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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 미국 독립 전쟁(American War of Independence, 1775년~1783년)
여기에 서유럽에 산업혁명이 전파되고, 유럽의 식민지 정책이 본격화되며 유럽문명국이 사실상 공식화되던 시대였다. 현대적인 관점에서 장교 저격은 부대의 지휘계통을 마비시키는 효과적인 전략이지만 위에서 언급한 당대 유럽의 분위기에서 장교저격은 현대적인 관점에서 보면 현대에 금기시하는 민간인 학살인 대도시 전략폭격이나 다를 바 없는 파격적인 수라고 볼 수 있다. 이 때문에 당시 영국 또한 이를 신사답지 못한 행위라고 맹렬히 비난했다.
사실 이 외에도 독립군들은 유럽의 귀족 문화를 전혀 모르던 민병대가 주축이다 보니 장교 저격 이외에도 유럽 전장에서는 통용되어 온 '관습'을 전혀 지키지 않았고 이것들이 승리와 연결되는 경우도 많았다. 물론 이 때문에 비신사적 행위라 비난도 많이 받았다.
《미국 헌법 서명 장면(Scene at the Signing of the Constitution of the United States)》,
하워드 챈들러 크리스티(Howard Chandler Christy), 1940, 캔버스에 유화
건국의 아버지들이 1787년 9월 17일 당시 미국 헌법을 서명하는 모습을 그린 그림인 미국 헌법 서명 장면이다. 당시 서명식에 참석한 55명의 건국의 아버지들 중 39명만 그려졌다.
그림 오른쪽 연단 위에 서있는 인물이 바로 조지 워싱턴이다.
1783년 파리 조약으로 미국은 독립을 인정받았으며, 1787년 필라델피아 대표 회의에서 미국 헌법이 제정, 1789년 9개주 이상의 비준을 통해 발효됨으로써 오늘날의 미합중국이 성립되었다. 한편 새 연방은 '영국 국왕을 대체할 통치자'를 요구했고, 전 대륙군 총사령관이었던 조지 워싱턴이 제헌회의의 의장으로 재선출되면서 새로운 합중국의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하게 되었다.
상세 내용 아이콘 자세한 내용은 미국 헌법 문서의 2번 문단을 참고하십시오.
이때 대통령제라는 정치체제가 처음으로 만들어졌으므로, 워싱턴은 미국 최초의 대통령이자 세계 최초의 대통령이었다. 때문에 이 지위가 무엇이고 역사적으로 선출되었던 황제들과는 어떻게 다른지 시민들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조지 워싱턴은 실질적인 통치행위 외 여러 의전에서 타국의 황제에 준하는 대우를 받았고, 시민들은 조지 워싱턴에게 '종신' 대통령을 해 달라고 청원하기도 했다. 그는 실제로 자신의 의지만 있었다면 종신 대통령을 하거나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처럼 '미국인의 황제'가 될 여지도 갖추었으나, 많은 건국의 아버지들과 마찬가지로 공화주의를 존중하였고 2선으로 8년만에 스스로 대통령직에서 물러났다. 그의 퇴임으로 생긴 관습 덕분에 미국의 민주주의가 무사히 정착할 수 있었고, 나아가 대통령제 시스템의 선례도 마련되었다.
워싱턴은 7년 동안 총사령관으로 대륙군을 이끌었을 뿐 아니라, 7년 동안 자신의 저택은 요크타운 포위를 앞두고 프랑스 장군들을 접대하는 겸 해서 겨우 딱 한 번 들렀을 정도로 항상 대륙군과 생사고락을 같이 했고, 종종 전투가 벌어지는 위험천만한 최전선까지 달려가 병사들을 독려하고 지휘하는 바람에 부관들이 억지로 말고삐를 잡고 끌고 나왔던 적이나 도망치려는 대륙군 병사들의 길을 가로막다가 공격당한 뻔한 적도 있었다. 여기에 전황이 나빠지자 원래 매년 받기로 했던 상당한 금액의 총사령관 급료를 미국 독립 후 총사령관 활동을 위해 지출한 경비를 실비 정산만 해서 받는 것으로 바꾼 것도 조지 워싱턴 본인이었다. 그 정도로 미국 독립운동에 독보적인 공헌을 했기 때문에 미국 대통령 중 유일하게 만장일치로 대통령에 당선될 정도로 압도적인 지지를 얻은 것이다.
