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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I Love Soccer (축구동영상) 원문보기 글쓴이: 악셀 비첼
축구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유럽의 어지간한 지방이라면 꼭 축구구단 하나씩은 있다라는걸 알거다.
그만큼 축구가 사람들의 삶속에 깊이 개입돼 있다는 증거.
유럽인들에게 축구란, 단순한 스포츠가 아닌 자기 지방의 명예를 건 일종의 대리전쟁의 양상을 띄고 있다.
유럽의 경우는 봉건주의 내지는 분열된 국가였다 통합된 나라들이 대부분인지라 각 지역에 대한 애착이 우리나라보다 훨씬 심하다.
신교와 구교, 좌파와 우파, 소외된 소수민족의 불만 등 유럽에 산재해있는 모든 악감정들이 합법적으로,
그리고 가장 깔끔하게 충돌할 수 있는 무대.. 그것이 바로 축구장이다.
이번 포스팅에서는 유럽의 더비와 그 배경설명을 담아보았다.
10. 올드펌 더비 [셀틱 vs 레인저스]
축구에 어느정도 관심이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위의 두 팀을 모르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레알이나 맨유같이 일반인들도 쉽게 알만큼 인지도가 있는 팀은 아니다.
하지만 축구에 관심있는 사람들이라면 이 셀틱과 레인져스의 글래스고 더비야말로 축구 역사상 최고의 살인더비라는걸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셀틱과 레인져스는 똑같이 스코틀랜드 최대도시인 글래스고를 연고지로 한다.
그러면서도 셀틱은 카톨릭, 레인져스는 신교이다.
그리고 두 팀을 지지하는 서포터들은 세계에서 제일 융통성이 없는 스코틀랜드인, IRA까지 조직하며
현재도 치열하게 치고받고있는 아일랜드인이다. 이쯤되면 이건 축구가 아니라 전쟁이라는 표현이 맞을듯..
올드펌 더비매치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역사를 가진 더비매치로서,
북 런던 더비나 머지사이드 더비와 같이 지역적 특성을 가진 더비가 있는 반면에,
올드펌 더비매치는 종교적 정치적 특색을 가진 신교도와 구교도의 문화적충돌 이자 종교적인 이념차이의 성격을 가진 대결이다.
그런고로 경기가 시작되면 경고 5~6장은 기본에 퇴장도 빈번히 속출하는 상황이 발생 한다.
글래스고레인저스와 셀틱간의 첫만남은 116년 전 1888년 5월25일 스코틀랜드의 퀸스파크구장에서 열린 경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결과는 셀틱이 5:2로 승리).
올드펌더비는 전통과 역사를 가진 세계적으로도 널리 알려진 유명한 더비매치이다.
116년간의 역사를 가진만큼 올드펌 더비가 열리는 날이면
스코틀랜드 전역은 엘클라시코더비나 머지사이드더비, 밀란더비에 뒤지지 않을 만큼 그 열기로 떠들썩하다.
극성 팬이 많기로 유명한 영국이지만 글래스고를 연고로 하는 두 팀의 사건 사고는 끊이지 않는다.
셀틱과 레인저스의 경기는 두 팀의 선수들이 펼치는 눈부신 라이벌 경기가 아닌 서포터들의 과격하고 폭력적인 움직임이 더욱 더 눈길을 끈다.
서로를 향해 뿜어대는 응원가조차도 서로의 처절한 패배를 갈구하며 원색적인 응원구호 또한 서슴없이 불리어진다.
모든 경기장에서 홈팀과 어웨이팀 서포터들의 크고 작은 몸싸움이 발생하지만 셀틱과 레인저스 서포터들간의 몸싸움은 말 그대로 몸싸움에서 그치지 않는다. 최근들어 두 팀 서포터즈의 과격한 행동들이 많이 수그러들었다고 하지만 셀틱의 홈 구장 셀틱파크 주변에선 최근 10년간의 집계에서 양팀 서포터들간의 크고 작은 몸싸움에서 8명이 사망하였고 네드(Neds)라 불리는 불량배들이 올드펌을 핑계로 양팀간의 팬들끼리의 충돌에 끼어들어 충돌의 크기를 눈두덩이 처럼 키우고 있다는 점 또한 양 팀 서포터들간의 지나친 몸싸움의 문제 중 하나로 떠오르고 있다.
이처럼, 셀틱과 레인저스의 더비경기는 타 더비경기와는 다르게 자존심을 놓고 경기하는것이 아니라, 생존과 죽음..
즉, 생족게임을 하는것이다라는 표현이 맞을듯 하다.
9. 엘 클라시코 더비 [바르셀로나 vs 레알 마드리드]
말이 필요없는 세계 최고의 더비.
엄밀히 말하면 이 두팀은 더비가 아니다. 더비라는 건 보통 같은 도시를 연고지로 하는 두 팀끼리의 경기를 말하는 거니까.
하지만 세계 최고의 리그라 불리는 프리메라리가에서, 최고의 명성을 자랑하는 두 팀간의 대결을 빼먹는다는건...
더구나, 리그 우승을 번갈아 가며 해먹는 거함들끼리에 대결인데다가 유명한 스타급 플레이어가 즐비하게 있다.
실예로, 몇일전 열린 09/10 엘 클라시코더비(바르셀로나 1:0승) 경기날에는,
바르셀로나 시내에 있는 모든극장의 상영영화를 중지하고, 엘클라시코 더비 경기를 중계했다고 한다.
우리나라는 4강 올라갔던 월드컵때도 하지 못했던것을... 이처럼 엘클라시코는 하나의 더비를 떠나 이제 문화로 자리잡았다.
이 두 팀 사이의 앙숙 관계는 매우 유명하다. 이런 이야깃거리들이 더비 매치의 살을 찌우고, 더욱 격렬한 경기로 이끈다.
최근 10년간의 사건들만 봐도 이 두 팀의 관계는 심상치 않았다.
