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鷹孵冷秋(응부냉추)
鷹:매 응, 孵:알 깔 부, 冷:찰 냉, 秋:가을 추.
어의: 스산한 가을에 매가 알을 까다. 즉 매가 가을에 알을 까면 그 새끼가 추운 겨울을
무사히 넘기기가 어렵다는 것에 비유하여 우매한 것을 비유하는 말이다.
문헌: 한국천주교회사(韓國天主敎會史)
조선 제 22대 정조(正祖) 때 영의정이자 신서파(信西派)의 영수(領袖)였던 채제공(蔡濟恭.1720~1799)은 당시 서양에서 새롭게 유입된 천주교(天主敎)에 대한 박해를 막아주었다. 그러자 이에 맞선 공서파(攻西派)는 그를 파직하고 유배를 보내야 한다고 요구했다.
그러나 그는 정조의 특별한 신임으로 천주교 처리 문제를 위임받아 천주교에 대해서 온건 정책을 유지했다.
채제공은 어렸을 적에 같은 또래의 아이들과 절에서 공부를 했다. 그의 집은 워낙 가난하여 철 따라 갈아입을 옷은 고사하고 식량마저 제대로 대지 못했다. 때문에 같이 공부하는 명문대가의 아이들로부터 멸시받고 따돌림 당하기 일쑤였다. 하지만 채제공은 조금도 기가 꺾이지 않고 공부만 열심히 했다.
섣달그믐이 다가오자 한 해를 보내는 기분에 들뜬 아이들이 각기 시로써 감회를 표현했다. 그런데 채제공은 그저 담담하게 앉아만 있었다.
아이들은 그를 놀리면서 너도 시(詩)를 한번 지어보라고 비아냥거렸다. 그래서 그는 마지못해 시를 써내려갔다.
가을바람 스산한 고목에 어리석은 매가 새끼를 까고
싸늘한 달, 눈 덮인 산에서는 범이 정기를 키운다.
그 아이들 중에는 재상의 자제도 있었다.
재상은 아들이 돌아오자 그날 있었던 일을 이것저것 물어 보다가 채제공이 지은 시 이야기를 들었다. 재상이 아들에게 물었다.
“너는 그 아이의 시가 어떻다고 생각하느냐?”
“형편없는 시지요. 글쎄 가을에 매가 새기를 까다니 말이 안 되잖습니까?”
그러자 재상은 혀를 차며 말했다.
“너는 헛공부만 했구나. 그러니 그런 욕을 먹어도 알아차리지 못하지. 들어 보아라. ‘가을바람 스산한 고목’은 머잖아 영화를 잃게 될 권문세가를 비유해서 한 말이다. 그리고 ‘어리석은 매가 새기를 깐다.’ 고 한 것은 우둔한 너희들을 비웃는 말이다. 가을에 깐 새끼 매가 어떻게 겨울을 나며. 매 구실을 할 수 있겠느냐? 이는 곧 매의 새끼이긴 해도 결코 매가 되지는 못한다는 비웃음이다. 그리고 ‘싸늘한 달. 눈 덮인 산에서는 범이 정기를 키운다.’ 고 하는 구절은 모든 고난을 딛고 학문에만 전념하는 자기를 비유한 것이다. 알겠느냐?”
체제공은 훗날 정치, 경제, 문화 등 각 분야에 박식하여 국조보감(國朝寶鑑)의 편찬에 참여했으며 시호는 문숙(文肅)이다.
(임종대 편저 한국 고사성어에서)
義氣求命(의기구명)
義:옳을 의, 氣:기운 기, 求:구할 구, 命:목숨 명.
어의: 의로운 기상은 생명을 구한다. 조선 영조 때 서유대의 고사에서 유래했다.
정의로운 일은 그 영향이 크다는 뜻으로 쓰인다.
문헌: 고금청담(古今淸談)
조선 제21대 영조(英祖) 때 청국(淸國)의 칙사를 맞이하여 서대문 밖 모화관(慕華館)에서 접빈의 예를 올리고 있는데 어디에선가 갑자기 돌멩이가 날아와 칙사의 이마를 때려 피가 흘렀다. 접빈관들은 크게 당황했다. 누군가 나라를 걱정하는 사람이 우리나라를 괴롭히는 칙사의 꼴이 괘씸하여 혼을 내주려고 한 짓이 분명했다. 그러나 일이 벌어진 이상 범인을 잡아내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 무렵, 모화관 주변에는 내로라는 한량들이 많이 살았는데 그 중에는 활도 잘 쏘고 힘깨나 쓰는 장사도 여럿 있었다.
