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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섬 완도!
왜 건강의 섬인가?
우리들은 일상생활에서 건강이란 말을 많이 한다. 그렇다면 건강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단지 질병이 없거나 허약하지 않은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건강(健康)이란 신체적, 정신적, 사회적으로 안녕(安寧)의 상태를 말한다.
정신적 건강으로는 1.200년전 장보고의 배출과 유배인들이 완도에서 완성하였던 업적을 들수 있으며,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 나라를 지키려는 의지는 사회적 건강이다. 이사회적 건강이 임진전쟁을 승리로 이끌었으며, 일제 저항운동 으로 나라를 지키고자 젊음을 바친 완도인들의 기상이다.
완도가 건강의 섬이라고 주장하는 확실한 근거는 다른지역과 차별화 될 수 있는 조건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육체적 건강과 양질의 산소.
공기 중 약 5분의 1 정도가 산소다.
호흡한다는 것은 공기 중에 있는 이 산소를 들여 마시는 것이다.
산소는 수목들이 햇빛을 받아 탄소동화작용을 하면서 발생한다. 그래서 수목이 많은 아마존강 유역을 ‘지구의 허파’라고 한다.
이 산소는 지역마다 약간의 차이가 있다.
완도의 공기는 산소가 많고 그 질이 우수하다.
그것은 다른 지역에 비해 사철 푸른고 울창한 상록수림과 대단위 해조류 양식장이 있어 산소를 많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낙엽수림은 잎이 없어 겨울 동안 탄소동화작용을 할 수 없다. 그러나 완도의 산은 상록수가 주종을 이루고 있어 사철 양질의 산소를 공급해 주고 있다.
상록수림이 만들어 내는 산소도 나무수종, 나뭇잎의 두께에 따라 그 양과 질이 각기 다르다.
가시나무 숲을 산행하게 되면, 초입에 들어선 순간부터 가슴이 트인다. 이곳 가시나무 숲에서 삼림욕을 할 경우 피톤치드 발생량이 많으므로 감기정도의 작은 병은 현장에서 치유되다.
또한 완도의 대단위 해조류 양식장에서는 수목의 다섯배가 넘는 산소가 발생된다.
완도는 우리나라 최고의 양식 해조류 산지이므로 다른 지역에 비해 완도의 공기에 산소가 많다
이처럼 사철 탄소동화작용을 하는 상록수림대와 대규모 해조류 양식장에서 많은 산소를 만들어지고 있어 완도의 공기는 그 질이 우수 하다.
2008년 보건복지가족부가 지역사회 건강조사 결과, 전국에서 완도 주민들이 스트레스를 가장 적게 받는 것으로 조사하여 발표하였다.
일상생활에서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고 느끼는 사람이 9.7%로 완도가 최저치를 기록했다.
그것은 완도의 공기 중에 있는 양질의 산소가 스트레스를 덜 받게 하기 때문이다.
완도는 음이온이 풍부한 지역이다.
대도시의 산소 음이온 발생량은 0∼200개/㎤이다.
전남도 보건환경연구원에서 2009년 시책사업으로 ‘도내 섬지역 공기질 특성’에 대해 연구한 결과 전남 섬지역 공기질이 인체에 유익한 것으로 분석됐다.
이번 연구는 여수 돌산, 완도 신지, 진도 고군, 신안 증도를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산소 음이온은 완도 신지 3181개/㎤, 진도 고군 1810개/㎤, 여수 돌산 1593개/㎤, 신안 증도 1320개/㎤으로 차량 통행이 많은 도심의 0~200개/㎤ 수준에 비해 높은 값을 보였다.
(전남 보건연구원, 2009-07-21일 발표)
같은 섬지역이라도 완도가 특이하게 음이온이 많은 이유는 상록활엽수림대가 형성되어 있고 대단위 해조류 양식장이 있기 때문이다.
완도 신지 명사십리는 3181개로 전국의 최고치다.
