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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청대사 혹은 중국근대사를 어떻게 볼 것인가, 라는 질문을 던지고 책과 자료를 찾아보면 이즈음엔 읽을거리가 넘쳐난다.
청대사는 왕조사로 읽을 수 있으며, 세분하여 滿洲汗國 시대(1605-1615), 後金 시대(1616-1635), 大淸帝國 시대(1636-1911)로 나누거나, 아편전쟁이나 신해혁명을 기준으로 전근대와 근대로 나누기도 한다. 하지만 보다는 일국사를 넘어서 ‘동아시아사로서의 중국(근대)사’를 살펴봐야 할 것이며, 현대중국과 관련하여 무엇이 ‘중국’이고 무엇이 ‘중화민족’인가 하는 물음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한편에선 우리학계는 청사를 어떤 시각에서 또 구체적으로 어떤 문제들을 검토할 수 있겠는가 하는 문제 제기와 그에 대한 모색이 필요하다는 점이 지적되고 있다. 청 왕조와 조선은 후금시대의 전쟁, 책봉 조공 체제, 임오군변과 청일전쟁 때의 군사적 침략, 문물 교류, 이주민 등의 분야에서 여러 가지 형태로 관련을 맺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는 한국의 청사연구가 항상 중국적인 시각 혹은 서구적인 시각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할 수 없다는 의미이기도 하며 오히려 그들의 패러다임이나 구체적인 성과들을 비판적으로 검토해야 할 필요성이 더 절실하다는 인식이다. (유장근)
2. 실로 오랜만에 관련 연구동향을 살펴보니 여러 주제들이 관심을 끈다. 특히 연구 패러다임의 변화라든지, ‘신청사’와 ‘만청 식민주의’와 같은 논의들이 그렇다.
<중국의 근대화를 둘러싸고>, 쿠보타 분지( 신해혁명연구회 엮음, 《중국근대사연구입문》 소수)
<현대중국의 역사학-사회주의 역사학의 모색과 좌절, 그리고 새로운 지평>, 이개석, 동아시아역사연구6
<한·마오쩌둥주의적 근대상과 만청적 근대상 사이에서>, 유장근
<만청 식민주의를 둘러싼 중·외 학계의 논의>, 유장근 ( 이상 《현대중국의 중화제국 만들기》 소수) 등 참조
3. 신청사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청의 통치 집단인 만주족에 대한 관심과 한화 이론에 대한 비판에서 찾을 수 있다. 신청사로 분류되는 연구자들은 공통적으로 중국인과 중국문화는 단일하고 균질적이라는 전제, 또한 중국을 정복한 외래 집단과 중국의 이웃은 궁극적으로 중국의 방식과 문화를 자발적으로 수용해왔다는 주장에 반박한다. 만주족은 유교적 가치관에 완전히 동화되었으며 그 때문에 중국을 성공적으로 통치했다는 한화 이론의 주장과는 달리, 신청사 학파는 만주족의 정체성은 한족문화와의 오랜 접촉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았으며 특히 청의 황제들은 문화적으로 변용되지 않았다고 강조한다. 만주족의 민족적 정체성에 대한 관심은 몽골, 회족, 묘족 등 다른 비 한족 집단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졌고 나아가 이들이 거주하는 다양한 변경지역에 대한 연구로 발전했다. 이 과정에서 청과 내륙아시아가 역사적, 문화적으로 밀접한 연관을 지니고 있음이 강조되었고, 한문 이외의 다양한 언어, 특히 만주어와 몽골어 자료에 대한 관심이 크게 증가했다. 비 한족과 이들이 거주하는 변경지역에 대한 연구는 또한 청이 지닌 팽창주의적 제국으로서의 특징을 강하게 부각시켰다.(김선민)
윤영인, <만주족의 정체성과 청대사 연구>, 만주연구5, 2006
파멜라 크로슬리, <‘신’청사에 대한 조심스러운 접근>, 《외국학계의 정복왕조 연구 시각과 최근 동향》, 동북아역사재단, 2010
김선민, <만주제국인가 청 제국인가-최근 미국의 청대사 연구동향을 중심으로->, 사총74, 2011 등 참조.
4. 현대 중국은 청조의 영토를 거의 그대로 계승하고 있다. 과연 청 왕조는 그 영토를 어떻게 구분해서 지배했는가.
먼저 황제가 사는 북경에는 중앙 정부기관이 설치되어 있고 대개 명의 지배 영역에 상당하는 본토에는 18개의 성이 두어졌다. 성을 둔 지역에서는 지방관제에 의해 과거 관료가 지방관으로 파견되어 통치하였다. 다만 그 중에서도 서남(귀주, 운남, 광서 등)에 상당수 거주하던 묘족, 요족, 장족 기타 소수민족에 대해서는 그 유력자를 ‘토사’로 임명해서 세습적인 통치를 행하는 제도가 있었다.
그 바깥쪽은 예부가 관할하는 조선, 류큐, 베트남, 라오스, 타이, 스루(필리핀 남부), 네덜란드, 버마, 서양(포르투갈, 로마 교황청, 영국) 등 갖가지 실태의 조공국들이다.
서북으로 눈을 돌리면 그중에서 준 중앙이라고도 할 수 있는 특별지역이 동북이다. 청 왕조 발상지인 동북 지역은 특별행정구역이 되어 봉천(심양)에는 수도 북경의 중앙관제에 준하는 관제를 두는 외에 봉천·길림·흑룡강 지역의 세 장군이 지역을 나누어 통치하였다. 청 말에 이르기까지 이 지역에는 한인의 입식이 제도상 금지되었다.
그 서쪽으로부터 시계 반대 방향으로 내외 몽골, 신강, 청해, 티벳이라는 비 한족의 지배 지역이 늘어서 있다. 이들은 정복이나 투항 등에 의해 청 왕조의 지배하에 들어온 곳들인 이른바 ‘번부’로서 이번원의 관할 지역이 되어 청 왕조의 감독 하에 고유의 사회제도가 유지되었다. 즉 몽골에서는 몽골 왕후가, 신강에서는 터키계의 유력자 벡이, 티벳에서는 달라이 라마가 현지 지배자로서 존속한 것이다.
그리고 그 바깥에는 이번원이 관할하는 네팔이나 중앙아시아 여러 나라, 나아가 러시아까지 들어가는 조공국이 있다.