상세 내용 아이콘 자세한 내용은 조지 워싱턴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한편 파리 조약에서 미국의 영토는 미시시피 강 동쪽까지로 인정되었다. 그러나 그곳에 살던 원주민들이 순순히 떠날 리 없었고, 이는 결국 노스웨스트 인디언 전쟁(Northwest Indian War, 1785 ~ 1795)을 유발하게 된다.
친영파(왕당파) 미국인들은 재산을 몰수당하고 추방당하거나 매국노로 몰려서 린치를 당했다. 그 중 상당수는 영국의 해외령이었던 캐나다와 뉴펀들랜드로 도피했다.
이 당시 전문적으로 세세한 부분을 따져보지 않고 표면적인 부분만 봤다면 이렇게 오해하기 쉽겠지만 실상은 좀 다르다.
프랑스가 영국에 대해 열등감을 가진 것 자체는 맞고 프랑스 자체적으로 이를 극복할만한 수단이 없던 것도 사실이며 미국의 독립 전쟁이 이 수단이 되어줄 수 있기에 프랑스가 상당히 지원해준 것도 사실이지만 오히려 협상 자체는 언제나 프랑스가 주도권을 잡고 있었다.
프랑스에 협상가로 찾아왔던건 벤자민 프랭클린인데, 이들의 상대로 프랑스측에서 내보낸 인물은 외무장관인 '샤를 그라비에 베르젠'이라는 닳고 닳은 정치인 겸 협상가였다. 이 당시 정치 초짜인 미국과 왕조가 여러번 바뀌면서도 기틀은 유지했던 정치 고인물인 프랑스의 위치를 보자면 토끼 하나 잡자고 사자를 보낸 격. 실제로 벤자민과 사절단이 울고불고 사정해도, 현 상황과 프랑스의 열등감을 꼬집어 그를 감정적으로 만들려 해도, 다 안먹히자 반쯤 협박인 행위까지 할 수 있는 수란 수는 다 쓰고도 베르젠은 끄떡도 안하고 본래 자신이 생각했던 범위인 통상 조약, 동맹, 원조, 차관만 확약하고 선을 딱 그었으며 심지어 이후 이미 추가 지원군을 파병시켜주고 있는 와중에도 물질적 지원이 아닌 지원군 파병을 요청하는 미국측에게 계속 답을 미루는 척하는등 협상 자체는 시종일관 벤자민이 베르젠에게 끌려다니는 모양새였다.
벤자민이 프랑스에서 영국에 대한 열등감과 친미 여론을 고조시켰던건 효과적인 한 수고 뭐고간에 베르젠을 상대론 아무것도 안먹혀서 그나마 시민들 상대로 어그로라도 끌어서 프랑스 정부를 약간이라도 움직여보자는 생각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종전까지도 프랑스는 현대에서 일반인들이 착각한 것과 달리 '나라가 흔들릴 정도'의 지원을 보낸 적은 없다. 미국이 처음 들고 일어날 때부터 첩보원들을 보내 몰래 관찰한 것을 시작으로 렉싱턴-콩코드 전투 이후 미국의 독립이 아예 무리수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면서 '중립'을 표방하는 한편 뒤로는 물질적 지원을 해주고 있었고 트렌턴, 새러토가 전투 이후 생각보다 미국이 분전하는 걸 보고 스페인까지 끌여들여 미국-프랑스-스페인 3자동맹을 결성시켰으며 이 이후에 지원군을 파병시켰지만 이조차 종전 때까지 영국이 미국 영토에 보낸 군사의 절반도 안된다. 실제로 미국 독립작전에 대한 실질적인 책임자는 외무장관이자 프랑스측의 협상가로 참여했던 '샤를 베르젠'이었는데 이는 국가의 수령이 아닌, 외무장관 선에서 처리가 가능할 정도로만 지원해줬다는 뜻이 된다.
다만 이 때 영국과 프랑스는 각각 예상 못한 몇가지가 있었고 이게 결국 양국 모두에게 나름 큰 악영향을 끼쳤다.
