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의 신고식
중종 36년인 1541년 12월, 사헌부에서 왕에게 이런 상소를 올렸다.
여기서 말하는 ‘신래(新來)’란 관직에 새로 임명된 신임 관원(官員)을 뜻한다. 지금의 군대로 치면 신참이고, 회사로 치면 신입사원이다. 그런데 그들이 치러야하는 신고식이 매우 비인격적일 뿐만 아니라 그들을 대접하는데 드는 비용이 막대하고 또 잘못하면 매도 맞는다는 것이다.
조선에서 과거의 문과급제자들은 1위에서 3위까지를 뜻하는 갑과(甲科) 3인을 제외하고는, 실직을 제수받기 전에 모두 사관(四館)에 배치되어 연수를 받았다. 사관(四館)은 교육과 문예를 담당하던 4관서를 가리키는 말로 성균관(成均館), 교서관(校書館), 승문원(承文院), 예문관(藝文館)이다. 통상 나이가 있고 덕망이 있는 자는 최고의 유학교육기관인 성균관에, 고금의 글에 박식한 자는 서적의 교정과 반포를 맡은 교서관에, 학식과 지혜가 뛰어난 자는 왕명의 문서와 사초(史草) 기록을 담당하는 예문관에, 나이가 어리면서도 총민한 자는 외교문서를 작성하는 승문원에 배치하였다고 한다.
과거급제자들은 각기 배치된 곳에서 일정기간 실무연수를 받는데 이때 이들 앞에는 ‘권지(權知)’라는 호칭이 붙었다. 요즘으로 치면 인턴이나 견습생과 같은 의미다. 그런 새내기들을 상대로 선배 관원들이 단순히 갈구는 정도가 아니라 인생이나 가정이 파탄날 수도 있을 만큼의 혹독한 신고식을 치르게 한 것이다.
[<모당홍이상공평생도> 제3폭의 응방식(應榜式) 부분, 국립중앙박물관 ㅣ악수(樂手)가 음악을 울리고 광대와 재인(才人)이 춤추고 재주를 부리면서 길을 누비는 가운데 과거급제자는 말을 타고 인사를 다녔다.]
이러한 신고식의 유래는 고려 말에 명문거족의 자손들이 실력도 없이 권력의 힘으로 벼슬에 오르고도 교만 방자하게 행동하는 것을 보고 선임 관원들이 신임 관원들의 ‘뻣뻣하고 날카로운 기세’를 초장에 꺾어 버리기 위하여 시작한 것이라 한다. 그들은 신임 관원을 ‘신귀(新鬼)’라고 조롱하면서 혹독한 면신례(免新禮)를 치르게 하였다. 면신례(免新禮)란 말 그대로 ‘신입을 면하는 예식’이다. 기녀를 동원하여 성대하게 술과 음식을 제공하여야 했고 또 그 과정에서 행해지는 심한 모욕과 치욕도 견뎌내야 했다. 이러한 풍습은 고려가 망하고 조선에 들어서도 계속 관습으로 이어졌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 정도가 더욱 심하여져서 ‘신래침학(新來侵虐)’이라는 말까지 생겨났다. 침학은 침노할 ‘침(侵)’과 모질 ‘학(虐)’자를 쓴다. 그만큼 거칠고 가혹했다는 이야기다.
신임 관원은 관아에 배치되는 즉시 일차로 허참례(許參禮)라는 이름으로 향응을 베풀어야 했다. 허참(許參)은 ‘마주 대하는 것을 허락한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그 이전에는 상대도 안 해준다는 뜻이다. 이 허참례는 한번으로 끝나기도 하지만 때로는 몇 차례가 되기도 했다. 그리고 허참례를 치른 열흘쯤 뒤에는 다시 면신례가 행해지는데 그 기간 동안 선임 관원들은 온갖 방법으로 신임 관원을 괴롭힌다. 인격적 모독을 가하고 직무상의 함정에 빠뜨리기도 하며 육체적 가혹행위나 구타도 행하여졌다. 실록에서는 그 참상을 왕에게 이렇게 고했다.
선임 관원들이 신임 관원들을 괴롭히는 방법은 관아마다 다양하였다. 지금 군대의 봉체조처럼 서까래만한 크기의 나무를 들어 올리게 하고 그것을 제대로 못하면 선임들이 차례로 돌아가며 무릎을 주먹으로 쳤다. 연못에 들어가 사모(紗帽)로 물을 퍼내게 하는 물고기 잡기를 시키고, 거미 잡는 놀이라 하여 부엌의 벽을 문지르게 한 뒤 손이 새카매지면 씻게 하고 그것을 여러 차례 반복하여 그 손 씻은 물을 마시게 하였다. 얼굴에 낙서하거나 진흙탕에 구르게 하는 것쯤은 약과였다.
이런 수도 없는 치욕과 모욕을 견디고 난 다음에는 면신례를 치러야 하는데 그 비용이 결코 만만치가 않았다. “가산(家産)을 모두 탕진하고도 또한 감당해 내지 못하여, 더러는 논밭과 노비를 팔고 더러는 집까지 팔게 됩니다.”라고 할 정도였다.