기시모토 미오·미야지마 히로시, 《조선과 명청》 pp456-460
우리들이 생각하는 ‘중국’과 ‘중화민족’은 대개 이 범위의 지역이고 또 여기에 사는 사람들이다. 하지만 막상 무엇이 중국이고 무엇이 중화민족인가 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문제이고 역사적으로 판단하려고 해도 정확한 답변은 나오지 않는다.
이렇듯 중국은 유럽 전체 면적과 맞먹는 면적으로 내부 식민지를 거느리고 동아시아를 문명적 우위와 조공질서를 통해 지배하는 제국이었다. 근대의 충격은 이러한 제국 질서를 어떻게 재편해나갔을까?
청조는 1840년 이래 신해혁명에 이르는 70여 년 동안 외국과 다섯 번의 대규모 전쟁을 치렀다. 제1차 중영전쟁(아편전쟁), 제2차 중영전쟁, 청불전쟁, 청일전쟁, 의화단운동이 그것이다. 중국이 애초에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던 조약체제는 이제 무력하고 기울어가는 청조의 상징이 되었다. 그리고 낮선 조약체제는 점차 내부 변경 문제와 동아시아에서 국제적 지위 모두를 뒤흔들기 시작했다.
내지의 한족, 번부의 몽고, 티벳, 투르크 무슬림 등 다민족 제국질서는 내재적으로 분열의 요소를 안고 있는데다 개항 이후 외압이라는 이중압력이 가해지면서 다민족 제국질서는 동요하기 시작했다. 하여 청조와 번부를 묶었던 연대는 훼손되었으며 변경은 불안정해졌다. 이어지는 조약체제로의 편입은 동아시아의 세계질서, 조공체제를 크게 흔들기 시작했던 것이다.
결국 청불전쟁의 패전은 중국 내부에 여러 변화의 움직임을 가져왔어도 현실로 가시화되지는 못했다. 최종적인 타격은 가장 중요한 조공국, 조선을 상실하는 청일전쟁에 의해 가해졌다. 청일전쟁은 동아시아 국제질서를 극적으로 바꾸어놓았을 뿐 아니라 중국의 진로에 대한 근본적인 각성을 촉구함으로써 개혁운동과 혁명운동의 커다란 흐름의 출발점이 되었다.
요컨대 다문화 존중과 자치를 종지로 한 청 제국이 서구 열강과 마주했을 때 외연은 쉽게 공략 당했고, 그 패배는 제국의 내부에도 깊은 상처를 가하게 되어 번부질서와 조공질서의 와해과정에서 중국은 반식민지화의 길을 걷게 된다.
그러나 신해혁명 이후 중화적 세계는 문명적 중화관과 국민국가의 이념이 ‘중화민족주의’로 결합하여 성숙해져 간다. 한족을 포함한 중국 영토 내의 모든 민족이 ‘중화민족’이라는, 만들어진 카테고리 속에 통합되어 ‘중국’이라는 국민국가의 일원이 된다.
강진아, 《문명제국에서 국민국가로》 pp88-122
5. 다시 보는 동아시아 근대사, 미타니 히로시 외, 강진아 옮김, 까치글방, 2011
이 책은 일국사를 넘어서는 동아시아 역사상을 그리고자 하며, 동아시아의 지역질서를 조공책봉질서와 구미열강에 의해 재편된 조약체제로 설명하고 있는데, 19세기 동아시아와 러시아, 영국, 미국 등 서양 국가들의 움직임을 연관시켜 망라한 근현대 지역사를 지향한다. 저자들은 오랜 기간에 걸쳐 기획하여, 일중한 삼국사 전공의 3인 주도하에 본문 필자가 각 분야를 분담 집필하고 다수의 논평문 필자가 가세하여 전문성을 극대화 하고 있다.
근대 동아시아사가 지향해야 할 것으로 자국의 제국성에 대한 철저한 비판이 전제되어야 한다고 할 때, 이 책은 상당부분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성에 대한 자기성찰이 엿보인다. 하지만 메이지 시기와 쇼와 시기의 제국화에 대한 분절적 편의적 역사인식이 극복되기 위해서는 근대일본의 제국화의 기점과 그 침략성에 대한 재인식이 필요하다는 점이 지적되고 있다. (유용태)
결론에 해당하는 27장 ‘국제 公共財의 형성’은 근대의 동아시아가 성취해 공유한 표준과 공동규범을 다루고 있는데 갈등과 전쟁 속에서도 자유무역, 해관 등 국가 관리시스템, 금융결제 시스템, 전신과 철도 같은 근대화의 성취물이 공동체험으로 수용된 사실을 주목하고, 그것의 수용과 형성을 중심으로 동아시아사를 구성하고자 한다. 그러나 이들이 가지는 서양의 근대적 규범의 확대라는 측면을 강조하다 보면 구미 열강의 침략성을 희석시킬 가능성은 집필자들이 우려하는 것처럼 유보될 수밖에 없다고 하겠다. 자유무역이 가지는 폭력성 또한 마찬가지다.
동아시아의 근대 그 중심과 주변, 김선민 외, 소명출판, 2013
동아시아의 중심과 주변을 이해하기 위한 하나의 시각으로서 '변경'이 주목되고 있다. 변경적 시각은 지리적 공간이자 동시에 문화적 개념이다. 변경은 복수의 정치세력, 혹은 여러 사회·문화적 집단이 공존하는 경계가 모호한 공간을 의미하며, 또한 이곳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형태의 접촉, 교류, 충돌, 혼종을 가리킨다. 변경적 시각은 중심에서 구축된 제국의 지배질서가 주변에 미치는 양상을 드러내고, 역으로 주변이 중심의 지배질서를 이해하고 수용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또한 중심이 주변을 설정하고 이를 학문적 연구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궁극적으로 중심 스스로의 정체성을 재구성하는 작업임을 알 수 있다. 무엇보다 변경적 시각은 중심과 주변의 관계에 주목함으로써 중심과 주변이라는 설정이 상대적이며 가변적인 것임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동아시아의 맥락에서 지리적·문화적 변경이 지닌 특징에 주목함으로써 한국문화가 지닌 동역학을 구체적으로 설명할 수 있게 해 준다는 것이다.