먼저 영국은 미국의 전력을 너무 낮게 잡았다. 실제로 그 당시 미국도 여러가지 내적 문제를 품은 상황이긴 했지만 영국이 그걸 알고 있었는지는 몰라도 전쟁 초반 영국은 13개 식민지에서 일어난 반란을 '조금만 밟아주면 알아서 사그라질 아랫 것들의 사소한 반항' 정도로 치부했다. 결국 강경책으로 나가면서도 처음부터 전력을 쏟아부어 속전속결로 끝내지 않았고 그 결과 이 당시 저력으로는 세계 최상위에 속하던 영국이, 식민지가 일으킨 반란 하나를 빠르게 정리하긴 커녕 승패를 주고 받으며 고착상태가 되게 만들었다. 이는 곧 기회를 보던 프랑스와 (프랑스가 데려온) 스페인이 '한번 해볼만 한데?'라고 생각하는데 큰 영향을 주었고, 거기에 영국측이 보낸 군대의 수뇌부인 '찰스 콘월리스'와 '헨리 클린턴'이 각각 큰 실책들을 저지르면서 패색이 짙어지고 결국 패배를 인정, 이로서 북미 13개주라는 광대한 식민지를 상실함은 물론, 프랑스와 스페인에게도 별개로 식민지를 어느정도 내주는 고배를 마셔야만 했다.
13식민지의 인구나 경제력만 봐도 당장 대영제국의 대도시 중 2개가 13식민지에 있었음을 고려하면, 영국은 수천km 바깥에 위치한, 거대한 농업지대+열강급 대도시를 가진 반란군을 진압할 골든타임을 놓쳤다고밖에 할 수 없다.
프랑스 쪽에도 문제는 있었는데, 대표적으로 전쟁이 '지나치게' 장기화된 것과 대륙회의의 지배력이 각 주 정부들을 하나로 모을 정도로 강하진 못했다는 것이다.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군수물자와 돈은 더욱 필요해졌는데 대륙회의가 닥달해도 주 정부들이 계속 소극적으로만 지원하니까 결국 미국 독립 세력도 프랑스에 의존할 수 밖에 없었다. 프랑스 역시 이제 와서 전쟁에서 빠질 수도 없는 처지라 지원을 할 수 밖에 없게 됐는데 이게 아직 국력을 완전히 회복하진 못한 프랑스 입장에선 나름 타격이 되었다. 심지어 종전 이후에 미국에 파견되었던 프랑스 장교와 병사들이 자유와 박애 정신을 배워 프랑스 본국에 퍼트렸고 이건 중앙 정부도 감당할 수 없는 폭탄이 되었다.
다만 프랑스 '왕국'은 몰라도 프랑스 입장에선 프랑스 자체의 멸망을 우려할 정도의 일은 끝내 없었고, 독립 전쟁이 승리하며 영국에 역사상 유례가 없는 빅엿을 먹일 수 있었기 때문에 어쨌든 참전한 목표는 100% 이상 이룬 셈이다. 실제로 이 일을 기억하고 있는 프랑스는 이후 미국 독립 100주년 기념 선물로 그 유명한 자유의 여신상을 선물로 보내줬을 정도였다.
사실 미국이 주도하는 서방 관점의 역사에서는 영국 정부의 탄압에 대항한 정착민들의 고결한 항쟁으로 묘사되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다. 일단 "건국의 아버지들"이라고 불리는 사람들과 그 외 현재 미국 의회의 뿌리가 된 식민 의회(Continental Congress)의 회원들은 각 지역사회 내지는 사회계층을 대표할만한 (전직)정치인 내지는 군인, 재력/사업가 등 소위 "지식인" 계층들이였으며, 어떤 식으로든 본국인 영국과 깊은 연줄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이 대부분이였다.
