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쓰나미 경보음 속 외환위기의 슬픈 추억을 떠올리다
/ 홍종학 전 중소벤처기업부 장관
/ 시민언론 민들레
2024.01.01
정부 망국적 가계부채 관리 실패, 언론은 다시 입 닫아
1년 전부터 한국 경제는 위기를 맞을 것이라고 경고해 왔다. 경제 관련 정보를 제대로 접하지 못하는 서민들은 자신이 처한 상황을 알기 어렵다. 마치 쓰나미가 몰려오고 있는데 바닷가에서 놀고 있는 아이들과 같은 격이다. 빨리 경보를 울려 안전한 곳으로 피신시켜야 한다는 생각에 다급해졌다. 고금리의 부담을 안고 버텨왔는데 지난 가을부터 싸늘하게 얼어붙은 경기는 서민 경제에 이중 타격을 주었다. 쓰나미는 끝났는가? 불행하게도 내년에는 더 강한 쓰나미가 기다리고 있다.
미국의 정책금리 인상으로 시작된 금융위기
중앙은행인 연준은 금리를 신축적으로 운용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2008년 이후부터 이러한 추세가 더 강화되어, 제로금리도 마다하지 않았다. 제로금리까지 낮추었는데도 경기부양이 되지 않으면서 과감한 양적 완화 정책을 추진했다. 중앙은행이 직접 시중의 채권을 사들이는 비전통적 방식의 시장 개입을 통해 과거에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돈을 풀었다. 이러한 양적 완화 정책의 부작용을 우려해 정상화 과정을 개시하면서 서서히 채권 보유량을 줄이려는 시기에 코로나가 발생했다. 미국 연준은 지체없이 다시 채권을 사들여 자산이 최고 9조 달러에 이르게 되었다.
상황에서 예상치 못한 인플레이션이 발생하자 미국 연준은 급속하게 정책금리를 올리기 시작했다. 2022년 3월에 0.25%였던 정책 금리를 2023년 7월에 5.5%까지 급격하게 올렸다. 과거 인플레이션이 높고 이자율이 10%를 넘나들 때를 제외한다면 대단히 이례적인 금리 인상이었다. 다른 한편으로 9조 달러에 달했던 자산을 꾸준히 줄여 현재 7조 7000억 달러까지 내려왔다. 과거 양적 완화 정책을 중단한다는 소식에도 금융시장이 큰 충격을 받은 경험이 있기에, 금리인상과 동시에 추진하는 양적 긴축 정책은 매우 이례적이다.
한국과 미국의 기준금리 격차. 연합뉴스
미국이 금리를 올릴 때 세계 경제는 큰 충격을 받는다. 세계 금융자본의 본산인 미국이 블랙홀처럼 세계의 자본을 빨아들이기 때문이다. 글로벌 금융위기도 2004년부터 시작된 정책금리 인상이 원인이 되었다. 1997년 연말 우리에게 닥쳤던 외환위기 역시 미국의 금리 인상에서 시작되었다. 1994년부터 미국이 정책금리를 올리기 시작하면서 세계 경제는 자본 유출에 따른 압력을 받기 시작했다.
당장 문제가 발생한 것은 이웃 국가 멕시코였다. 미국과 인접한 멕시코는 빈부격차가 크고 자본 유출이 문제인 나라였다. 북미자유무역협정으로 늘어났던 멕시코에 대한 투자는 급격하게 줄어들었고, 농민 반란과 대통령 후보 암살로 비롯된 정정불안으로 인해 자본이 빠른 속도로 빠져나갔다. 페소화는 폭락하고 결국 국가 파산의 위기를 맞게 되었다. 인접 국가의 경제 붕괴로 인한 충격을 두려워한 미국 정부가 서둘러 개입해서 봉합했다. 그러나 세계경제에 대한 충격은 이어졌다.
한국이 파산 위기 맞고서야 쏟아진 징비록들
미국의 금리 인상은 상대적으로 안전하다고 알려진 미국의 채권 이자율을 높이고, 이는 다른 금융자산의 가치를 낮추게 된다. 미국의 금리가 높아지면 개발도상국들의 금리도 영향을 받게 되고 자연스럽게 위험한 투자의 부실 가능성이 높아진다. 그동안 투자가 크게 늘어났던 아시아 국가 기업들의 연쇄 부도가 이어지면서 태국과 인도네시아가 흔들이기 시작했다. 1997년이 되자 이들 국가는 결국 국제통화기금(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하게 되었다.