이 책은 3부로 구성된 논문집이다, 1부는 전통시대 동아시아의 제국질서가 중심과 주변에서 발현되는 양태를 고찰하고 있다. 먼저 윤욱은 청의 통치질서가 제국의 중심에서 논의되고 구체적으로 운영되는 방식을 건륭 말기 화신이라는 인물을 통해 살피고 있는데, 건륭제가 18세기 후반에 이르러 청의 핵심기관인 군기처를 중심으로 관료들의 부패가 만연하면서 제국의 통치가 위협을 받게 되자 화신 집단을 정책적으로 등용하여 과거출신 관료들을 견제하였음을 밝히고 있다. 이어 조성산은 청의 제국질서가 주변에서 이해되고 수용되는 과정을 조선 지식인들의 대청인식을 중심으로 분석한다. 마지막으로 김선민은 청 중심의 제국질서에 근거한 중심과 주변관계가 청과 조선의 접경지대에서 구체적으로 표현되는 양상을 고찰한다.
김 교수는 이 논문을 포함한 일련의 연구(<청제국의 변경통치에 관한 연구동향 분석> 2010, < 雍正-乾隆年間 莽牛哨事件과 淸-朝鮮國境地帶> 2011, <국경지대에서 국경선으로-19세기 말 청과 조선의 관계>2013, <한중관계사에서 변경사로> 2013)를 통해 기존의 한중관계사의 국가 중심적이고 본질주의적 틀을 대신하여 변경사적 관점으로 여진-만주족과 조선의 관계를 해석할 것을 제안하는 바, 이를 통해 만주와 조선의 변경에 대한 인식이 시기적으로 변화했음을 강조함으로써 여진-만주족과 조선의 관계를 보다 새롭고 입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누르하치와 홍타이지 시기의 범월사건에서 강희년간의 백두산정계비 설치, 그리고 옹정-건륭년간의 망우초 사건에 이르기까지 후금-청과 조선의 관계에는 언제나 범월과 강역의 문제가 그 중심에 있었으니, 양국의 접경지역이야말로 후금에서 청 제국으로의 발전과 청-조선 사대관계의 추이를 가장 잘 드러내는 지점이었다는 것이다.
제2부는 전통적인 제국질서가 19세기 말 겪게되는 연속과 단절의 양 축면을 다루고 있다. 윤욱은 청말에 도입된 철도, 윤선과 같은 근대적인 교통수단과 근대적인 우정제도가 주접(奏摺)의 전달에 끼친 영향을 검토하고 있으며, 이어지는 글에서 주접제도와 마찬가지로 기인의 지배체제도 적어도 훈춘과 같은 변방에서는 커다란 동요 없이 지속되었음을 증명하고 있다.
제3부는 20세기 전반 동아시아의 근대학문과 변경의 문제를 다룬다. 김선민의 ‘만선사, 만학 그리고 만주학’은 일본과 중국에서 만주학의 발전과정과 그 시대적 배경을 검토함으로써 동아시아 만주학에 공통적으로 내재된 민족주의적 시각을 분석하고 있다. 이어지는 두 편의 글에서 홍윤희는 근대학문으로서 인류학이 중국 서남부 소수민족 신화에 적용되었을 때 생성되는 ‘민족’표상과 또 다른 ‘중심과 주변’ 구도를 포착하고 있다.
이 책은 ‘변경사’에 대한 케이스 스터디라는 생각과 함께, 추후 읽고자 하는 ‘만주학‘에 대해 선행학습을 하는 느낌이 든다.
청사 - 만주족이 통치한 중국, 임계순, 신서원, 2001
만주족과 팔기제를 오랫동안 연구해온 저자의 이 책은 청조에 대한 전형적인 개설서이다. 저자는 청조의 성격을, 소수민족인 만주족이 건립한 왕조임에도 한인을 장기간 통치하였으며, 청의 지도자들은 명조를 정복한 뒤 전개된 새로운 국면에 유연하게 대처하였고, 오랜 기간 동안 평화와 번영을 이룩했으며(‘팍스 시니카’ Pax Sinica), 광활한 영토와 다민족국가를 오늘날의 중국에게 유산으로 물려주었으나, 19세기 상황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하고 서구열강에 의해 서서히 붕괴되어갔다는 데에서 찾고 있다.
그리고 청조를, 흥기와 중국정복, 중앙집권적 유교관료국가 수립, 번영과 쇠퇴, 구질서 회복을 위한 자강운동, 미완성의 개혁이라는 5부로 나누어 정리하고 있으나 그 구분의 기준이 무엇인지는 뚜렷이 밝히지 않고 있다. 일본의 경우 중국역사상의 한 왕조로서 청 왕조를 바라보는 관점에서 한문 사료를 이용하고 명청으로 교체되는 중국사의 연속성을 강조하는 청대사 내지 명청사 연구자와, 북방민족인 만주족이 세운 왕조라는 관점에서 만문사료를 중시하는 청조사 연구자로 나뉘고 있는 경향을 보이고 있는데, 저자의 관점은 어떠한지 궁금해지는 대목이다. 사실 이 문제는 청 왕조의 만주왕조로서의 측면과 중화제국으로서의 그것을 어떻게 통일적으로 파악할 것인가 하는 문제이기도 하다.
이 책에 대해선 유장근 선생의 전문적이고도 상세한 서평이 있어 대작을 읽으며 모호해질 수 있는 관점을 일깨우고 책 읽는 재미를 한결 더해준다.
청 : 중국 최후의 제국
윌리엄 T. 로, 기세찬 옮김, 너머북스, 2014
원제 China's Last Empires: The Great Qing 2009
하버드대학을 중심으로 전개된 신청사 연구는 유목민족인 청조의 제국적 질서는 전통적인 중화제국과는 상당히 이질적이었음을 밝혀 청의 판도를 그대로 오늘날 중화민족론에 복사하거나 조공체제론에 투사하려는 중국학계의 동향을 경계하고 있거니와, 이 책의 기본적인 입장 역시 그러하다.