먼저 세계를 깜짝 놀라게 했던 피구의 이적 사건과 같은 경우, 구단 관계자들 사이의 원한이 쌓이지는 않은 반면
바르셀로나 서포터들에게 엄청난 분노를 일으킨 사례다.
96/97 시즌에 바르셀로나에 입단한 피구는, 선수로도 감독으로도 바르셀로나의 전성시대를 이끌었던
요한 크루이프 감독 체제에서 오른쪽 윙으로 바르셀로나 팬들의 많은 사랑을 받고 있었다.
그는 바르셀로나에 많은 우승컵을 가져다 주었고, 본인도 바르셀로나에 대한 애정을 공개적으로 강조하고 있었다.
그러던 그가 유로 2000 이후 5600만 달러라는 엄청난 이적료로 최악의 라이벌 레알 마드리드로 이적하자
바르셀로나 서포터들의 배신감은 극에 달했다.
언론 보도에 따르면, 피구가 바르셀로나 홈구장은 누 캄프에서 코너킥을 할 때 벽돌, 맥주병, 돼지머리 등이 날아와서 경기가 중단되었다고 한다. 바르셀로나 구단주와 감독은“굳이 피구가 코너키커로 나선 것은 관중을 도발하려던 행위”라며 피구를 공격했고,
피구는 섭섭한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피구는 바르셀로나와 레알 마드리드에 번갈아가며 5년씩 있었고, 10년간 클래식 더비의 증인이 되었다.
바르셀로나 서포터들에게 오물(돼지머리) 투여를 받는 레알마드리드때의 루이스 피구.
피구에게 배신감을 감추지 못하는 바르셀로나 서포터즈.
결국 연고지도 다른 이 두 클럽 사이의 경기가 진정한 더비가 되었던 원인은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카탈루냐 인들이 받았던 억압의 경험이 FC 바르셀로나라는 축구 클럽으로 표현되었던 과거의 영향이다.
둘째, 이 두 팀이 모두 세계 탑 클래스 수준의 강팀이기 때문에 이 두 구단의 경기가 언제나 관심을 모았기 때문이다.
셋째, 이 클럽들 사이에서 아주 오랫동안 정말로 많은 일들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갓 레알 마드리드나 바르셀로나의 팬이 되는 지구상의 수많은 사람들이 각자 편을 갈라서 은근한 적개심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오죽하면 바르샤를 응원하는 한국인이“나는 레알 마드리드가 우승팀이 되길 바란다. 세군다 리가(스페인 2부 리그)에서.”라는 말을 썼을까.
8. 머지사이드 더비 [리버풀 vs 에버튼]
잉글랜드의 중서부에 있는 머지사이드주에 연고를 두고 있는 레즈“리버풀”과 토피스“애버튼”이 펼치는 머지사이드 더비이다.
머지사이드더비는 무엇보다도 퇴장을 각오하고 서로를 몰아붙이는 격렬한 일전으로 이름이 높다.
두 팀간의 경기는 그 어떤 경기 보다도 치열하며 상대를 향해 거침없이 달려드는 경기는 그 역사와 치열함에서 최고를 자랑한다.
객관적인 전력에서 한 수 아래인 애버튼과 챔피언스리그 5회 우승과 프리미어리그 최다 우승을 자랑하는 프리미어리그 최고의 명문구단 리버풀의 어찌보면 어울리지 않는 앙숙관계 그리고 그들이 만들어내는 머지사이드더비의 역사에 사람들이 열광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애증의 관계는 앤필드로부터
1878년 잉글랜드 머지사이드 주를 연고로 하는 세인트 도밍고스라는 축구팀이 창단되었다.
그러나 이축구팀은 5년뒤에 팀이름을 에버튼으로 바꾸며 새롭게 시작하게 된다.
에버튼은 리버풀의 사업가 존 하울딩이 소유하고 있던 앤필드를 홈구장으로 사용하게 되었고 1892년 임대에 관련된 계약과정에서
에버튼은 갈등차이를 좁히지 못하고 결국 다른 홈구장을 찾아서 떠나게 되었다.
결국 주인을 잃은 경기장을 위해 존 하울딩이 새로운 구단을 창단하게 되었고 그 구단이 바로 리버풀이다.
이때부터 이어진 두팀 인연은 100년이 넘게 이어지게 된 것이다.
시작은 한 식구였지만 지금은 “누가 진정한 머지사이드의 주인인가”를 놓고 자존심 대결을 벌이고 있는 셈이다.
1992년 잉글랜드 프로축구 1부리그가 프리미어리그라는 이름으로 새롭게 출범한 이래,
리버풀과 에버튼의 머지사이드 더비에서 무려 14명의 선수가 퇴장을 당했다.
뒤를 잇는 아스톤빌라-뉴캐슬유나이티드, 첼시-에버튼의 경기에서 10명의 퇴장선수 기록보다 더 눈에 띈다.
리버풀과 애버튼이 보유하고 있는 기록은 특정팀간에 나온 최다 퇴장기록이다.
그만큼 머지사이드 더비는 선수들의 승부욕이 지나친 나머지 아주 거친 경기를 펼치는 것으로 유명하다.
선수들 뿐만이 아니다.
거칠기로 유명한 리버풀의 서포터즈 그것도 치열한 라이벌전답게 경기장 안팎에서 양 팀의 서포터들은 잦은 무력 충돌을 일으킨다.
유혈사태도 심심찮게 일어나 머지사이드 더비가 벌어지는 날이면 경기장주변에는 평소보다 훨씬 많은 경찰이 배치된다고 한다.
난투극에 가까운 두팀의 대결, 우위는 근소하게 리버풀
머지사이드 더비는 선수들과 팬들의 투지가 다른 경기에 비해 지나치게 과다한 덕분에 그동안 치뤄졌던 더비매치에선 양팀의 충돌이 잦았다. 99-00시즌 리버풀의 홈구장 앤필드에서 벌어진 더비에서는 리버풀 수문장 베스트벨트와 에버튼 프랜시스 제퍼스가 난투극을 벌여
두 선수 모두 퇴장당했다. 이 경기에서는 19살의 신예였던 스티븐 제라드도 거친 태클로 레드카드를 받고 쓸쓸히 퇴장을 당했다.