포도대장 송상(宋詳)은 그중에 서유대(徐有大)를 의심하여 그를 술자리에 불렀다. 술이 몇 순배 돌자 송상이 은근히 유도 질문을 했다.
“여보게! 자네도 들었지? 청국 칙사에게 돌을 던져 보기 좋게 혼내준 일 말이야. 내 얼마나 속이 후련하던지…….”
그러나 서유대는 다소곳이 앉은 채 말이 없었다. 그러자 송상은 속내를 정면으로 드러내어 물었다.
“그게 자네 짓이지?”
그러자 서유대는 새삼스럽게 분기가 치솟는 듯 씩씩대며 말했다.
“아니, 그놈이 아무리 대국의 칙사라고 해도 우리나라의 일에 지나치게 간섭하는 꼴을 그냥 보고 있을 수가 있어야지요.”
송상은 이렇게 하여 범인을 잡기는 했지만 그냥 처벌하기에는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길로 중범죄인들이 갇혀 있는 감옥으로 가서 사형수 한 명을 끌고 나와 말했다.
“너는 어차피 죽을 몸 아니냐. 그러나 그냥 살인범으로 죽는 것보다는 무례한 칙사에게 투석한 의로운 국사범(國事犯)으로 죽는다면 네 후손에게는 영예로운 일이 될 것이다. 그리하겠느냐?”
이렇게 설득하여 그를 투석한 죄인으로 위장시켜 청국 사신에게 데리고 가서 정중히 사과하였다. 그러자 칙사가 말했다.
“이놈이 나를 다치게 한 것은 괘씸하나 제 나라에 대한 충성심에서 그러한 것이니 풀어 주도록 하시오.”
이렇게 하여 사형수는 듯밖에 죽음에서 풀려나게 되었다. 포도대장의 슬기로운 기지로 서유대는 물론이고, 사형수 한 사람까지 살려냈으니 한꺼번에 두 목숨을 살려내는 결과가 된 것이다.
그 후, 서유대는 출중한 무예를 인정받아 훈련대장이 되었는데, 무인으로서 뿐만이 아니라 학문에도 조예가 깊어 문무를 겸비한 큰 동량이 되었다. 영조는 80세 고령이 넘어서도 서유대만 보면,
“하하! 오만한 칙사에게 따끔한 맛을 보여준 그 사람 아니냐!” 하면서 반가워했다.
(임종대 편저 한국 고사성어에서)
義比爲國(의비위국)
義:옳을 의, 比:견줄 비, 爲:위할 위, 國:나라 국.
어의: 개인적인 의리보다는 나라를 위해야 한다. 즉 대의를 위해서는 작은 일은 버려야 한다는 뜻이다.
문헌: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한국(韓國)의 인간상(人間像).
고려(高麗)를 창건한 왕건(王建)이 궁예(弓裔)의 충성스러운 신하로 있을 때였다.
왕건이 궁예의 명을 받아 군사를 거느리고 정주(貞州)를 지나다가 길가 버드나무 아래에서 빨래를 하고 있던 그곳의 아름다운 부잣집 유천궁(柳天弓)의 딸을 보게 되었다. 첫눈에 반한 왕건은 빨래터로 내려가 말을 걸었다.
“그대는 누구시오?”
“예, 이 고을의 장자 유천궁의 딸이옵니다.”
“나는 왕건이라는 사람이오. 지나다가 그대가 하도 어여쁘기에 인사를 청한 것이오. 이제 해도 저물었는데 그대의 집에서 하룻밤 자고 갈 수 없겠소?”
“그러시면 저희 집으로 가시어 아버님께 여쭈어 보시옵소서.”
왕건은 처녀를 따라 유천궁의 집으로 갔다. 유천궁은 왕건을 보더니 보통 사람이 아닌 것을 직감하고 그날 밤으로 딸과 짝을 지어 사위로 삼았다.
그렇게 해서 왕건은 유씨 처녀와 하룻밤을 같이 했으나, 당시에는 궁예의 명령을 받아 후백제와 전쟁을 하는 처지라서 좀처럼 다시 만날 기회가 없었다. 기다리다 지친 유시 처녀는 왕건의 행운도 빌고, 정절도 지킬 겸해서 중이 되었다.