저자는 청대 역사학 방법론의 세 가지 중요한 변화를 지적하고 있다. 첫째는1970-1980년대에 진전되었던 ‘사회사로의 전환’인데, 그 결과 ‘서구에 대한 중국의 대응’ 모델에 내재하고 있던 중국 근대의 도구적 관점을 새롭게 비판하고 중국 내부 역사의 변화에 초점을 맞추기 시작한 점, 마오 이후 중국의 경제발전이 뒷받침되면서 청의 역사를 실패한 이야기로 치부하는 인식이 점차 사라졌다는 것, 시대구분에서 청대를 하나의 전체로 보는 관점이 ‘전통’과 ‘근대’로 구분하는 경향보다 우위를 점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둘째는 ‘내륙 아시아로의 전환’이라는 청대 역사의 재 개념화로, ‘만주족’의 정체성이 그 자체로 역사적 구성체였고 대체로 명을 정복한 후에 자체적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이러한 시각은 제국의 변경 팽창사 방면으로 확장되어 중국을 19세기 말 서양이나 일본 제국주의의 수동적인 피해자로 보는 대신 18세기에 가장 활발했고 19세기와 20세기 초까지도 적극적이었던 제국주의 행위의 참여자로 본다는 점이다.
셋째는 ‘유라시아적 시각으로의 전환’인데 많은 학자들은 이른바 ‘17세기의 전반적인 위기’에 대해 다국적 경제적 요인 특히 금과 은의 국제적인 유통과정에서의 극단적인 불안정과 소빙기라는 세계적 기후를 변화를 강조했다. 이는 유라시아의 단일성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불러일으켜 지금 청은 고립된 예외라기보다는 새로운 통신 기술에 도움을 받은 행정적 중앙 집권화, 계획적인 다민족적 구성요소 적극적인 영토 개척의 형태면에서 여타 제국들과 대체로 유사했다고 재인식되고 있다.
이 책은 정복, 번영, 멸망과 관련되는 제국의 정치, 군사 문제뿐만 아니라 문화, 사회, 상업 분야에 별도의 장을 할애함으로써 여러 시각에서 청 제국을 분석하고 있다.
대청제국 1616~1799, 이시바시 다카오, 홍성구 역, 휴머니스트, 2009
이시바시 교수 역시 ‘내륙 아시아적 시각’을 토대로 한족 중심의 중국사 연구에서 벗어나서, 가장 성공적으로 한족의 중국을 통치한 청조의 성공 요인을 한족 문화의 수용과 동화에서 찾지 않고, 건국 주체인 만주족의 입장에서 재해석함으로써 새로운 대청제국의 역사를 보여 준다.
변방의 오랑캐로 불리던 만주족이 중화 대륙과 중앙아시아를 넘어 이슬람 시계까지 이어진 중국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지배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무엇일까. 물론 팔기제로 대표되는 청조의 막강한 군사력이 뒷받침이 되었지만, 저자는 청조의 강대함은 끊임없는 혁신 덕분에 가능했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것을 가능하게 한 조건을 한족이 아니었기 때문에 만주족이 갖출 수 있었던 순응성이 풍부한 세계성과 가난했기 때문에 얻을 수 있었던 활력에서 찾는다. 가난한 오랑캐는 가진 것이 없었기 때문에 그 모든 것을 채우려는 갈망이 혁신의 추동력이 되었다는 것이다. 청을 건국한 누르하치의 거병에서부터 끊임없이 이어진 성장과 확대 과정 속에서 정치력 . 경제력 . 군사력을 둘러싼 혁신 정치와 보수 정치의 대립을 겪으며 수많은 정치적인 변천을 거듭함으로써 이 문화(異文化)를 융합하는 다민족국가를 형성하는 데 성공하고, 결과적으로 전례가 없는 청조의 강대함을 낳았다고 한다.
청조의 역사는 지배족인 만주족과 피지배족인 한족의 이중구조로 이루어져 있다고 알려져 있다. 부족사회의 만주족이 농경사회에 기반을 둔 중국 내지를 차지함으로써 부족사회와 농경사회의 양면적 성격을 띠고 있다는 것이다. 비한족인 ‘오랑캐’의 한(han)이 중국 황제를 겸한 청조는 ‘이(夷)’와 ‘화(華’가 동거하는 양면성, 즉 ‘화이일가(華夷一家)’의 성격을 그대로 보여준다. 이 책은 이러한 청조의 양면적 성격에 한 가지 더 주목하고 있으니, 바로 만주족(滿)과 한족(漢)에 덧붙여 번(藩, 몽골 . 티벳 . 위구르)의 체제에 주목한 것이다. 이를 만·한·번의 3중 구조라고 일컬으며, 이 체제로 인해 청조는 마침내 통일 다민족국가를 이룩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저자의 청조국가론에 대해선 그 관건인 개념의 정리와 실증 연구에 의한 증명이 충분하다고 말하기 어렵고, 또 삼중구조론도 도식화된 모델이라고는 할 수 없고 추상적인 표현에 머무르고 있다는 비판이 있다.(스기야마 기요히코)
이시바시 교수는 청조 초기 200년 동안의 정치적 변천을 6단계로 정리한다. 북경 입관 전 3단계(누르하치의 만주국 수립, 아이신국 형성, 홍타이지의 대청국 성립)와 입관 후 3단계(강희제의 중국 내지 통일, 옹정제의 절대권력 확립, 건륭 황제의 중국 최대 판도의 형성) 중 마지막 6번째 단계가 다민족국가로서의 청조의 완성을 의미하며, 이 여섯 단계의 성장 과정은 모두 새로운 다민족국가를 향해 변신을 거듭한 청초의 정치적 변천을 반영한다.
저자는 이 6단계를 통해 만주족 황제들의 모습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특히 만주족에 대한 한족의 복종도를 가늠할 목적으로 만주족의 두발형을 강제한 치발령, 지배구조의 중요한 버팀목의 하나였던 팔기제, 황태자를 대신한 저위밀건법(儲位密建法), 주접(奏摺)제도 등을 세밀하게 소개하는데, 이들 역사는 청조가 명조의 계승자라는 시각에서는 결코 볼 수 없는, 한족 중심의 역사 서술로는 해독 불가능한 독특한 역사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다시 말해 만주족 왕조로서의 청조론에 힘을 실어줌으로써, 청 왕조의 역사가 다민족국가를 완성해가는 역사인 동시에 한족과는 다른 만주족 왕조의 역사임을 드러내준다.
여진 부락에서 만주 국가로, 유소맹, 이훈 외 옮김, 푸른역사, 2013
만주족의 관점에서 접근하는 청대사는, 그 정체성이 확립되는 강희, 옹정, 건륭 시대만이 아니라 청조사회의 기본적인 성격이 형성되는 입관 전 만주사회에 대한 이해가 필요한 바, 이 시기에는 만문으로 기록된 다수의 만문당안이 있으며 이들은 한문자료 보다 일차적인 자료이기에 만주사회의 정체성 파악을 위해선 기본적으로 만문자료의 이용이 요구되고 있다. 이 책 역시 마찬가지로 한문 사료와 만문사료가 광범하게 동원되는데, 조선왕조실록이 만주실록 등과 함께 주요한 사료로 쓰이고 있다.