04-05시즌 앤필드에서 펼쳐진 리그경기에선 제라드와 루이스가르시아의 득점에 힘입은 리버풀이 2대1로 에버튼에게 승리했으나,
밀란 바로스가 퇴장당하고 하만, 루이스 가르시아, 모리엔테스등 리버풀의 주축 선수들이 부상으로 쓰러졌고
결과적으로 리버풀은 그해 리그 운영하는데 있어서 이날의 경기로 인해큰 타격을 입었다.
05-06시즌에서도 치열한 경기는 계속 되었다. 이날 리버풀의 주장 제라드가 18분만에 퇴장을 당했으나 10명의 리버풀이
후반 중반까지 2-0으로 경기를 리드 했고 애버튼의 팀 카힐이 만회골을 성공시킨 이후 교체해 들어온 반데메이데가 1분만에 퇴장을 당했다.
이후 10명대10명의 상황에서 9장의 옐로카드가가 난무한 끝에 해리 키웰의 추가골로 리버풀이 승리를 하였다.
03-04시즌 이후 치뤄진 양팀 대결에서는 리버풀이 8전4승2무2패로 근소하게 앞서있다.
에버튼은 86-87시즌 리그 우승을 따내며 챔피언스리그에 진출하게 되었다.
악연은 경기장뿐만이 아닌 밖에서도 계속되어진다.
리버풀과 에버튼은 경기장에서 맞붙으며 라이벌관계를 이어온 것만은 아니다.
그러나 에버튼의 꿈은 리버풀에 의해 무산되었다. 85년 벨기에 브뤼셀에 위치한 헤이젤경기장에서 펼쳐진 유러피언 컵 결승전에서 훌리건들의 난동으로 38명의 이탈리아인과 1명의 벨기에인이 사망하고 500여명에 가까운 관중들이 부상을 당하는 끔찍한 사고가 일어났다.
'헤이젤참사' 로 인해 유럽축구연맹(UEFA)은 리버풀에게 7년간, 잉글랜드의 모든 구단들에 5년간 챔피언스리그 출전 금지의 중징계를 내렸다.
결국 이 사건과 무관한 에버튼이 유럽대항전의 꿈을 접는 징계의 피해자가 되었다.
경기장 안이든 밖이든 두 팀의 악연은 이렇게 계속 되어 졌다.
이처럼 머지사이드 더비는 프리미어리그의 더비매치중에서도 빅매치로 꼽히며 격렬하기로 유명하다.
7. 북런던 더비 [토트넘 vs 아스날]
수많은 더비 매치 중에서도 가장 역사긴 더비매치.
두 팀이 대립이 심하게 된 이유는 1919년 1부 리그가 20 클럽으로 확장되어 최하위였던 토트넘은1부 잔류가 가능했지만,
FA의 결정으로 토트넘은 2부로 강등, 반면 2부리구 5위였던 아스날은 1부리그로 승격되었다.
이런 납득하기 어려운 강등과 승격으로 인해 아스날 경영진의 로비가 아닐까 하는 추측이 많았다.
다음 시즌 토트넘은 2부리그에서 쉽게 우승하고 1부리그로 승격해서 아스날과 첫 대전에서 승리를 거두며 설욕했다.
이로인해 이 두팀의 뿌리깊은 라이벌의식이 생겨났다.
굴러온 돌, 박힌 돌을 빼다.
북 런던 더비는 명칭에서 유추할 수 있듯이 지역적 경쟁의 성격을 가진 더비이다. 옛 속담에 “굴러들어온 돌이 박힌 돌 뺀다”라는 말이 있다. 새로 들어온 사람이나 단체가 기존에 있던 것들을 없앤다는 뜻이다. 아스날과 토트넘의 관계를 잘 표현하는 속담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양팀의 시소 경쟁은 계속된다.
2차 세계대전 이후에도 아스날의 승승장구는 계속된다.
2번의 리그우승과 함께 한차례의 우승컵을 들어올리며 숙적 토트넘 팬들의 시기를 사고 있었다.
하향곡선을 그릴 때가 있다면 상향곡선을 그릴 때도 있다고나 할까 토트넘도 아스날의 고공행진을 지켜볼 수만은 없었다.
1960년대 토트넘은 아서 로(Arthur Rowe)라는 명장의 부임으로 새로운 팀으로 다시 태어나게 된다.
부임 첫해 짧은 패스와 선수들의 빠른 움직임을 강조하는 푸쉬-앤-런(Push&Run)이라는 획기적인 전술을 들고나와 부활의 기지개를 폈다.
흐름을 탄 토트넘은 그야말로 무적이었다.
리그에선 무패행진을 계속 해나갔고 1960년엔 리그우승과 FA컵 우승을 동시에 이루며 잉글랜드 구단 중 처음으로
더블크라운의 대기록을 세웠고 1962년 유러피언컵 결승 진출과 FA컵 2회 우승, 1963년엔 스페인 AT마드리드를 꺾으며 유러피언컵 우승을 거머쥐었다. 그동안 아스날에 내어 주었던 북런던의 맹주 자리를 되찾은 토트넘팬들에는 잊을 수 없는 시기였다.
70년대 들어 아스날은 다시금 성적으로서 그들의 명성을 입증했다.
1971년 리버풀을 꺾으며 FA컵 우승을 일구었고 동시에 토트넘의 홈 구장 화이트 하트 레인에서 리그우승을 확정 지으며
토튼햄의 자랑이었던 더블크라운의 영광을 라이벌의 홈 구장에서 이뤄냈다.
라이벌의 이 같은 기쁨을 토트넘 팬들은 어찌 반길 수가 있겠는가 이후 한동안 토튼햄은 아스날의 눈부신 독주를 눈물을 머금고 지켜봐야만 했다.