몇 해가 지나 왕건이 도성(都城)으로 돌아와서 아내 유씨를 찾았으나 그녀가 정절을 지키려 중이 되었다는 말을 듣고 크게 기뻐하며 곧 그녀를 데려다가 혼례를 치렀다. 유씨는 남편 왕건을 위해 헌신적으로 뒷바라지를 했다. 그러나 왕건은 시중(侍中)으로 나라의 중책을 맡고 있었으나 언제나 우울해했다. 이유는 궁예의 성질이 날로 난폭해져 충신은 말할 것도 없고 일가친척마저도 자기 기분에 거슬리면 사정없이 죽이는 등 그 횡포가 이루 말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자 왕후 강(康)씨가 이성을 찾으라고 충고를 했다. 궁예는 강씨가 남편인 자기를 반대하고 다른 사람을 두둔하는 것은 그놈과 간통했기 때문이라고 죄를 뒤집어 씌워 모진 고문 끝에 죽였다. 이에 신하들은 임금이 미쳐서 아내와 아들까지 마구 죽이는 판이니 우리도 언제 죽을지 모른다며 공포에 휩싸였다. 그리고 끝내는 이처럼 포악한 임금을 그대로 섬겨야 하느냐에 대한 논의가 일게 되니 왕건은 몹시 괴로웠다.
왕건의 나이 42세, 918년 6월14일 밤이었다.
왕건이 거느리고 있던 무사 홍유(洪儒), 배현경(裵玄慶), 신숭겸(申崇謙), 복지겸(卜智謙) 등이 왕건의 집으로 찾아왔다. 왕건은 이들이 나라의 중대사를 의논하려는 것임을 알고 아내에게는 그 비밀을 감추고자 집안 식구들에게 참외를 따오라고 내보냈다.
그러나 눈치를 챈 유씨 부인은 참외를 따러 가는 척하고 아무도 모르게 북쪽 문으로 들어가 장막 뒤에 숨어서 이야기를 엿들었다. 과연 놀라운 이야기였다.
“지금 임금께서는 정신착란으로 날이 갈수록 포악해지니 이대로 보고만 있을 수 없소이다. 하루 빨리 그를 쳐서 바로잡도록 합시다.”
“그렇소! 그런데 우리가 나라를 구하려면 어쩔 수 없이 새로운 임금을 내세워야 하는데 그러려면 왕 장군밖에 없습니다. 하여 이렇게 찾아왔으니 우리들의 뜻을 져버리지 마시고 왕위를 이어받아 주십시오.”
여러 장군들도 그렇게 하는 것만이 나라를 구하는 길이라고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아니 될 말이오, 나는 어디까지나 궁예 임금의 신하요. 신하가 어찌 임금을 배반할 수 있겠소. 나는 그것만은 못하겠소.”
그러자 신숭겸이 나서며 힘주어 말했다.
“장군은 개인적인 의리만 중하고 나라는 쓰러져도 상관하지 않겠다는 말씀이오? 우리가 어질고 훌륭한 임금을 배신한다면 나쁘지만 지금의 임금이 어디 사람이라 할 수 있소이까? 장군은 아무 말 하지 마시고 우리들의 뜻을 받아 주시오. 그것만이 우리 모두가 사는 것이오.”
그러나 왕건은 거듭 거절하였다. 그러자 장막 뒤에 숨어 있던 유씨 부인이 왕건 앞으로 나아가 정중하고도 단호하게 말했다.
“나라를 위하여 불의를 치는 일은 예로부터 있었던 일이옵니다. 소녀가 듣자하오니 여러 장군들께서 하시는 말씀이 여자인 저로서도 마땅한 일이라 생각되옵는데 하물며 장군께서는 장부의 몸으로 어찌 반대만 하십니까?”
그리고 왕건에게 갑옷을 입혀 주면서 다시 말을 이었다.
“병은 제때에 고쳐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나라의 일도 적절한 시기에 이르렀을 때 손을 써야 합니다. 때를 놓친 다음에는 후회해도 회복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나리께서는 부디 여러 장군들의 듯을 저버리지 마시옵소서.”
부인의 말에 용기를 얻은 왕건은 여러 장군들과 뜻을 모아 혁명의 깃발을 들고 궁예를 몰아낸 다음 새로운 나라, 고려(高麗)를 세우고 태조가 되었다. 유씨 부인은 작위를 신혜왕후(神惠王后)로 받고, 왕건에게 큰 도움을 주었다.
(임종대 편저 한국 고사성어에서)
義死不辭(의사불사)
義;옳을 의, 死:죽을 사, 不:아니 불, 辭:사양할 사
어의: 의로운 죽음은 사양하지 않는다. 즉 옳은 일을 위해서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문헌: 삼국사기 열전 제8
신라의 검군(劍君)은 대사(大舍) 구문(仇文)의 아들로서 사량궁의 사인(舍人)으로 있었다.
진평왕 정해(627년) 8월, 초가을인데도 된서리가 내려 농작물이 모두 죽었다. 그리고 이듬해 봄부터 여름까지 큰 기근이 들어 백성들이 자식을 팔아 끼니를 잇는 그야말로 참혹한 지경에 이르렀다.
