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3년 원균정론이란 책이 발간됩니다. 1987년 사망한 이재범씨가 지은 책입니다. 1993년에 원균을 위한 변명이란 제목으로 다시 나옵니다. 이게 원균 맹장론의 시초로 23년 밖에 안됐습니다. 80년대부터 왜 갑자기 원균 명장론이 대두되었나 하면 '박정희 까기'입니다. 박정희가 이순신을 우상화 하는 과정에서 원균에게 모든 잘못을 뒤짚어 씌었다는 것이죠...
그 후 고정욱의 원균 그리고 원균이란 희대의 망상작을 편찬하는데 원균옹호론에서 주장하는 '충정공 원균'이 이때 탄생합니다. 제가 알기로 원균은 시호 받은적 없습니다. 민주화와 함께 박정희를 계속 까는 흐름속에서 원균 명장론은 집요하게 이어졌고 원균을 나름대로 열심히 한 용기있는 장수로 보는 시선이 생겨났습니다. 그걸 김탁환이 불멸의 이순신으로 상업적으로 성공하고 오늘날 원균을 무슨' 육지의 수호신' 이나 돌격형 맹장으로 보는 사람들이 생겨났습니다.
원균옹호론의 생명줄은 역사적 기록이 아닌 '박정희'에 대한 반발심리인 것입니다. 박정희가 이순신을 숭상한건 모두가 인정하는 사실이니까요. 근데 원균옹호론에서 주장하는 근거들을 보면 하나같이 부실합니다.
1.원균행장록
원균옹호론자들이 금과옥조 처럼 떠받드는 원균행장록, 그들이 주장하는 '멋진 원균'은 여기 다있습니다. 하지만 이 기록은 지어진 연도는 물론 누가 지었는지조차 확실치 않습니다. 막연히 원균 후손들 주도로 만들었겠지 추측할 뿐입니다. 그리고 일개 장수의 행장록을 그대로 믿는 사람은 없습니다. 행장록은 집안기록으로 선조들 미화시켜 뛰워주려고 편찬한 기록입니다.
이순신 행장록도 교차 검증때나 인용할뿐 심각하게 받아들이진 않습니다. 명랑해전때 뒤에서 구경하던 전라우수사 김억추도 행장록에는 칼을 휘둘러 왜선 수백척을 박살내는 화경의 고수입니다.(김억추 행장록은 택리지와 함께 명랑 철쇄설의 유일한 근거입니다.) 행장록의 말을 그대로 믿으면 최소한 천만명은 죽어야 합니다...쉽게 말해 믿을게 못됩니다. (난중일기는 개인기록이라 안 믿는다면서 원균행장록은 철썩같이 믿는 원균옹호론자들...)
2. 선조 수정실록
원균옹호론자들 사이에서 조선시대 원균 죽이기의 대표적 기록이라 매도받는 선조수정실록. 선조수정실록을 편찬하는 일으 맡은 대제학 이식이 이순신과 같은 덕수 이씨라 이순신을 미화했다는 주장인데...참 나, 수정실록에서 인용한건 조경남의 '난중잡록'이나 유성룡의 '징비록'같은 임진왜란 당시의 기록들 입니다.
수정실록에 원균 까는 내용이 많다면 그건 임진왜란 당시에 원균에 우호적인 세력이 별로 없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역사를 진지하게 공부하시는 분들 중에 수정실록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이순신 장군은 실록이나 다른 기록에서도 항상 훌룡합니다.
3. 경상우수영의 규모
경상우수영이 정말 1만명의 규모였다면 인구비례로 따졌을 때 전국의 수군은 10만명이었고, 아무리 좋게 봐줘도 수 : 육의 비율은 1:5니까 조선육군은 50만명이었을 것이다. 잘못된 주장 입니다. 경국대전, 동국여지승람, 세종시록지리지 등등 여러 기록들을 보면 조선초 전라,경상 수군을 창설할때는 규모가 같았으나 이후 해류변화, 왜구가 비번하게 침범하는 지역에 대한 방비, 일부 특정 해역의 중요도 변화등으로 인해 규모가 계속 바뀌었구요. 임진왜란중 경상우수영이 원균에 의해 무너지면서 경상우수영 소속 고을은 육군에 많이 돌려집니다.
