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웅진(熊津:公州)은, 우이(于夷·郁夷·嵎夷)의 땅, 중원대륙(中原大陸) [4-2-3]
백제(百濟), 대륙(大陸)의 토착왕조(土着王朝), 그 考古學的인 증거(證據)
2026년 03월 28일
○ ❴AD 678年 / AD 2026年❵ = 「1,347年」의 시차(視差)와 공간(空間)을 뛰어넘었다.
무슨 말인가? : 「옛 조선왕조(朝鮮王朝)의 한 축(軸), 일원(一員)이었던 백제(百濟)는 중원대륙(中原大陸)의 토착왕조(土着王朝)였음을 여실(如實)히 보여주고 있는 고고학적(考古學的) 유물(遺物)이 ‘AD 2,011’년에 서안(西安)【장안(長安)】에서 발굴(發掘)되었다는 것이다.」
이곳에서 발굴(發掘)된 묘지석(墓地石)에는 : 「일본(日本)은 백제(百濟)의 별칭(別稱)이었으며, 현재(現在)의 일본(日本)은 유민(遺民)들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百濟的遺民逃到扶桑以躲避懲罰. 當時日本仍指位處於朝鮮半島的百濟非正式名稱】」라는 것도 묘지석(墓地石)의 명문(銘文)에 기록(記錄)되어 있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렇다면 일부(一部) 사서(史書)에 기록(記錄)된 「왜(倭)와 일본(日本)이 별도(別途)로 있었는데, 일본(日本)이 왜(倭)를 복속(服屬)시키고, 나라 이름을 일본(日本)이라고 하였다」라는 내용(內容)을 증거(證據)하게 된다.】
(1) 즉(卽), 【維基百科,自由的百科全書 / 《唐朝百濟裔將軍 ➠禰軍曾經664年、665年出使日本,而那時日本為中大兄皇子主政,當時日本仍稱倭國。2011年在中國西安發現禰軍的墓誌(卒於678年),禰軍墓誌石碑是製作於公元678年,誌文中提到「日本」,是目前為止世界發現最早記載「日本」漢字的的古物。在禰軍墓誌中有寫道,「於時日本餘噍,據扶桑以逋誅」是以日本形容百濟 ,扶桑形容倭國。意味:「百濟的遺民逃到扶桑以躲避懲罰。」,當時日本仍指位處於朝鮮半島的百濟非正式名稱。》】
(2) 즉(卽), ‘구당서(舊唐書)’에서는 “왜국(倭國)과 일본국(日本國)”을 별도(別途)로 구분(區分)하고 있다. 【➊ 倭國 ; 倭國者,古倭奴國也。去京師一萬四千里,在新羅東南大海中。依山島而居,東西五月行,南北三月行,世與中國通。中略. 地多女少男。頗有文字,俗敬佛法。中略. 衣服之制,頗類新羅。中略. 又附新羅奉表,以通起居。➋ 日本國 : 日本國者,倭國之別種也。以其國在日邊,故以日本為名。或曰:倭國自惡其名不雅,改為日本。或雲:日本舊小國,並倭國之地。中略。又雲:其國界東西南北各數千里,西界、南界鹹至大海,東界、北界有大山為限,山外即毛人之國。】 ☛ 이 모두 곧, “왜국(倭國), 일본국(日本國)”은 구당서(舊唐書)에서 말하는 그 지리적(地理的) 위치(位置)는, 「오늘날의 열도(列島) 일본(日本) 땅과는 전혀 관계(關係)가 없다.」
왜냐하면 : 「경사(京師)로부터 14,000리(里) 떨어져 있다」라고 했기 때문이고, 「일본국(日本國)은 동서남북(東西南北) 각각(各各) 수천리(數千里)이며, 서(西)쪽과 남(南)쪽은 바다(海)이지만, 동계(東界)와 북계(北界)는 큰 산(山)에 경계(境界)한다」라고 했기 때문이다.
☛ “이 얼마나 놀라운 사실(史實)인가!” 문제(問題)는 이러한 일본국(日本國)은, 백제(百濟)의 비공식적(非公式的)인 명칭(名稱) 곧 별칭(別稱)이었다는 뜻이다.
「일본(日本)이란 나라 이름(國號)은, 왜(倭 : 扶桑)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비공식적(非公式的)인 백제(百濟) 호칭(呼稱) 곧 국호(國號)”였다」라는 뜻이다. 그래서 이러한 명문(銘文)이 나오자 오늘날의 일본(日本) 학자(學者)들이 ‘발끈했었다’라고 전(傳)해진다. 그러나 “발끈”했다고 해서 해결(解決)될 역사적(歷史的) 사실(事實)은 없다. 오히려 사기극(詐欺劇)을 벌인 일본(日本) 학자(學者)들은 각성(覺醒)해야 할 일이다.
‘일본(日本) 그리고 왜(倭)의 역사(歷史)’는, 19세기(世紀) 말(末)∼20세기(世紀) 초(初)의 제국주의(帝國主義) 사학자(史學者)들에 의해 창작(創作)【새로운 것을 처음으로 만들어냄】해 놓은 것이다.
☛ “일본서기(日本書紀)”가 8세기(世紀)에 기록(記錄)된 사서(史書)란 말은 사기(詐欺)다. 반도조선사(半島朝鮮史) 특히 삼국(三國)【고구려(高句驪)·백제(百濟)·신라(新羅)】의 역사(歷史) 이야기는 “일본서기(日本書紀)”가 없다면 : 고증(考證)될 수 없을 정도(程度)로, 그 해설(解說)과 고증(考證)은, 대부분(大部分)이 “일본서기(日本書紀)”에 의한 것이다.
일본서기(日本書紀)는 가짜다.
반도삼국(半島三國) 역시(亦是) 가짜다.
반도조선사(半島朝鮮史)는, 당연(當然)히 가짜다.
➥ 《“일본서기(日本書紀)”를 인용(引用), 삼국사기(三國史記)를 해설(解說)하고, 반도(半島) 땅에서 발굴(發掘)되는 유적유물(遺跡遺物) 또는 명문(銘文)의 내용(內容)을 “일본서기(日本書紀)에 의하면… …”하는 행위(行爲)가 바로 반도조선사(半島朝鮮史) 주류(主流)를 이룬다.》
이로 보면 : 「일본서기(日本書紀)가 먼저 만들어지고, 이에 맞춰 반도(半島)의 유적유물(遺跡遺物)이 만들어졌다.」라고 판단(判斷)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 일본서기(日本書紀)가 아니면 반도(半島) 땅에서 발굴(發掘)되는 많은 유적유물(遺跡遺物) 또는 명문(銘文) 등(等)을 해설(解說)할 수 없기 때문이다. 곧 “고증(考證)될 수 없다”라는 뜻이다.
