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규형(姜奎馨)
[무과] 무보(武譜)
[인물요약]
UCI G002+AKS-KHF_13AC15ADDCD615U9999X0
개명 강규동(姜奎東)
본관 진주(晉州)
거주지 미상(未詳)
[관련정보]
[무과] 음보(蔭譜)
[이력사항]
초직 정묘(丁卯) 진동만호(鎭東萬戶)
타과 무오(戊午) 정시(庭試) 무과(武科) 급제
초직 정묘(丁卯) 수(栦)
전력 정해(丁亥) 수(守)
관직 고성(固城)
[가족사항]
[부 - 부1: 부]
성명 : 강한과(姜漢過)
관직 : 첨사(僉使)
과거 : 무과(武科)
[부 - 부2: 생부]
성명 : 강한태(姜漢泰)
[조부 - 조1: 부1의 부]
성명 : 강휘길(姜彙吉)
관직 : 변지(邊地: 변지첨사)
과거 : 무과(武科)
[조부 - 조2: 부1의 생부]
성명 : 강휘명(姜彙明)
과거 : 진사(進士)
[증조부 - 증조1: 조1의 부]
성명 : 강오성(姜五成)
관직 : 병사(兵使: 병마절도사)
관직 : 병아(兵亞)
과거 : 무과(武科)
[증조부 - 증조2: 조1의 생부]
성명 : 강윤성(姜允成)
과거 : 진사(進士)
[4대 - 4대조1: 증조1의 부]
성명 : 강문덕(姜文德)
[4대 - 4대조2: 증조1의 생부]
성명 : 강문좌(姜文佐)
관직 : 우후(虞侯)
관직 :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
과거 : 무과(武科)
[5대 - 5대조1: 4대조1의 부]
성명 : 강상주(姜尙周)
과거 : 진사(進士)
[5대 - 5대조2: 4대조1의 생부]
성명 : 강재주(姜載周)
[6대 - 6대조1: 5대조1의 부]
성명 : 강필우(姜必遇)
관직 : 방어사(防禦使)
과거 : 무과(武科)
[6대 - 6대조2: 5대조1의 생부]
성명 : 강필건(姜必健)
관직 : 영장(營將)
과거 : 무과(武科)
[7대 - 7대조1: 6대조1의 부]
성명 : 강만석(姜萬碩)
관직 : 병사(兵使: 병마절도사)
관직 : 함경도병마절도사(咸鏡道兵馬節度使)
과거 : 무과(武科)
[7대 - 7대조2: 6대조2의 부]
성명 : 강만석(姜萬碩)
[8대 - 8대조1: 7대조1의 부]
성명 : 강원희(姜元禧)[生]...328생원시 참조...21.11.26수정
관직 : 판관(判官)
과거 : 음관(蔭官)
[외조부 - 외조부]
성명 : 한몽첨(韓蒙瞻)한상첨(韓象瞻)
본관 : 미상(未詳)
[생외조부(生外祖父)]
성명 : 한상은(韓相殷)
관직 :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
과거 : 문과(文科)
본관 : 미상(未詳)청주(淸州)21.12.30수정
[처부(妻父)]
성명 : 정환록(鄭煥祿)
본관 : 미상(未詳)
[출전]
《진신무보(縉紳武譜)》乾‧坤(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古4650-173])
2010-10-23 《진신무보(縉紳武譜)》乾‧坤(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를 저본으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문음진신보(文蔭縉紳譜)》 〈진신팔세보(縉紳八世譜)〉[武科編](朴周大 편저, 麗江出版社, 1986.[999.8111 박76ㅁ])
[지방관] 조선후기 지방관 경상도(慶尙道) 고성현령(固城縣令) 1873[계유(癸酉)] 5월(五月)
[인물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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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무구분 문관
생년 미상(未詳)
졸년 미상(未詳)
시대 조선후기
본관 미상(未詳)
활동분야 관료
