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공(過恭)은 비례(非禮)라.”라는 말이 있죠.
너무 지나치게 공손한 것은 오히려 예의에 어긋난다. 라는 뜻이랍니다.
점심을 먹고 나서 잠시 책을 보다가 읽은 것입니다.
하두 재미가 있어서 얼마나 웃었던지요.
그래서 이렇게 공감하고자 올려봅니다.
오늘도 활짝 핀 하루 되세요. ^-^
전에 어느 아무 문중에 명색 없는 종(從)이 하나 있었더래요.
평생토록 뼈가 빠지게 일만 하다가 죽었더랍니다.
그것이 하도 서러워서 종의 자식이 불쌍한 아배 원혼을 달래 주려고,
죽어서나마 어디 양반 대접 한번 받아보시라고,
제사에 당하여 아들은 마음씨 고운 샌님한테 통사정을 했더래요.
“워낙 한이 되서 그러는데요.
내일이 아버지 제사랍니다. 그래서 이 못난 놈은
배우고 익힌 것이 없어 신주도 지방도 못쓰는 터라
선생님께서 지방이라도 한 장 써 주시며 백골난망이겠습니다.”
그래서 그 지방을 하나 얻어 간직하고
홍동백서(紅東白西), 어동육서(魚東肉西)를 어찌 알 것 마냐.
종의 자식은 지극정성으로 얻어 온 과일, 생선 등으로
제상을 차리는데 그 옆에서 샌님은 그 마음이 갸륵하여
축도 한 장 자알 써서,
유우세에차아 모년 모월 모일 …… 낭랑하고 엄숙하게 읽었더랍니다.
이만하면 생전에 못 살아 본 양반의 세상을,
귀신이 되어서라도 흉내 내 보았으니 여한이 없으렷다.
샌님은 돌아가고 종의 자식은 흐뭇하여 깊은 잠이 들었는데,
이게 웬일인가.
꿈속에 봉두난발 머리를 풀어헤친 제 아배가 피골이 상접한 몰골로 나타나,
두려워서 벌벌 떨며,
“배가 고파 못 견디것다. 식은 밥 한 덩어리만 달라.” 라고 하면서
우는 게 아닌가.
종의 자식이 이 말에 소스라쳐 깜짝 놀라며
“아니 아배, 이게 무슨 말씀이요. 그 맛난 떡에,
국에, 온갖 전이며 붉은 사과, 흰 배, 그리고 생선, 고기, 술과 포,
식혜를 다 어쩌고, 무엇을 잡샀길래 배가 고프다 하십니까?” 했데요.
종의 아배는 갈고리 같은 손으로 잔뜩 주린 배를 움켜쥔 채,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한 자식 놈한테 하소연을 했더랍니다.
“말도 마라. 야야,
송췽이는 솔잎을 먹어야 하고, 물괴기는 물속에서 살아야는디,
이날 평생에 넘의 집 종노릇 이골이 나서 손바닥에 굉이가
백이드락 일만 하다 죽은 내가,
오늘 귀신이 되야 느그 집에 제삿밥 조께 얻어 먹으로 왔다가
기절초풍을 해서 두 번 죽는 줄 알았다.
느닷없이 생전에 못 먹어 보던 음식들이 울긋불긋 그뜩그뜩
채려진 제사상도 당최 나 멕기에는 낯설고 겁나는디,
내 가서 앉어야 할 자리에는 대관절 무신 소린지 알도 못헐
먹 글씨로 쓴 지방이 몬야 와 터억 붙어 있길래,
나는 무섭고 주눅이 들어서 벙거충이맹이로 그 저테 차마 가들 못하고
빙빙 돌기만 했니라.
그거이 꼭 날 쫓아낼려는 부적맹이드라.