반도(半島 : 韓半島) 백제(百濟)는, 없었다
○ 이 심각(深刻)하고 난해(難解)한 문제(問題) 곧 ‘난제(難題)’를 풀기 위해서는 먼저 『구이(九夷)』에 대한 해설(解說)과 설명(說明)이 뒤따라야 한다. 즉(卽),
㈠ 《후한서(後漢書) : 동이(東夷)에는 9종이 있으니, “견이(畎夷)ㆍ우이(于夷)ㆍ방이(方夷)ㆍ황이(黃夷)ㆍ백이(白夷)ㆍ적이(赤夷)ㆍ현이(玄夷)ㆍ풍이(風夷)ㆍ양이(陽夷)”가 그것이다.》
㈡ 《동래집(東萊集) : 상고 시대 때 “견이(畎夷)ㆍ우이(嵎夷)【우이(于夷)이다】ㆍ방이(方夷)ㆍ황이(黃夷)ㆍ백이(白夷)ㆍ적이(赤夷)ㆍ현이(玄夷)ㆍ남이(藍夷)【풍이(風夷)이다.】ㆍ양이(暘夷)【양이(陽夷)이다.】” 칭호가 있었다.》
㈢ 《풍속통(風俗通) : “구이(九夷)는, 현토(玄兎)ㆍ낙랑(樂浪)ㆍ고려(高驪)ㆍ만칙(滿飭)ㆍ부유(鳧臾 : 夫餘)ㆍ색가(索家)ㆍ동도(東屠)ㆍ왜인(倭人)ㆍ천비(天鄙)”라고도 한다.》
㈣ 《상서(尙書)에 : 堯分命羲仲。宅 ➠ 嵎夷。曰暘谷。寅賓出日。平秩東作。日中。星鳥。以殷仲春。: 요 임금이 희중(羲仲)에게 따로 명하여 우이(嵎夷)에 살도록 하니, 바로 양곡(暘谷)이란 곳이다. 떠오르는 해를 공손하게 인도하여 봄 농사를 일과로 삼게 하니 날은 춘분이오, 별은 주조(朱鳥)라. 이로써 중춘(仲春)에 맞게 한다. 按史記。嵎夷作郁夷。: 살펴보건대, 사기(史記)에는 우이(嵎夷)가 욱이(郁夷)로 되어 있다.》
㈤《사기정의(史記正義)에서 : 禹貢靑州云。嵎夷旣畧。嵎夷靑州也。: 우공(禹貢)에서 청주(靑州)에 대해 말하기를, “우이(嵎夷)가 이미 경략하였다.” 하였으니, 우이(嵎夷)는 청주(靑州)에 살고 있었다. 堯命羲仲。理東方靑州嵎夷之地。日所出處。名曰陽明之谷。史記正義。: 요(堯) 임금이 희중(羲仲)에게 ‘동방(東方) 청주(靑州) 우이(嵎夷)’의 지역을 다스리라고 명한 것이다. 해가 나오는 곳을 이름하여 ‘양명지곡(陽明之谷)’이라 한다. 》
☛ ‘구이(九夷)’ 중에 오늘의 주제(主題)인 「우이(嵎夷)」가 있는데, 「우이(嵎夷) 또는 우이(于夷)」라고도 하는데, 21세기(世紀) 오늘날에도 : 『산동성(山東省) 교동반도(膠東半島) 일대(一帶)를 말한다』라고 설명(說明)하고 있다. 곧,
《‘AD 2,026’年의 “중국어 위키백과”에서는 : 《嵎夷 / [維基百科,自由的百科全書] : 嵎夷,為東夷之一支,活動於今中華人民共和國➠山東省膠東半島一帶。相傳在堯時就已存在,➠ 一說源自於萊夷。 概論 : 嵎夷的記載最早見於《尚書》,據說堯曾派羲和前來統治。嵎夷居住在青州之地。馬融認為,嵎夷是指居住在海邊的萊夷。宋朝薛士龍在《書古文訓》中,認為嵎夷居住在登州。清朝胡渭在《禹貢錐指》中認為,嵎夷為日本人的先祖。》
➥ 위의 「중국어 위키백과」 설명(說明)대로라면 : 『백제(百濟)는 반도(半島)에 없었다. 웅진(熊津)은 산동성(山東省)에 있다』라는 것이 된다. 또한 「“우이(嵎夷)”는 일본(日本) 사람들의 선조(先祖)」라고 하였다. 즉(卽),
《「산동성(山東省) 교동반도(膠東半島) 일대(一帶)에서 활동(活動), 일설(一說)에는 래이(萊夷)에서 시원(始源)한다.」라고 하였으며, 우이(嵎夷)가 처음으로 기재(記載)된 것은 “상서(尙書)”인데… …‘우이(嵎夷)는, 청주(靑州)의 땅에 거주했다’라고 말하며, 마융(馬融)은, 우이(嵎夷)는, 해(海) 연안(沿岸)에 사는 래이(萊夷)를, 송조(宋朝) 때는 우이(嵎夷)는, 등주(登州)에 산다고 했으며, 청조(淸朝)의 호위(胡渭)는, 우이(嵎夷)는, 일본인(日本人)의 선조(先祖)라고 하였다.》라고 하는 것이 ‘21세기(世紀)의 역사해설(歷史解說)’이다.
위의 설명(說明)을 조선사(朝鮮史)에 대입(代入)하면 :
➊ 「백제(百濟)」는 『중원대륙(中原大陸)의 산동성(山東省), 하남성(河南城), 하북성(河北省), 내몽고(內蒙古), 강소성(江蘇省), 안휘성(安徽省), 호북성(湖北省), 호남성(湖南省), 강서성(江西省), 절강성(浙江省) 등지(等地)에 자리 잡고 있었으며, ‘웅진(熊津)=공주(公州)’는 오늘날의 산동성(山東省) 교동반도(膠東半島) 일대(一帶)를 말하며, 지명(地名)의 별칭(別稱)으로 “우이(嵎夷)”라고 불렀다.』라는 것이 된다.
➋ 新唐書, 本紀 第 三, 高宗 / 顯 慶 五 年, 三 月 辛 亥, 左 武 衛 大 將 軍 蘇 定 方 為 神 兵 道 行 軍 大 總 管, 新 羅 王 金 春 秋 為 嵎 夷 道 行 軍 總 管, 率 三 將 軍 及 新 羅 兵 以 伐 百 濟 。
舊 唐 書 卷 四. 本紀 第 四. 高宗. 上 / 十 一 月, 癸 亥 , 以 邢 國 公 蘇 定 方 為 神 丘 道 總 管 , 劉 伯 英 為 禺 夷 道 總 管 。
資治通鑑 高宗天皇大聖大弘孝皇帝上之下顯慶五年(庚申,公元六六零年)/ 辛亥,以左武衛大將軍蘇定方為神丘道行軍大總管,帥左驍衛將軍劉伯英等水陸十萬以伐百濟。以春秋為嵎夷道行軍總管,將新羅之眾,與之合勢。
➥ 구당서(舊唐書) 또는 신당서(新唐書) 또는 자치통감(資治通鑑) 등에서 말하는 바에 따르면 : 소정방(蘇定方)의 출정군(出征軍)의 총책임자(總責任者) 직책(職責)의 이름이 서로 다른 것은 차치(且置)하더라도, 분명(分明)하게 말하고 있는 것은, 김춘추(金春秋) 또는 유백영(劉伯英)이든 간에“우이도(嵎夷道) 또는 우이도(禺夷道) 행군총관(行軍總管)”은 있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이도행군총관(嵎夷道行軍摠管)” 김춘추(金春秋)」는, 김유신(金庾信)과 5만 보기(步騎)와 함께 함선(艦船) 또는 수송선(輸送船)을 타고 남해(南海)의 거친 파도(波濤)를 헤치고, 다시 서해(西海)를 건너 산동성(山東省)의 ‘교동(膠東) 반도(半島)’에 상륙(上陸)하여 물밀듯이 진격(進擊), 당군(唐軍)과 합세(合勢)하여 ‘백제(百濟) 군(軍)과 교전(交戰)을 벌였다’라는 이야기가 되는데… …,
그러나 이건 어찌 됐든 간에 『백제(百濟)』는 : 「반도(半島)가 아닌 중원대륙(中原大陸)에 있었다는 것이다.」 무엇이 반도(半島) 백제(百濟)란 말인가?
