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1920년 평안북도 태천군 태천면에서 김중현 씨의 4남 4녀 중 맏딸로 태어났습니다. 자상하신 부모님 곁에서 형제들과 의좋게 살다가 스무 살 되는 해에 동네 청년과 결혼하게 되었는데, 감리교를 믿는 시댁 식구들을 따라서 저도 자연스럽게 감리교인이 되었습니다. 가족과 함께 태천 감리교회에 다니며 누구 못지않게 열심을 다했고, 목사님 가족이 모두 장질부사에 걸려 누웠을 때는 아무도 들여다보지 않으려는 것을 시동생과 함께 보살피기도 했습니다.
그 후 8·15 해방 이듬해에 서울로 내려와 생활하면서 덕수궁 옆에 있는 재건교회에 다니다가, 6·25 전쟁 때 충청남도 공주로 피난 가서는 같이 피난 내려간 같은 교회 교인 세 분과 함께 공주에 재건교회를 세웠습니다. 그리고 남편의 직장 때문에 경상북도 고령에이사 와서도 저 혼자 힘으로 재건교회를 짓고 교인들을 모은 후 목사님을 모셨습니다.
그렇게 지내던 중 1956년경이었습니다. 저는 서울 재건교회에서 열리는 부흥집회에 참석한 후, 서울에 올라온 김에 노량진에서 살고 계신 고모(김중서)댁에 잠시 들렀다 내려가려고 찾아갔습니다. 고모 댁 대문을 들어서니 고모네 식구들이 모두 외출할 차림을 하고 있었습니다. 고모는 저를 보고 반가워하시며 “마침 잘 왔다. 나랑같이 박 장로님 교회에 가 보지 않겠니?”하고 묻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다니던 교회 목사님께 박태선 장로님이 세운 전도관이 이단이라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었기 때문에 “이단이라고 하던데.'하니, 고모는 “그게 무슨 소리야. 거기 진짜야.”하며 제 손을 끌었습니다. 저는 한번 가 보는 것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어 그길로 고모 댁 식구들을 따라나섰습니다.
그때가 수요일 저녁으로 기억되는데,원효로에 있는 전도관에 가 보니 그날 박 장로님께서는 인천전도관에 가시고 안 계신다고 하였습니다. 손선보 전도사님이라는 분의 찬송 인도로 예배를 드리는 동안, 이상하게도 무엇인가 썩은 냄새가 지독하게 맡아졌습니다. 그 냄새가 어디서 나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너무나 지독하였습니다. 예배를 마친 후에는 고모와 함께 전도사님을 찾아뵙고 여러 가지 말씀을 들었습니다. 오래된 일이라 그때 들었던 말씀이 다 기억나지 않지만, 손 전도사님 말씀이, 박 장로님께 은혜를 받고 앉은뱅이가 일어나고 벙어리가 말을 하는 등 기사이적이 헤아릴 수도 없이 많이 일어났고, 성경 중에 호세아 14장 5절 “내가 이스라엘에게 이슬과 같으리니 저가 백합화같이 필 것이요~" 구절을 일러 주며 박 장로님께서 이슬 같은 은혜를 내리시는 감람나무라고 증거하셨습니다.
그날 밤늦은 시간까지 전도사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저는 전도관에 다녀 봐야겠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다음 날 새벽, 저는 고모를 따라 원효로 전도관에 새벽예배를 드리러 갔습니다. 예배를 마친 후 고모와 함께 가서 박 장로님께 안찰을 받게 되었는데, 고모가 저를 가리키며 박 장로님께 “장로님, 재건교회에서 이제 전도관으로 온대요.” 하니 박 장로님께서는 웃으시면서 “오겠으면 오고.”하고 대답하셨습니다. 박 장로님께서는 제 눈 위에 손을 살짝 얹어 놓으시고 안찰을 시작하셨는데 눈이 빠져나가는 것같이 아팠습니다. 그리고 옷 위에 손을 가만히 얹으시고 배를 안찰하실 때에도 너무 아파서 어쩔줄을 몰라하니, 박 장로님께서는 “고집, 이것 꺾어야 돼." 하고 말씀하시며 안찰을 계속해 주셨습니다.
고모는 저에게 서울에 얼마 동안 더 있으면서 은혜를 받고 내려가는 것이 어떻겠냐고 권유하셨습니다. 저 또한 전도관에 계속 다니고 싶은 생각이 들었기 때문에, 집에 있는 남편과 시누이에게 연락하여 사정을 얘기한 후, 고모 집에 머물면서 전도관에 다니게 되었습니다.
전도관에 나간 지 이삼일 정도 지난 어느 새벽예배 시간이었습니다. 찬송을 부르는중에 갑자기 박하 향도 아니고 꽃향기도 아닌 너무나도 향기로운 냄새가 진동을 하는것이었습니다. '어디서 이렇게 좋은 냄새가 나지?’ 하고 궁금해하며 이리저리 둘러보아도 제 주위에는 화장을 하고 온 사람은보이지 않았으며 모두 수수한 차림이었습니다. 저는 예배 시간 내내 궁금해하다가예배를 마치고 나오면서 고모에게 “예배시간에 왜 이렇게 좋은 냄새가 나지?”하고물어보았습니다. 그러자 고모는 “그게 은혜야 은혜. 향취 맡았구나.”하며 너무 좋아했습니다.
그리고 어떤 때는 예배실 안이 안개 같은것으로 뽀얗게 둘러싸여 단상에 서 계신 박장로님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도 있었고,예배 도중 실내에 비가 분명히 쏟아지는 것같은데 옷을 만져 보면 하나도 젖지 않고보송보송하였습니다. 또한 박 장로님께서강대상을 탁 하고 내리치시면 불덩이 같은것이 사람들이 앉아 있는 곳까지 튀어나오기도 하였습니다.
이렇게 은혜를 체험하면서 전도관에 다니는 동안, 이만제단 신축 공사장 제단 짓는 일에도 참여하였습니다. 박 장로님께서는 공사 현장에 매일 오셔서 저희들에게 안수를 해 주셨는데, 일을 할 때면 배 속이 항상 시원했고, 그저 기쁘고 좋아서 하는 일이니 힘든 줄도 모르고 즐겁기만 하였습니다. 저는 두 달 정도 이만제단 공사를 도우며 전도관에 다니다가 고령 집으로 내려왔습니다.
저는 전에 다녔던 재건교회에는 다시 다니고 싶은 마음이 없었고, 전도관에 다니고 싶었으나 당시 고령 근처에는 전도관이 없었기 때문에 안타까워하며 그냥 지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로부터 3~4개월 후 남편이 갑자기 병이 생겼습니다. 감기 몸살같던 증상이 낫지 않고 점점 심해지더니, 나중에는 몸이 심하게 붓고 숨이 차올라 헐떡거리다가 가라앉고, 또다시 몸이 붓고 숨차는 증상이 계속 반복되었습니다. 고령읍에 있는 개인 병원에서 진찰해 보니 신장병이라고 하였는데, 병이 너무 깊어 고칠 수 없다고 하여 고령 근처에 있는 다른 병원이나 한약방에도 가 보았지만 모두 고치지 못한다고만 할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저희는 남편이 다녔던 직장에 사표를 내고 집을 정리한 뒤, 일말의 희망을 가지고 서울로 올라오게 되었습니다.
신앙신보 〈205회 1999. 12. 12./19. 게재〉
첫댓글 잘 읽고갑니다
잘보고 갑니다
잘보고갑니다.
감동이네요 ㅎ
잘보고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