이렇게라도 면신을 잘 치른 경우에는 선임 관원들로부터 재능과 인품을 인정받아 그 뒤의 관직 생활이 순탄하였지만, 반대인 경우에는 멸시를 받아 견디기 어려웠다고 한다. 이 때문에 신임 관원들은 성대하게 허참례와 면신례를 베풀 수밖에 없었고 때로는 금품을 상납하기도 하였다.
[<전 김홍도필담와홍계희평생도> 제6폭 삼일유가(三日遊街) 부분, 국립중앙박물관 : 과거급제자가 친척이나 스승을 찾아 인사를 드리는 장면]
신입자에 대한 이런 벌례(罰禮)는 새로 관원이 된 양반들에게만 국한되지 않았다.
“사대부(士大夫)들 사이에서 먼저 이런 풍습을 주창했기 때문에 미관말직(微官末職)은 물론 잡품(雜品)과 군졸(軍卒), 복례(僕隸)와 같은 미천한 사람들까지도 모두 그렇게 하지 않는 사람이 없다.”고 했다.
사헌부가 상소를 올리고 20일쯤 뒤에 예조(禮曹)에서 그에 대한 대책인 절목을 올리는 글에도 이런 대목이 나온다.
▶유밀과(油蜜果) : 쌀가루나 밀가루를 꿀과 조청을 섞어 반죽한 뒤 다시 참기름에 튀겨낸 과자로 조선시대에는 가장 사치스러운 과자로 꼽혔다. ▶거관(居館) : 유생(儒生)들이 성균관(成均館)에 머물며 공부하는 일. 원칙적으로 유생들은 성균관에서 3백일 동안 공부해야만 문과초시(文科初試)에 응시할 수 있었다. |
더욱 놀라운 사실은 이런 신고식이 상대를 가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중종 때보다 50년 앞선 때인 성종 때에 이런 일이 있었다.
병조(兵曹)가 지금의 국방부처럼 병정(兵政)을 총괄하는 기구라면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는 조선시대의 중앙군인 오위를 총괄하는 최고 군령기관(軍令機關)이다. 도총관(都摠管)은 그 오위도총부에서 군무(軍務)를 총괄하던 최고 관직으로 정2품(正二品)이다. 오위(五衛)이다 보니 도총관은 다섯 명이나 되었지만, 종친이나 부마 또는 삼공(三公)이 겸임하는 자리였다. 변종인(卞宗仁)은 30년도 전인 1460년에 무과에 급제하고, 1467년에는 이시애(李施愛)의 난을 평정하는 데 큰 공을 세워 당상관에 오르고 그 후에도 여러 곳의 병마절도사와 공조참판을 지낸 인물이다. 그런데 그런 도총관이 허참례를 행하지 않았다고 아직 정식으로 관직도 받지 못한 신참 무과 급제자들이 자신들의 상관을 맞이하는 예를 거행할 수 없다고 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직함 대신에 이름을 부르는 무례까지 범했다.
이 말을 들은 성종은 권지(權知) 이극달(李克達)을 비롯한 14명을 불러 "낮은 벼슬아치들이 재상(宰相)을 욕보임이 옳으냐?"고 물었다. 그러자 이들은 이렇게 대답했다.
"무과 출신인(武科出身人)은 당상(堂上), 당하(堂下)를 묻지 않고 모두 주효(酒肴)를 판비(辦備)하여 본원(本院)의 남행(南行)과 서로 만나본 연후에야 선생안(先生案)에 제명(題名)하고, 선생(先生)이라고 일컫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비록 당상(堂上)이라도 지영(祇迎)하지 않고, 신래(新來)의 이름을 부르니, 이것은 옛 풍습입니다."
▶남행(南行) : 조선시대 공신과 현직 당상관의 과거를 거치지 않은 자손에게 벼슬을 주는 일. 여기서는 그렇게 임명된 관원. ▶선생안(先生案) : 조선시대 각 기관과 관서에서 전임관원의 성명, 관직명, 생년, 본관 등을 기록한 책. 안책(案冊)이라고도 한다. |
왕의 물음에도 그들은 누가 되었든 간에 새로 부임해 왔으면 술과 안주를 준비하여 허참례를 행한 뒤 관인명부에 이름을 올린 뒤에야 제대로 된 대접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성종은 그들을 따로 벌하지 않고 옛 풍습을 혁파하라는 명만 내렸다.
그러나 허참례와 면신례는 끊이지 않고 계속되어 중종 때는 물론 영조 때까지도 계속되어 영조 51년인 1775년에는 이 때문에 숭문관 관원이 모두 삭직(削職)되기도 하였다. 『경국대전』에도 ‘새로 소속이 된 사람을 침학하는 자는 장 육십(杖六十)에 처한다.’고 규정되어 있었지만 실제로 그런 벌을 받았다는 기록은 찾을 수가 없다.
아직도 전통과 풍습이란 명목으로 사회 곳곳에서 여전히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신고식이라는 악습의 뿌리는 참으로 오래고도 질긴 것이다.
참조 및 인용 : 조선왕조실록, 한국고전용어사전(2001, 세종대왕기념사업회)
[출처] 조선시대의 신고식 종심소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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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조선시대의 신고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