시대가 이렇게 뒤숭숭하니 자연히 부패가 창궐했다. 궁중의 집사(執事)들도 예외는 아니어서 궁지기들이 모두 공모하여 창예창(唱翳倉)의 곡식을 훔쳐서 나누어 가졌다. 그런데 검군은 홀로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그러자 궁지기들이 저마다 한마디씩 했다.
“여러 사람이 모두 받는데 당신만 홀로 물리치니 무슨 까닭이오? 몫이 적어서 그런다면 더 주겠소.”
검군이 웃으며 대답했다.
“나는 화랑의 뜰에서 풍류도(風流道)를 수행한 사람이니 화랑도 정신에 어긋나는 것이라면 천금이라도 받지 않겠소.”
그러자 궁지기들이 검군을 그냥두면 화근이 될 것이 두려워 그를 제거하고자 모의했다.
“이 자를 죽이지 않으면 틀림없이 비밀이 탄로 날 것이다.”
검군은 이를 눈치 채고 친구 근랑(近郞)에게 작별인사를 했다.
“오늘 이후로는 다시 만나지 못할 것이오.”
근랑이 이유를 물었으나 말하지 않다가 두세 번 물은 뒤에야 마지못해 그 이유를 말했다. 근랑이 왜 관가에 고발하지 않느냐고 하자 검군이 말했다.
“나 혼자 살자고 뭇사람이 벌을 받게 함은 인정상 차마 할 수 없는 일이오.”
“그렇다면 도망이라도 가시오.”
“그도 아니 되오. 저들이 그릇되고 내가 옳은데 내가 달아난다면 장부로서 비열한 짓이 되오.”
그러고 나서 그는 궁지기들에게로 갔다. 여러 궁지기들이 술을 마련하고 사과하는 척하며 몰래 음식에 약을 넣었는데, 검군은 알면서도 그냥 먹고 죽었다.
이를 지켜본 사람들이 말했다.
“검군은 죽지 않을 수도 있었는데 죽었으니 태산 같은 자기 목숨을 기러기 털보다 가벼이 본 사람이다.”
그러나 그는 목숨을 던져 의(義)를 구했던 것이다.
(임종대 편저 한국 고사성어에서)
以笠掩天(이립엄천)
以:써 이, 笠:갓 립, 掩:가릴 엄, 天:하늘 천.
어의: 삿갓으로 하늘을 가리다. 김삿갓에게서 유래한 말로, 부끄러운 일을 피하는 행동을 이른다.
문헌: 한국해학소설집(韓國諧謔小說集)
김삿갓의 본명은 김병연(金炳淵. 1807~1863))이고, 호는 난고(蘭皐)이며, 경기도 양주(楊州)출신이다.
그는 죽장(竹杖. 대나무 지팡이)에 죽립(竹笠. 대나무로 만든 삿갓)을 쓰고 술 한 잔에 시(詩) 한 수로 세상을 풍자하며 삼천리 방방곡곡을 돌아다닌 방랑 시인이었다.
그의 조부 익순(益淳)은 순조(純祖) 11년(1811년), 홍경래난(洪景來亂) 때 선천(宣川)부사로 있었으나 난을 진압하지 못하고 되려 홍경래에게 항복하여 무릎을 꿇은 죄로 사형을 당했고, 나머지 가족들도 멸족시키라는 훈령이 내려졌다. 그러자 여섯 살의 어린 김병연은 형 병하(炳河)와 함께 하인의 도움으로 황해도 곡산으로 피신했다. 그런데 얼마 있지 않아 사면을 받아 강원도 영월로 내려와 나머지 가족들과 함께 모여 살게 되었다.
병연은 나이가 들자 과거를 보기 위해 글공부에 힘썼다. 그리고 20세가 되던 해, 영월에서 열리는 백일장(白日場)에 참가했다. 니라에서 치르는 대과(大科)에 비할 바는 못 되었지만 지방 백일장도 입상을 하면 지방의 관리로 등용되기에 응시자들이 많았다.
그날의 시제(詩題)는 가산군수 정시(鄭蓍)의 충절과 선천부사 김익순의 행적에 대해서 논하라는 것이었다.
홍경래가 반군을 이끌고 먼저 가산에 들이닥치자 가산군수 정시는 팔이 잘려나가면서도 최후까지 저항하다가 끝내 순절했으나, 선천부사 김익순은 전날 과음하여 잠에 골아 떨어져 있다가 홍경래에게 생포되자 저항 한번 하지 못하고 항복해 버린 사실에 대해서 비판하라는 것이었다.
병연은 충신을 흠모하는 마음과 너무 쉽게 항복해 버린 죄인을 경멸하는 의분으로 그동안 갈고닦은 글 솜씨를 유감없이 발휘했다.