☛ 반도사학(半島史學)이 주장(主張)하는 : 반도(半島) 백제(百濟)의 근거(根據)는? 고증(考證)은? 일본서기(日本書紀)로… …‘한마디로 웃기는 이야기일 수밖에 없다.’ 『우이도행군총관(嵎夷道行軍摠管)』이라는 직책(職責) 가운데 가장 중요(重要)한 『‘우이(嵎夷)’라는 곳이 바로 ‘산동성(山東省) 땅(地)’이라지 않는가!』
더 무슨 말이, 무슨 해설(解說)이 더 필요(必要)하겠는가! 반도사학(半島史學)을 어찌하오리까? 그렇다면 이렇게 자신만만(自信滿滿)하게 말하는 필자(筆者)는 무엇을 근거(根據)로 큰소리치는가? 당연(當然)한 의문(疑問)이요, 물음이다.
○ 「반도(半島) 백제(百濟)는 없었다.」 곧 허구(虛構)로 만들어진 역사조작(歷史造作)임을 밝혀줄 수 있는 서지적(書誌的) 근거(根據)와 고고학적(考古學的) 유물(遺物)이 있다.」
반도사학(半島史學)도 이미 알고 있는 것이지만 : 그 원문(原文) 내용(內容)을 번역(飜譯), 해설(解說)하는 데에 있어, 「식민사학(植民史學)의 논리(論理)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반도(半島)로 한정(限定)하고 해설(解說)을 하는 것이다」 이 처사(處事)는 반국가세력(反國家勢力)과 무엇이 어떻게 다른 것인지를 알 수 없을 정도다. 즉(卽),
● 「위키백과」에 따르면 :
《예군(禰軍)【AD 613년~678년 2월 19일】은, 나당 연합군과 항전 중이었던 백제 마지막 왕 의자왕(義慈王)을 웅진성에서 데리고 나와 나당 연합군에 투항시킨 예식진(禰寔進, 혹은 예식(禰植)의 형이다. 자는 온(溫), 백제 웅진(熊津) 우이(嵎夷) 출신이다. 백제를 멸망시킨 공로를 인정받아 예군은, 동생 예식진은 함께 당나라에서 관직을 받았고, 예씨(禰氏) 집안은 당나라 귀족으로 자리잡았다. 예군의 묘지명이 섬서(陝西) 서안(西安)에서 출토되었다.[2] 이 묘지명과 함께 앞서 2007년경 소개된 예식진의 묘지명과 비교를 통하여, 백제 예씨(禰氏) 집안의 선계 등을 규명하였다.》라고 설명(說明)하고 있는데… …,
‘필자(筆者)’는 여기서 “예군(禰軍)”이란 인물(人物)이 백제(百濟)를 배신(背信)하고 당(唐)에 빌붙어, 결정적(決定的)인 순간(瞬間)에 반역(叛逆), 의자왕(義慈王)과 기타 왕족(王族)들과 대신(大臣)들을 포로(捕虜)로 잡고 : 당고종(唐高宗)에게 헌납(獻納), 헌상(獻上)한 것을 따지기 전에, 그의 묘지석(墓地石)에 기록(記錄)되어 있는 묘지석(墓地石) 원문(原文) 내용(內容)의 한 구절(句節)에 대해 시시비비(是是非非)를 가려보자는 것이다. 곧, 묘지명(墓誌銘) 첫머리에 기록(記錄)하기를… …,
☛ 《大唐故右威衛將軍上柱國禰公墓志銘幷序. 公諱軍,字温,➠ 熊津嵎夷人也.》이라고 하였는데… …「예군(禰軍)은, ‘웅진(熊津) 우이(嵎夷)’ 사람이다.」라고 한 것이다.
➠ 이미지 출처 : 【더 위키 : 예군(禰軍·613∼678)】 : 개인적(個人的)으로 이런 ‘묘지석(墓地石)의 명문(銘文)’과 반도(半島) 남(南)쪽 땅에서 발굴(發掘)되었다고 호들갑을 떨고 있는 “무녕왕릉(武寧王陵)”의 ‘묘지석(墓地石) 명문(銘文)’을 비교(比較)해보면 : 한심(寒心)하고, 황당(荒唐)하며, 당시(當時)에 ‘대(大) 제국(帝國)’을 이루고 있었던 “백제(百濟)”를 한낱 고그만 제후국(諸侯國) 제후(諸侯)로 만들어 놓은 반도(半島) 땅의 식민사학자(植民史學者)들을 맹렬(猛烈)히 규탄(糾彈)한다.
☛ 祢軍墓誌 678年 / 大唐故右威衛將軍上柱國祢公墓誌銘 〈并序〉【引用出處 / 維基百科,自由的百科全書】
《公諱軍,字温,(1) 熊津嵎夷人也。其先与華同祖,永嘉末,避亂適東,因遂家焉。(2) 若夫巍巍鯨山,跨青丘以東峙,淼淼熊水,臨丹渚以南流。: 무릇 숭고하고 위대한 경산(鯨山)은 청구(青丘)에 걸터앉아 동쪽으로 우뚝 솟았고, 끝없이 아득한 웅수(熊水)는 단저(丹渚)에 임하여 남쪽으로 흘렀다. 浸煙雲以樆英,降之於蕩沃,照日月而榳悊,秀之於蔽虧。靈文逸文,高前芳於七子,汗馬雄武,擅後異於三韓。華構增輝,英材継響,綿圖不絶,弈代有聲。曾祖福,祖譽,父善,皆是本藩一品,官号佐平。並緝地義以光身,佩天爵而懃國。忠侔鐵石,操埒松筠。範物者,道德有成,則士者,文武不墜。公狼輝襲祉,䴏頷生姿。涯濬澄陂,裕光愛日。干牛斗之逸氣,芒照星中,搏羊角之英風,影征雲外。去顯慶五年,官軍平本藩日,見機識變,杖劍知歸。似由余之出戎,如金磾之入漢。聖上嘉歎,擢以榮班,授右武衛滻川府折衝尉。于時日本餘噍,據扶桑以逋誅,風谷遺甿,負盤桃而阻固。萬騎亘野,与盖馬以驚塵,千艘橫波,援原虵而縱沵。以公格謨海左,龜鏡瀛東,特在簡帝,往尸招慰。公侚臣節而投命,歌皇華以載馳。飛汎海之蒼鷹,翥凌山之赤雀。决河眥而天吴靜,鑿風隧而雲路通。驚鳧失侣,濟不終夕。遂能說暢天威,喻以禑福。千秋僭帝,一旦稱臣,仍領大首望數十人將入朝謁,蒙恩詔授左戎衛郎將,少選遷右領軍衛中郎將兼檢校熊津都督府司馬。 材光千里之足,仁副百城之心。舉燭霊臺,器標於芃棫,懸月神府,芳掩於桂苻。衣錦晝行,富貴無革。雚蒲夜寢,字育有方。去咸亨三年十一月廿一日詔授右威衛將軍,局影彤闕,飾躬紫陛。焏蒙榮晉,驟歷便繁。方謂克壯清猷,永綏多祐。豈圖曦馳易往,霜凋馬陵之樹,川閲難留,風驚龍驤之水。以儀鳳三年歲在戊寅二月朔戊子十九日景午遘疾,薨於雍州長安縣之延壽里第。春秋六十有六。 皇情念功惟舊,傷悼者久之,贈絹布三百段,粟三百斛,葬事所須,并令官給,仍使弘文館學士兼檢校本衛長史王行本監護。惟公雅識淹通,温儀韶峻,明珠不纇,白珪無玷。十步之芳,蘭室欽其臰味,四鄰之彩,桂嶺尚其英華。奄墜扶摇之翼,遽輟連舂之景。粵以其年十月甲申朔二日乙酉葬於雍州乹封縣之高陽里,禮也。駟馬悲鳴,九原長往,月輪夕駕,星精夜上。日落山兮草色寒,風度原兮松聲響。陟文榭兮可通,随武山兮安仰。愴清風之歇滅,樹芳名於壽像。其詞曰:
胄胤青丘,芳基華麗。
脉遠遐邈,會逢時濟。
茂族諄秀,奕葉相継。
獻款夙彰,隆恩無替。〈其一〉
惟公苗裔,桂馥蘭芬。
緒榮七貴,乃子傳孫。
流芳後代,播美來昆。
英聲雖歇,令範猶存。〈其二〉
牗箭驚秋,隟駒遄暮。
名將日遠,德随年故。
慘松吟於夜風,悲薤哥於朝露。
霊轜兮遽轉,嘶驂兮跼顧。
嗟陵谷之貿遷,覬音徽之靡蠹。〈其三〉》
☛ 위의 묘지석(墓地石) 비문(碑文)에서 그 지리적(地理的) 위치(位置)를 찾을 수 있는 대목은 “두 구절(句節)”이 있다. 즉(卽), 《(1) 熊津嵎夷人也。(2) 若夫巍巍鯨山,跨青丘以東峙,淼淼熊水,臨丹渚以南流。: 무릇 숭고하고 위대한 경산(鯨山)은 청구(青丘)에 걸터앉아 동쪽으로 우뚝 솟았고, 끝없이 아득한 웅수(熊水)는 단저(丹渚)에 임하여 남쪽으로 흘렀다.》라고 한 것이다.