이 책은 중국의 소수민족 가운데 하나인 만주족이 16세기 말에서 17세기 초에 씨족 부락제도의 기반 위에서 발전하여 국가를 건립한 과정을 고찰한 연구서이다. 저자에 의하면 여진의 부락시기의 여러 제도가 국가 설립시기 제도의 기반이 되었던 바, 만주족이 씨족·부락 제도의 기반 위에서 발전 중이던 14세기 후반부터 거대 국가를 건립하는 17세기 초반까지 과정을 ‘조직’과 ‘권력’이란 개념을 발판 삼아 제도사 측면에서 고찰하고 있다. 종래 별개의 사회로 인식돼 온 여진의 부락시기와 국가수립 이후의 시기를 연속선상에서 고찰하고 있음이 이 책의 특징인 것이다. 저자는 금의 국가체제의 근간을 이뤘던 ‘팔기’와 사회조직과 관습법 등의 제도의 원형을 300여 년 전 여진 부락에서 찾아낸다. 요컨대 여진 부락 시기 여러 제도가 국가 시기 제도의 기반이 되었으니, 여진 곧 만주족이 수립한 국가는 '만주족·몽골인·한족이 팔기 체제를 통해 효율적으로 혼합된 다민족 국가'인 것이다.
책중일록 - 1619년 심하 전쟁과 포로수용소 일기
이민환, 중세사료강독회 옮김, 서해문집, 2014
이민환은 광해군조에 명과 후금 사이에 벌어졌던 심하전역(深河戰役, 사르후전투. 1619년)에 파견된 조선군의 강홍립 휘하에 종사관으로 참전했다가 포로가 되었던 인물이다. 《柵中日錄》은 이민환이 창성에서 출병을 준비하던 1619년 2월 16일부터 만포에 돌아온 1620년 7월 17일까지 쓴 일기다. 일기의 앞머리에는 출병의 배경이 된 후금의 무순 함락, 이에 대한 명나라의 군사 동원과 조선에 대한 징병 요청, 조선 정부의 대응책 등이 기술되어 있다. 초반부의 일기는 매일 기록했으나, 포로가 된 이후 장기간에 걸친 수용소 생활 중에는 중요한 일이 있을 때만 기록했다. 이 책엔 조선에 돌아온 후 조정에 제출한 후금의 전력에 대한 보고서인 《建州聞見錄》도 함께 실려 있는데 그는 후금 방어 대책으로 산성수축, 군마육성, 군사의 정예화, 변방 군사 육성, 무기의 정예화, 무예 장려 등을 꼽고 “착실히 준비하여 거행할 수 있다면 족히 적을 막을 수 있다”고 적었다. 그러나 이후 조선은 이 가운데 어느 하나도 준비하지 못한 채 참혹한 전란을 맞게 된다.
심양장계 - 1637~1643년 심양에서의 긴급 보고
심양관, 김남윤 옮김, 아카넷, 2014
《瀋陽狀啓》는 병자호란 직후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간 소현세자와 배종 신하들이 청나라의 수도 심양에서 승정원에 보낸 장계를 모은 것이다. 장계에는 세자나 대군의 안부에서부터 관소에서 벌어진 일, 정축화약의 약조에 따른 양국 간의 현안 등을 상세히 기록하여, 명.청 교체기 조선이 처한 현실을 생생하게 전해주고 있다. 청나라 군대의 침공으로 쑥대밭이 된 강토와 청으로 끌려간 포로가 수십만을 헤아리는 참담한 상황에서 대청외교의 최전선에서 타전한 현장 보고인 것이다. 장계는 1637년 2월 11일 소현세자 일행이 심양으로 가는 길에 장단에서 보낸 것을 시작으로 1643년 12월 15일 세자가 두 번째 일시 귀국길에 보낸 것까지 7년간의 장대한 기록이다.
이 심양에서의 긴급 보고는 청 태종이 조선에 내린 명령, 칙사 행차 소식, 청 군병들이 사로잡은 피로인의 속환, 조선에 살던 향화인의 쇄송, 대명전쟁에 참전할 조선 군병과 군량의 징발, 조선에 대한 불신, 조선과 명의 밀통 사건으로 인한 양국 관계의 경색 등을 주요 내용으로 다루고 있다.
소현세자는 정례 조참(朝參)은 물론, 태묘 제사, 승전 진하례 및 황제와 제왕(諸王)이 베푸는 잔치들, 황제의 사냥 행차 등에도 황제의 명에 따라 참석했다. 또 청 태종은 몽골 일부 세력과 연합하고 일부는 정벌하여 복속시켰는데 몽골과 중첩된 혼인을 맺고 벌인 잔치에도 세자와 대군을 참여하게 하였다. 이들 장계 내용에서 청조의 동향과 아울러 여인의 기마(騎馬) 및 재혼 장려와 화장(火葬) 등 만주족의 풍습을 엿볼 수 있는데, 이는 17세기 중국 근세사 연구에도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만주족의 청제국, 마크 C. 엘리엇, 이훈 김선민 옮김, 푸른역사, 2009
원제 Manchu Way: The Eight Banners and Ethnic Identity in Late Imperial China
신청사 학파의 대표 주자 중 한 사람인 마크 엘리엇은 이 책의 핵심을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청대 중국의 역사를 고찰하기 위해서는 왕조를 수립한 정복자인 만주족에게는 반드시 전해져야 할 그들만의 이야기가 있으며 그 만주족의 이야기를 기존의 서술에 포함시키지 않고는 청대사를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이어 그는 첫째, 청제국은 그저 중국 왕조 가운데 하나라는 생각 대신 오토만 제국, 무굴 제국, 합스부르크 제국, 로마노프 제국에 비견할 만한 다민족 제국이라는 생각이 확산되어 이제 청대사는 새로운 경향의 세계사에 동참하게 되었으며 이와 관련하여 둘째, 중국사 연구자들이 기본적으로 갖고 있던 ‘중국’과 ‘중국인’에 대한 인식 자체를 재검토해야 할 필요가 대두되었다고 한다.