좀 과격하게 표현하자면 여러 출신과 국적의 사람들이 아메리카에 자리 잡으면서 "영국인"이라는 정체성은 얕아지고, "아메리카 정착민"의 정체성이 확립하던 시기에, 영국 정부의 조세 정책에 이권이 약해진 것에 빡친 사람들이 자기들만으로도 충분히 먹고 살만하다는 생각에 '자주권을 위한 혁명' 프레임을 명분삼아 정착민들을 선동해서 벌인 내전으로도 해석이 가능하다. 전쟁 발발 조짐이 보이기 전부터 영국 국왕과 식민 의회의 주된 대립은 "당신네들 보호 및 자치권 보장을 위해 전쟁을 했으니 세금을 좀 더 내시오"에 대헤 일방적인 "부당한 조세정책 철회하라!" 가 아니라, "우표나 차같이 쌩뚱맞은걸로 식민령에나 때릴 관세를 일방적으로 강요하려 하지 말고 사람 보내줄태니 조세를 하더라도 제발 우리 피드백좀 받아서 현실적인 정책을 가지고 와라"가 "No taxation without represntation"의 주된 골자였다. 쉽게말해 "우리도 영국인이니 아무리 명목상 식민지라지만 같은 백인들끼리 이러지는 맙시다"(식민지 야만인 취급은 하지 말아달라)라는 뜻이였다. 상황이 전쟁으로 격화된 것도 "같은 영국인들끼리 좀 잘해보자"고 대륙 측에서 먼저 나왔는데 더 강압적으로 나오니까 "끝까지 야만민족 대하듯이 포함외교로 나오겠다는거지? 그럼 총칼로 승부 봐야지"라는 명분을 만들어준 꼴이였기 때문이다. 흔히들 알고 있는것과는 다르게 본격적인 전쟁으로 격화되기 전 아메리카 이주민들이 주장하던 "자유" 혹은 "평등한 대우" 는 어디까지나 "전제군주에 대한 거부" 내지는 "공화정의 필요성" 같은 이념적 논리가 아니라 "같은 영국인으로서 대우받을 권리"를 이야기 하는거였다. 게다가 이 <상식론>도 민주정이 보편화된 지금에서야 상당히 선진적인 매체로 보이겠지만 그 당시 기준으로는 매우 급진적이면서도 극단적인 이념의 선동물이였고, 식민 주민들은 여기에 열광해서 너도나도 총을 잡고 항전을 결의한 계기가 됐다. 결과적으로는 "독립을 위한 전쟁"이 되었지만 전쟁 중기까지만 해도 비록 "독립선언문" 이라는 선전포고를 하기는 했어도 '동등한 처우를 요구하는 차원의 식민지 주민들의 실력행사/반란'의 성질이 더 짙었다.
조금 다른 시각으로는 아메리카 식민지를 프랑스로부터 지키려고 영국이 무리해서 경제력(즉, 국력)을 소진하는 바람에 힘의 공백이 생긴 틈에 "이참에 한번 독립해서 부와 힘을 키우자"는 암묵적 동의 하에 식민지 지배층이 벌인 분리주의 내전으로도 볼 수 있다. 이런 한계는 프랑스 혁명을 비롯한 여러 시민혁명에도 비슷하게 적용된다.
가장 대표적인 예로, 식민지의 분리주의 움직임이 서서히 보일 적부터 영국군에서 일찍이 퇴역한 조지 워싱턴이 영국군 정복을 입고 식민 의회에 출석했다는 일화가 있다. 분리전쟁을 전제로 하고, 그때 군사 지휘를 해서 새로 설립되는 질서에서 한가닥 잡으려 했다는 의도로 해석된다.
당장 전쟁 직후 독립된 미 식민지는 조지 워싱턴과 벤자민 프랭클린의 개입 없이는 전제 군주제 내지는 각 주의 대표들이 선출한 왕이 다스리는 입헌 군주정 국가로 갈 뻔 했다. 엄청난 인기로 인해 어어하다 초대 왕이 될 찰나 조지 워싱턴이 죽어도 국가 원수는 하기 싫어서 선출된 의회와 국가원수가 이끄는 공화국가로 가야 한다고 건국의 아버지 및 다른 식민 의회 양반들을 어찌어찌 설득해서 결국 공화정 국가로 건국은 했는데, 투표에서 선출당해버려(…) 임기 두번 마치고 사임했다.
당대 사상가들이 추구했던 목표가 현실에 부딪혀 흐지부지된 것들도 상당 부분 있다. 독립 전쟁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토머스 페인만 하더라도 계급을 비롯해 인종, 민족, 종교, 성 차별을 모두 타파하고, 보편 복지의 필요성까지 역설했는데, 미국 기준으로만 보더라도 저 문제들은 20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현재 진행형인 상황이고, 심지어 이권 문제와는 거리가 먼 공화국 건국이란 목표도 개인의 영향력 기대어서 겨우겨우 해결한 수준이었다.
