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불기 2568년 10월 6일 10월 첫째주 포살법회 및 정기법회 (법회소식 1501호)
금강경 수행 (자기를 온전히 맑힌 사람들)
법문 : 회주 지명스님
불야 세존 하이고 장엄불토자 즉비장엄 시명장엄
不也 世尊 何以故 莊嚴佛土者 卽非莊嚴 是名莊嚴 (10.장엄정토분 (莊嚴淨土分) ②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왜냐하면, 불국토를 장엄한다고 하는 것은 즉 실제로 장엄하는 것이 아니라 이름이 장엄일 뿐입니다.”
자기를 온전히 맑히어 아름답게 수식(修飾)한 지혜로운 수행자들의 생활, 그때의 모습을 어렴풋이나마 상상하여 보려고 하지만 작은 부분 하나도 감히 사족을 붙일 자리가 없으니 이것은 중생의 우매함 때문일겁니다.
제10분의 첫 번째 질문은 ‘내가 옛날 연등부처님 처소에서 법에 대하여 얻은 사실이 있는가?’ 인데, 존자께 서 ‘아닙니다’ 라고 부정을 합니다. 그렇다면 ‘보살이 정토를 장엄한다고 할 수 있겠는가’ 를 다시 물었는데, 이 역시 ‘아닙니다’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스스로 이해)‘불국토를 장엄한다는 것은 실제로 장엄하는 것이 아니라 이름이 장엄일 뿐’이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수보리존자께서 부처님과 사전에 어떤 말씀을 나눈 사실이 있는가?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그렇게도 시원스럽게 토론을 이어 가실 수 있는가 하는 부분입니다.
어떤 일에 대하여 사전에 말을 맞추어도 틀리는 것이 보통인데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가 부처님과의 토론인데 조금도 서둘거나 주저함 없이 밝고 분명하고 시원스럽게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합니다. 이 토론이 누구를 위하여 왜 그렇게 하시는가? 하는 부분입니다. 참으로 감사와 고마움으로만 그칠 수만 없는 일입니다. 그렇게 본다면 분명 수보리존자는 부처님의 지혜와 서로 통하는 몇 안 되는 사람 중의 한 사람입니다. 그러니 당연히 ‘법을 얻은 사실도 없고, 정토를 장엄하는 사실도 없다’고 하는 것이 있는 그대로의 말씀입니다.
이는 제9분의 수행에서 좋고 싫다는 생각을 일으키지 않고, 수행이 깊다는 생각도 일으키지 않는 마음의 아란야를 얻었기 때문에 여기서는 당연히 ‘얻음이 없어야 하고, 장엄 역시 없음’이 됩니다. 그런데 만약 ‘연등부처님 처소에서 법에 대하여 얻은 사실이 있다든가 정토를 장엄한 사실이 있다’고 한다면 이는 ‘자기성취의 집착’이라는 상(相)을 떨쳐내지 못한 또 하나의 조그마한 상이 아직 남아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 됩니다.
생각해보면, 왜 유마경에서 “중생의 국토가 곧 보살의 정토”라 했으며? 왜 “중생의 마음이 깨끗하면 정토”라 했을까? 그리고 왜 “정토(극락)에 나기를 원하거든 먼저 마음부터 맑혀라”고 했을까 하는 부분입니다.
지금까지 불국토를 장엄시키는 일을 한다는 사람이 어디 한둘이었든가. 수행이다. 포교다. 불사다 하여 사람을 모으기도 하고 부처님께 공양을 올리기도 하고, 나름대로 세상에서 이 일이 가장 훌륭하고 성스럽고 위대한 일이라고 늘 자부하며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좋은 공부를 하고 좋은 말을 하면서도 가끔은 남들에 대해서 잘 한다느니 못 한다느니 하는 상을 짓고 있다는 겁니다. 저는 지금도 ‘나는 이렇게 좋은 법을 가르쳐 주고 있건만 저들은 어째서 나를 이해하지도 따라 오지도 않나?’ 하는 실망감이 나도 모르게 일어나곤 하는데 그럴 때마다 그런 마음을 꾸짓고 깨우쳐주는 말씀, 바로 장엄정토 이 부분을 생각합니다.
‘보살은 정토를 장엄했어도 장엄한 바가 없고 그 이름이 장엄일 뿐이다.’ 때문에 ‘아무리 고행을 했어도 한 바가 없어야 하고, 아무리 설법을 했어도 한 바가 없어야 하고, 아무리 불사를 했어도 한 바가 없어야 하고, 아무리 중생을 교화했어도 한 바가 없어야 한다.’ 반야행자는 여기에서 막힌 체증이 확 뚫리는 시원함을 모두 느껴야 합니다. 그리고 이 내용의 뜻은 진정 우리에게 좋은 흔적은 물론이요, 나쁜 흔적 까지도 모두 마음속에서 지우게 하는 힘이 되고 있다는 사실을 꼭 기억해야 겠습니다. 마하반야바라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