종래에 역사가들은 청 초기, 즉 입관을 전후한 짧은 시기를 다룰 때에만 만주족을 청의 주체로 부각시키고, 이후로는 만주족이 지배민족이라는 사실을 청사의 중요한 요소로 고려하지 않았다. 이는 청 중기부터 만주족이 자신의 문화와 언어를 상실하고 한족 속에 융해되었기 때문에 청대 정치의 주체가 만주족이라는 점이 청사에서 중요하지 않다고 보는, 이른바 ‘중국 중심적 시각’ 때문이었다. 이 책의 저자인 마크 엘리엇은 이런 시각에서 벗어나, 만주족이 청 말까지도 자민족의 민족성과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다수의 피지배민족에 대한 소수 지배민족의 통치를 견지했다고 주장한다. 다시 말해 저자는 만주족이 한화되었다거나 혹은 만주족의 중국 지배가 만주족이 한화되었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종래의 주장을 반박한다. 그리고 만주족이 자민족의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중국보다 내륙 아시아의 전통에 영향을 받았고 그것을 통치에 지속적으로 활용했다는 이른바 ‘내륙 아시아적 시각’을 주장의 바탕에 두고 있다.
저자는 이 책에서 만주족이 정체성을 유지하고 소수의 지배민족으로 다수의 피지배 민족을 통치할 수 있었던 기제를 팔기에서 찾는다. 팔기제는 무술연마와 근면 강직을 강조하는 만주족의 전통을 중심으로 기인들을 하나의 민족 집단으로 결집시키는 기능을 담당했다는 것이다. 엘리엇의 이러한 관점은 학계에서 논쟁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혹자는 민족성이라는 개념이 청말 이전의 상황에서 사용되기에 적절하지 않다고 주장한다. 즉 엘리엇의 주장처럼 만주족의 문화가 청초부터 일관되게 지속적으로 존재했던 것이 아니라, 청조는 만주족의 정체성을 자의적으로 해석하여 정복과 통제의 필요에 맞게 사용해왔다는 것이다. 혹자는 마크 엘리엇이 팔기를 민족과 동일시하는 주장에 대해 비판을 가하기도 한다. 즉 팔기에는 만주팔기, 몽고팔기, 한군팔기가 있는데 팔기에 속한 이 민족들이 모두 만주족과 동일시되었다는 주장은 과도하다는 비판이 그것이다. 청조의 특질이 만주족의 민족성과 정체성의 유지에 있는 것인지, 혹은 만주족ㆍ몽골족ㆍ한족ㆍ티벳족ㆍ위구르족을 모두 아우르는 보편 군주적 황제권에 있는 것인지는 아직도 논쟁중이다. 그리고 만주족, 한족, 몽골족으로 구성된 팔기를 엘리엇의 주장처럼 만주족과 등치시킬 수 있는지 의구심은 여전히 상존하고 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신청사 학파의 청대 민족성 문제에 대한 관심은 청사와 만주족과 청대 변경 연구에 새로운 지평을 열었고, 마크 엘리엇은 그 가운데에서도 민족성의 문제를 정면에서 가장 첨예하게 다루었다는 사실이다. (김선민)
이 책은 760 여 쪽에 이르는 대작이다. 그만큼 풍부한 내용을 담고 있으며, 동시에 많은 논쟁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화제작이라 하겠다.
건륭제 - 하늘의 아들, 현세의 인간
마크 C. 엘리엇, 양휘웅 옮김, 천지인, 2011
원제 Emperor Qianlong: Son of Heaven, Man of the World
17세기 중반 강희제가 제위에 오르면서 시작된 청조의 전성기는 옹정제를 거쳐 건륭제 대에 이르면 최고의 황금기를 맞게 된다. 이 시기를 흔히 ‘강건성세(康乾盛世)’라고 부르는데, 건륭제는 조부의 위업을 이어받아 정치, 경제, 군사, 문화 등 전반에 걸쳐 강력한 국가를 이룩해냈다. 18세기 서양이 산업혁명과 계몽주의로 급변하는 새 시대를 맞고 있었다면, 중국이라는 제국의 위엄은 ‘장구한 18세기의 성세’ 동안에 최고조에 달했다.
18세기 중국은 인구가 두 배로 늘어나 1800년 3억을 넘어선다. 이러한 인구폭발은 인간과 자연이 처한 환경의 곳곳에서 울려 퍼졌고, 각 지역 간 교역 측면에서 급속한 경제 발전을 초래하는데, 이는 도시지역에서 삶의 질을 개선시키고 문화적인 생산을 자극하는 데 크게 기여한다. 18세기 중화제국은 대규모로 팽창했고 지식탐구 사조가 나타나 문화가 꽃을 피우고 대중적인 신앙 및 조직이 다양한 형태로 널리 퍼졌다. 그리고 중국인과 유럽인 사이의 접촉이 극적으로 증가하고, 중국과 서양 사이에서 최초의 근대적인 외교관계가 벌어진 것도 이 시기의 일이었다.
이러한 변화 모두는 중국을 지배한 청 왕조의 황제 치하에서 발생했다. 사실 황실 가문과 청조 지배층의 주력은 만주족이었다. 저자는 여기에 주목한다. 건륭제는 당당한 세상의 통치자로 인식되기를 원했고, 만주족의 ‘칸’만이 아니라, 한족을 비롯한 여러 다양한 민족을 모두 아우르는 황제로 자처했다. 그는 만주어, 중국어, 몽골어 등의 언어에 유창했고, 중국, 티베트, 몽골, 만주의 문화에 정통했으며, 샤머니즘, 불교(티베트와 몽골 및 후대의 만주족이 신봉한 종교), 유교, 이슬람교에 똑같이 관심을 가지고 이들 종교를 존중했다.