이 수치는 원시에 가까운 자연 환경이라 할 수 있다.
음이온은 삼림과 폭포주변 초원공원의 분수 부근 해변에 다량이 존재하고 인간이 이러한 자연 환경에 노출 되면 상쾌감과 편안함 을 느끼게 된다.
이온이란, 전기를 띤 눈에 보이지 않은 미립자로 양이온과 음이온으로 분류한다.
양이온은 전자에서 발생되는 전파로 신체에 해로우며 음이온은 양이온과 결합하여 양이온을 무력화 시킨다.
TV 나 핸드폰에서 발생되는 이온이 양이온이다, 양이온이 많은 지역은 음이온이 급격히 감소한다.
숲속에 존재하는 음이온은 1㎥ 당 800-1.500개로 도시의 실내보다 12-15배가 많다.
TV, PC, 이동전화를 비롯한 가정의 각종 전자, 전기 제품으로부터 방출되는 X선, R선, 전리방사선, 자외선 등은 높은 에너지를 갖고 있으며, 이것은 공기 중에서 양이온을 생성하는 원인이 된다.
주위에 전자제품이 많으면 양이온의 숫자가 많아지고 천식, 기관지염, 두통, 시각장애, 요통, 어깨결림, 신경과민, 긴장고조, 생리불순, 무기력증, 우울증, 피부염, 기형아 출산등과 같은 병을 유발할 수 있다. 그러나 음이온은 (-)전파를 띤 공기의 원자요소로써, 유해한 양이온을 중화시키고, 인체조직에 접하면서 피를 맑게 하고 신경안정과 피로회복, 식욕증진, 세포의 활성화를 촉진시켜 생기 있는 생활을 영위케 하는 효과가 있다.
음이온은 공기를 맑게 정화하는 작용을 한다.
공기 중에 존재하는 여러 가지 오염물질 즉, 담배연기 아황산가스, 질소산화물, 일산화탄소, 오존 및 각종 유기물질은 양이온을 형성하고 있다. 음이온은 이들 양이온을 경화 침전시켜 제거하므로 공기를 깨끗하고 신선하게 유지해 준다.
양이온은 세균이나 먼지, 꽃가루 곰팡이, 오염된 입자들을 자유롭게 떠다니도록 해 공기를 혼탁하게 만드는 반면, 음이온은 이들을 중화, 제거 해 줌으로써 세균을 살균하고 먼지는 침전되도록 하는 역할을 한다.
겨울철에도 상록수로 가득한 완도에서의 산행으로 피톤치드(산림욕 효과)와 음이온이 가득한 질 좋은 산소를 마음껏 마셔보자.
맥반석으로 정화된 무공해 수산물.
바다를 접하고 있는 우리나라 자치단체들은 모두 자기지역 해안을 청정해역이라 한다.
그러나 완도처럼 확실한 근거를 제시할 수 있는 해안은 우리나라에는 없다.
완도는 상왕봉에서 노화도에 이르는 횡간수로 바다 밑 지반이 맥반석으로 되어 있다.
노화도에는 이 맥반석을 캐어 일본에 수출하고 있는 광산이 두 곳이나 있다.
완도 바다는 밀물과 썰물이 하루 각각 두 차례 이어지며, 심층의 해류까지 주기적으로 바닷물을 이동시켜 맥반석에서 분출되는 미세 미네랄이 완도 전체바다를 청정하게 가꾸고, 수산물의 맛을 바꾸는 역할을 하여 양질의 수산물이 생산된다.
세계 최고의 먹거리를 찾는 사람들이 일본인들이다. 그들이 완도산 김을 비롯하여 미역, 톳에 이어 최근에는 전국 생산량의 81%를 차지하고 있는 완도산 전복을 대량으로 수입해가고 있다.
또한 외국의 국빈들이 한국을 방문할 때 완도의 수산물을 수송하기 위해 헬리콥터가 완도까지 오곤 하였던 것은, 모두 완도의 바다에서 생산되는 수산물이 우수하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다.