[관인정보]
관직명칭 고성현령(固城縣令)
관직등급 현령(縣令)
관직이칭 고주현령(固州縣令)
진관체제 김해(金海)
현대지명 고성군(固城郡)
부임년월 1873 [계유(癸酉) 5월(五月)]
[도 정보]
도명칭 경상도(慶尙道)
관할군현 71관(七十一官)
도구분 경상우도(慶尙右道)
[출전]
《팔도총록(八道總錄)》(국립중앙도서관[한古朝57-가527])
2010-10-23 《팔도총록(八道總錄)》(국립중앙도서관)을 저본으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지방관] 조선후기 지방관 황해도(黃海道) 장연부사(長淵府使) 1880[경진(庚辰)] 7월(七月)
[인물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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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무구분 문관
생년 미상(未詳)
졸년 미상(未詳)
시대 조선후기
본관 미상(未詳)
활동분야 관료
[관인정보]
관직명칭 장연부사(長淵府使)
관직등급 부사(府使)
관직이칭 장담부사(長潭府使)
진관체제 해주(海州)
현대지명 장연군(長淵郡)
부임년월 1880 [경진(庚辰) 7월(七月)]
[도 정보]
도명칭 황해도(黃海道)
관할군현 23관(二十三官)
도구분 황해우도(黃海右道)
[출전]
《팔도총록(八道總錄)》(국립중앙도서관[한古朝57-가527])
2010-10-23 《팔도총록(八道總錄)》(국립중앙도서관)을 저본으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지방관] 조선후기 지방관 경상도(慶尙道) 경상도전영장(慶尙道前營將) 1876[병자(丙子)] 7월(七月)
[인물요약]
UCI G002+AKS-KHF_13AC15ADDCD615U9999X0
문무구분 무관
생년 미상(未詳)
졸년 미상(未詳)
시대 조선후기
본관 미상(未詳)
활동분야 관료
[관인정보]
관직명칭 경상도전영장(慶尙道前營將)
관직등급 영장(營將)
관직이칭 안장(安將)
관청소재 안동(安東)
현대지명 안동시(安東市)
부임년월 1876 [병자(丙子) 7월(七月)]
[도 정보]
도명칭 경상도(慶尙道)
[출전]
《팔도총록(八道總錄)》(국립중앙도서관[한古朝57-가527])
2011-10-31 《팔도총록(八道總錄)》(국립중앙도서관)을 저본으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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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 21권, 21년(1884 갑신/청광서(光緖) 10년) 3월 15일 경인 7번째기사
충주를 방어하는 일과 문경에 방어영을 설치하도록 강규형이 상소하다
부호군(副護軍) 강규형(姜奎馨)이 올린 상소의 대략에,
“요즘 듣자니 충주(忠州)에서 병력을 갖추고 무기를 수리한다고 하는데 이 고을로 말하면 경상도(慶尙道)와 전라도(全羅道)사이에 끼여있으며 조령(鳥嶺)의 요충지를 단독으로 담당하고 있습니다. 동쪽은 강원도(江原道)에서 제어하고 서쪽은 충청도(忠淸道)에서 뻗치니 6번 출전해야 쟁취하는 기산(祈山)이나 백번싸워야 비로소 얻는 하남(河南)처럼 견고한데 형세를 비교해 본다면 아마 이보다 나은 곳은 없을 것 같습니다.
신이 예전에 안동(安東)의 진장(鎭將)으로 있을 때 마침 병자년(1876)과 정축년(1877)의 큰 흉년을 만나 백성들의 고통과 도적들의 정세에 대해서 상세히 탐지하기 위하여 관할 각 고을을 두루 돌아보다가 문경(聞慶)에 이르러 산천을 살펴보니 이 현(縣)은 큰 고개 밑에 의거하여 삼면이 막혀있고 하나의 길이 통하여 있었는데, 71개 고을이 반드시 이 길을 통과하게 되었고 충주와의 거리가 80리였습니다.