라이벌 팀으로의 이적행위는 곧 배신행위
서로 중흥기를 지켜보며 의식하지 않으려 해도 의식할 수밖에 없었던 두 팀의 라이벌 관계는 서로의 성적에서만 찾아 볼 수있는 것이 아니다.
서로의 성적에 대한 시기에서 오는 라이벌 의식 외에도 서로의 악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사건들이 여럿 있었다.
1977년 부진을 면치 못하던 토트넘은 결국 2부 리그로 강등이 되었다.
유러피언컵 우승, FA컵 우승, 리그우승 등 토트넘에게 잊지 못할 영광을 안겨주었던 골키퍼 제닝스가 팀이 2부 리그로 강등되자 팀을 떠났다.
팀을 떠난 것이 두 팀의 라이벌관계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에 대한 의문이 있을 것이다.
문제는 팻 제닝스가 새로이 둥지를 틀었던 팀이 문제의 원인이다.
제닝스가 토트넘을 등지고 향한 팀이 바로 아스날이었다. 토트넘이 2부 리그로 강등된 충격에서 미처 빠져나오지도 못한 토트넘 팬들은
제닝스의 이적으로 인해 또 한 번 배신감과 박탈감에 빠져야만 했다.
결국 팻제닝스는 토튼햄과의 원정에 신변보호를 위해 출전을 포기하기까지했다.
20년 후 토튼햄팬들에게 영원히 기억될 사건이 또 발생했다. 10여 년 가까이 토튼햄에 몸담았던 숄켐벨의 이적이 바로 그것이다.
당시 FA(자유계약선수)로 풀리던 켐벨은 바르셀로나, 인터밀란, 리버풀, 바이에른뮌헨등 유럽의 명문구단에서 영입 오퍼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숄 켐벨은 결국 아스날의 붉은저지를 선택했고 토튼햄의 팬들은 켐벨에 대한 증오심에 아스날에 대한 감정마저 악화가 되었다.
팻 제닝스나 숄 켐벨 외에도 로한리케츠, 케빈스티드, 데이빗젠킨스등 여러 명의 선수가 서로의 유니폼을 바꿔 입었고
이때마다 팬들은 이적행위를 범한(?) 선수들에게 엄청난 야유를 퍼붓기 시작했다.
6. 밀란 더비 [인터밀란 vs AC밀란]
밀란더비. 혹은 밀라노 더비.
이 두 클럽은 같은 밀라노를 연고로 한다. 예전에는 AC밀란이 혼자 밀라노를 연고로 하고 있었다.
근데 영국의 도움을 받아 만들어 졌기 때문에 많은 이탈리아 인들이 자존심때문에 인터밀란이라는 서민들을 위한 클럽을 세우게 된다.
특징은 홈구장(산시로 스타디움) 도 같은 곳을 쓰고 스타 선수들도 즐비하다.
최근 리그 성적으로는 인터밀란이 압도적이지만, 챔피언스리그 성적으로는 밀란이 압도한다.
잉글랜드의 챔스 DNA가 리버풀이라면 이탈리아에는 AC밀란이 있고. 산시에로에서 펼쳐지는 두 밀라노 형제들의 더비.
밀라노의 전통파(보수파)들의 영향을 받은 밀란과 개혁파와 영국 축구의 영향을 받은 인테르 간의 더비는
전 세계 축구팬들은 다 아는 유명한 더비이다. 두 팀은 "남의 불행이 나의 행복이다." 라는 말이 어울 릴 정도로 서로 조롱하며 비웃는 라이벌.
이탈리아 세리에A 리그에서 인테르밀란과 AC밀란의 ‘밀란 더비’는 남북으로 분할되는 밀라노의 경제적·계급적 불평의 역사를 갖고 있으며, 스페인 프리메라리그의 FC바로셀로나와 레알 마드리드의 ‘엘클라시코 더비’는 지역 감정과 종족 갈등의 연장이다.
스코틀랜드의 셀틱과 글래스고의 목숨을 건 경기는 신·구교도 간의 대결로 대변된다.
프리미어리그의 전통의 라이벌인 리버풀과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대결에서는 지역 노동자들간의 오랜 경쟁의식과 파업의 연대감을 느낄 수있다. 인구 40만여 명에 불과한 맨체스터시에 7만 석이 넘는 좌석은 항상 매진되고,‘밀란 더비’와
FC바로셀로나와 레알 마드리드 간 ‘엘클라시코 더비’에서 감동적인 응원 열기가 식지 않는 것은 바로 지역에 뿌리를 둔 일상의 소중함 때문이다. 유럽인들의 축구문화는 월드컵을 특별한 이벤트로 여기지 않는다. 오히려 이들에게는 유럽 챔피언스리그가 더 친근하고 절박하다.
국가별 프로리그나 유럽 챔피언스리그는 늘 지속되어 일상의 축제로 정착되었기 때문이다.
두 팀의 경기가 있는 날이면 산시로의 스타디움은 온통 붉은색과 하늘색으로 양분되어 물들여 진다.
게다가 양팀 서포터들이 자리잡고 있는 좌석은 거대한 통천과 게이트기, 깃발로 뒤덮인다.
한 구역을 뒤덮을 만한 엄청난 크기의 통천과 6만의 팬들이 뿜어대는 엄청난 함성.
두 팀 선수들은 그런 자리에 서 있는 것 만으로도 엄청난 기세에 눌리게 된다.
각각의 탄생배경과 구단이 걸어온 길은 다르지만 유벤투스와 더불어 이탈리아 축구문화의 꽃을 피웠다.
산 시로/ 쥬세페 메아차, 열정적인 서포터들
앞에서 언급했듯이 AC밀란과 인터밀란은 홈 구장을 함께 쓰고 있다.
이탈리아가 자랑하는 세계적인 축구장 산 시로/쥬세페 메아차가 바로 그것이다.