전통적인 중국의 학문 영역에서도 그의 공로는 탁월했다. 건륭 자신 시작詩作을 좋아했으며, 오늘날에도 그 방대한 분량으로 다른 모든 총서를 압도하는 《사고전서》가 그의 명으로 편찬되었다. 또한 근대의 과학적 연구방법론인 고증학의 기풍이 크게 유행했다. 거리마다 서점이 넘쳐났고, 많은 연극과 공연이 열렸다. 경제적으로도 활황이었다. 세계의 은이 중국으로 유입되었고, 시장이 원활하게 유지되었다. 제한적이었지만 국제무역도 활발하게 이뤄졌고, 서양의 선교사를 통한 문화의 교류도 꾸준했다. 대외적으로도 건륭제는 많은 유럽 국가들의 구애를 받았다. 영국을 비롯한 유럽의 여러 나라들도 어떻게 해서든 건륭제와 외교관계를 맺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여행하는 군주이자 르네상스인 이었던 그는 또한 十全武功을 자랑하는 무인이기도 했지만 정벌전쟁에 소요되는 지나친 국고 낭비는 청나라가 쇠퇴하게 되는 원인 중 하나가 되는데, 태평청국의 난이 발발하면 이미 앞선 시대의 영광은 결정적으로 묻히게 되고 만다.
저자는 건륭의 삶을 네시기로 나눈다. 첫 번째는 1711년부터 1735년까지로 정규교육을 받고 황위를 물려받을 준비를 한 유년 시절이며, 둘째는 즉위한 1735년부터 1748년까지로 자신의 권위를 주장하고 백성을 위한 일에 헌신할 것을 촉구하며 많은 조서가 반포되는 시기이다. 이 새 정권의 기본적인 가정은 모든 사람이 강우, 추수, 곡물가격, 시장조건과 같은 통치상의 일상적인 세부사항에 대한 젊은 군주의 열정에 공감했다는 것이다. 이 경험은 새로운 강인함과 성숙함을 만들어냈고 이는 1748년부터 1776년까지 지속된 세 번째 단계의 특징이 된다. 만주족의 정신에 새로운 활기를 불어넣기 위한 수렵대회 거행은 제국의 일정에서주요한 행사가 되며 이는 서북부 변경지대에 대한 공격적인 정책과 결합된다. 그 정책은 중가르의 위협을 영구적으로 제거하고, 중가르의 동맹인 호자를 격퇴하며 제국에 막대한 영토를 증가시키는 성과를 이룩했다. 유연한 외교, 창조적인 기구의 건설, 지속적인 몽골, 티벳 및 서남부 변경에 대한 청조의 지배를 강화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 1774년 왕륜의 반란, 1776년 화신의 군기대신 임명, 1777년 일어난 모후의 죽음과 함께 건륭의 삶은 네 번째 시기로 접어든다. 잦은 반란과 정부의 부패가 나타나 점차 사회적으로 소외 현상이 나타나고 불안이 악화되며 1795년 황위를 양위하며 끝난다. 이후 태상황으로 4년간 군림하나 이는 마지막 고통의 시간에 대한 종결을 상징한다.
저자는 마지막으로 이 시대의 모순점들 중, 강력한 황제의 통치권이 그의 재위 시절에 약화되었으며 시간이 지남에 따라 자신의 많은 권력을 대신과 하급관료들에게 이양했다는 점을 든다. 제국의 팽창이 종료된 시점, 즉 18세기 중엽부터 제국의 관료제가 효율성과 역동성을 잃으며서 청은 쇠퇴의 길로 접어들게 된다는 것이다.
사고전서, 켄트 가이, 양휘웅 옮김, 생각의 나무, 2009
원제 The Emperor's Four Treasures: Scholars and the State in the Late Ch'ien-lung Era
《사고전서》는 호학의 군주인 건륭제의 주도로 진행되었다. 건륭제는 관과 개인이 소유한 방대한 서적의 수입을 명하였으며, ‘사고관’이라는 기구를 통해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 건륭제는 사고전서를 편찬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오탈자에 상벌제도를 도입하여, 관리감독 하였으며 그 원고를 자신이 직접 검토할 정도로 이 사업에 매진하였다. 작업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사고전서에 포함되는 문헌의 수집과 편집은 1773년부터 1782년까지 9년이 걸렸고 오류를 수정하고 추가로 책을 포함시키는 일이 포함된 최종출판과정은 1792년까지10년이 더 걸렸다.
저자 켄트 가이는 황제가 역사상 가장 대규모의 서적수집사업을 후원하고, 당대 최고의 재능을 가진 사람을 조정으로 끌어 모았으며, 학문적 평판과 그 후원의 정도에서 모든 전례를 압도한 것은 역사상 가장 문명화된 제국에서 건륭제 자신이 지식인 공동체의 지도자가 될 수 있는 정당성을 입증해준 것이라고 지적한다.
그러나 사고전서의 편찬은 잔혹한 검열운동으로 인한 학문에 대한 탄압으로 묘사되기도 한다. 이는 사고전서가 서지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성과였지만, 1770년대 후반과 1780년대 초반에 조정에서 진행된 검열운동으로 2,400여 종의 책들이 파괴되었고, 400~500여 종의 책들은 공식적 명령으로 개정되었기 때문이다.
저자는 중국에 있는 모든 불온서적들을 수집하려는 노력이 만약 지식인들 대다수의 저항을 받았다면 커다란 진전이 없을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금서의 수가 늘어나고, 불온서적을 소지한 사람들에 대한 처벌이 널리 알려질수록, 신사층이 신고한 건수가 늘어났다. 이처럼 신사층의 고발이 늘어나고 조사과정에서 보인 관리임용 후보자들의 역할을 보면, 지식인들이 검열운동에 적극 가담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확실히 관직 안팎의 지식인 모두가 금서로 지정되어 북경에 보내는 책의 대부분을 색출했고, 책의 내용을 비난했으며, 조사하고 평가하였다. 그렇다고 그것이 황제의 의도에 아첨하거나, 저항한 것은 아니었다.
저자는 검열이 만주족 지배층의 입장에서는 과거에 있었던 만. 한 사이의 갈등을 없애고 만주족의 관습과 유산 및 전통에 대한 한족의 경멸을 나타내는 역사기록들을 삭제하기 위해 이루어졌고, 한족 지식인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추구하는 차원에서 이루어졌다고 본다. 결국 검열운동은 신사, 관료, 황제의 이익의 상호작용을 통해서 발전했고, 거의 어느 한쪽에 의해서 지배적으로 주도되지 못한 채 이루어졌다. 켄트 가이는 이 점에 주목하여 청대의 황제, 관료, 학자들과의 복합적 관계를 조명하는 데 연구의 초점을 두고 있다. 요컨대 사고전서 편찬사업의 역사는 권력의 작동방식과 황제 권력의 한계를 잘 보여주고 있다고 하겠다.
