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벌서 양띠해가 며칠 지나가고 있습니다. 존경하고 사랑하는 해사 15기
동지들 ! 한살 더 먹었습니다. 이럭 저럭 흥남부두에서 형님 뒤 따라 무언지도
알리가 있겠습니까 ?? 지금 65년전이니 아물 아물 하지만 분명히 LST 탱크
갑판에 자리 잡은것 같앴어요. 영하 20도는 넘었을겁니다. 그래도 주먹밥이 어디서
왔는지 먹으면서 궁궁 배의 엔진소리가 들리고 ... 만 48시간이 걸렸다고 야단들...
피란민들이 모 - 두 상갑판으로 올라갔어요. 아 - 왜 흰눈을 가르고 걸었는데 여기
저 산을 쳐다보니 눈은 하나도 없고 겨울인데 산이 푸른가...아 - 남쪽나라 어느
열대지방인가...?? 촌놈이 어리 둥절하고 들떠 있었지요. 바로 거기가 거제도
장승포 sand beach!! LST 가 몇척인지 좌우지간에 하선시작 장승포 국민하교
마당에서 Group 짜서 어디론가 배치 하는데 이북에서 가져온 붉은 돈이 못 쓰게
되니까 마당 여기 저기 바람에 날려 떠다니고 이제 부터 주먹밥 배급이 시작...
어떻게 하면 밥은 먹겠지 .... 나이 들고 어리고 무슨 선후 앞뒤도 없이 살기 위
해서 지금 부터 아우성이 시작 되였습니다. 당장에 어데서 자고 먹고??
약 2시간은 걸었을까?? 우리 함경도 촌사람들 구조라리 국민학교에 수용 배치
받어 국민학교 교실에 거지 누더기 가마니 깔고 서로 안고 자는지 마는지....
그래도 먹어야 하니 미군 깡통에 안남미 쌀 배급 받아서 밥을 짓는겁니다.
밥이 제대로 될 이가 없지요. 해 봐야알지요...밥이 3층이라고 서로 떠들면서
소금으로 반찬 아니면 짠무가 유일한 반찬인데 그렇게 꿀맛이던 생각이 지금도....
하루 밤 자고 나면 서로 먹는 이야기와 어데서 뜬 소문 듣고 와서 국군이
곧 북진하여 빨갱이 잡을 날 얼마 남지 않았고 유-엔군이 다시 진격한다고
서로 얼굴 쳐다 보면서 피란민 거지 생활이 시작되었습니다. 아 - 무도 모르고
정말 No body know...! 그래도 한줄기 희망은 곧 북진하면 고향 돌아 간다고...
그렇게 하여 2개월 쯤 지나니 부산항에 가면 미군 물자 나르는 일이 있다고
자고 나면 하나 둘씩 빠져 나가기 각자 살기 위해서 자기 길을 찾아 나셨습니다.
본인도 살기 위해서 부산 건너가서 영도(섬)의 제일 산 중턱에 피란민 바락 촌에
기여 들어 가고 기여 나오는 바락크집 비가 오면 여기 새고 ....1951년 봄 쯤 기억
합니다. 제1부두는 군수 물자 운반하는 부두 일이 너무 힘들어서 도저히 할 수 가
없어서 영도섬 입석부두에서 물자는 전부 먹는것 Rations...순 식량운반인데
여기는 군수물자가 전부 tent속에 보관되어서 아침 식사는 tent속에서 can을
cutter로 까고 야채, 파인애풀, 없는게 없이 밖에서 일진은 망을 보고 안에서는
진수성찬이 벌어지고 ...얼마나 빨리 처리 하였던지...5분도 안걸리고 만끽 입
싹 - 닦고 나면 힘도 의욕도 눈치도 ... 사는 재미는 국민학교 피란살이 보다야
훨신 좋았습니다. 일단 먹고 자는것은 해결 되어 가고 있었습니다.
그 때 tent 속에서 잘 - 먹고 많이 성장한것 같앴어요. 회상해 봅니다.
인간이 배만 부른다고 사는게 아니기 시작했습니다.