1926년 AC밀란의 구단주였던 피에로 피렐리가 건축하여 밀라노시에 기증한 이 경기장은
밀라노의 작은 교회에서 평생을 헌신했던 성인의 이름을 따 “산 시로” 라 이름이 붙여지게 되었다.
2차 세계대전 전까지 인터밀란은 아레나 나폴레오니카(Arena Napoleonica)을 사용하였으나,
전쟁이 끝난 후부터 AC밀란과 함께 한 지붕 동거를 시작하게 되었다.
인터밀란이 쥬세페 메아차라 부르고 있는 이유는 인터밀란의 전설적인 축구영웅 쥬세페 메아차를 기리기 위해 부르고 있으며
AC밀란은 산시로라는 이름으로 인터밀란은 쥬세페 메아차라는 이름으로 각각의 홈경기를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이 같은 열기에도 밀란더비는 폭력이 거의 없는 더비이기도 하다.
물론 사소한 몸싸움이나 충돌은 벌어지지만 이는 흔히 볼 수 있는 경우이다.
폭력이 없기 때문인지, 응원만큼은 세계 최고의 응원을 펼치지만, 그래서 부작용도 많다.
베컴의 굴욕인가..하지만 이날 베컴은 문타리의 지나친 돌발행동에도 잘 참았다.
이번에는 맨체스터 더비, 이스탄불 더비, 레즈더비, 마드리드 더비와..
가장 폭력적이고, 가장 전쟁같은 더비인 안달루시안 더비에 대해 알아보겠다.
5. 맨체스터 더비 [맨체스터 시티 vs 맨체스터 Utd.]
잉글랜드의 더비 중에서 가장 유명한 더비.
중상류층이 만든 축구클럽인 맨시, 철도 노동자들이 만든 축구클럽 맨유.
리그전으로의 첫대전은1894-95 시즌으로 맨유가 앞섰다.
제2차 대전까지는 맨체스터의 축구팬은 맨유와 맨시 모두를 응원하고 있는 상황이였고,
전쟁으로 인해 맨유의 홈구장이 소실된때엔 맨유가 맨시의 홈구장을 빌려쓰기도 했다.
하지만 각각의 고정적인 써포터가 생기기시작한 후인 1970연대에 대항심이 타오르게 된다.
1970 년12월의 경기에서 맨유의 죠지베스트가 맨시의 디펜더의 다리를 심하게 뭉개버리는
일이 최대의 계기로 여겨진다.
그 이후, 맨체스터더비는 항상 난투 직전이 황량한 분위기를 내게된다.
사실 맨유하고 맨시가 처음부터 원수지간이 아니었다고 한다..
맨유의 홈구장인 올드트래포드가 2차 세계대전중 붕괴되었을때 맨유는, 맨시 홈구장에서 경기를 했었다.
그래서 팬들은 주말에 매일 축구볼수 있다고 기뻐했는데..
맨유의 퍼거슨경 이랑 명장이 부임하면서 상승세 타고 20년 이상 감독이 안바뀐 반면에,
맨시는 중위권에 맴돌면서 허우적거리고 감독의 무덤이라 불릴정도였다.
그러다 이번에 사우디 오일리치 형님들이 나서서 맨시 인수해갔고 현재는 오일머니로 치장한 초호화 구단으로 자리잡았다.
덕분에, 호비뉴, 아일랜드, 벨라미, 콜로투레, 숀라이트 필립스...이번에 맨유에서 이적한 테베즈까지..
이번 맨유에서 맨시로 이적한 테베즈 덕분에 올시즌 가장 기대되는 더비중의 하나가 되었다.
베르바도프와 루니등으로 많은 출전기회를 갖지 못하자,
더 많은 출전 기회를 찾아 같은 지역의 라이벌팀으로 떠난 카를로스 테베즈...
하늘색 유니폼을 입은 테베즈.. 친정팀과의 경기를 위해 선발출전 하다.
입고있는 유니폼은 달라도 여전한 절친이다...
4. 이스탄불 더비 [페네르바체 vs 갈라타사라이]
세계에는 유명한 더비매치가 있다.
그중에도 터키에 존재하는 이스탄불더비는 열정적으로 유명하다.
이스탄불 더비는 갈라타사라이와 페네르바체가 이스탄불을 연고로 벌이는 더비를 가리킨다.
그러나 이 2개의 클럽은 터키에서 가장 많은 서포터를 지닌 클럽이기도 하다.
그 수는 터키 전체 국민 7000만명의 약 7할에 해당하는 5000만명 이라고도 일컬어지고 있다.
그 때문에 이스탄불 더비는 로컬 더비이기고 하면서 나라 전체를 뒤흔드는 내셔널 더비이기도 한 것이다.
터키 축구팬에게 더비는 그야말로 축제다.
매년 반드시 벌어지는 희생제나 사탕제라는 종교행사와 동급이라고도 할 수 있다.
터키 축구계가 가장 들끓어 오르는 것도 이 더비가 벌어지는 시기....
작년 이스탄불에서 챔피언스리그 결승과 이스탄불 더비가 중첩된 때에는
이스탄불의 거리는 챔피언스리그를 넘어서 더비 일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제일 앞에 든 말은 더비에 대해서 터키의 미디어가 보도할 때 반드시 사용하는 문구이다.
터키에서는 대전하는 클럽의 역사와 팬의 종교 차이, 계급차로 판단해
이스탄불 더비는 글라스고 더비, 부에노스아이레스 더비와 나란히 “세계 3대 더비의 하나”라고 보도하고 있다.
양 클럽 서포터는 ‘더비는 경기가 아니라 전쟁이다.’ 라며 매 경기마다 반드시 기합을 넣는다.
‘전쟁이다’라는 따위로 말하니까 터키에서는 소동이나 난투가 끊이지 않는 것이다’라는
비판적 의견도 있지만 현재의 이스탄불 더비는 경기라고 하기 보다는 그야말로 전쟁이다.