(1) 「熊津嵎夷人也 : 웅진(熊津) 우이(嵎夷) 사람이다」
「우이(嵎夷)」는, 곧 「백제(百濟) 땅을 가리키는 것이다」…라고 해석(解釋)해도 된다. 그렇다면 「우이(嵎夷)가 반도(半島) 땅을 지칭(指稱)한다는 뜻은 없다.」
《AD 1,900년(年) 이후(以後)의 역사해설(歷史解說)에 ‘우이(嵎夷)’는 반도(半島)를 말한다》라고 한 것이다.
「우이(嵎夷)」와 관련(關聯)해서는 여러 번에 걸쳐 “우리 카페(Cafe)”에 게재(揭載)되어 있다. 〈“우이(嵎夷)”는, 곧 「동방(東方), ‘양곡(暘谷)=(陽谷)’」을 뜻하는 말로, 반도(半島)와는 전혀 관계(關係)없는 말이다〉 ‘고전(古典)’에서 말하는 “우이(嵎夷)”는?
➊ ‘AD 2,026’年의 “위키백과”에서는 : 《嵎夷 [維基百科,自由的百科全書] : 嵎夷,為東夷之一支,活動於今中華人民共和國山東省膠東半島一帶。相傳在堯時就已存在,一說源自於萊夷。 概論 : 嵎夷的記載最早見於《尚書》,據說堯曾派羲和前來統治。嵎夷居住在青州之地。馬融認為,嵎夷是指居住在海邊的萊夷。宋朝薛士龍在《書古文訓》中,認為嵎夷居住在登州。清朝胡渭在《禹貢錐指》中認為,嵎夷為日本人的先祖。》
➥ 위의 「중국어 위키백과」 설명(說明)대로라면 : 『백제(百濟)는 반도(半島)에 없었다. 웅진(熊津)은 산동성(山東省)에 있다』라는 것이 된다. 또한 「“우이(嵎夷)”는 일본(日本) 사람들의 선조(先祖)」라고 하였다.
➥ 「산동성(山東省) 교동반도(膠東半島) 일대(一帶)에서 활동(活動), 일설(一說)에는 래이(萊夷)에서 시원(始源)한다」라고 하였으며, ‘우이(嵎夷)’가 처음으로 기재(記載)된 곳은 “상서(尙書)”인데… …‘우이(嵎夷)는 청주(靑州)의 땅에 거주했다’라고 말하며, 마융(馬融)은, 우이(嵎夷)는 해(海) 연안(沿岸)에 사는 래이(萊夷)를, 송조(宋朝) 때는 우이(嵎夷)는 등주(登州)에 산다고 했으며, 청조(淸朝)의 호위(胡渭)는, 우이(嵎夷)는 일본인(日本人)의 선조(先祖)라고 하였다.
이것은 2,026년의 “중국어 위키백과”에서 말하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러함에도 「“우이(嵎夷)”는, “반도(半島) 특히 백제(百濟)를 지칭(指稱)하지 않았다”」
「예군(禰軍) 묘지석(墓地石)」에서 말하는 「웅진(熊津) 우이인(嵎夷人)」이란 : 「중원대륙(中原大陸)의 ‘어떤 땅’을 말하는 것이지, 반도(半島) 땅을 말하는 것이 아님은 여실(如實)히 증명(證明)되는 것이다.」 「“우이(嵎夷)가 반도(半島) 땅”이라고 말하는 무리는 “반국가세력(反國家勢力)”보다도 더 반역적(叛逆的)인 인물(人物)들이다.」
➋ 《후한서(後漢書) : 동이(東夷)에는 9종이 있으니, 견이(畎夷)ㆍ우이(于夷)ㆍ방이(方夷)ㆍ황이(黃夷)ㆍ백이(白夷)ㆍ적이(赤夷)ㆍ현이(玄夷)ㆍ풍이(風夷)ㆍ양이(陽夷)가 그것이다.》라고 하였는데,
「동이(東夷) 곧 구이(九夷)는 동방(東方)에 살고 있었던 모든 종족(種族), 부족(部族)들을 총칭(總稱)」하는 말이다. “동방(東方)이란 중앙아세아(中央亞世亞) 일부(一部)로부터 중원대륙(中原大陸) 땅”을 말하는 것이다.
➌ 《상서(尙書) : 堯分命羲仲。宅嵎夷。曰暘谷。寅賓出日。平秩東作。日中。星鳥。以殷仲春。尙書。: 요(堯) 임금이 희중(羲仲)에게 따로 명하여 우이(嵎夷)에 살도록 하니, 바로 양곡(暘谷)이란 곳이다. 떠오르는 해를 공손하게 인도하여 봄 농사를 일과로 삼게 하니 날은 춘분(春分)이오, 별은 주조(朱鳥)라. 이로써 중춘(仲春)에 맞게 한다. 按史記。嵎夷作郁夷。:살펴보건대, 《사기(史記)》에는 ‘우이(嵎夷)가 욱이(郁夷)’로 되어 있다.》
이 구절(句節)에서 핵심(核心)은 : 사기(史記)에는, 「嵎 夷 作 郁 夷 : 우이(嵎夷)가 욱이(郁夷)’로 되어 있다.」라는 것이다. ➠ 『우이(嵎夷)는 욱이(郁夷)로, 욱이(郁夷)는 욱이현(郁夷縣)이며, 장안(長安) 서(西)쪽 ‘우부풍(右扶風) 속현(屬縣)’ 땅이라는 사실(事實)이다.』
사기(史記)의 말대로라면 : 「우이도(嵎夷道) 행군총관(行軍摠管) 김춘추(金春秋)와 김유신(金庾信) 및 5만(萬)의 신라(新羅) 병사(兵士)」는 :
➥ 「‘경주(慶州)=계림(雞林)’에서, 동해(東海)로 나아 가, 백제(百濟)의 남(南)쪽 남해(南海)를 돌아, 다시 백제(百濟)의 서해(西海)로 진입(進入)하여, 거슬러 올라가 강소성(江蘇省)이나 산동성(山東省) 땅에 상륙(上陸)하여… …보기(步騎)는, 때에 맞추어 “장안(長安) 서(西)쪽으로 행군(行軍), 백제(百濟)의 웅진(熊津) 땅인 우이(嵎夷)【섬서성(陝西省) 장안(長安) 서(西)쪽 우부풍(右扶風) 속(屬), 욱이(郁夷)는 우이(嵎夷)다】를 향해 진격(進擊)했다”」라는 설명(說明)이 되는 것이다. 이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시나? 식민사학자(植民史學자者)님들이시여!