유별스레 나는 고민이 일어나기 시작하였는데
남쪽에 왔으니 남들 처럼 공부해야 되지 않겠는가. 이렇게 매일 얌새이(음식
훔쳐먹음)나 하고 ...이게 아니다. 이때만 해도 형님과 같이 천막생활과 부두노동을
하였습니다. 형님은 이북에서 결혼해서 조카들도 있었습니다. 저야 별천지에
왔으니 의심도 꿈도 의욕도 공부도 .... 생각과 고민이 일기 시작하였습니다.
형님은 혼자서 대구로 가고 나는 친국들과 부두노동 계속하다가 얼마 안 있어
형님 따라 대구에 갔는데 형님이 무슨 재주가 있었는지 와이샤쓰 상자 만드는
수공업 일인 공장을 차리고 손수 만들어서 납품하고 있었습니다. 대구 내당동
제일 빈민촌이였습니다. 형님은 이웃 사람들과 잘 - 친해서 경상도 촌 여자와 살고
여조카도 나고 경상도 사람이 되어가고 있었어요. 형님이 만든 와이샤쓰 상자를
Drum통으로 만든 구루마(달구지)에 실고 시내 까지 운반 하는게 나의 일이였습니다.
가는 도중에 여학생 남학생들을 만나면 그렇게 부럽고 창피하기도 하였습니다.
꼴모자 꾹 박아 쓰고 매일 상자 운반 하는 일에 시간이 너무 아깝기 시작하였습니다.
안되겠다. 형님 밑에서 일 하며 자고 먹는것은 해결 하는데 독립하여 학비도 벌고
학교도 야간이던 어데든지 가야 겠다는 결심이 생겼습니다.
여기 저기 나를 좀 일하게 해 달라고 용기 내서 찾아 나셨는데 형님집 보다
시내 지금의 만경관 극장 가까이 鎭盛園이란 중국요리 집에 자짱면 배
달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아직도 이북에서 중학교 교복에 中이라는
노 - 란색 단추가 달려 있는 우아기 입고 있었습니다.
여기는 역시 우동 먹고 자는 방도 있고 세상 먹고 살아 가는데 지장이 없었고 잘 -
먹고 튼튼해서 힘도 쎄여지고 가까이 대구고등학교가 있어서 평행봉 운동 철봉운동
무럭 무럭 우동 잘 먹고 튼튼해 지기 시작하였습니다. 알통도 생기고....일기장도
빼지 않고 썼는데 어떻게 하면 나도 공부 할것인가 ??? Where there's a will, there's
a way! 뜻이 있는곳에 길이 있다! 有志處在道라고 하였지.... 열심히 우동 배달 소년
키도 몸도 좋아지기 시작하였습니다. 웃기는 Episode 하나 집고 넘어가야 겠습니다.
초가을이였나 보다 가을이면 그때만 해도 구둘 온돌방 수리 할 때였어, 우동배달
3층으로 고급요리 9접시 무겁게 들고 그날 따라 가을 비가 소리 없이 내렸다.
여관집 대문 옆에 진흙으로 덮여진 뾰족한 땅을 밟았는데 진흙에 미끌어 지면서
넘어졌다....큰일 났구나..그 비싼 9개의 접시와 빽알 술이 뒤범벅이 되어 못 쓰게
되었다. 코가 한발은 빠졌을거다. 이다바(chef) 앞에 무릎 꾸고 머리를 떨구었다.
무슨 소린지 "말라가 초 비야를 계-속 큰소리도 나를 보면서 해대는데
무슨 말인지 몰랐다. 나중에 알아보니 "씹할놈..제-기랄..."이런 나쁜
욕이 였다는걸 알았다. 65년의 세월이 흘러서 가끔 할매하고 "초말라가
비야..." 배꼽 뺄 때도 있으니 .... 또 하나 Episode 는 얼마나 먹나 실험
했는데 자그마치 보통 우동 8그릇 비우고 한시간에 한번 이상 소변 보기에
날랑 들랑 한적도 있었다. 얼마나 배곺았으면 보통 우동 여덟그릇 ....얼마나
되나 Bucket에 담아보니 한 바겟쓰 였다.....오늘은 여기서 stop 하겠습니다.
첫댓글 아 ! 친구여 ! 그 고생이 눈앞에 보이는 듯하오 !
의전 읽어 주셔서 감사하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