완도의 자연 환경과 운동
완도의 자연을 이용한 건강 찾기를 알아보자
최근 도회지 곳곳에 발안마나 발 맛사지, 발 지압, 등을 받는 곳이 많이 생겼다.
발에는 사람의 오장육부와 통하는 지압점들이 모여 있기 때문이다.
이 지압점들을 자극해주면 오장육부의 기능이 활성화되어 음식물 소화는 물론 건강을 유지하는데 크게 도움이 된다.
완도의 구계등, 보길도 예송리를 비롯한 완도 각 섬 해변에는 크고 작은 몽돌밭이 많이 있다.
이 몽돌밭을 완도에서는 ‘짝지밭’ 또는 ‘깻돌밭’ ‘자갈밭’이라 부른다.
위장병으로 고생하던 많은 사람들이 이 몽돌밭을 정기적으로 걷고 나서 완전하게 치유된 사례들이 많이 있다.
이렇게 완도에서는 자연 속에서 걷는 것만으로도 복합적인 운동이 된다.
몽돌이 파도에 쓸리면서 나는 몽돌소리는 2001년 환경부 지정 한국의 아름다운 소리 100선에 선정되었다.
몽돌소리의 음파를 분석한 결과, 사람의 마음을 안정시켜주는 효과가 있는 이른바 백색음이 풍부한 것으로 밝혀졌다.
숭실대학교 정보통신전자공학부 배영진교수는 몽돌소리를 ‘백색사운드’라고 하는데, 자연 속에서 들을 수 있는 저음, 중음 고음을 다 포함하고 있어 마음을 안정시키는 특징이 있다고 하였다.
몽돌소리의 뇌파시험 결과 몽돌소리를 들려주자 스트레스를 나타내는 베타파는 50%이상이 줄었고, 집중도를 나타내는 알파파는 13% 증가했다.
이 실험결과에 대해 신촌세브란스 병원 신경과 박수철교수는 피험자의 긴장이나 불안 상태가 감소한 것이고, 주의 집중력과 관련된 각종 상태가 다소 증가한 것으로 보인다는 소견을 밝혔다.
완도에는 몽돌밭 외에도 모래 해수욕장이 많이 있다.
대표적인 모래해수욕장으로 신지도 명사십리를 꼽는다.
이곳의 모래는 너무 가늘어 건축용으로 사용을 할 수 없다. 그러나 이 모래가 햇살을 받아 뜨거워졌을 때 모래찜질을 하거나, 맨발로 모래사장을 걷게 되면 건강에 큰 도움이 된다.
바닷물은 지구가 생성된 후 육지에 있는 각종 미네랄(광물질)이 바다로 흘러들어 갔다. 그래서 바닷물을 가리켜 ‘종합 미네랄의 보고’라 한다.
일본에서 발표한 자료에 의하면 바다에 녹아있는 금의 양이 약 700톤, 은이 그 일곱배인 4,900톤 정도가 녹아 있으며, 그 외에도 무진장한 광물질이 있다고 한다.
그래서 인류는 예로부터 이 바닷물을 이용하여 여러 가지 질병을 치료하였으며, 건강을 위한 목욕법이 개발되고 있다.
그리스의 철학자 유리피데스는 ‘바다는 인간의 모든 질병을 치유할 수 있다’는 말을 하였으며, 히포크라테스, 아리스토텔레스 등이 뜨거운 해수 목욕을 추천한 바 있다.
해수탕이 좋은 이유는 바닷물에 100여 가지가 넘는 미네랄이 함유되어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어머니 뱃속 양수에서 자란다. 그 양수의 성분이 태초의 바닷물 성분이라 한다.
미네랄은 우리 인체의 신진대사에 없어서는 안 되는 중요한 물질이다.