이러한 시각에서 발전하여 미국 혁명의 혁명성에 회의적인 의견도 있다. 이에 의하면 혁명이라고 하면 말그대로 사회적이든 경제적이든 정치적이든 무엇인가 혁명적인 전환이 있어야 하는데 미국 독립전쟁은 말그대로 일개 식민지가 경제적 원인을 주요 요인으로 한 독립 전쟁에 불과하는 것이다. 최소한 혁명으로 불리려면 영국의 청교도 혁명처럼 왕당파로 불리는 구 귀족체제에서 의회파로 대변되는 시민세력으로 정치세력이 변동되고, 이로인해 영국의 경제정책이나 기타 정책들이 바뀌었으며 무엇보다 왕정에서 공화정으로 격변하는 변화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부분을 잘 꾀뚫는 미국인들도 영국이란 체제를 통째로 엎은거는 아니고 그냥 이주민들이 유혈저항으로 독립한 뒤 새로운 공화국을 채웠다는 점을 중시하면서 주로 보수측에서 미국을 "The American Experiment"라고 부르곤 한다. 완전무결의 이념적 혁명이 아니라 우리들끼리 먹고살겠다고 냅다 독립한게 지금까지도 이어지다가 어쩌고 보니 최강 패권국이 됐다는거고, 중대한 사유가 없는한 현재의 체제를 버려선 안된다는 함축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시민 혁명이라는 관점에서는 유럽 한복판에서 일어난 프랑스 혁명보다는 인지도가 덜하지만, 최초로 근대적 공화국을, 그것도 고도의 안정성을 바탕으로 수립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받는 혁명이다.
미국 독립전쟁의 실제 동기와 명분 사이에 괴리가 있다고 하여 전쟁의 의의와 결과를 폄하할 수는 없다. 우선, 어느 정도의 자치권이 있었다고 한들 아메리카 식민지는 국왕과 귀족이라는 본토의 봉건적 계층에 예속되어 있었다는게 중요하다. 즉 철저하게 본토인들의 의지에 따라 자치권이 박탈 가능한 상태였으며, 이러한 상태를 무력으로 바꾸었다면 혁명이라 부르기에 충분하다. 그리고 세금 내기 싫어서 일으킨 전쟁이라며 미국 혁명의 혁명성이 폄하되어야 한다면, 잉글랜드 내전(이른바 청교도 혁명)이야말로 찰스 1세의 폭정은 대외적 명분이였을 뿐 실질적으로는 청교도들이 자기들 기준에서 조금만 벗어나면 루터파이든 국교회이든 가리지 않고 가톨릭이라 몰아붙인 수사에서 일어난 내란이니 더더욱 혁명성이 떨어진다. 그리고 프랑스 혁명도 결국 이전부터 서서히 세력을 키워가던 자본가들이 전통적 귀족 계급을 몰락시킨 '있는 자들의 밥그릇 싸움'이니 혁명성을 완전히 부정할 수 있다. 하지만 잉글랜드 내전은 그렇다쳐도 프랑스 혁명의 혁명성마저 완전히 부인할 사람은 적다. 미국 혁명이 대외적 명분과 실질적 이유가 따로 놀았다고 한들, 혁명성을 부정해버릴 수는 없다.
신생 아메리카 합중국은 성문헌법이 통치하였고, 혈통적 신분을 부정했으며, 권력의 분립과 상호견제가 이루어졌다. 봉건적 문화가 상당한 본국의 지배를 무력으로 뒤엎고 이러한 신생 독립국이 탄생했으니 충분히 혁명이라 할 만하다. 한나 아렌트처럼 프랑스 혁명보다 미국 혁명을 더더욱 높게 평가하는 정치학 연구자도 있다. 아렌트는 프랑스 혁명이 자유(freedom)와 해방(liberty)을 혼동하였기에 비록 의도하지는 않았을지언정 전체주의의 씨앗을 남겼다고 평했으나, 미국 혁명은 자유와 해방을 구분하였기에 고도의 안정성과 민주정을 쟁취한 성공한 혁명이 되었다고 본다.
참으로 이상한 것은 20세기 유럽의 지식인보다도 미국의 지식인들이 미국 혁명을 프랑스 혁명의 견지에서 해석하고, 미국 혁명이 프랑스 혁명의 교훈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미국 혁명을 비판하는 것이다. 슬픈 진실은 파국으로 끝난 프랑스 혁명이 세계사를 만든 반면 그렇게도 성공적이었던 미국 혁명은 국지적인 중요성밖에 가지지 못한 사건으로 치부된다는 것이다.
한나 아렌트, <혁명론>
오늘은 어떤 중대한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조지 3세, 1776년 7월 4일
1776년 7월 4일 미국 독립선언문 발표일에 영국왕 조지 3세가 일기장에 쓴 글이라는 미국에서 꽤 유명한 속설이지만, 사실 조지 3세는 일기를 쓰지 않았다. 물론 일기를 썼다고 해도 전보조차 없던 시절이라 미국에서 미국 독립선언문이 발표된 당일에 영국까지 소식이 전해졌을 리가 없으니 이상한 일 아니다. 미국 독립 선언서가 영국 의회에 도착한 것은 1주일 뒤인 7월 11일이고, 조지 3세가 이를 접수받은 것은 다시 이틀 뒤인 7월 13일이었다고 한다. 미국 독립선언문이 영국에 도착한 날, 당연히 영국은 발칵 뒤집어졌다.
