국내의 분열된 공산주의 세력이 이러한 점을 교훈삼아 활동했다면 좀 더 발전된 한국만의 공산주의 운동이 이루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발표 잘 들었습니다. 이번 절에서는 일본 내에서의 한국공산주의운동에 대하여 다루고 있습니다. 기존의 예상과 달리 일본 내에서 한국공산주의운동의 발전은 그리 어렵지 않게 전개될 수 있었습니다. 일본 경찰의 관대함, 국내만큼 심하지 않았던 분파주의, 수월한 지하활동은 일본 체제 하에서 한국공산주의자들을 변호하는 일본인까지 만들어낼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일본 경찰의 끊임없는 포위 아래 지속적인 관계는 발전될 수 없었습니다. 국내와 만주에 이은 일본 내에서의 끊임없는 탄압은 일본 내에 존재하는 지도자들과 공산주의자들이 체포됨에 따라 실패로 돌아가게 됩니다. 국내에 확고한 뿌리를 내리지 못한 채 국외에서 행해지는
일련의 국외지부화동의 한계점에 대하여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만드는 절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