바닷물의 미네랄과 우리 인체의 미네랄은 아주 비슷하다. 그러므로 부족한 미네랄을 해수목욕으로 얻을 수 있어 해수목욕을 권 한다.
우리나라에도 바닷물을 이용한 해수탕이 많이 시설되고 있다. 그러나 우리 완도의 바닷물 처럼 맥반석에 의해 일차 정수된 청정한 바닷물을 사용하는 해수탕은 없다.
미네랄이 풍부한 완도 해수탕에 목욕을 하게 되면 인체에 헤모글로빈을 활성화 시켜주기 때문에 동맥경화, 고혈압, 당뇨, 관절염, 요통, 피부병, 부인병, 습진, 무좀 등 여러 가지 질병 예방에 탁월한 효능이 있다고 알려져 있다.
해수탕에서 목욕을 하게 되면 탕 안에 있을 때 비하여 탕 밖에 나와 있으면 땀이 더 많이 배출된다. 그것은 바닷물 속에 있는 염분이 인체의 미세한 모공을 열어 줌으로서, 피하 지방층에 있는 노폐물이 땀에 섞여 나오기 때문이다.
이것은 마치 배추를 바닷물에 절일 때와 같은 이치다. 바닷물의 삼투압작용에 의한 것이다.
구국의 땅 완도
완도는 단군조선 이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각 분야에서 하나의 국가가 이룩할 수 있는 업적을 남긴 곳이다.
장보고 시절 청해진에는 중국 번진에 버금가는 대사급의 자치 통치를 하여 하나의 나라로 인정받았다.
당나라 건국의 주역 이세민의 “정관의 치”에 버금가는 고유의 정치, 문화, 경제, 사회가 화려하게 꽃을 피운 곳이다.
정관의 치란, 당 태종이 소수민족을 통합하여 민족간의 갈등을 해소하고 인재 중심의 정치를 이루어 태평성대를 구가하였던 시기이다. 장보고도 소수민족의 일원으로 인본주의에 의한 통치를 청해진에서 이끌어 갔다.
장보고가 이끌었던 청해진의 자치 통치는 오늘날 세계가 그 업적을 인정하여 육상의 징기스칸에 비교하여 해상의 영웅으로 받들고 있다.
세계적 영웅을 꼽는다면 육상에선 중국을 통일하고 유럽을 휩쓸었던 몽골의 징기스 칸 과 해상에선 세계 최초로 해상무역왕국을 건설하였던 청해진의 장보고다.
장보고의 개척정신이 혈관 속에 녹아있는 완도 사람들은 나라가 어려울 때마다 나라를 구하고자 분연히 일어섰다.
완도의 조상들은 임진전쟁으로 풍전등화에 처한 나라를 구 하는데 주역을 담당하였다,
일제치하에서 목숨을 초개 같이 던졌던 구국의 의열은 완도사람들이 중심이 되었다.
완도는 초기 한국경제의 기틀을 다진 곳이다.
대한민국 건국초기에 해외수출이 전무할 때 완도의 해태 수출은 외화 획득의 기초가 되었으며, 한국경제를 이끌어 왔던 최초의 수출품목 이였다. 이를 시작으로 우리나라는 지금의 수출 대국을 이룬 시발점이 되었다.
이처럼 완도의 선조들은 네 번에 걸친 구국의 대열에 앞장선 긍지 높은 조상들이며, 그 정신은 완도에 살고 있는 후손들의 혈관 속에 면면히 흐르고 있다.
완도인이 국난의 위기를 극복하였던 4가지를 들추어보자.
첫 번째 : 장보고의 신라 구국.
두 번째 : 임진전쟁 승리의 주역 가리포진 사람들.
세 번째 : 항일독립운동의 시발지 완도.
네 번째 : 대한민국 경제초석의 다짐.
청해진의 영웅 장보고.
완도는 세계 제일의 해상왕 장보고를 배출한 곳이다.
