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축구의 영웅들
대한축구협회 엮음
Ⅰ 김용식
불꽃처럼 살다 간 '축구의 신'
한국 축구의 대부
축구는 김용식, 그가 이 세상을 사는 존재 이유였다.
이 풍진 세상 무슨 낙으로 사느냐고 물으면 축구 경기를 하는 재미 덕에 산다고 대꾸할 그런 사람이었다. 축구는 칠십 고령의 그에게 15평짜리 아파트 하나만을 남겨 주었지만, 그 평수 몇 배의 기쁨과 행복도 함께 주었으니 괜찮다고 말할 그런 사람이었다.
그런 까닭에 김용식은 '축구의 화신'이 되어 한평생을 미련 없이 축구 하나에 투신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는 오로지 축구 생각뿐이어서 몇 번의 기회가 있었음에도 돈벌이에도 명예에도 무심했다. 20대에 모교인 보성전문학교(현 고려대학교, 이후 '보전'으로 약칭)에서 제시한 강사 직을 실력 없어 못한다 거절한 것이나, 금성방직에서 영어 실력을 인정해 권했던 이사 직함도 분수에 안 맞는다며 자청해서 경비과장을 보다 그만둔 것 모두 업과도 같은 축구와의 정분을 떨쳐 버릴 자신이 없어서였다. 이 세상에서 오직 축구만이 그릴 살맛 나게 하고 행복하게 했기 때문이다.
김용식의 축구 사랑, 그건 한 줄기 타오르는 불꽃과도 흡사했다. 그 화염에 닿으면 속세에서 귀하게 여기는 돈이나 명예, 사랑, 심지어 가족애까지 다 타서 재가 되거나 그 안에서 녹아 없어졌다. 그 모든 것이 한낱 축구 사랑의 불꽃을 더 뜨겁게 달구는 불쏘시개 역할을 할 뿐이었다.
불운하게도 일제 강점기에 태어난 그는 일제 때는 극일, 항일의 울분으로 공을 찼고, 광복을 되찾은 조국에서는 국가 대표 선수, 대표팀 코치 및 감독으로 축구를 통해 대한민국을 만방에 알리고자 신명을 바쳤다.
그는 축구를 잘하는 것이 애국 애족하는 길이라고 소박하게 믿고 있었고, 기회만 닿으면 주변에 그런 믿음을 전파하고자 했다.
그렇게 불꽃으로, 축구의 화신으로 살다 죽어서 마침내 이제 '축구의 신'이 된 사람, 그 이름이 바로 김용식이다.
'축구인 김용식'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말은 꽤 많은 편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한국 축구의 대부'라는 호칭 또는 존칭일 것이다. 만년에 그가 살던 서초동 아파트의 이웃 주민들은 그를 '축구 할아버지'란 애칭으로 부르기도 했다. 불혹의 나이 마흔세 살까지 국가 대표 유니폼을 입고 경기장을 누볐음은 물론 은퇴 후에도 대표팀 코치 및 감독으로 축구를 통한 나라 사랑에 혼신의 노력을 다했으니, 그런 존칭도 당연한 터다.
그의 평생 꿈은 오직 하나, 축구 사랑과 함께 한국 축구를 남보란 듯 세계무대에 우뚝 세우는 것이었다. 이 목표 달성을 위해 그는 일찍이 선각자적인 안목으로 2세 양성을 위한 유소년 축구단 및 성인을 위한 프로 축구단 창설을 역설하곤 했다.
말뿐 아니라 스스로 '1만 일 개인기 훈련'이란 도무지 믿어지지 않을 시범을 보임으로써 후세를 지속적으로 깨우치고 한국 축구가 가야 할 올바른 방향을 제시하고자 했다.
이미 꽤 알려진 그의 '1만 일 개인기 훈련'에 관련된 이야기는 들을수록 이채롭다. 그 동기 및 과정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936년 11월, 일제 강점기에서 조선 청년으로는 유일하게 일본 국가 대표팀에 선발되어 베를린 올림픽에 출전했다가 고배를 마시고 돌아오는 뱃길에서 김용식은 아시아팀이 유럽이나 남미팀에게 번번이 지는 원인이 무엇일까를 곰곰이 생각했다. 문득 그들에 비해 개인기가 떨어지는 게 아닐까 싶었다.
'그렇다. 개인기를 기르도록 하자. 기왕 시작할 바엔 세계 제일의 선수가 되기 위해 1만 일을 정해 놓고 정진하자. 그리고 이 운동이 앞으로 전국적으로 확산해 축구 강국의 밑거름이 되게 하자.'
그는 그 자리에서 스스로 자신에게 다짐했다. 그리고 귀국 직후인 1936년 11월 15일부터 개인기 훈련에 들어갔다.
1만 일이면 도대체 얼마의 세월인가. 보통 사람은 상상도 못하고 엄두조차 내지 못할 그 불가사의한 목표가 달성된 건 훈련을 시작한 지 42년 2개월이 지난 1979년 1월 15일. 그의 나이 일흔 되던 해의 일이었다. 스물일곱의 청년이 어느새 머리에 서릿발이 날리는 칠순 노인이 되었을 때다. 도무지 믿어지지 않을 일을 김용식은 날마다 훈련 일지에 날짜를 계산해 가면서 기록을 했다.
1만 일이면 단순 계산법으로는 27년 145일이 된다. 그러나 그 오랜 기간 부득이한 사정으로 건너뛰는 날도 있었고 중간에 한국전쟁이 일어난 통에 42년 2개월로 마감 날짜가 연장된 것이었다.
이 같은 일은 축구를 그저 하나의 단순한 구기 또는 생계의 방편으로 치부하는 요즘 세태에선 도무지 공감이 안 되는 이야기다.
김용식이 이 같은 엄청난 일을 마치 일상사처럼 해냈다는 것은 그가 평소 축구를 자기의 운명과 동일시하고 있었다는 증표가 된다. 사사로움이 범접할 수 없는 구도의 정신력 없이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돌이켜 보면 축구는 그에게 구기가 아닌 구도의 길이었다.
현실적으로도 그는 평생을 오직 축구에 바친 구도자적 삶을 산 인물이었다. 깊게 팬 주름살과 엄격하고 바르면서도 다시 보면 따뜻하게 느껴지는 인상이 꼭 탈속한 수도승이나 성직자를 대하는 것 같았다는 게 만년에 그를 만나 본 이들의 공통된 견해다.
"김용식은 축구를 통해서 한 인간이 가 닿을 수 있는 가장 높은 경지에 도달했던 사람입니다."
그들의 평가는 결코 과장된 말처럼 들리지 않는다.
옮긴이: Zlatan 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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