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비가 내리는 10월 느즈막에 운무속의 청량산 자락을 찾는다.
신선이 노닐다 갔는지, 선녀가 노닐다 갈려는지, 몽환경이다.
도산서원과 농암 종택, 고산정을 찾아 운무속을 거닐어 본다.
도산서원
도산서원 강당과 동.서재
강당인 전교당(典敎堂)
고직사(庫直舍) ~ 도산서원을 관리하고 식사를 준비하던 사람들이 거처하던 곳
수령 400여 년의 왕버들
시사단(試士壇)
천연대(天淵臺) 오르는 길
단풍이 들어가는 도산서원 전경
도산서원을 둘러보고 농암 이현보선생 종택으로
농암종택 대문 너머로 보는 청량산자락 운무
이현보(李賢輔,1467~1555)선생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며 학자이다.
자는 비중, 호는 농암(聾巖), 설빈옹(雪賓翁), 본관은 영천(永川),
시호는 효절(孝節)이다.
농암종택 사랑채
농암은 안동 도산 분천리에서 태어나, 1498년(연산군 4) 식년문과에
급제한 뒤 32세에 벼슬길에 올라 예문관검열, 춘추관기사관,
예문관봉교 등을 거쳐, 1504년(연산군 10) 38세 때 사간원정언이 됐다.
밀양부사, 안동부사, 충주목사를 지냈고, 1523년(중종 18)에는
성주목사로 선정을 베풀어 표리(表裏)를 하사받았다.
긍구당(肯構堂) ~ 현판은 명필 신잠의 글씨다
이후 병조참지, 동부승지, 부제학 등을 거쳐 대구부윤,
경주부윤, 경상도관찰사, 형조참판, 호조참판을 지냈다.
1542년(중종 37) 76세 때 지중추부사에 제수되었으나 병을 핑계로
벼슬을 그만두고 낙향하였는데,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해 강가에서
배를 탈 때는 오직 화분(花盆) 몇 개와 바둑판 하나뿐이었다고 한다.
명농당(明農當)
농암의 효빈가(效顰歌)
돌아가리라, 돌아가리라 말뿐이오 간사람 없어
전원이 황폐해지니 아니 가고 어쩔꼬.
초당에 청풍명월이 나며 들며 기다리나니.
사당과 장독대
농암은 1519년 안동부사 재직당시 중양절에 화산양로연
(花山養老宴)을 열어 부모님을 포함한 고을의 80세 이상 노인들을
초대하여 본인이 때때옷을 입고 춤을 추어 부모님을 즐겁게 하였다.
장독대 앞의 국무총리 한덕수 글
아름다운 강, 맑은 별빛, 시원한 바람,
농암선생 종택에서의 하루를 마음깊이 간직하고 떠납니다.
2007. 8. 12 국무총리 한덕수
농암 종택 전경
분강서원 정문(농암종택 경내)
분강서원 강당인 흥교당과 동,서재
농암 신도비각
신도비
농암을 기리기 위해 1566년(명종 20)에 세워졌다.
대리석으로 만들었으며, 비문은 홍섬이 쓰고, 송인의 글씨다.
농암 신도비각
농암은 특히 문장에 뛰어나 자연을 노래한 시조가 많이 있는데,
10장으로 전하던 어부가를 5장으로 고쳐 지어 청구영언에 실려 있고,
효빈가(效嚬歌), 농악가, 농암가(聾巖歌) 등이 있다.
농암종택과 청량산 자락 운무
멀리 고산정이 보이는 강 언덕
고산정앞 가송협(佳松峽) 풍경
안동 고산정(孤山亭)
고산정(孤山亭) 은 정유재란시 안동 수성장으로 활약하여 좌승지에
증직된 바 있는 성성재 금난수(惺惺齋 琴蘭秀,1530∼1599)선생의 정자이다.
고산정에서 보는 한폭의 동양화 같은 풍경
금난수(琴蘭秀)선생은 35세되던 1564년(명종 19)에 안동팔경의
하나인 가송협 (佳松峽)의 단애(斷崖) 아래 정자를 짓고
일동정사(日東精舍)라 부르며 늘 경전을 가까이 한 채 유유자적하였다.
고산정은 주변 경관이 뛰어나 이황을 비롯한 선비들의 내왕이
잦았던 곳으로, 스승인 퇴계(退溪)선생의 영시유상(詠詩遊賞)을 비롯
고산제영(孤山題詠,고산정을 노래한 시)에는 재경관인(在京官人)들까지
찾아 차운(次韻)한 시(詩)가 수백 수에 달하고 있다.
가송협(佳松峽)
가송협(佳松峽)의 고산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