장보고는 우리나라 사람으로 세계사에서 해상무역왕 또는 해상제국의 황제로 평가 받고 있는 유일한 인물이다.
16세기 영국을 비롯한 구라파 국가들이 아프리카와 아메리카를 점령하면서 해양진출이 세계를 점령하고, 부를 창출 할 수 있다는 것을 터득하면서 9세기 장보고를 높이 평가하는 계기가 되었다.
장보고의 세계적 위상이라면 무역 용어에서 알 수 있다.
지금은 무역용어가 영어로 되어 있다. 그러나 장보고 시절에는 동남아, 아랍, 유럽, 일본, 중국에서 무역을 하는 상인들은 신라어를 모르면 무역을 할 수 없었다.
그것은 중국을 비롯한 동남아의 주요 상거래 지역의 무역은, 장보고 휘하의 신라인들이 주도하였기 때문이다.
또 무역을 하려면 장보고 선단을 이용하지 않으면 국제간의 무역을 할 수 없었다는 점도 위상을 높여주는 한 대목이다.
장보고는 완도에서 태어나 소년기를 보내고 청년시절 중국(당나라)으로 건너가 무령군에 입대하여 군중소장(사단장급)까지 올랐다.
전쟁이 마무리 되면서 중국 동부 연안에 산재되어 있는 동포들을 통합하여 상단을 운영하였다.
장보고는 828년 청해진에 오늘날 싱가폴, 홍콩과 같은 국제무역도시를 건설하고 중국, 일본, 아랍, 유럽까지 무역을 하였다.
청해진은 장보고가 독자적으로 통치를 하면서 신라보다는 중국의 번진에 속하는 정치구조를 유지하였다.
신라 왕족 김우징이 청해진에 망명하여 장보고의 보호를 받았다. 그러나 신라의 영향력 밖에 있었기 때문에 조정에서는 김우징과 장보고에 대해 어떤 조치도 취하지 못 하였다는 것이 이를 증명한다.
김우징은 장보고의 도움으로 신라 45대 왕에 오를 수 있었다.
청해진대사 장보고.
대사는 당나라 직제에 일정 구역을 통치하는 직함으로 신라에는 없는 직함이다. 이를 근거로 장보고 대사는 신라 조정의 통제를 받지 않고 청해진을 독자적으로 통치하였다는 것을 짐작 할 수 있다.
당시 장보고는 조정의 통제를 받지 않고 청해진을 중심으로 서, 남해안 일대를 직, 간접적으로 관할하였다.
장보고의 군사력.
장보고는 청해진에서 해외무역을 하면서, 해적을 소탕하여 신라 노예를 해방시키는 등 군사 활동까지 겸하였다.
장보고의 군사 규모를 짐작 할 수 있는 것으로, 김우징이 왕권을 되찾기 위해 출병 하였던 청해진의 마병이 5천이나 되었다는 것이다.
청해진의 군사는 수적으로 5천에 불과 하지만, 신라 정규군 10만을 대적할 수 있는 잘 훈련된 정예 군사다.
마필을 최소한 5천 이상 보유하고 있었다는 것은 5천 마병이 있었다는 것을 뜻한다.
또 말이 5천 필이라면 일반 병력은 2만이 훨씬 넘는다고 보아야 한다.
청해진에 이런 마필과 마병을 보유할 수 있었다는 것은, 장보고의 경제력을 의미한 것으로, 장보고가 무역으로 인한 부의 축척은 한 나라의 재정보다 많았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장보고를 평가 할 때 같은 시대를 살았던 김유신 장군과 비교하여 평가 한다.
삼국을 통일한 김유신 장군에게는 식읍 500호를 하사하였지만, 장보고 대사에게는 그 네배에 해당하는 식읍 2천호를 하사 하였다.
왕족도 아닌 평민 장보고에게 식읍 2,000호를 하사한 예는 역사상 장보고 외에는 없다.