‘김익순은 죽은 혼백이라도 지하에 계신 선왕들에게 사죄하라. 신하가 임금을 잊는 것은 자식이 어버이를 잊는 것과 같으니, 이는 한 번 죽음이 아니라 만 번 죽어 마땅하다. 어이하여 활과 창을 지니고도 임금 앞에서나 꿇어야 할 무릎을 역적 홍경래 앞에서 꿇을 수 있단 말인가! 이는 임금을 배반함과 동시에 선영을 저버린 망동이이 치욕의 역사에 길이길이 전해지리라.’
붓을 놓고 난 병연은 의분에 못 이겨 긴 한숨을 토해내고는 권지(卷紙)를 시관에게 제출했다.
그리하여 당당히 장원을 차지한 병연은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어머니에게 자랑스럽게 이야기했다.
“어머니. 제가 장원을 했습니다.”
그러나 어머니는 병연이 백일장에서 김익순을 신랄하게 비판했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기뻐하기는커녕 깊은 한숨을 토하며 말했다.
“병연아! 김익순 그 어른은 바로 네 할아버지란다.”
병연은 하늘이 무너지는 듯 눈앞이 캄캄했다.
“아니, 내가 만 번 죽어 마땅하다고 욕한 그분이 내 할아버지라니, 이럴 수가……. 이토록 얄궂은 운명이 어디 있단 말인가? 기껏 배운 글재주로 내 조상을 욕하는데 써먹다니…….”
병연은 고개를 떨군 채 말을 잇지 못했다.
인생에 깊은 회의를 느낀 병연은 그때부터 집을 떠나 전국 방방곡곡을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이 조상을 욕한 불효자로서 하늘을 바로 보면 안 된다고 생각하여 큼직한 삿갓을 써서 하늘을 가린 후, 대나무 지팡이에 괴나리봇짐을 지고 어머니와 처자식을 떼어 놓은 채 산천경개를 구경하며 마음을 달랬다.
병연은 양의 창자처럼 꼬불꼬불한 구절양장 산길을 터벅터벅 걸어 태백산 구경을 마치고 금강산으로 들어섰다. 그런데 초입의 작은 정자에서 바둑을 두고 있는 스님과 선비를 만났다. 오랫동안 말벗이 없어 입에서 군내가 날 정도가 된 병연이 슬그머니 선비 편을 들어 훈수를 했다. 그러자 스님이 초라한 병연의 행색을 보고는 핀잔을 주었다.
“여보슈! 가던 길이나 가지. 웬 훈수요?”
불쾌해진 병연이 한마디 했다.
“산은 명산인데 중은 어질지를 못하구나.”
그러자 스님도 지지 않고 쏘아붙이듯이 말했다.
“삿갓 쓴 되지못한 선비는 아름다운 산의 바위에 앉는 것조차 아깝다.”
그러자 병연이 뒤틀린 심사를 시로 읊었다.
번들거리는 중대가리는 땀 찬 말 불알 같고
선비 머리통 상투는 개좆처럼 보이는구나.
목소리는 구리방울이 구리솥 속에서 부딪치는 것 같고
눈동자는 검은 콩이 흰죽 위에 떨어진 것 같네!
모욕을 당한 중과 선비는 팔을 걷어붙이며 덤벼들었다.
“뭐라구. 무? 말 불알? 이 빌어먹을 놈아, 게 섰거라.”
잽싸게 도망쳐 나온 병연이 산마루에 올라 발밑을 내려다보니 장관이었다. 시 한 수가 절로 나왔다.
뽀족뽀족 올라선 기암괴석 참으로 기이하도다.
사람인가 신선인가, 신령인가 부처인가, 놀랍기만 하구나.
평생 언제 금강산을 읊어볼까 벼르고 별렸건만
막상 대하고 보니 시는 쓰지 못하고 감탄만 나오네.
병연은 스님과 입씨름을 하고 산등성이를 오르내리다 보니 배가 출출했다. 그래서 마을로 내려오니 어느 솟을대문으로 많은 사람들이 드나드는 것이 보였다. 높은 담장 너머로 갈비 굽는 냄새와 술 냄새가 그의 주린 배를 괴롭혔다. ‘음, 잔치를 벌이는 모양이니 속 좀 풀 수 있겠구나.’ 병연은 대문 안으로 들어섰다. 그러자 집사(執事)로 보이는 늙은이가 눈을 부라렸다.
“이봐! 여기가 어디라고 걸인이 함부로 들어오는 거야, 당장 나가지 못할까?”
배알이 뒤틀린 병연은 주인이 앉아있는 대청에다 대고 냅다 소리를 질렀다.