정신(精神)을 좀 차리셔야 되지 않을까? 생각이 든다.
《사기정의(史記正義) : 禹貢靑州云。嵎夷旣畧。嵎夷靑州也。堯命羲仲。理東方靑州嵎夷之地。日所出處。名曰陽明之谷。史記正義。: 우공(禹貢)에서 청주(靑州)에 대해 말하기를, “우이(嵎夷)가 이미 경략(經略)하였다.” 하였으니, 우이(嵎夷)는 청주(靑州)에 살고 있었다. 요(堯) 임금이 희중(羲仲)에게 동방(東方) 청주(靑州) 우이(嵎夷)의 지역을 다스리라고 명한 것이다. 해가 나오는 곳을 이름하여 ‘양명지곡(陽明之谷)’이라 한다.》라고 하였으니,
「우이(嵎夷)는 청주(靑州)요, 청주(靑州)는 당시(當時)의 욱이(郁夷)였다」라는 말과 같은 것이다. 곧 “청주(靑州)는 우부풍(右扶風)이다”라는 뜻이 되는 것이다.
➍ 「우이(嵎夷)는, 곧 래이(萊夷)에서 시원(始源)한다.』라고 하였다. 「래이(萊夷)는 우이(嵎夷)요, 동이(東夷)이자, 구이(九夷)중의 하나」이다. 즉(卽),
• 「래이(萊夷)」는, 「래산(萊山)에 의지(依支)하며 살던 무리를 일컫는 말」이고, 「그곳은 “鹵地, 地不生物斥 : 로(鹵) 땅은, 그 땅이 만물(萬物)이 자라지 못한다.”」라고 하였으니, 이러한 땅(地)에 「래산(萊山)이 있고, 이 산(山)을 의지(依支)해 래이(萊夷)들이 살았다」라고 한 곳이다.
• 「래주(萊州)는, 래이(萊夷)들의 땅이고, 래산(萊山)에 살던 자(者)들이며, 이곳 땅은 소금기【鹵 : 西方鹽地 鹵 자(字)로, ‘地不生物斥’라고 하였다.】가 많아 농사(農事)를 지을 수 없으며, 축목(畜牧)을 업(業)으로 살아가는 곳」이라고 했다.
• 「래이(萊夷)」들이 의지(依支)하며 살던 「래산(萊山)」은 어디에 있었을까? 오늘날의 산동성(山東省) 바닷가에 있을까? “이건 황당무계(荒唐無稽)한 헛소리다”
➥ 「산해경(山海經) 서산경(西山經)」을 보면 : 〈西山經華山之首, 曰錢來之山, 其上多松, 中略. 山海經 第二 西山經 : 凡西經之首, 自錢來之山至于騩山, 凡十九山, 二千九百五十七里. 華山冢也. 中略. 山海經 第二 西山經 : 又西三百五十里, ➠ 曰萊山, 其木多檀楮, 其鳥多羅羅, 是食人. 中略. 山海經 第二 西山經 : 凡西次二經之首, 自鈐山至于萊山, 凡十七山, 四千一百四十里, 中略. : 서산경(西山經)의 시작(始作)은 화산(華山)으로부터다. 서산경(西山經) 1의 서경지수(西經之首)는 전래산(錢來山 : 華山)으로부터 괴산(騩山)까지 19개 산(山)에 ‘2,957’리요, 서산경(西山經) 2의 서차이경지수(西次二經之首)는 영산(鈴山)으로부터 래산(萊山)까지 17개 산에 ‘4,140’리다〉라고 하였다.
즉(卽), 「화산(華山)=전래산(錢來山)으로부터 ‘래산(萊山)’까지는 약 7,097리」인 셈이다. 화산(華山)으로부터 약(約) ‘7,097’리(里) 서(西)쪽에 “래산(萊山)”이 있다고 하였다.
➠ 이 말은, 「장안(長安)으로부터 약(約) 7,100리 떨어진 곳에 “래산(萊山)”이 있다」라는 것이며, 이곳은 오늘날의 『신강성(新疆省) 토노번(吐魯番)·고창(高昌)·오노목제(烏魯木齊)·언기(焉耆)·구자(龜茲) 등지(等地)』이며, 이곳은 「타클라마칸 사막지대(沙漠地帶)의 북방(北方) 인접지대(隣接地帶)로, 천산산맥(天山山脈)이 서(西)쪽에서 동(東)쪽으로 쭉 뻗어있는 곳이다.」
「두우(杜佑) 통전(通典)」에서 이르기를 : 「焉耆, 中略. 在白山之南七十里, 去長安七千三百里. 中略. 皆沙磧. 其國近海水, 多魚鹽蒲葦之利 : 언기(焉耆)는 백산(白山)의 남(南)쪽 70리에 있다. 장안(長安)에서 ‘7,300’리 떨어져 있다. 모든 땅이 사적지대(沙磧地帶)로, 가까이에는 해수(海水)가 있어, 물고기와 소금과 포위(蒲葦)의 이득이 있다.」라고 하였다.
➨ 이런 곳 즉(卽) 「천산산맥(天山山脈)의 한 봉우리가 래산(萊山)」이 되며, 「이 “래산(萊山)에 의지(依支)하며 유목(遊牧), 축목(畜牧)을 하며 살아가던 구이(九夷)” 중의 하나였던 “래이(萊夷)”들의 나라가 “래산국(萊山國)”이었다.」
이들 〈“래이(萊夷)”들이 더 살기 좋은 동(東)쪽으로 이주(移住)하면서 그 이름 역시(亦是) “래이(萊夷) ➝ 우이(于夷) ➝ 욱이(郁夷) ➝ 우이(嵎夷)”등으로 불리게 된 것이다〉라는 것을 자연(自然)스럽게 알 수 있는 것이다.
이들이 점차(漸次) 동(東)쪽으로 이동(移動)하며 살았다는 그 증거(證據)들이 바로 많은 사서(史書)에서 말해주고 있는 내용(內容)들이다. 즉(卽) 「래이(萊夷)」는, 중앙아세아(中央亞世亞)와 천산(天山) 접경(接境)에 있었던 “래산(萊山)”에서 축목(畜牧)으로 이어가다가 양곡(陽谷) 곧 해 뜨는 동(東)쪽을 향해 이동(移動)했으며, 언제 정착(定着)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장안(長安) 서(西)쪽의 우부풍(右扶風) 땅까지 와 정착(定着)하였는데, 그때의 증거(證據)가 바로 “욱이현(郁夷縣)”이다.
☛ 「래이(萊夷)」는, 「욱이(郁夷)」로 불리게 되고, 「그들이 집단(集團)으로 살던 곳이 곧 “욱이현(郁夷縣)”이 되었고, 이 현(縣)은 장안(長安) 서(西)쪽의 우부풍(右扶風) 속현(屬縣)으로 있었다」라는 것이 곧 그 증거(證據)다.
또 「신라(新羅)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 김춘추(金春秋)가 우이도행군총관(嵎夷道行軍摠管)으로 임명(任命)되었다」라고 한 것인데, 이때의 “우이(嵎夷)”는, 한반도(韓半島)와는 “십 원 한 장”의 관계(關係)도 없는 것이다.