장보고의 위대함은 여기에서도 읽을 수 있다.
호란, 세금을 받을 수 있는 가구 수를 말한다.
청해진의 지리적 위치
① 한, 중, 일을 잇는 무역로와의 근접
② 자연 재해로부터의 보호(신지도, 청산도)
③ 요망대와의 근접(상왕봉, 상산)
④ 내륙(도요지)과의 해로 근접
⑤ 넓은 배후지와 풍부한 수자원(대야, 장좌, 한들, 일 만정)
⑥ 조류 및 해양지리에 익숙한 인원확보
장보고의 위대성
① 당나라 산동성 일대에 살고 있는 유민들의 ‘정신적 지주였다.
② 서남해안의 해상질서를 바로 잡고, 노예로 팔려가는 것을 근절 시켰다.
③ 완도에 동북아 해상무역왕국을 창설하였다.
④ 해상복합운송(무역항로) 체계를 확립하였다.
장보고 대사에게 우리가 배워야 할 것.
① 창조적 발상
장보고에게는 선견지명이 있었다.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들도 장보고 대사처럼 미래를 보는 안목을 가져야 한다. 그리고 보았다면 두려워하지 말고 도전하여야 할 것이다.
② 인본주의사상
장보고는 청해진을 인본주의에 의한 주민위주의 통치를 하였다.
당나라에 억류되어 있는 신라 노예를 해방시키고, 무역에 관계된 여러 나라의 각기 다른 민족들을 홍익인간 이념에 따라 서로를 이롭게 하였다.
③ 인의지심(仁義之心)
중국에서 정년과의 사이가 좋지 않았으나 죽기를 각오하고 몸을 의탁해 온 정년을 넓은 마음으로 중용하였다.
임진전쟁의 승리.
임진전쟁에서 나라를 구한 땅으로 포상되어 정시 과거시험까지 실시된 완도 고금도는 우리 완도 군민의 자랑이자 높은 긍지다.
임진전쟁은 이순신장군의 “난중일기”에 근거하여, 지금까지 자료로 활용하고 있다.
가리포진은 지금의 완도이다.
임진전쟁에서 크고 작은 작전회의나 해전에는 가리포진 수군이 빠진 적이 없다.
1592년 임진전쟁이 발발하여 왜군들이 한반도에 상륙, 한양을 점령하고 압록강까지 진출 하였다.
그러나 완도를 비롯한 서남해안 일대는 왜놈들의 발굽에 희생되지 않았다. 이는 가리포 수군이 있었기 때문이다.
역사에 등장하는 임진전쟁은 이순신장군의 역할에 의해 왜놈들이 서남해안을 넘지 못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데 어찌 이순신 장군 혼자였겠는가?
이순신 장군의 승전에 제일 큰 역할을 하였던 수군은 주로 가리포진 수군이었다.
그때는 완도가 각기 다른 현에 속해 있었기 때문에 역사 기록에는 완도라는 표기가 없다. 그러나 당시 완도읍에는 “가리포진”이 있었다.
가리포진은 조선 수군 중에서 규모가 제일 크고, 가장 중요한 지역을 수비하고 있었다.
경상 좌,우 수사. 전라 좌,우 수사. 충청수사 로 구분하여 다섯 사람의 장수가 우리나라 해안을 방어 하였다.
당시 가리포진은 전라우수영에 속해 있었다. 좌, 우수영의 구별은 한양에서 보았을 때를 기준하기에, 가리포진이 우수영에 속한다.
가리포진은 제주해협까지 광범위한 해역을 담당하였다.
때문에 전국 각 진의 첨사보다 2품이 높은 종3품의 당상관이 역임되었다.
가리포진이 얼마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는지는, 이순신 장군이 남망산에 올라 했던 말로 증명할 수 있다.