사고전서에 대한 글이 많지 않은 우리학계에서 정치사와 사상사를 아우르는 이 책의 존재는 상당히 도드라져 보인다.
중국의 서진 - 청의 중앙유라시아 정복사
피터 C. 퍼듀, 공원국 옮김, 길, 2012
원제 China marches west : the Qing conquest of Central Eurasia/Perdue, Peter C.
신청사 연구를 대표하는 저작이자, 중국 변경사 연구의 걸작으로 꼽히는 이 책은 중앙유라시아 지역이 15세기부터 18세기 청조에 정복되기까지의 과정을 꼼꼼하게 추적한다. 분량만 해도 920쪽이 넘는 이 대작은 일단 논지를 잃지 않고 따라가는 것만도 벅차다. 그만큼 주장하는 내용을 둘러싼 논란과 관심은 역사학보에 실린 기획서평을 위시한 다수의 서평이 말해준다.
저자의 18세기 청제국 건설 이해에서 ‘유라시아’라는 공간의 이해는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퍼듀에 따르면, 18세기 청제국 건설은 유라시아라는 독특한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인 ‘환경(environment) 안에서 진행되었다. 이 공간의 지배적인 환경시스템인 스텝은 상대적으로 자원이 결핍된 공간이며, 칭기스칸이 건설하였던 몽골 제국의 정치적인 유산이 살아있는 공간이며, 티벳 불교라고 하는 내륙 아시아의 문화적 유산이 지배하고 있는 공간이다. 독특한 유라시아의 인문 생태계는 구조적으로 비슷한 세 근세국가(early modern state)를 낳았는데, 그 세 국가는 청 중국, 러시아, 그리고 준가르 몽골이다. 이 세 국가는 전제주의적인 ’개발국가‘(developmental state)라는 점에서 유사하다. 그리고 이러한 구조적 유사성은 세 국가를 치열한 군사경쟁 관계에 놓이게 하였으며, 이러한 치열한 군사적 경쟁이 18세기 청조가 중앙아시아로 진출하게 되는 요인이었다는 것이다.
저자는 청나라의 중앙유라시아 정복의 역사를 세 가지 관점에서 세계사적 사건이었다고 규정한다. 첫째 제국의 지배자들과 신민들에게는 이 승리가 자신들이 가지고 있던 세계의 범위를 완전히 바꾸어놓았다. 정복으로 국가 영토가 광범위하게 확장됨으로써 신민들의 이주, 무역, 행정 그리고 역사적인 상상력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 둘째, 청의 확장은 17~18세기에 일어난 세계적 과정의 한 부분을 이룬다. 세계의 거의 모든 지역에서 새롭게 중앙집권화되고 통합되고 군사화된 국가들은 군사적 정복, 이주민들, 선교사들 그리고 뒤를 따르는 무역상들을 통해 영토를 확장해 나갔다. 서구의 역사학자들은 종종 이 시기를 국가 형성에서 18세기의 안정기에 선행하는 '17세기의 위기'로 규정한다. 당시 중국의 제국주의적 팽창을 세계적 과정의 일부로 취급하게 되면, 중국 제국의 모든 경험들을 중국 고유의 것만이 아닌 더 큰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다. 셋째, 중국의 팽창은 중앙유라시아 역사의 전환점을 가져왔다. 이를 계기로 유목 목축민들은 역사의 무대에서 주요 행위자의 지위를 영원히 박탈당하게 되었다. 자유로운 유목에서 정주민(중국)에게 균형추가 넘어가게 된 진정한 세계사적 전환의 주역은 바로 청이었다는 것이다.
여기에 대해 18세기 유라시아사의 진행을 국가의 구조와 그 확장의 필요성, 확장의 의지, 그리고 그 확장의 메카니즘으로 환원하는 것은 저자가 야심차게 제시하였던 내용 있는 유라시아, 생태계로서의 유라시아는 내용을 잃어버린다는 비판이 있다. 국가의 역할을 강조하다 보니, 어떻게 그 국가가 중층적인 권력관계, 교역관계, 생산관계가 존재하는 유라시아라는 생태계에서 다양한 액터들과 상호 관계하며 형성되었는지, 또 그 관계에 의하여 제약을 받으면서 형성되었는지를 고려하지 않않고, 그 보다는 국가들(청, 준가르, 러시아)간의 경쟁에만 초점을 맞추어, 어떻게 이 국가들이 자유자재로 다른 액터들을 통제하고 동원하였는지를 서술하고 있는데, 이런 내러티브에서, 유라시아는 단지 이 세 전제주의적 개발국가가 존재하는 물리적 공간 이상도 이하도 아니게 된다는 것이다. 평자는 그에 대한 대안으로, 18세기 청제국 건설을 보다 넓은 역사적 맥락, 즉‘18세기 유라시아의 정치 경제적 위기’라는 세계사적 맥락 안에서 검토할 것을 제안하고 있다.(김광민)
6. 중국의 청사공정 연구, 정혜중 외, 동북아역사재단, 2008
중국 역사학계의 청사연구 동향, 유장근 외, 동북아역사재단, 2009
(http://blog.naver.com/yufei21/60094438412 참조)
중국의 청사 편찬과 청사 연구, 김형종 외, 동북아역사재단, 2010
(http://blog.naver.com/correctasia/50116898969 참조)
외국학계의 정복왕조 연구 시각과 최근 동향, 윤영인 외, 동북아역사재단, 2010
이들은 동북아역사재단이 설립된 이후 본격적으로 기획된 논문집들이다. 대부분 관련 분야의 연구동향을 소개하고 있어 중국근대사와 동아시아사를 공부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된다.
근래, ‘중화’에 대한 자신감 회복을 바탕으로 진행되는 역사성의 긍정, 그리고 그 현상 형태의 하나인 새롭게 시도되는 각종 역사공정 및 그와 연관된 연구는 단순히 학문으로서의 역사학의 차원을 넘어 회복하고 있는 중화에 걸맞는 역사의 재구성을 추구할 뿐 아니라 향후 국가 이념의 재구성과도 관련된다는 점에서 역사공정이 가지는 현실적 함의를 거시적 맥락에서 조명해야 된다는 제언이 있다. 특히 청사공정은 현대 중국의 지식 구조 변동 및 중국 권력 엘리트의 성세의식(盛世意識)을 직간접적으로 반영한다는 점에서 각종 역사공정의 목표를 집약적으로 보여준다는 인식이다. (전인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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