5관 5포로 규모가 가장 작은 전라좌수영은 한때 엄청나게 불어났다가 이순신이 돌아온후 선조에 의해 가장 큰 고을인 순천부를 빼앗기면서 규모가 크게 줄어듭니다. 당시 경상우수영 전력은 판옥선 70여척에 수군1만, 100척으로 주장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조선 남해안은 수군이 육군보다 더 많습니다. 왜군이 많이 침입하니 당연한 결과입니다. 가장 규모가 큰게 경상우수영과 전라좌수영이고 전라좌수영, 경상좌수영, 충청수영은 절반 규모인데 이는 관할구역 변천사 때문입니다.
4. 준비할 시간이 부족했다.
원균이 부임한지 3개월 만에 전쟁이나 준비할 시간이 부족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들 주장대로라면 원균 이전 대체 몇명의 전임수사들이 부패해야 할까요? 전임수사들이 열심히 전쟁 대비했습니다. 왜군이 쳐들어 올거란거 조선조정에서도 다 알고 이었습니다. 경상감사 김수가 너무 전쟁준비를 열심히 해 백성들에게 저 전쟁광 때문에 농사 못 짓겠다고 욕을 얻어 먹습니다.
그 김수가 경상우수영 소속 진, 포 다 체크해서 OK했습니다. 초창기 왜군이 짓밟은 경상좌수영도 군사를 소집했으니 원균이 싸울 마음만 먹었다면 얼마든지 싸울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처음 왔던 선봉함대는 군함이 아니라 전부 수송선이므로 싸우면 학살할 수 있습니다. 안싸우고 도망간 원균이 바보입니다.
5. 이순신을 불렀잖아?
조정의 허락없이 없으면 수사는 관할구역에서만 함대를 움직일수 있습니다. 조정의 명 없이 관할구역 밖으로 움직였다간 그대로 역적죄로 간주될 소지가 큽니다. 조선은 공무원 사회입니다. 일본 다이묘 들과는 틀립니다. 그리고 전라좌수영 함대를 불러달라고 조정에 요청한건 경상감사 김수입니다. 이 주장은 선조가 원균을 선무1등공신 책봉하면서 억지부린 겁니다.
6. 모든건 박정희 때문이야!
이런 사람이 제일 많습니다. 아, 제발...원균은 이미 조선시대부터 죽일 놈이었고 이순신 장군은 이미 그 당시부터 영웅이었습니다. 조선선비들이 남긴 그 많은 이순신을 기리는 시는 다 뭐고 이순신 사후 200년지나 해마다 이순신 장군기일이면 백성들이 검은옷을 입고 이순신장군을 기린다는 실록기록은 뭡니까? 이순신은 당대에 일반백성들에 의해 성웅으로 인정받았습니다. 그리고 남해안에 발에 채이는게 이순신 장군 관련 유적인데 그거 전부 일반 서민들이 돈모아 정성껏 세운 것들입니다.
이순신이 운구행렬에 수많은 백성들이 따라와 우느라 길아 막혔다고 합니다. 이순신과 백성들과의 엄청난 교감이 그정도입니다.
그 전과도 그렇고 백성들과의 교감도 그렇고 이순신 장군은 현대에 와서 과소평가된 경우입니다.
7. 어쨎든 싸우다 죽었잖아?
칠천량 해전의 그 황당하다 못해 사람 미치게 하는 전개과정은 차치하고 서라도 당시 기록들을 보면 원균이 죽었다는 말은 하나도 없습니다. 선전관 김식의 보고서에도 징비록에도 또한 7월 18일 도원수 권율의 군관 최영길이 원균을 만나 대화했다는 내용이 실록에 실려있습니다. 그리고 칠천량해전의 진실을 알고 분노한 선조가 수군 장수들을 처벌하려 하니 조정에서 원균부터 잡아오자고 하니 선조가 말을 돌립니다. 하늘이 수군을 패하게 했다니 뭐니 하며...원균의 사망이 공식하된건 4년 후입니다.