‘좌우를 돌아보니 적이 지나다니는 길목이 한눈에 보이니 여기가 바로 한 도의 요충지다(則右處候李廷忠亦先到 同上南望 則左右賊路諸島 易易可數 眞一道要衝之, (칙우처후이정충역선도동상남망 칙좌우적로제도 역역가수 진일도요충지),
이 말은 그 후 가리포진 첨사 명선에 의해 ‘호남제일번(호남에서 제일 강한 울타리)이라 현판에 새겨 객사 정문에 걸었다.
난중일기에 보면 ‘약무호남 시무국가(若無湖南 是無國家 也)’라고 호남의 중요성을 역설하였다. 그 중요한 호남의 중심에는 완도가 있었음을 ‘호남 제일번’으로 알 수 있다.
가리포진이 이렇게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기에 가리포진 첨사를 거쳐야 좌, 우수사가 될 수 있었다.
전라우수사 이억기(47대)도 임진전쟁이 있기 바로 전에 가리포 첨사를 하였으며, 이순신(54대)도 가리포 첨사로 명령을 받았다. 하지만 취임하지도 못하고 바로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었다.
또 노량전투에서 이순신과 함께 전사한 이영남(56대)도 가리포 첨사로 있으면서 전투에 참여 했다.
이처럼 임진전쟁에 전라 우수사와 가리포 첨사가 참여하지 않은 전투는 한 번도 없었다.
가리포진(완도)은 군사 전력기지로 완벽을 갖춘 지역이다.
가. 군선확보
수군력은 군선의 확보가 가장 기초다,
완도는 군선을 확보하는데 가장 필수인 황장목이 가장 많은 곳이며, 선박을 건조하는 기술자가 확보되어 있는 곳이다.
완도는 예로부터 황장목이 많은 지역으로 고려 때는 국원으로 지정하였다.
조선조 중종 때에는 전국에 황장목이 고갈되었으나 완도에는 보전되어 있었다.
조정에서는 가리포에 진을 설치하고 왜구를 막으며 황장목으로 군선을 건조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근거 : 중종실록 : 완도의 상왕봉과 노화의 격자봉은 전국 제일의 수목지역으로 전국에서 가장 좋은 황장목이 있었던 곳이다.)
나. 수군확보
격군 즉 노군의 확보가 가장 용이한 곳이다.
이는 가리포진에서 고기잡이가 주업인 어부들은 배를 부리는 기술자이기에 노 젓는 것은 일상생활이었다.
이들은 언제라도 군선에 승선하면 최고의 수군이 될 수 있는 사람들이다.
육지에서 징집된 수병은 노를 젓는 것은 고사하고 멀미 때문에 수개월의 숙련이 필요하다. 그러나 가리포진의 어부들은 언제든지 바로 승선만하면 노 젓는 것 정도는 바로 할 수 있는 장점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섬으로 형성된 지형지물, 수시로 변하는 서, 남해안의 조류와 와류, 바다 속에 보이지 않은 암초들 까지 통달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이곳 가리포진의 어부들이다.
다. 군량의 확보.
가리포진의 인근 지역은 곡창지역이다.
해남, 강진, 장흥, 영암 그 외에 고금도는 군량을 확보하기위한 둔전지역으로 이순신이 점 찍어 놓은 곳이다.
이순신이 1598년 3월 18일 임금에 올린 장계에 “고금도의 남쪽에는 지도(智島-신지도)가 있고 동쪽에는 조약도(助藥島)가 있으며, 농장(農場)도 역시 많고, 한잡인(閑雜人)도 거의 1천 5백여 호나 되기에 그들로 하여금 농사를 짓게 하였습니다.”
이러한 조건이 충족되어 있었기 때문에 1598년 2월 17일 고금도에 본진을 설치하고 군비를 확충하여 노량 해전을 마지막으로 임진 전쟁을 끝 낼 수 있었다.
고금도에서 과거시험을 치르다.