빠르게 성장하던 국가들이 도미노처럼 무너지는 상황에서 금융시장의 불확실성은 크게 높아졌고, 이는 다시 연초부터 대기업의 부실이 드러나던 한국에 영향을 미쳤다. 한국의 외환보유고가 고갈되었다는 소식이 알려지는 순간 한국은 파산 위기를 맞게 되었고, 연말에 국제통화기금에 구제금융을 신청했다. 국제통화기금의 자금 공여조건은 가혹했다. 실업자를 폭발적으로 양산하는, 납득하기 어려운 구조조정 요구안을 굴욕적으로 수락할 수밖에 없었다.
임창열 부총리 겸 재정경제원장관과 미셸 캉드쉬 IMF 총재가 세종로청사에서 내외신 보도진들이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 국제통화기금(IMF) 긴급자금지원최종 협상결과를 발표하고 있다.
1997.12.3. 연합뉴스
되돌아보면 한국의 외환위기는 재정경제부와 중앙은행의 부채관리 실패에서 비롯되었다. 개별 은행들은 재벌 계열사간 채무보증이 있으면 부채비율이 1000%가 넘는 것을 아랑곳 않고 대출을 해 주었다. 대마불사를 믿고 밑빠진 독에 물 붓듯 대출이 늘어나 경제 전체적으로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이 될 때까지, 한국 경제 그 어느 곳에서도 경보음은 울리지 않았다. 위기를 맞고 나서야 그동안 마치 온 국가가 무엇에라도 홀린 듯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기업 대출을 방치해 왔음을 깨닫게 되었다. 그 때 수많은 언론과 지식인들이 위기를 맞는 순간까지 비판하지 않았던 자신들을 성찰하며 다시는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하겠다는 의미심장한 징비록들을 쏟아내던 시기를 기억한다. 모든 것은 기록으로 남아 있다.
망국적 가계부채 관리 실패한 정부, 다시 입 닫은 언론
그 수많은 징비록이 무색하게 한국 경제는 다시 한번 부채의 늪에 빠지고 말았다. 가계부채 잔액이 1800조 원에 달해 가처분 소득 대비 200%를 넘나들고 있다. 그 조차도 700조 원에 달하는 사업자 대출이 빠진 통계이고, 규모를 알 수 없는 전세보증금도 빠져 있으니 한국의 전체 가계부채는 가처분 소득 대비 300%를 넘을지도 모른다. 자본주의 역사상 가장 높은 수준으로 기록될 정도다.
이처럼 가계부채가 망국적인 수준으로 높아지도록, 기획재정부와 금융위, 한국은행은 부채 관리에 실패했다. 가계부채 총액관리를 하겠다고 10여 년째 앵무새처럼 되뇌기만 하는 동안 가계부채는 폭증에 폭증을 거듭했다. 또 다시 모두가 홀린 듯이 경보음은커녕 빚내서 집 사라는 목소리에 맞장구를 치거나, 아니면 비겁하게 입을 닫았다. 한국 경제가 빚더미에 올라서는 순간에 모두가 침묵했던 26년 전의 모습과 겹쳐진다. 이런 규모의 부채를 안고 위기를 피할 수 있는 가능성은 극히 적다. 그리고 그 모든 부담은 오롯이 서민들의 몫이 될 것이다.
미국의 고금리로 인한 충격은 여전히 진행형이다. 변동금리 대출로 인해 고금리 이자를 부담해야 하는 채무자들이 늘어나고 있다. 서민경제는 싸늘하게 식어가고 있는데 정부는 곳간 지키기에 바빠 재정지출을 줄이는 예산안을 통과시켰다. 서민들의 마지막 산소호흡기를 막아 버린 격이라서, 한국경제의 장기 침체 가능성은 더 높아졌다.
26년 전 연말 부실 대기업은 물론 기획재정부와 금융위, 한국은행을 성토하며 비분강개하던 투사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그 때처럼 서민 경제 앞에 놓인 추운 겨울을 맞아 꺼져가는 거리의 불빛을 바라보며 문득 드는 의문이다.