➎ 「우공추지(禹貢錐指) 卷 04」에서는 : 「래이(萊夷)」에 대해서 :
【우공(禹貢) : 서경(書經)의 편명(篇名)으로, 요(堯) 임금 때 9년 동안 홍수가 나서 신하 곤(鯀)에게 명하여 다스리도록 했으나 공을 이루지 못했고, 순(舜)임금에 이르러 곤의 아들 우(禹)에게 명하여 다스리게 하니, 우는 9주를 순시하여 산천을 측량하고 강을 다스려 9주의 경계를 바르게 하여 10년간에 공을 이루었는데, 이 우공편은 중국 최고(最古)의 지리서(地理書)라 할 수 있음. 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 : 한시어사전】
우공(禹貢) : 우(禹)임금 때라면 BC 2,200년(年) 경(頃)에 저술(著述)된 지리서(地理書)라는 이야기로, “4,200여(餘)” 년(年) 전(前)의 지리서(地理書)다.
〈萊夷作牧. 釋文:萊音來. 牧, 徐音目, 一音茂. : 래이(萊夷)는 축목(畜牧)한다. 석문(釋文)에 : 래(萊)의 음(音)은 래(來)이고, 목(牧)은, 서(徐)의 음은 목(目)인데 한 음은, 무(茂)이다〉
〈顏氏曰:萊夷, 萊山之夷也. : 안씨[顔氏:顏師古]가 이르기를 : ‘래이(萊夷)는, 래산(萊山)의 이(夷)’라고 하였다〉
〈吳氏曰:作, 謂耕作;牧, 謂放牧, 夷人以耕牧為業也. : 오씨(吳氏)는 : 작(作)은, 경작(耕作)이고 : 목(牧)은, 방목(放牧)이다. 이인(夷人)들은 경목(耕牧)이 일(業)이라고 하였다〉
〈孔傳雲:萊夷, 地名, 可以放牧. 今按:萊夷之地, 三麵瀕海, 皆為斥鹵, 五穀不生, 中間又有萊, 膠, 勞, 成, 羽, 金與, 之罘, 文登, 不其, 距艾等山及貕養澤. : 공전(孔傳)에서는 : ‘래이(萊夷)는, 지명(地名)’인데, 이는 방목(放牧)이 옳다고 하였다. 래이(萊夷)의 땅은, 삼면(三面)이 바닷가[河]에 임해 있으며, 모든 땅에는 소금기가 있어, 오곡(五穀)이 자라지 않는다. 중간(中間)에 또 래주(萊)·교주(膠)·노주(勞)·성(成)·우(羽)·금여(金與)·지부(之罘)·문등(文登)·불기(不其)·거애(距艾) 등과 산(山)과 해양택(貕養澤)이 있다〉라고 하였다.
➨ ‘호위우공(胡謂禹貢)’에서는 : 《今登州, 萊州之地, 皆禹貢萊州之地, 三面濱海, 皆爲斥鹵, 五穀不生, 中略, 亦稱萊子國. : 등주(登州), 래주(萊州)의 땅은, 모두 우공(禹貢) 래주(萊州)의 땅이다. 삼면(三面)이 바다(海 : 河)에 붙어있는데, 모두 소금【鹵 : 서방(西方) 소금로(鹵)】기가 많은 땅으로, 오곡(五穀)이 자라지 못한다. 중략(中略). 또한 래자국(萊子國)이라고 부른다.》라고 하였다.
여기서 중요(重要)한 대목은 원문(原文) 중의 「척로(斥鹵)」이다. 「로(鹵)」자(字)는 : 『서방(西方) 염지(鹽池) 로(鹵)』 자(字)이다.
☛ 《오늘날의 산동성(山東省) 래주(萊州), 등주(登州)의 땅이 “서방(西方)의 염지(鹽池) 땅”인가? 이러한 “서방(西方) 염지(鹽池) 로(鹵)” 자(字)가 탄생(誕生)될 즈음인 “수천(數千) 년(年) 전(前)”의 「“오늘날의 래주(萊州), 등주(登州)”는 바닷속에 잠겨있는 해저(海底)의 땅이었을 것이다」 이건 과학적(科學的)인 설명(說明)이다.
➥ 「네이버 한자사전」 / 象形文字 / 「鹵」 : 《塷(로)와 동자(同字). 암염을 싼 모양을 본뜸. 또는 卤(로)는 西(서)의 주문(籒文)으로 卤(로)를 제외(除外)한 글자가 소금 모양을 나타냄. 따라서 “서(西)쪽에 있는 소금밭”이라는 뜻으로 보아 지사문자(指事文字)로 보기도 함.》라고 하였다.
【지사문자(指事文字) : 한자(漢字) 육서(六書)의 하나. 사물(事物)의 추상적(抽象的)인 개념(槪念)을 본떠서 낱말의 뜻을 나타내는 문자(文字). 「일(一)」은 하나, 「이(二)」는 둘, 「상(上)」은 위, 「하(下)」는 아래를 가리키는 것 따위】
➨➨➨ 위의 여러 설명(說明)에서 보듯이, 「서방(西方) 염지(鹽池) 로(鹵), 래이(萊夷)와 목(牧)」을 함께 해설(解說)하면 :
『서방(西方) 땅의 척박한 염분(鹵)이 많은 땅에서, 畜牧(축목)을 생(生)으로 하고, 래산(萊山)에 의탁(依託)해 살았던 동이(東夷)들을 말하는 것이고, 구이(九夷)중의 하나를 일컫는 말이고, 이들을 가리켜 “래이(萊夷)”라고 했다』라는 것이다.
이들 래이(萊夷)는, 《“래이(萊夷) ➝ 우이(于夷) ➝ 욱이(郁夷) ➝ 우이(嵎夷)”》등으로 전음(轉音) 또는 별칭(別稱), 이칭(異稱) 등으로 부르게 되었는데, “신라(新羅)의 김춘추(金春秋)가 우이도행군총관(嵎夷道行軍摠管)”으로 임명(任命)된 것을 보면 : ‘서력(西曆) 660년’경에도 “우이(嵎夷)”라고 불렀음을 알 수 있는데, 지명(地名)과 함께 사용(使用)했음을 알 수 있다.
고전(古典) 원전(原典)에서는 ‘청주(靑州)나 서주(徐州)’는 오늘날의 산동성(山東省) 땅이 아니라 『1 만리(萬里) 서(西)쪽 땅에 있었다』라고 하였다. 즉 『청주(靑州)나 서주(徐州)는, 요서(遼西)의 서(西)쪽 땅에 있어야 한다.』라는 뜻이다.
즉(卽), ‘청주(靑州)나 서주(徐州)’에 ‘래이(萊夷)’가 있었다고 하였는바, 『래이(萊夷)는 곧 우이(嵎夷)』라고 하는데, “래이(萊夷)는 래산(萊山)에 의지(依支)하여 축목(畜牧)으로 살아가는 유목민(遊牧民)”들을 말하는 것이고【尚書記載, 萊夷居住在青州. 馬融認為, 居住在海濱的萊夷, 稱嵎夷. 顏師古認為他們居住在萊山下, 以畜牧為生.】‘래산(萊山)’은 ‘7,100리(里)’ 서(西)쪽에 있었던 산(山)이란 것을 위의 ‘산해경(山海經)’에서도 이를 확인(確因)할 수 있다.
➨ 「등주(登州), 래주(萊州), 청주(靑州), 서주(徐州)」는, 오늘날의 산동반도(山東半島)에 있을 수 없는 지명(地名)들이다. 사가(史家)들에 의해 동천(東遷)한 대표적(代表的)인 지명(地名)들이다.
더하여 「사기(史記) 오제본기(五帝本紀)」에 의히면 : 〈堯命義仲居郁夷 : 요(堯)의 명(命)으로 희중(羲仲)이 욱이(郁夷)에서 살았다. 嵎夷, 今文尙書及帝命驗竝作. 禺銕, 在遼西. 銕古夷字也 : 우이(嵎夷)는 금문상서(今文尙書)와 제명험(帝命驗)에 나란히, ‘우철(禺鐵)’인데, 요서(遼西)에 있다. 철(鐵)은 옛 이(夷) 자(字) 이다〉라고 하였으니,
➨ 『우이(嵎夷)는, ‘우철(禺鐵)’인데, 요서(遼西)에 있었다』라고 하였으니, 『요서(遼西) 땅에 “구이(九夷)중의 하나인 ‘우이(嵎夷)=욱이(郁夷)’가 있었다”』라는 것이다.