이 일화는 원래 프랑스 혁명 당시 바스티유 감옥 습격사건이 일어난 1789년 7월 14일 루이 16세의 일기장에 “rien”(아무일 없다)이라고 쓴 것이 미국 버전으로 와전된 것이다. 이쪽은 실화이며 해당 문구가 쓰여진 루이 16세의 일기장도 현대에 남아 있다.
놀랍게도 100세 넘게 장수한 노병들의 사진들이 있다.
가장 유명한 인물은 레뮤얼 쿡이며 브랜디와인 전투와 요크타운 전투에 참전한 경험이 있다. 각각의 발발년도가 무려 1777년과 1781년이다. 생몰년일은 1759년 9월 10일 - 1866년 5월 20일인데 어느 정도냐면 나폴레옹보다 10년 먼저 태어난 거다. 미국의 탄생을 위해 싸웠고 미국의 통합을 직접 눈으로 본 셈이다.
레뮤얼 쿡이 얼마나 오래 살았나면 한국 기준으로 영조에 의해 뒤주에 갇혀 사도세자가 사망한 임오화변 사건 3년 전 영조 35년에 태어나서 제너럴 셔먼호 사건, 병인양요가 일어난 해 고종 3년에 사망한걸 생각하면 체감이 확 온다. 현대 한국사로 비유하면 쿡은 독립군에서 복무한 후, 광복 후 17명의 대통령을 본 셈인데, 대한민국은 광복 이후 2022년 1월 기준으로 불과 12명의 대통령이 거쳐갔다.
이들의 더 많은 사진은 위 사이트 참고. 대부분 100살을 넘겼다!
미군은 수많은 전쟁에 참전했는데, 양측 합쳐 1천명 이상 동원된 대규모 전쟁 중 미군의 사상자가 더 많은 유이한 전쟁 중 하나다. 당시 세계적인 초강대국 그레이트브리튼 왕국(영국)을 상대로 오합지졸이 태반인 미군이 싸웠기 때문. 남은 하나는 미영전쟁. 1차, 2차 대전은 물론 베트남전, 걸프전 등 모두 상대 군인들은 미군보다 높은 손실을 입었다.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군이 교환비 미군 대 독일군 1 대 1.4 로 그나마 가장 높은 교환비를 기록했다.
독립전쟁 당시 흑인 노예들도 참전했다. 독립파와 왕당파로 나뉜 식민지 주인들처럼 이들도 둘로 나뉜 것. 단순히 주인을 따라 군대에 입대하기도 했지만, 자신과 뜻이 맞지 않는 주인으로부터 도망쳐서 상대 진영에서 복무한 사례도 있었다. 미군과 영국군 양측 모두 흑인들의 참여를 독려하기 위해서 노예 신분의 해방과 봉급을 조건으로 모병하였기 때문이다. 독립파 흑인 중 유명한 참전자로는 벙커힐 전투 때 영국군에게 포위당하자 기지를 발휘해서 영국군 지휘관을 저격하고 동료들과 함께 탈출한 피터 세일럼(Peter Salem)이 있다. 영국군에서 복무한 흑인 중 미국 노예주로부터 탈출한 노예 출신 흑인들의 경우, 본래는 종전 후 조약에 따라 미국 측이 이들을 붙잡아서 원래 노예주인들에게 되돌려주게 되어 있었다. 하지만 영국군 측은 이들의 신분을 보장한다는 약속을 지켜서 이 영국군 출신 흑인 및 가족들은 영국령 캐나다 등으로 이주할 수 있었다. 당연하지만 미국의 백인 인종차별주의자들은 미국독립전쟁에 흑인들도 참여하여 영국과 싸웠다는 것을 부정하고 있다.
훗날 미국 해군은 순양전함, 순양함, 항공모함의 이름에 독립 전쟁의 전투 이름을 붙인다.
뉴욕에서 9.11 테러로 무너졌던 세계무역센터의 재건 과정을 통해 새로 세워진 제1동의 높이가 1776피트인데, 여기서 1776은 바로 이 전쟁을 통해 미국이 독립한 1776년을 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