폭발 직전 가계부채 위기, 과감한 면책이 해결책이다
/ 홍종학 전 중소벤처기업부 장관
/ 시민언론 민들레
2023.11.21
필자는 오래 전부터 가계부채가 경제 위기로 이어질 수 있다고 경고해 왔다. 현 정부가 강조하는 정부부채는 오히려 외국과 비교할 때 안정적이지만, 가계부채는 최악이고 최근 몇 년 사이 증가율은 세계 최고 수준이다. 올들어 IMF 같은 국제기구들이 한국의 가계부채에 대해 계속 경고하고 있고, 언론에서도 가계부채의 연체율이나 부실 가능성에 대한 기사가 자주 보도되고 있다. 대통령 비서실장도 가계부채 위기가 발생할 경우 외환위기보다 10배 더 큰 충격을 줄 수 있다고 경고할 정도다. 가계의 대규모 부실로 인해 장기 침체가 올 수 있다는 위험을 정부도 인식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카드빚으로 휘청댔던 20여 년 전 사태의 데자뷔
현재의 상황은 20여 년 전의 데자뷔가 되어 그 때를 회상시킨다. 카드사들의 길거리 모집이 횡행해 누구나 손쉽게 여러 장의 카드를 발급받을 수 있던 시기였고 카드빚으로 고통받던 사람들의 이야기들이 신문과 방송을 장식하던 때였다. 필자는 경제학자로서 곧 서민 경제가 무너지고 수많은 희생이 이어질 것을 직감했다. 전문가들을 만나 대책을 물어보았지만 뾰족한 대안을 얻지 못했다.
거의 6개월을 정신나간 사람처럼 만나는 사람에게 큰일났다를 외치고 다녔다. 사람들이 필자만 보면 신용카드를 떠올릴 정도로 사태의 심각성을 알리는데는 성공했지만 여전히 대책은 찾지 못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눈앞에서 죽어가는 것을 지켜보아야 한다는 사실을 견딜 수 없었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으로, 혹시나 하는 생각에 경제학 논문들을 뒤지기 시작했다. 그동안 경제학을 공부하면서 금융 분야에 대해서도 공부를 꽤 했는데도 가계부채와 관련된 논의를 들어본 적이 없는 것이 이상했다.
답답한 심정으로 경제학 논문들을 뒤지다가, 미국의 개인 파산제도를 접하게 되었다. 미국은 18세기부터 농민들이 자연재해나 전쟁 등으로 상환불능 상태에 빠졌을 때 한시적으로 파산제도를 운영해 왔다. 20세기에 들어서는 언제든지 법원의 판결에 의해 파산이 가능하게 했다. 이후 채무자에게 유리하게 개선해 오던 중, 1978년 파산개혁법을 통해 채무자가 쉽게 파산을 신청하도록 하고 법원은 과감하게 면책을 허용하게 했다. 그 결과 미국에서는 2005년 200만 명이 넘는 채무자가 파산을 신청하기도 했다. 이는 인구 비례로 보아도 엄청난 숫자가 아닐 수 없다.
한국주택금융공사(HF)는 3일부터 특례보금자리론 금리를 0.25%포인트(p) 인상한다고 밝혔다.
사진은 이날 서울의 한 은행 앞에 붙은 특례보금자리론 관련 현수막. 2023.11.3 연합뉴스
자본주의 본산 미국의 광범위한 채무자 파산제도
필자의 의문이 풀렸다. 이 법이 가계부채와 관련한 논의에 사실상 종지부를 찍은 셈이다. 그 이후 추가 논의가 많지 않아서 필자가 접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공부를 할수록 미국의 파산제도는 놀라웠다. 많은 주에서는 파산시 전 재산을 처분하지 않고 최소한 집 한 채는 유지할 수 있게 했다. 또한, 직장인의 경우 월급의 25% 이상은 압류하지 못하도록 강제하기도 하고, 공정채권추심법이 있어 채권 추심을 까다롭게 규제했다.