신의 생각에 충주를 공고히 하는 것은 문경에 달려있고, 문경을 방비하는 것은 충주에 달려있으니, 이것이 이른바 보(輔)와 거(車)가 서로 의지하고 금대(襟帶)와 같은 요충지라는 것입니다. 지금 충주에서 군사를 준비하는 것은 물론 병사(兵事)에서는 잘하는 일이지만 정세를 분석하는 방도에서는 소홀한 점이 있습니다. 더구나 이 문경은 여러 산들이 밀집되어 있으며 바위가 톱마냥 우뚝우뚝 솟아있고 울창한 나무숲이 성과 같이 되어 있으니 만명의 군사를 가지고도 함락시키지 못하는 곳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방어영(防禦營)을 설치하고 몇백명의 포병을 두어 그들로 하여금 무기를 정비하여 가지고 엄하게 방어하도록 한다면 남쪽에서 쳐들어오는 적에 대하여 근심할 것이 없을 것인데, 남쪽에서 쳐들어오는 적에 대한 근심이 없게 되면 충주는 자연히 근심이 없어집니다.
대체로 둔전(屯田)의 유리한 점이 다섯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방어준비를 공고히 할 수 있으며, 둘째 운반하는 수고를 덜 수 있으며, 셋째 나라의 비용을 풍족하게 할 수 있으며, 넷째 군사들의 몸을 부지런하게 움직일 수 있으며, 다섯째 한가하게 노는 군사들을 없앨 수 있습니다.
지금 몇 백명의 포병들에 대하여 농사짓는 기간에 반드시 군법으로 단속하여 근면한지 태만한지의 여부에 따라 상벌(賞罰)을 행하면 아무리 넓은 밭이라도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또한 각도에 흩어져있는 충훈부(忠勳府)나 각 군영(軍營), 아문(衙門)의 둔전(屯田)과 같은 것은 모두 다 도장(導掌)이나 해당 감관(監官)의 개인주머니에 들어가고 있으니, 어찌 그런 각 둔전(屯田)을 조사해서 수입을 헤아려 포병이 있는 곳으로 이둔(移屯)하고 그 나머지 둔전(屯田)을 취해서 본 아문(衙門)에 넘기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전하께서는 문경에 빨리 방어영(防禦營)을 설치하고 적임자를 선택하여 그로 하여금 막게 하기 바랍니다.”하니,
비답하기를,
“상소 내용에 채택할 만한 것이 있으니 매우 가상하다.”하였다.
副護軍姜奎馨疏略: “近聞‘備兵修械於忠州’云, 此州, 介在嶺、湖之間, 獨當鳥嶺之要衝。 左有關東之控制, 右有湖西之湊扼, 六出必爭之祈山, 百戰始得之河南, 較視形便, 則恐無以踰此也。 臣嘗待罪於安東鎭將時, 適値丙、丁大無, 以民隱、賊情之詳探, 周覽所管各邑, 行到聞慶, 省審山川, 此縣據在大嶺之下, 阻三面, 開一路, 而七十一州之所必由, 距忠州八十里地也。 臣愚以爲固忠州在聞慶、備聞慶在忠州。 此所謂輔車相依, 襟帶爲重者也。 今治兵於忠州者, 固善於兵事, 而疏於情勢分合之權也。 況玆聞慶, 衆山叢集, 石鉅木城, 可謂萬夫莫開之地也。 若建置防營, 設幾百砲軍, 使之修械嚴防, 則無足憂南來之兵, 而南來之兵無憂, 則忠州自無憂矣。 大抵屯田之利有五: 一曰, 固守禦之備、二曰, 省轉輸之勞、三曰, 足國家之用、四曰, 勤軍兵之筋骸、五曰, 止遊兵之驕逸。 今以幾百砲軍, 凡於耕播之間, 必以兵法束之, 視其勤慢而賞罰, 則千頃萬畝之田, 無足可憂矣。 又如勳府各營各衙門屯田之散在各道者, 皆歸於道掌該監之私橐, 何不査出其各屯, 量入移屯於設砲處, 而取其餘屯, 付之本衙耶? 願殿下亟置防營於聞慶, 擇其人, 使之鎖鑰焉。” 批曰: “疏辭頗有可採。 甚庸嘉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