아래는 친철량 해전직후 선전관 김식의 보고인데
선조30년 7월 22일 / 선전관 김식이 한산의 사정을 탐지하고 돌아와서 보고하다
선전관 김식(金軾)이 한산(閑山)의 사정을 탐지하고 돌아와서 입계하였다. “15일 밤 2경에 왜선 5∼6척이 불의에 내습하여 불을 질러 우리 나라 전선 4척이 전소 침몰되자 우리 나라 제장들이 창졸간에 병선을 동원하여 어렵게 진을 쳤는데 닭이 울 무렵에는 헤일 수 없이 수많은 왜선이 몰려 와서 서너 겹으로 에워싸고 형도(刑島) 등 여러 섬에도 끝없이 가득 깔렸습니다. 우리의 주사(舟師)는 한편으로 싸우면서 한편으로 후퇴하였으나 도저히 대적할 수 없어 할 수 없이 고성 지역 추원포(秋原浦)로 후퇴하여 주둔하였는데, 적세가 하늘을 찌를 듯하여 마침내 우리 나라 전선은 모두 불에 타서 침몰되었고 제장과 군졸들도 불에 타거나 물에 빠져 모두 죽었습니다. 신은 통제사 원균(元均) 및 순천 부사 우치적(禹致績)과 간신히 탈출하여 상륙했는데, 원균은 늙어서 행보하지 못하여 맨몸으로 칼을 잡고 소나무 밑에 앉아 있었습니다. 신이 달아나면서 일면 돌아보니 왜노 6∼7명이 이미 칼을 휘두르며 원균에게 달려들었는데 그 뒤로 원균의 생사를 자세히 알 수 없었습니다. 경상 우수사 배설(裴楔)과 옥포(玉浦)·안골(安骨)의 만호(萬戶) 등은 간신히 목숨만 보전하였고, 많은 배들은 불에 타서 불꽃이 하늘을 덮었으며, 무수한 왜선들이 한산도로 향하였습니다.”
【원전】 23 집 267 면 【분류】 *군사(軍事) / *외교-왜(倭)
어디에도 죽었다는 얘기는 없습니다.
아래는 도원수 권율휘하의 군관 최영길이 보고한 내용입니다.
7월 21일에 성첩(成貼)한 도원수 권율의 서장에 아뢰기를, “신의 군관인 최영길(崔永吉)이 한산도에서 지금에야 비로소 나왔는데 그가 말하기를 ‘원균(元均)이 사지를 벗어나 진주로 향하면서 말하기를, 「사량(蛇梁)에 도착한 대선(大船) 18척과 전라선(全羅船) 20척은 본도에 산재해 있고, 한산에 머물러 있던 군민(軍民)·남녀·군기(軍器)와 여러 곳에서 모여든 잡선(雜船) 등을 남김없이 창선도(昌善島)에 집합시켜 놓았으며, 군량 1만여 석은 일시에 운반하지 못하여 덜어내어 불태웠고, 격군(格軍)은 도망하다 패배한 배는 모두 육지 가까운 곳에 정박시켰으므로 사망자는 많지 않았다.」고 하였다.’ 하였습니다. 최영길을 곧이어 올려보내겠습니다. 이순신(李舜臣)에게 흩어져 도망한 배를 수습하도록 사량으로 들여보내소서.” 하였는데, 비변사에 계하(啓下)하였다.
【원전】 23 집 269 면 【분류】 *군사(軍事) / *외교-왜(倭)
원균을 만났답니다. 그것도 아주 상세히 현 수군 상황을 보고하네요? 하지만 이후 원균은 나타나지 않습니다.
첫댓글 도데체 이런걸 찾아내는 사람들은 ㅎㄷㄷㄷ 진정 능력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