파산법을 공부하면서 그동안 필자의 관심분야였던 규제 완화에 대한 이해도 깊어졌다. 미국은 1980년대 들어 금융규제를 대폭 완화했는데, 이는 파산개혁법을 포함한 소비자 보호제도를 강화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규제 완화를 반대하는 가장 큰 이유는 소비자 피해인데, 이미 소비자를 철저하게 보호하는 제도가 갖춰져 있다는 규제 완화론자들의 주장이 설득력을 얻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미국은 이후 금융위기에서 가장 빠르게 회복하는 유연성을 보였는데, 그 이유는 가계 부실을 빠르게 해소했기 때문이다.
필자에게는 완전히 새로운 이론에 눈 뜬 계기가 되었다. 카드빚으로 인해 수많은 희생자가 발생하는 사회적 문제가 부각되던 시기, 필자는 남들과는 다른 대안을 자신있게 제시할 수 있었다. 단순히 카드사의 일탈로 볼 것이 아니라, 가계부채 문제를 구조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파산제도를 포함한 채무자 보호제도가 필요하다고 제안했다. 채무자의 재기를 도와 새출발할 때 경제는 다시 활력을 되찾게 된다는 중요한 이론을 반복해서 강조했다.
급한 불을 끄기 위해서는 미국처럼 채권추심을 엄격하게 제한하는 공정채권추심법의 제정이 필요했다. 사회적 문제가 커져 갈수록, 불법적 채권 추심으로 인한 부작용을 인식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정부에서도 뒤늦은 조치였지만, 추심업체에 대한 규제를 강화하여 조금씩 개선되었다. 카드사태로 인해 카드회사가 정리된 이후에야 비로소 개인회생 및 파산법이 제정되어, 개인들이 재기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필자는 국회의원이 된 후 미진한 채권추심 규제를 강화하고자 2014년 공정채권추심법을 개정하였다. 대리인을 지정한 후에는 채무자에게 직접 채권 추심을 할 수 없도록 금지하는 방어권을 보장한 것이다. 향후 많은 생명을 구할 중요한 조항이라고 믿고 있다.
금융회사 안정성 아닌 가계부채 해결에 명운 걸어야
이때 공부한 것을 바탕으로 가계 대출에서 상환능력을 중시하는 총부채상환비율(DTI) 규제를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지금은 금융전문가들이 대부분 받아들이고 있으나, 당시만 해도 동조하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그 사이 한국의 가계부채는 악화일로를 걸었다. 그때 더 소동을 피웠어야 하지 않았나 후회가 된다. 신자유주의적 미국식 제도의 도입을 주장하면서도 채무자를 보호하는 제도는 외면해온 한국의 현실이 원망스럽기만 하다.
가계부채 위기는 필연적으로 한국 경제를 장기 침체에 빠지게 할 것이다. 그보다 더 답답한 것은 서민 경제가 무너지는 것에 대해 무관심하다는 점이다. 카드사태 당시처럼 수많은 가계가 부실화되고 비극적 사건이 이어질 것이다. 부동산 거품을 조기에 안정화하고 가계를 회생시키지 못하면, 한국 경제는 큰 위기를 맞게 될 것이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정부와 정치권은 별 대책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다행히 그 때와 달리 답은 마련되어 있다. 개인회생과 파산에 관한 법률과 함께 공정채권추심법을 적극적으로 적용하여 부실 가계를 조속히 회생시키면 경제는 살아날 수 있다. 그러나 그때처럼 정부는 여전히 금융회사의 안정성만 걱정하고 있고, 법원은 과거 방식의 판결을 고집하고 있어 이번에도 큰 희생을 치를 것만 같아 걱정이다. 언론에서 공정채권추심법상 방어권에 대해 제대로 알려만 주어도 불필요한 희생을 막을 수 있을 텐데 좀처럼 찾아보기 어렵다. 전세사기 피해자의 절망에 대해서도 법원이 좀 더 귀를 기울여야 하는데 안타깝기만 하다.
문제의 심각성을 인식하도록 각성을 촉구한다. 과감하게 가계부채를 면책해서 사람도 살리고 경제도 살려야 한다. 금융회사가 막대한 이익을 올리고 있는 지금이 적기다. 이 시기를 놓치면 한국경제도 잃어버린 20년을 맞게 될 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