임진 전쟁이 끝나고 3년 후인 1601년(선조34년), 선조임금은 해방(海防)에 수고한 사람들을 위로하기 위하여 전라도 고금도, 경상도 부산, 거제 3곳에서 과거시험을 볼 것을 명하였다.
2년 후인 1603년1월1일 고금도를 비롯한 3곳에서 과거시험을 실시하여 문과 이명준 등 10인과 무과 신경유등 1,600명을 선발 하였다.(선조수정실록 36년 계묘)
임진전쟁의 특징은 우리 역사상 고려 이후에 최초로 승리한 전쟁이다. 그 전쟁의 주역이 호남이며, 호남의 중심에 완도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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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항일 독립운동의 발원지 완도
완도는 항일운동의 발원지다.
항일운동의 씨를 뿌리고 본격적인 저항 운동을 출발 한 곳이 완도다.
전국 218개 군 중에서 가장 조직적이고 격렬한 항일운동을 펼쳤던 곳이 전라도 완도, 함경도 북청, 경상도 동래로 평가한다.
완도의 외딴섬 소안도 한 곳에서만 독립운동으로 훈, 포장을 받은 사람이 55명에 이른다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완도에서 항일 운동이 이처럼 활발하게 꽃을 피우게 된 동기는 완도사람들이 일찍부터 신학(新學) 교육을 받았기 때문이다.
사립 신학교에서는 애국 애족사상과 계몽사상을 역점 교육하였다.
사립 신학교의 교육 목표는
첫째, 항일운동 고취.
둘째, 미신타파.
셋째, 언어평등(양반, 쌍놈간의 언어평등)
넷째, 남녀평등(여권신장가).
다섯째, 조혼폐지. 등이며
“배워서 나라를 지키자” “아무리 배워도 나라가 없으면 우리는 잘 살 수 없다“. “배우지 못하면 소유할 수 없다” “배워야 부자가 될 수 있다.“
고 교육을 시켰다.
사립 신학교는 소안도에서 처음 개교한 후 뒤를 이어 완도의 각 면에서 개교하였다.
소안도에서는 1913년 설립자 김사홍을 필두로 교사 송내호, 김경천, 빈광국(함북) 강경환(함북) 등이 사립 신학교를, 사립소안 중화학원으로 개강하여 중학과정을 가르쳤다.
여기에서 민족계몽 애국사상을 교육 하였으며 1922년 사립소안학교로 발전시켰다.
1916년 사립고금학교, 노화영흥학원.
1921년 사립조약도학교. 사립신지학교.
1925년 사립군외학교.
1932년 사립노화 대성학교, 금당학교. 모도학교 등이 연달아 문을 열었다.
전국에서 교사를 초빙하여 각 면단위는 물론 마을 단위까지 학교가 설립되어 신교육이 실시되었다. 즉 항일운동을 고취 시킨 것이다.
이 학교 설립자와 교사들은 대부분 서울과 함경도, 중국등지에서 항일운동으로 활동하던 망명가들이었으니 그 교육내용을 짐작 할 수 있을 것이다.
날로 성장하여 가는 사립학교의 교육은 일본의 입장에서 볼 때 극히 불순한 교육으로 판단하여 1924년 신지, 1927년 소안, 1935년 군외 사립학교를 강제 폐쇄하였다.
따라서 학교 설립자와 교사들을 불순분자로 몰아 강제 연행하여 재판에 회부하였다.
완도는 장보고의 혼을 이어 받은 구국의 땅이다.
20세의 젊은 나이에 조국의 광복을 위해 서슴없이 목숨을 바친 구국의 열사, 계속되는 투옥에도 굴하지 않고 이를 직업삼아 자신을 희생한 기사정신이 있었다.
소안도 주민들은 동료가 투옥되어 있는 동안에는 집에 있으면서도 한겨울에도 이불을 덮지 않았다한다.
고생을 같이 하자는 동료 의식이다.
완도는 “충혼의백(忠魂義魄)”의 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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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더많은자료를부탁합니다 수고하셨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