또 〈색은(索隱)은 또 말하기를 : 郁夷亦地之別名也 : 욱이(郁夷)는 또한 땅(地)의 별명(別名)이다.〉
◆ 이에 비춰보면 : 『청주(靑州)니 서주(徐州)니 래주(萊州), 등주(登州)니 하는 지명(地名)들은, 본래(本來) 오늘날의 신강성(新疆省)의 천산(天山) 주변(周邊)의 땅으로 서서히 동천(東遷)하여, 1,900년대(年代)에 오늘날의 산동성(山東省) 바닷가에 자리 잡았다.』라는 것으로 이해(理解)할 수 있는데… …「이것은 사가(史家)들이 그렇게 해설(解說)하여, 왜곡(歪曲)하고 조작(造作)하여 만들어 놓았다」라는 뜻이다.
「우이(嵎夷)의 땅, 웅진(熊津)은, 반도(半島)가 아닌 중원대륙(中原大陸)의 땅에 있었다」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어디에도 “반도(半島)”라고 설명(說明)하는 곳이 없다. 오직 20세기(世紀) 이후(以後)의 사가(史家)들에 의해 만들어진 해설(解說)일 뿐이다.
➥ 『조선사(朝鮮史)의 전체적(全體的)인 구도(構圖)』는, 〈20세기(世紀) 이후(以後)의 실증사학(實證史學)을 빙자(憑藉)한 제국주의(帝國主義) 사가(史家)들에 의해 : 이들의 하수인(下手人)이었던 식민사학자(植民史學者)들에 의해 : 조선사(朝鮮史)는 동천(東遷), 또 동천(東遷)하여 드디어 “반도(半島)” 땅에 내몰리게 된 것이다.」
☛ 〈드디어는, 반도조선사(半島朝鮮史)가 고착화(固着化)되어 : 작금(昨今)의 시대(時代)에는 위에서 보듯이 “묘지석(墓地石)”에서 나오는 중원대륙(中原大陸)의 지명(地名)조차도 반도(半島) 땅으로 비정(比定), 추정(推定)하기에 이른 것이다〉 한마디로 정신(精神) 빠진, 혼(魂)이 빠져나간 자(者)들의 광증(狂症)이다.
“우이(嵎夷)가 어떻게 백제(百濟) 웅진(熊津) 땅이 되겠는가?” 만약(萬若) 「웅진(熊津) 땅이 우이(嵎夷)의 땅이었다」라면 : 「섬서성(陝西省) 장안(長安) 서(西)쪽의 우부풍(右扶風) 땅이 당시(當時)의 웅진(熊津)이었다」라는 이야기가 된다.
➥ ‘한국사(韓國史)와 조선사(朝鮮史)는 같다?’ ‘같을 수 없다’라는 것에 동의(同意)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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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若夫巍巍鯨山,跨青丘以東峙,淼淼熊水,臨丹渚以南流。: 무릇 숭고하고 위대한 경산(鯨山)은 청구(青丘)에 걸터앉아 동쪽으로 우뚝 솟았고, 끝없이 아득한 웅수(熊水)는 단저(丹渚)에 임하여 남쪽으로 흘렀다.》라고 한 곳이다.
곧, 「웅진(熊津)은, 웅수(熊水) 변(邊)에 있다」라는 말과 같은데, 「묘묘(淼淼)란 : 바다 따위가 넓고 끝이 없어 아득함을 일컫는 말이다.」 즉(卽),「“웅수(熊水)”는 바다처럼 넒고 넓어 끝이 없이 큰 강(江)이었다」라는 뜻이다.
반도(半島) 땅에는 “웅진(熊津)”은 웅진성(熊津城)과 웅진도독부(熊津都督府)와 관련(關聯)이 있어 보이는데… …곧 “충청도(忠淸道) 공주(公州)”라고 설명(說明)하고 있는데, 금강(錦江) 중류(中流) 변(邊)에 있다. … …그러나 “넓고 넓은 끝이 없어 보이는 웅수(熊水)는 없다.”
웃기는 이야기가 아니냐! 「웅수(熊水)는 없는데, 웅진(熊津)은 있다.」 이런 것이 바로 “황당무계(荒唐無稽)”한 “해괴망측(駭怪罔測)”한 일이다.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今公州,古節度府也。龍山巽起,熊水坤抱,后土孕靈秀,更代而大振。: 지금 공주는 옛날 절도부(節度府)로서 계룡산이 동남쪽에 우뚝 솟아 있고, 웅진 물이 서남(西南)쪽으로 감돌아 지리적으로 영수(靈秀)한 기운이 배태(胚胎)되어 역대로 크게 떨쳐왔다.》
▪ 공주목(公州牧) : 《형승(形勝) : 李益朴詩。 熊川連海,鷄嶽柱天。➠ 이익박(李益朴)의 시(詩) : 웅천(熊川)은 바다에 접해 있고, 계룡산(鷄龍山)은 하늘을 떠받치고 있는 듯하네. 徐居正 聚遠樓記 : 鷄龍爲鎭,熊津爲襟帶。➠ 서거정(徐居正)의 취원루기(聚遠樓記) : 계룡산은 진산(鎭山)이요, 웅진(熊津)이 금대(襟帶)를 이루었다.》
‘금대(襟帶)를 이루었다’란 말은 : 「산하금대(山河襟帶)를 말하는 것으로, ‘산(山)이 옷깃처럼 둘러 솟아 있고, 강(江)이 띠처럼 감돌아 있는 곳’」을 말한다. 즉(卽), 지리적(地理的 : 地勢) 요충지(要衝地)를 이르는 말이다.
공주(公州)가 바다와 접(接)해 있다? 「공주목(公州牧) : 東至懷德縣界六十九里,至鎭岑縣界六十四里。南至扶餘縣界四十九里,至尼山縣界四十三里,至連山縣界五十三里,至全羅道珍山郡界八十里。西至大興縣界六十九里。北至天安郡界五十七里,至燕岐縣界二十七里。距京都三百二十三里」라고 하였는데, 어디가 바다와 접(接)해 있다는 것인가? 100% 내륙(內陸)이다.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동국(東國)의 지리서(地理書)다. 그러나 “반도(半島) 땅을 말하고 있지 않다” 이는 곧, “반도(半島) 땅은 동국(東國)과는 관련이 없다”라는 뜻이다.」
▪ 《水發龍潭、茂朱二縣,合湊于錦,過永、沃、淸三州,至于公爲錦江,折而爲泗泚,瀰漫逶迤,入于海者,曰熊津。: 물이 용담(龍潭)ㆍ무주(茂朱) 두 고을에서 발원하는데 금산(錦山)에서 합류하여 영동(永同)ㆍ옥천(沃川)ㆍ청주(淸州) 세 고을을 지나 공주(公州)에 이르러서는 금강(錦江)이 되고, 꺾여 사비(泗沘)가 되어서, 넓게 퍼져 흐르는 물을 이루어 길게 구불구불 바다로 들어가는 것을 웅진(熊津)이라 한다.》라고 하였다.
여기서 중요(重要)한 것은 : “웅진(熊津)”을 “곰 나루터”의 한자(漢字)라고 말하지만 : 위의 내용(內容)을 보면 : 「∼ 금강(錦江)이 되고 사비(泗沘)가 되어 넓게 퍼져 흐르는 물이 되어 구불구불 길게 흘러 바다로 들어가는데, 말하기를 “웅진(熊津)”이라고 했다」라는 설명(說明)이다.」 곧 아래의 “대명일통지(大明一統志)”의 설명(說明)과 똑같은 이야기다.