실제로 양 서포터가 충돌해 피를 보지 않는 경우는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스탄불 더비에는 글라스고와 같은 종교적인 배경도 부에노스아이레스와 같은 계급 차에 의한 배경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곳에 있는 것은 양 클럽이 약 100년이라는 긴 역사 속에서 쌓아올린 라이벌 의식뿐이다.
갈라타사라이는 1905년, 페네르바체는 1907년에 창립된 역사 깊은 클럽이다.
[갈라타사라이, 지난 시즌 터키컵 우승모습]
갈라타사라이는 지금도 터키의 엘리트 학교로 유명한 갈라타사라이 고등학교가 만든 스포츠클럽이다.
당시 이스탄불에 주재하고 있던 영국인이 만든 스포츠클럽에 대항하기 위해 갈라타사라이 고등학교의 학생을 모아 만든 클럽이었다.
이에 대해 페네르바체도 갈라타사라이와 마찬가지로 영국인 클럽에 대항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그러나 만든 것은 시민이었고 갈라타사라이에 비하면 일반에 넓게 개방된 클럽이었다.
양 팀은 97년전인 1909년 1월 17일, 처음 경기를 벌여 2-0으로 갈라타사라이가 승리했다.
당초에는 “엘리트 학교인 갈라타사라이”에 대해 “시민의 페네르바흐체”라는 계급차이가 조금은 있었지만,
현재와 같은 격렬한 라이벌 관계는 없었다. 오히려 좋은 경쟁상대라는 느낌이었고 양 팀의 관계는 양호했다.
[페네르바체, 지난시즌 리그 우승모습]
라이벌 의식이 격렬해진 것은 최근에 이르러서였다고 한다.
현재도 뜨겁게 응원을 보내는 나이든 베테랑 축구팬에게 당시의 일을 묻자,
“그 무렵은 적 팀의 서포터라도 옆자리에 같이 앉아서 각각의 클럽을 응원하고 있었죠. 물론 지금과 큰 차이가 없을 정도로 열광이었습니다.
라이벌에게는 지고 싶지 않기 때문에 필사적으로 응원했습니다. 그렇지만 ‘전쟁’이라는 식으로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정말 훌륭한 분위기가 스타디움에는 있었습니다.”며 지난날을 그리운 듯 회상했다.
터키 슈퍼리그가 출범된 1959년 이후의 리그우승 회수가 나타내듯이 갈라타사라이가 15회, 페네르바흐체가 16회으로 양 클럽이
터키 축구의 맹주 자리를 다투고 있다..
그리고 같은 도시를 거점으로 하고 있는 것에서 오는 강열한 라이벌 의식이 관계를 변화시킨 큰 요인임은 틀림없다.
더비에서의 대승을 기념해 곧바로 여러 물건이 상품화되어 판매된다.
페네르바체는 2002년에 6-0으로 승리한 기념 머플러를,
갈라타사라이는 작년 5-1로 승리한 기념 T셔츠를 판매했다.
서포터에게는 상대를 도발하는 딱 맞는 도구이고 상대 서포터는 그 물건을 볼 때마다 굴욕적인 대패를 떠올리는 것이다.
97년이나 되는 역사 속에서 터키 축구를 둘러싼 환경은 크게 변해 ‘더비는 전쟁이다.’라고까지 일컬어지게 되었다.
그리고 당연히 클럽 자체의 사정도 변했다.
갈라타사라이는 직원을 비롯해 클럽 상층부만은 엘리트 학교의 피를 계승하고 있지만 티켓 가격도 싸고 서포터에 대해서도 열려있는 클럽이다.
반대로 페네르바체는 서포터 카드를 만들고 이 서포터 카드를 구입한 사람에게
우선적으로 티켓을 판매하고 있다. 일반 판매하는 티켓의 가격도 비싸다.
스타디움에 관해서도 터키에서 유일한 근대적 스타디움을 지닌 페네르바흐체에 대해
갈라타사라이는 노후화가 진행된 스타디움을 사용하고 있다.
그렇지만 아쉽게도 이 경기에서도 언제나처럼 경기 전에는 양 클럽에 의한 설전이 펼쳐졌다.
서포터도 그에 호응이라도 한 듯이 텐션이 고양되어 있었기 때문에 경비에 4400명의 경관이 동원되었다.
정말로 전쟁이 일어나는 것이 아닐까라고 생각될 정도의 수였다.
경기 후에는 “왜 축구 경기에 4400명의 경관이 필요한 것인가? 이는 터키 축구의 치욕이다”라는 논쟁이 벌어졌다.
폭력은 이스탄불 더비의 문제점이며 ‘야만’이라는 것이 상징처럼 되어가는 터키 축구가 안고 있는 문제이기도 하다.
이런 폭력행위를 해결하지 않는 한, 이스탄불 더비가 세계의 축구팬이 인정하는 진정한“세계에서 가장 큰 더비”가 되는 일은 없을 것이다.
3. 레즈 더비 [리버풀 vs 맨체스터 Utd.]
장미전쟁(리즈와 맨유가 장미전쟁이라 불리지만 리즈가강등되면서 리버풀과의 경기를 장미전쟁이라고함.)이라고도 불리는 이 더비는 일단 같은 지역을 연고로 한 더비매치는 아니다.
강한 라이벌 의식과 역사적으로 치열해 주목을 받게 된 매치다.
사실 처음부터 리버풀과 맨유가 라이벌 관계였던 것은 아니였다.
라이벌 관계는 80년대부터 시작되었다.
그 전까지만 해도 서로 화기애애 하기만 했었는데..
이 둘이 맞붙을 때면,
리버풀은 1958년 맨유의 뮌헨참사를 들먹이며 조롱하고,
맨유는 1989년 리버풀의 힐스보로 참사를 들먹이며 조롱한다.
맨체스터의 상징 붉은 악마를 리버풀의 리버버드가 숨통을 끊는 그림.