그러다 하도 배가 고파서 머이라도 한 덤벵이 먹어 보까아……
싶도마는, 아이, 야,
그 서릿바람 호랭이 같은 샌님은 또 왜 어디로 가도 안허고
그렇게 사천왕멩이로 상 옆에 딱 버티고 서서,
사람 에러와 죽겄는디 숨도 못 쉬게,
귀신보고 이래라아, 저래라아, 점잖허신 문자를 우렁우렁 외어댄다냐이,
종놈은 본래 상전이라면 죄 진 것도 없이 오갈이 들고,
쌍놈은 그저 양반이라면 갓끈만 비쳐도 몸썰이 나지 않냐. 왜,
그런디 상전의 샌님이 유식허게 문장 격식을 갖춰
축끄장 읽어 주싱게로, 좌불안석, 몸 둘 바를 몰라 나는 무색허고,
횡송해서 진땀이 다 나드라.
엥게붙은 목젖에 물 한 모금 못 적시고
저 멀고 머언 황천길을 터덕터덕 갈랑게, 배도오 고프고 다리도오 아퍼서,
가다가 기양 도로 왔다.
아이고, 나, 밥 한 숟가락만 도라.”
종의 아들은 아버지의 말을 듣고,
“아니, 이거이 먼 소리여, 시방,”
종의 자식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소리에 놀라 꿈에서 깨어났데요.
그리고 혼곤히 젖은 이마의 땀을 손등으로 훑어 닦으며,
벌떡 일어나 허둥지둥 짚신을 꿰어 신고
잰걸음으로 샌님한테 내달아 갔죠.
이건 보통 큰 일이 난 게 아니다.
오밤중에 들이닥친 종의 자식이 하는 말을 자초지종 다 듣고 난
샌님은 그길로 다시 종의 집으로 가,
제상을 새로 차리라고 일렀데요.
헌데 이번에는 아까와는 사뭇 다르게,
홍동백서, 어동육서는 물론 따질 것도 없이
무조건 수북수북 담아다가 아무렇게나 상 가운데 놓아두고,
떡이며 전도 귀 맞추어 모양 나게 담지 않고 마구 섞어
고깔을 만들었답니다.
나머지 제수며 나물들도 마찬가지로 그저 허벅지게
퍼 담기만 하였죠.
그리고 지방도 모시지 않구요.
종의 자식은 이 두서 없는 제상 앞에 쪼그리고 앉아
향을 피우고 술을 따랐습니다.
그러자 샌님은 뒷짐을 지고 벽력같이 큰 소리로
“바우야아”
호령을 하듯이, 귀신이 된 종의 아배 생전의 이름을 불렀데요.
그러더니 딱 한 마디,
“많이 처먹어라.”
하고는 뒤도 안 돌아보고 횡 자리를 떠버렸답니다.
이럴 수가 있을까.
아무리 종놈의 제사라도 제사는 제사인데,
종의 아들은 몹시 마음이 아프고 처량도 했으나,
도리가 없어서, 그냥 밤새도록 상을 뻗대 놓고 앉았다가
새벽녘에 그만 깜빡 잠이 들어버렸데요.
그런데 이것은 또 웬일인가.
주린 배를 갈고리같이 움켜쥐었던 아까의 얼굴은 간 곳이 없고,
어느 결에 화안히 밝아진 낯색으로 웃으며 나타난 종의 아배는,
보름달이 동서르르 부른 배를 낙낙하게 두드리면서,
“어이, 자알 먹었다. 나는 갈란다.”
그래서 종의 자식은 크게 깨닫고,
이 후로는 앓던 짓은 안했더라고 합니다.
- 최명희의 <혼불> 중 에서 -
첫댓글 양반들이 만들어 낸 이야기가 아닐까요? 함부로 넘보지 말라는 취지로 ....잼 있게 읽었습니다.
그것이 맞는 이유일 듯합니다. 하긴 너무 빼는사람 보면 미울때가 있어요~
혼불에 나온 내용인가보네요..^^
잘 읽었어요..~~
재미있는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