▪ 고적(古跡) : 熊津都督府。《大明一統志云:熊津在故百濟海口。唐置都督府於此。: 웅진도독부(熊津都督府) 대명일통지(大明一統志)에 : “웅진은 옛날 백제국의 바다 어구에 있는데, 당(唐)나라에서 이곳에 도독부(都督府)를 두었다.” 하였다.》
◇ 『내륙(內陸)에 “웅수(熊水)”는 없다. 그러나 “웅진(熊津)”은 있다.』 그러나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서는 「“웅진(熊津)”은 “백제(百濟)의 해구(海口)에 있다.”」라고 분명(分明)하게 설명(說明)하고 있다.
또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의 “금강(錦江)”을 설명하면서 “웅진(熊津)”에 대해 말하기를 : 「∼ 금강(錦江)이 되고 사비(泗沘)가 되어 넓게 퍼져 흐르는 물이 되어 구불구불 길게 흘러 바다로 들어가는데, 말하기를 “웅진(熊津)”이라고 했다」 곧 “바다 어귀에 있다”라는 것이다. 반도사학(半島史學)은, 사학(史學)이 아니라, 사학(死學)임이 분명(分明)하다.
➥ AD 660년(年), 당군(唐軍)에 의해 소멸(掃滅)되었다는 “백제(百濟)”는 “반도(半島) 땅에 없었다”라는 서지적(書誌的), 고고학적(考古學的)인 증거(證據)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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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제(百濟)」는, “반도(半島) 땅에 있었다”라고 말하는 반도사학자(半島史學者)들에게 필자(筆者)가 말하고 싶은 것은, 「“자연환경(自然環境)”과 “인간의 삶”에 대한 연구(硏究), 영토(領土)의 면적(面積), 방위(方位) 등에 대한 기초지식(基礎知識)을 더 쌓으시고 역사해설(歷史解說)을 하셔야 한다.」〉라고 말씀드리고 싶고,
또 〈「15세기(世紀) 이전(以前)의 전쟁사(戰爭史)에 대한 무지(無知)를 깨우치셔야 하고, 원전(原典) 원문(原文) 구절(句節), 구절(句節)을 하나하나 꿰뚫어 볼 수 있어야 한다」라고 말씀드린다.
“예(例)”를 들어 「반도(半島) 땅에서 서방(西方)은, 곧 중원대륙(中原大陸)이고, 아조(我朝) 곧 우리나라 조정(朝廷)에서 볼 때 서변(西邊)이란 서해(西海) 연안(沿岸)의 땅일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그런데,
「중원대륙(中原大陸)에서 무슨 일이 있다고 해서 우리나라 서해(西海) 연안(沿岸) 땅에 무슨 일이 연관(聯關)되어 일어날 수 있나?」 반만년(半萬年) 역사(歷史)를 들추어봐도 이런 일은 없다.
그러나 왕조실록(王朝實錄)에서는 : 「중원대륙(中原大陸)에서 무슨 일이 있거나 일어난다면 : 이는 곧 우리나라 서방(西方) 땅에 큰 영향(影響)을 미치는 것」이라고 줄줄이 말하고 있다. 이게 무슨 뜻일까?
바로 「조선(朝鮮)의 서(西)쪽은 바다(海)에 막힌 것이 아니라, 육지(陸地)로 서로 이어져 있다(連接)」라는 뜻이다. 아무리 무식(無識)해도 서(西)쪽과 북(北)쪽도 구분(區分)하지 못한다면? 모른다면? 무얼 어쩌란 것일까? 막무가내(莫無可奈)로, 무대포(無鐵砲)로, 미친 척하는 것도 정도(程度)가 있는 것이다.
2026년 03월 28일 [글쓴이 : 문무(文武)]

첫댓글 * 다음 편에서는 : 조선 영토와 사막지대에 대한 "규원사화"의 기록과 함께 알아보기로 합니다.
(1) 혹자들은 규원사화속의 기록 내용중에 17세기에 사용하지 않았던 말이 기록되어 되어 위서임이 틀림없다고 말하며,
(2) 또 혹자는 이것을 감정해 보니 17세기의 기록이 맞다라고 합니다.
(3) "규원사화"가 위서가 아니라는 것은 : 그 기록을 보면 알 수 있는 것인데... ...또 규원사화가 발굴된 것이 일제강점기와 맞물립니다.
일제가 이러한 민족주의적 사서를 그대로 두었다? 이건 너무 순진(?)한 이야깁니다.
순진한 것도 종류가 있는데... ...남에게 이용당하기 꼭 좋은 "순진"함도 있습니다.
(4) 당연히도 일제가 적당하게 참삭하여 시중에 유포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한 것이고, 그래서 이병도를 위시한 학자들은 "위서"라고 강력하게 주장했던 이유가 바로 이런 겁니다.
* 위서이든, 진서이든... ...그 기록이 역사적 사실과 부합된다면 : 사서로써 당연히 대접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식민사학자들은 규원사화속에 기록된 역사적 사실을, 솔직히 : 절대로 감당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규원사화에서 말하는 것은 : '중원대륙의 땅'을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의 일본 학자들도 답답하기는 마찬가지라고 봅니다.
남아세아에 있었던 왜와 일본을 오늘날의 열도에 맞춰놓고 보니 ; 옛 사서속의 기록을 어떻게 하든지 지우든가, 해설을 열도로 만들어 놓아야 하는데.... ...지연환경적 요소는 조작할 수가 없으니... ...얼마나 답답하겠습니까?
장안에서 "예군'의 묘지석이 발견되니... ...한참 뒤에 공개되니, "발끈하며 얼굴을 붉히며 열을 냈다고 전해지는데.. ... "
그런데... ...대한민국의 학자님들은 어떤 표정을 했을까? 궁금합니다.
문제는 오늘의 중국 당국이 100% 그대로 "공개'를 하겠는가? 하는 가장 핵심적인 문제가 또 대두됩니다.
백제가 대륙 땅에 있었다면 : 당시의 중국 왕조들은... ...백제의 속국이었다(또는 고구려의 속국, 또는 신라의 속국)는 이야기가 되어버립니다. 이래서 중국과 대한민국, 일본은 역사적인 사실에 있어 : 결코 양보는 없다는 것입니다.
양보하는 쪽은 곧 속국의 백성들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대한민국은, 마음이 큰 것인지, 너무 너무 순진하신건지, 속국(제후국)임을 자인합니다.
제대로 연구도 해보지 않고 말입니다.
지리서를 보면 :
오늘날의 반도 땅과 부합되지 않는 많은 기록들을 볼 수 있는데.. ...왜? 이런 질문이 있어야 하는데... ...한국의 사학자들이나 공부하는 학생님들은... ...동서남북도, 기후도, 토산물도, 땅의 넓이도, 도회지와의 거리도 생각하지 않고, 그냥 외우기만 하는 것 같습니다.
동쪽 수천리,
남족 5천리 하는 것에는 '기록의 잘못이나 오류등으로 납땜하는 식으로 얼버무리는 것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규원사화 연구도 마찬가지라고 봅니다.
그 속에의 내용이 중요한 것이지... ...1천여년 전의, 오백여년 전의, 일백여 전의 역사적 사실을 기록했다면 : 그건 사서로써의 정당한 대접을 받아야 합니다.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풋내기들이 위서다 진서다 호들갑을 떨어봐야... ...헛소리만 들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더 많은 정보를 게재하고 싶지만, 시간이라는 애로가 가로 막고 있습니다.
회원 여러분들에게 감사드리며, 늘 건강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