제라드의 이런 세레모니를 본적이 있는가.. 레즈더비에서 골을 성공시킨 후..
맨유의 홈(올드 트래포드)에서 골을 성공시킨후 맨유의 깃발을 뽑아버린 제라드.
2. 마드리드 더비 [레알 마드리드 vs AT마드리드]
10년전까지만 해도 레알 마드리드를 대적할 만한 강팀은 바르셀로나가 아니라, 아틀레티코 마드리드(AT마드리드)였다.
프리메라 리가 우승 경험도 9번이나 있고, 정확히 10년 전에는 프리메라 리가와 국왕컵 대회 모두를 우승하기도 했던 저력이 있는 팀이다.
현 프리미어 리그 최고의 플레이어 페라난도 토레스(리버풀), 케즈만, 21세이하 최고 플레이어 아게로등이 있다.
거기에, 현 레알 마드리드의 주장을 맡고 있는 라울도 AT마드리드 유스 출신이다.
원래, AT마드리드는 아슬레틱 빌바오의 마드리드 버전이라고 할 정도로 빌바오에서 갈라져 나온 클럽이었다.
처음에는 유니폼도 빌바오와 동일한 색상이었다.
빌바오도 원랜는 상당한 강팀이었기 때문에 AT마드리드도 강팀의 전술과 운영 방법 모두를 전수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95-96시즌 더블 크라운을 끝으로, AT마드리드는 레알 마드리드에게 밀리기 시작했고,
급기야 2부리그로 강등되면서 어려운 나날들을 보내게 된다.
이제서야 제 위치로 차츰 돌아오고 있다.
전력차가 나면서도 치열하기로 유명한 마드리드 더비는 서포터들을 흥분시키기에는 충분하지만 더비 경기로서의 짜릿함은 상당부분 감소하였다.
현재도 AT마드리드는 아게로와 포를란을 앞세워 조직적이고 짜임새있는 플레이를 하고 있으며,
라이벌 전 답게 레알마드리드 경기에서는 쉽게 경기를 내어 주거나 하진 않는다.
그리고 우리나라에서 그렇게 유명하지 않은 더비 일수도 있지만...
'레알' 이란것은 왕가에서 직접 선사해주는 정말 명예스러운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왕가의 피 가 흐르는(?) 레알마드리드와 그에 라이벌인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의 경기는 언제나 재미있다.
1. 안달루시안 더비 [세비야 vs 레알 베티스]
한 때 세비야의 소속이었던 밥티스타는 안달루시안 더비를 "전쟁과 다름없다." 라고 표현 했다.
그 열기는 경기장으로 가는 길에서부터 시작되어 경기가 끝날 때까지 식지 않는다.
저번에는 양팀의 경기가 끝난 후 관중들의 극성 때문에 홈경기 금지 징계가 내려진 일도 있었다.
세비야와 베티스의 더비 매치는 스페인 반 폭력단체에 의해 선정된 "폭력사태가 일어날 확률이 가장 높은 경기" 이기도 하다.
이탈리아 팬들에 비해 '얌전한' 스페인 팬들이지만 안달루시안 더비 때 만큼은 거세어서 '스페니쉬 훌리건' 이라고도 종종 표현 된다.
이 안달루시안 더비때문에 세계 최고수준의 축구를 구경하고 싶다면 엘클라시코 더비를 보면 되고,
세계 최고로 열정적, 폭력적, 라틴적인 더비를 보고 싶다면 안달루시아 더비를 보라는 말까지 생기게 되었다.
그럼 얼마나 열정적이고 폭력적이며, 라틴적인 더비인지 들여다 보자.
흔히 스페인은 투우, 플라멩고, 정열로 표현된다고 말한다. 스페인 남부 안달루시아 지방에서는 이 세 가지를 가장 쉽게 몸으로 느낄 수 있다.
안달루시아는 어쩌면 가장 스페인다우면서도 스페인답지 않은 지방일지도 모른다.
투우, 플라멩고, 정열 세 가지가 생생히 살아 숨쉬는 동시에 이슬람 문화의 강렬한 흔적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안달루시아 문화의 중심지 세비야는 '축구의 도시'로 더욱 잘 알려져 있다.
이 도시를 연고로 하고 있는 레알 베티스와 세비야 FC는 스페인의 대표적인 라이벌 클럽들이다.
레알 마드리드와 바르셀로나의 엘클라시코 더비만큼 대대적인 관심을 불러 모으는 것은 아니지만,
'격렬함'만을 놓고 보자면 베티스와 세비야의 대결이야말로 스페인 최고의 더비라 칭할만 하다.
보통 '세비야 더비'라고 말하지만, 사실상 스페인 남부 지방의 맹주 자리를 놓고 다툰다는 점에서 '안달루시아 더비'의 성격이 짙다.
레알 베티스는 어쩌면 안달루시아 지방의 색깔을 가장 잘 표현하는 클럽일지도 모른다.
베티스의 축구는 매우 공격적이다.
마치 투우처럼 상대를 향해 돌진하는 베티스의 축구스타일은 프리메라 리가 최고 수준의 파괴력을 자랑한다.
안달루시아 더비의 백미는 어쩌면 그라운드 위에서의 경기가 아닌, '장외전쟁'일지도 모른다.
베티스와 세비야의 더비 매치가 스페인 반 폭력단체에 의해 선정된 '폭력사태가 일어날 확률이 가장 높은 경기'라는 사실 또한 매우 흥미롭다. (엘클라시코 더비 이상의 격렬함이 살아 숨쉬고 있다는 이야기다.) 두 팀의 써포터들은 '스패니쉬 훌리건'이나 다름이 없다.
먼저 시비를 건 쪽(?)은 베티스였다.
