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15일 희망의 근거 당시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구세주 메시아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분이 지닌 넘치는 카리스마는 인정했지만, 그것이 하느님에게서 온 게 아니라 오히려 그 당시 로마 제국에게 지배를 당하고 있는 나라를 위험하게 만들 거라고 여겼다. 온 나라가 멸망하는 거보다 한 사람, 그분이 희생되게 하는 더 낫다고 했다. 그래서 결국 그들은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정했다.(요한 11,50.53)
지금 그들의 생각과 결정을 보면 어처구니가 없지만, 그 당시 그 무리에 속해 있었다면 나는 그들에게 동조하지 않았을 거라고, 예수님을 변호했던 니코데모나(요한 7,51) 예수님을 위해서 자기 무덤을 내어놓은 거로 보이는 아리마태아 사람 요셉(요한 9,38)처럼 행동했을 거라고 말할 자신이 없다. 예수님을 죽일 결정을 한 사람들은 악당들이 아니었다. 나라와 백성을 위해서 그런 결정을 했으니 말이다. 그 당시 예루살렘 성전은 오늘날 명동 성당이 아니라 헌법과 같은 존재였다. 그러니 그걸 지키겠다는 결정은 하느님의 뜻이라고 여길만했다. 하지만 예수님이 아니라 다른 이유로 성전은 결국 철저하게 파괴됐다.
사람은 좀처럼 변하지 않는다. 뼛속까지 죄인이라는 말은 본성이 악하다는 뜻이 아니라 죄로 기울어지는 경향이 있다는 뜻이다. 특별한 죄 한두 가지에 더 쉽게 걸려 넘어지고 부지불식에 그 죄를 범하게 된다. 그것이 잘못이고 죄인 줄 아주 잘 아는데도 고쳐지지 않으니 내 몸과 마음은 그 죄가 지배하고 있는 게 분명하다. 그 죄의 법칙은 내 무의식 안에 고스란히 새겨져 있어서 웬만한 노력으로는 극복하기 어렵다. 아마 죽는 날까지 안 되지 싶다.
아버지 가슴에 대못을 박고 집을 나갔다가 거지꼴이 돼서 다시 아버지 집으로 돌아온 그 둘째 아들은 자기가 잘못했다고 뉘우치기보다는 비참한 자신을 보고 동시에 아버지 집의 풍요로움을 기억해 냈기 때문이다.(루카 15,17) 백날 뉘우치고 통회해도 그 죄스러움이 사라지지 않는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사실이다. 하느님이 왜 이 비참한 사람이 되시고, 대역죄인으로 심판과 벌 그리고 죽임까지 당하셨는지 알 거 같다. 그런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이 아니면 용서와 구원에 대한 희망을 어디서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죄 속에서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인데도 우리 그리스도인은 언제나 희망을 말한다. 희망 고문이 아니라 현실이 되는 믿음이다.
예수님, 저희의 간절한 기도를 인자로이 들어주시고 저희를 찾아오시는 성자의 은총으로 저희 마음의 어둠을 비추어 주십시오. 영원한 도움의 성모님, 어머니의 커다란 두 손으로 불쌍한 이 영혼을 도와주소서.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