사람이 사람 집에 왔거늘 사람대접 안 하니
높은 대문 안의 주인 또한 사람답지 못하도다.
병연은 박대를 당하는 일이 한 두 번이 아니었는데 그 역시 사람인지라 속이 편할 리 없었다. 그래서 돌아서 나오다가 마침 길가 오두막집 창가에서 재재거리는 새를 보고 읊조렸다.
묻노니 들창 앞에 와서 우는 새야,
너는 어느 산에서 자고 왔느냐?
넌 산 소식을 잘 알겠지,
지금 산엔 진달래꽃이 피었더냐?
이튿날, 다시 발걸음을 옮겨 명천 땅에 들었으나 인심은 매한가지여서 반겨주는 이가 없었다. 탄식이 저절로 나왔다.
명천 명천 부르지만 사람들은 현명치 못하고
어전 어전 자랑하지만 밥상엔 북어 꽁댕이 하나 없구나!
인심은 사는 형편에 따라 천차만별이지만 변하지 않는 것은 그래도 산천초목뿐이었다.
병연은 한 조각 구름처럼 정처없이 발길을 옮기며 또 시 한 수를 읊었다.
산은 강을 거느리고 강 어구에 서 있고,
물은 돌을 뚫으려고 돌머리를 도는구나!
산 좋고 물 좋은 금강산과 산간벽촌을 돌던 병연의 발걸음이 어느덧 한양으로 향하여 인왕산 봉우리에 올라 성안의 빽빽한 기와지붕들을 바라보니 감회가 새로웠다. 하여 다시 시 한 수를 읊었다.
청춘이 기생을 안고 노니 천금도 검불 같고
백일하에 술잔을 드니 만사가 구름 같구나,
기러기 먼 하늘을 날 때 물길을 찾기 쉽고
나비는 청산을 지날 때 꽃을 보고 피하기 어렵네.
병연은 복잡한 한양의 저잣거리 인심이 시골 인심보다 사나운 것을 피부로 느끼고 있었다. 그는 어렵사리 쉰밥 한 술을 얻어먹고 되지못한 인심을 뒤틀린 배알로 읊조렸다.
스무 나무 아래 낯설은 나그네가
망할 마을에서 쉰밥을 먹게 됐네.
인간으로서 어찌 이런 일이 있을꼬.
차라리 하늘을 가리고 고향 집에 돌아가
서러운 눈물의 밥을 먹느니만 못하구나.
병연은 오랜 세월 떠돌다 보니 구경도 좋고 유랑도 좋지만 고향에 있는 어머니와 처자식이 한없이 그리워졌다.
해질 무렵 두서너 집 문을 두드렸으나
모두 손을 흔들어 나를 내쫓는데
두견새만이 박정한 인심을 아는지
나를 위로하여 집으로 가라고 구슬피 울어 주는 구나!
병연은 조상을 욕한 죄 때문에 삿갓을 써서 얼굴을 가렸지만 돌이켜보면 자신의 한많은 생이 스스로 서럽기도 했다. 그래서 설움에 북받쳐 또 시를 읊었다.
어디로 갔소, 어디로 갔소,
삼생에 맺힌 인연 다 뿌리치고 어디로 갔소,
뉘라서 알리오, 뉘라서 알리오.
옻칠 같은 캄캄한 밤중에 내 홀로 우는 것을…….
병연은 하염없는 눈물을 안으로 삼키면서 점점 자기의 삶에 그늘이 다가오고 있음을 느끼게 되었다.
산에 사는 새도, 들에 사는 짐승도 집이 있는데
나는 한평생을 쓸쓸히 떠돌았네.
미투리와 대지팡이로 천 리 길을 돌아 걸어
구름처럼 바람처럼 떠도니 천하가 다 내 집이었네.
사람을 탓하랴, 하늘을 원망하랴.
흘러가는 세월 속에 내 마음만 고달프네.
병연은 유복한 집에서 태어났으나 할아버지가 한때 방심한 탓으로 기구한 팔자가 되어 하늘을 우러르지 못하고 삿갓을 눌러쓴 채 풍자와 해학의 시를 읊으며 한 시대를 비운의 그늘에 가려져 살아야 했다.
(임종대 편저 한국 고사성어에서)
理埋毒肉(이매독육)
理:다스릴 리, 埋:묻을 매, 毒:독 독, 肉:고기 육.
어의; 독이 든 고기를 파묻다. 선조 때의 문신 홍서봉의 어머니에게서 유래한 말로, 다른 사람의 피해를 염려하
여 그 소지를 없애는 행위를 이른다.