루이스 데 로페라 스타디움에서 펼쳐진 01/02 시즌 2차전에서 세비야 원정팬들을 향해 불을 지르는 난동을 부려 경기가 중단되는 사태가 발생했던 것이다. 이에 앙심을 품은 세비야 팬들은 02/03 시즌 더비 1차전 표를 예매하던 베티스의 팬들을 단체로 기습, 집단 폭력을 행사하며 대대적인 복수극을 펼쳤다. 그 결과 베티스는 2주 간 홈경기 금지 및 3000 유로의 벌금을, 세비야는 1달 간 홈경기 금지라는 중징계의 철퇴를 맞아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 팀 팬들의 난동은 멈추지 않았다. 02/03 시즌 더비 1차전 도중 세비야 홈팬이 갑자기 그라운드로 난입, 베티스의 골키퍼 안토니오 프라츠를 습격하는 심각한 사건이 발생하고 만 것이다. 이 사건으로 인해 프라츠 골키퍼는 정신적 충격을 받았다고 고백, 안달루시아 더비의 열기가 올바르지 못한 방향으로 표출되고 있음을 그대로 대변했다. 베티스와 세비야는 결국 '제 2의 프라츠' 사건을 방지하기 위해 매경기 500명이 넘는 경찰 및 경호원들을 동원하는 번거로움을 감당하고 있기도 하다.
장외전쟁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사건을 일으킨 장본인은 다름 아닌 베티스의 회장 로페라. 02/03 시즌 2차전에 이르러 조금은 얌전한 분위기 속에서 더비 매치가 치러졌음을 감안, 로페라 회장은 03/04 시즌 1차전을 앞 두고 베티스 선수들에게 '전의'를 불어넣기 위해 무심코 다음과 같은 한 마디를 던졌다. 베티스의 선수들은 세비야 선수들과 인사를 나누어서도 안되며, 친분을 가져도 안되고, 어딘가를 함께 놀러가도 안된다는 것이었다.
스페인 언론 및 양 팀 선수들이 크게 반발했음은 당연했다. 폭력사태를 방지하기 위해 그 누구보다도 힘을 쏟아야 할 로페라 회장이 오히려 세비야 팬들을 크게 자극하는 발언을 남겼으니 말이다. 베티스의 스트라이커 호르헤 토테는 폭력사태가 일어날 바에는 차라리 팀이 패배하는 것이 낫다고 말했고, 호아킨과 데니우손, 레예스 등 또한 같은 입장을 견지했다.
세비야의 브라질 출신 용병 줄리오 바프티스타는 베티스와의 라이벌 전을 그 어디서도 접할 수 없었던 '엄청난 것'이라고까지 말한다. 스페인 진출 이후 첫 더비 매치를 준비하던 바프티스타는 베티스와의 경기가 한 달 가량이나 남았음에도 불구, 길거리를 지날 때마다 세비야의 열혈 팬들이 베티스를 꺾어 달라고 간곡하게 부탁하는 바람에 곤욕을 치렀던 기억이 있다고한다.
두 팀간의 라이벌 전은 과거와는 다르게 '창'과 '창'의 대결이 될 가능성이 높다. 세비야는 더 이상 수비 지향적인 축구에 의존하고 있지 않으며, 베티스 또한 올리베이라와 에두의 영입을 통해 창 끝을 더욱 날카롭게 다듬었기 때문이다. 두 팀의 올 시즌 행보와 함께 다시 한 번 불타오를 안달루시아 더비에 많은 관심이 모아진다.
07년도 안달루시안 더비이자 코파 8강전 경기중 경기에 지고있던 베티스 팬들이 던진 플라스틱 병에
당시 세비야의 코치인 후안데 라모스가 머리에 맞고 기절. 경기가 취소되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지금까지 세계의 더비에 대해 알아보았다.(이글에올라온 더비를 빼고도 도르트문트와 샬케의 레비어더비, 아약스와 페예노르트의 데 클라지커르 더비, 라치오와 로마의 로마더비 같은 치열한더비들이 있다.)
100년 이상의 역사를 자랑하는 빅리그에는 라이벌팀들이 존재하고 있고 이들은 리그 흥행에 중요한 열쇠로 자리매김해왔다.
라이벌전은 어떠한 이유에서든 선수와 팬들에게는 승패를 떠나 팀의 자존심과 결부시킬수 있을만큼의 가치를 가진 중요한 경기이다.
객관적인 전력만으로서 승자와 패자를 판단 할수 없을만큼 열정과 투지가 승패를 좌우하는 경기.
이처럼 그 어느 때 보다도 격렬하고 뜨거운 경기.
한경기에 패한다고 해서 탈락하는 토너먼트 대회가 아닌 단지 시즌 중간에 치뤄지는 라이벌간의 맞대결일 뿐이지만,
그 어떤 경기보다 중요한 경기.
그것이 바로 “더비매치”인 것이다.
펨코펌.
첫댓글 맨체스터더비랑 안달루시안더비가 들어가 있는게 에러 같은데.. 조금은 이 두 더비가 상대적으로 무게감이 떨어진다는 생각이 드네요...
그냥 글쓴이의 주관인듯한 느낌.. 전 마드리드 더비가 제일 거시기 하군요..
수페르 클라시코를 빼놓고 더비를 논할수 있나... 장미전쟁 표현도 잘못 쓰는걸 보니 전문성이 떨어지는 글인듯
리버풀이랑 맨유랑 사이는 80년대에도 안좋았던걸로 기억하는데... 리버풀이랑 맨체스터는 도시자체가 산업혁명 이후로 사이가 쭉 안좋던것 같은데...
삭제된 댓글 입니다.
22222222222로마더비가없다니....
장미전쟁(리즈와 맨유가 장미전쟁이라 불리지만 리즈가강등되면서 리버풀과의 경기를 장미전쟁이라고함.) ????
장미전쟁이 맨유 vs 리버풀이라고 언급되었던건 소수의 지라시였고 어느 누구도 맨유/리버풀을 장미전쟁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장미 전쟁은 리즈/맨유일뿐.
장미전쟁은 리즈vs맨유가 맞습니다. 맨유vs리버풀은 레즈더비가 맞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