문헌: 해동속소학(海東續小學)
조선 제14대 선조(宣祖) 때의 문신 홍서봉(洪瑞鳳. 1572~1645)의 호는 학곡(鶴谷)이며, 시호는 문정공(文靖公)이다. 그는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최명길(崔鳴吉)과 함께 화의(和議)를 주장하였다. 서봉은 인조반정 후 이조판서를 거쳐 우의정에 이르렀으며 성격이 온화하여 누구와도 화락했다. 병자호란 때는 소현세자(昭顯世子)와 봉림대군(鳳林大君)과 함께 심양에 갔다 오기도 했다.
서봉은 문장과 글씨에도 능했지만 생활은 아주 검소했다. 그의 집안은 가난하여 변변치 않은 음식을 먹으며 어렵게 지냈다.
하루는 그의 어머니가 부엌에서 일하는 하인을 보내 고기를 사오게 하였는데, 사온 고기가 모두 상해 있었다. 그래서 그 하인에게 물었다.
“사온 것과 같은 고기가 얼마나 더 있더냐?”
하인이 얼마쯤 되더라고 하자 그녀는 즉시 머리 장식을 팔아서 돈을 마련하여, 그 고기를 다 사오게 하여 담장 밑에 묻었다. 다른 사람이 그 고기를 먹고 병이 날까 걱정했기 때문이었다. 이 소식을 들은 서봉이 말하였다.
“어머니의 마음이 가히 천지신명(天地神明)과 통할만하니 자손들이 반드시 번창할 것입니다.”
그때 소현세자(昭顯世子)가 갑자기 별세하자 왕실에서는 봉림대군(鳳林大君)을 세자로 책봉하려 했다. 서봉은 이에 반대하고 소현세자의 아들을 세자로 책봉할 것을 주장했으나 관철되지 못했다.
청구영언에 수록된 시 한 수 옮겨 그 심경을 들여 다 본다.
이별하던 날에 피눈물이 난지 만지
압록강 내린 물 푸른빛이 전혀 없네.
배 우희 허여 센 사공도 처음 본다 하더라.
풀이하면, ‘서울을 떠나 심양으로 가던 날 피눈물이 났는지 어떤지조차 모를 정도로 정황이 없고 보니 배를 타고 건너는 압록강 물도 피눈물과 범벅이 되어 푸른빛이라고는 없는 것처럼 느껴지는구나, 배 위의 머리가 하얗게 센 늙은 사공도 일국의 세자가 오랑캐에게 붙잡혀 끌려가는 것은 처음 보는 일이라고 하더라.’ 라는 뜻이다.
홍서봉이 나라를 걱정하듯 홍서봉의 어머니는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여겼던 어머니였다.
(임종대 편저 한국 고사성어에서)
李武膽量(이무담량)
李:성 이, 武:호반(굳셀) 무, 膽:쓸개 담, 量:헤아릴 량.
어의: <이무>의 배짱이라는 말로, 조선 효종시대의 송시열과 방어사 이무 사이에 있었던 고사에서 유래했다.
어떤 일이 잘못되었음을 알면서도 그를 인정하면 자신이 크게 불리해지므로 그대로 밀고 나가는 배짱을
말한다.
문헌: 고금청담(古今淸談)
조선시대, 주자학의 대가이며 좌의정을 지냈던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이 은퇴하여 쉬고 있을 때였다.
그가 하루는 나귀를 타고 하인과 함께 주막에 들어갔다. 그대 새로운 임지로 부임하는 방어사(防禦使) 이무(李武)가 부하들을 이끌고 뒤따라 들어왔다.
“비켜라! 방어사 어른이시다.”
큰소리로 외치며 우르르 들어오는 그들의 기세에 송 대감과 하인은 한쪽 구석으로 밀려났다. 화가 난 송 대감의 하인이 그들을 향해 소리쳤다.
“무엄하도다, 이 어른이 바로 송시열 대감이시다. 그런데 감히 무례하게 군단 말이냐?”
군졸들은 즉시 방어사 이무에게 하인의 말을 전하였다.
“큰일 났구나, 그 어른을 몰라보고 방자하게 굴었으니…….”
방어사는 더럭 겁이 났다. 그러나 거기서 물러설 수는 없었다. 그는 잠시 궁리를 하다가 송 대감 앞으로 가서 방어사로서의 위엄을 갖추고 말하였다.
“노인은 누구시오?”
송 대감의 하인은 방어사의 거만한 태도에 어이가 없었다. 한낱 군관의 신분으로 좌의정을 지낸 어른에 대한 무례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내가 바로 송시열이오.”
“뭐? 당신이 송시열이라고? 나이만 든 게 아니라 망령까지 들었군.”
“예끼, 이 사람! 젊은 사람이 무슨 말을 그렇게 험하게 하시오.”
“그게 아니라면 노인은 겁도 없소? 감히 송시열 대감을 함부로 사칭하다니, 당신 단단히 혼 좀 나야 되겠소. 이 나라의 제일가는 어른을 희롱하다니…….”
“그럼, 내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게요?”
“조용히 말할 때 물러가시오, 그렇게 아무데서나 송 대감 어른을 사칭하고 돌아다니다가는 제 명에 죽지 못할 것이오, 아시겠소?”
송 대감은 어처구니없는 봉변을 당하고 군졸들에게 떠밀려 주막을 나왔다.
“대감님, 당장 관가에 알려서 저놈들을 혼내야 됩니다.”
“그럴 거 없다. 그 방어사가 나를 알아보고도 모른 척한 것이 틀림없다. 내가 봉변을 당하긴 했지만 그 방어사의 기지와 배짱은 높이 살만하다. 후에 내가 긴히 써야 할 인물이니라.”
송시열 대감은 봉변을 당하고도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다른 주막으로 가서 머물렀다.
(임종대 편저 한국 고사성어에서)
以文放父(이문방부)
以:써 이, 文:글월 문, 放:놓을 방, 父:아비 부.
어의: 글로써 아버지를 풀려나게 하다. 조선 성종 때 김규라는 어린아이가 감옥에 갇혀 있는 아버지를 구한 고
사에서 유래했다. 특기로써 어떤 일을 성사시키는 것을 이른다.
문헌: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김규(金虯. 1521~1565)는 조선 제13대 명종(明宗) 때 사람으로, 본관은 광주(光州)요, 호는 탄수(灘叟)이며, 벼슬은 전한(典翰)을 지냈다.
어느 해, 심한 가뭄이 들어 명종이 직접 기우제를 올리고 있는데 가자기 풍악 소리가 들렸다. 괘씸하게 여긴 명종이 뉘 집에서 나는 풍악 소리인지 알아오게 했다.
“감찰 김세우(金世愚)라는 자가 잔치를 베풀고 있다 하옵니다.”
명종이 진노하여 명을 내렸다.
“가뭄으로 백성들이 도탄에 빠져 짐도 찬까지 줄이며 조심하고 있는데 국록을 먹고 있는 자들이 어찌 그리 방자하단 말이냐? 당장 잡아다 죄를 묻도록 하라!”
어명이 떨어지자 잔칫집 사람들을 모두 잡아 가두니, 모두 13명이나 되었다.
그러자 김세우의 아들과 동생들이 김세우의 용서를 애원하는 상소문을 올렸다. 명종은 자신의 잘못은 모르고 어린 아들과 동생을 시켜 상소하게 하였음이 더욱 괘씸하여 아들과 동생까지 잡아 가두라고 했다. 그러자 그의 가족들이 모두 겁이 나서 멀리 달아났는데 어린 아들 김규만이 남아 있다가 잡혀 왔다. 명종이 물었다.
“너는 왜 도망가지 아니했느냐?”
“아버지의 목숨이 걸렸는데 자식된 자의 도리로 어찌 도망가겠습니까?”
“이 상소문은 누가 지었느냐?”
“제가 지었습니다.”
“누가 썼느냐?”
“제가 썼습니다.”
“네 나이는 몇이냐?”
“예, 열세 살입니다.”
“어린 네가 어찌 글을 이처럼 잘 짓고, 잘 쓸 수 있단 말이냐? 조금이라도 거짓이 있다면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예, 분명 제 손으로 쓴 것입니다. 바라옵건대 한 번 시험하여 주십시오.”
명종은 그에게 글을 짓고 쓰도록 명하였다. 그는 곧 거침없이 글을 지었는데, 글 끝을 이렇게 마무리했다.
“…천 리에 비가 촉촉이 내리니 성왕께서 백성을 생각하는 거룩한 마음인가 합니다.”
명종은 그 재주에 감탄하여 그의 이름을 물었다.
“가상하도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예, 김규라고 합니다.”
“너는 어린 나이인데도 문장에 능하고 글씨도 잘 쓰는구나. 너의 문장을 보고 네 아비를 석방하고, 글씨를 보아 다른 사람들까지 놓아 주겠다. 네 아비에게 지극한 효성을 보이듯이 나라에도 충성을 다하도록 하여라.”
그리하여 김세우와 그 동료를 석방토록 해주었다.
김규는 동래(東萊) 선위사(宣慰使)를 직무하던 중 윤원형(尹元衡) 일파의 무고로 경원에 유배되었다가 1564년에 풀려나 장악원정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고 예산(禮山)에서 죽었다.
(임종대 편저 한국 고사성어에서)
자료출처-http://cafe.daum.net/palp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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