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조(宣祖)의 후궁인 인빈 김씨(仁嬪金氏)가 졸하였다. 【빈은 의안군(義安君)ㆍ신성군(信城君)ㆍ원종 대왕(元宗大王)ㆍ의창군(義昌君) 등 네 군과 다섯 옹주(翁主)를 낳았는데, 술수가 있어 미봉을 잘하였다. 그 아우인 김공량(金公亮)이 천한 관리로서 이산해(李山海) 부자와 서로 결탁하였는데, 이산해가 드디어 유언비어로서 궁궐과 내통하여 대신을 참소해 떠나게 하였다. 이때부터 빈이 정사에 간여한다는 비난을 받았고 이산해도 역시 사론(士論)에 버림을 받았다. 왕의 어머니인 공빈(恭嬪)이 본래 인빈과 틈이 있었는데, 공빈이 산병(産病)으로 죽자 인빈이 그 대신이 되었다. 왕의 형제에 대한 총애는 드디어 줄어들었고 산해가 대신을 참소한 것은 이 기회를 틈탄 것이었다. 왕의 형제가 이 때문에 인빈을 매우 원망했으며, 인빈의 집안 사람들도 역시 인빈을 위해 그를 위태롭게 여겼다. 왕이 동궁에 있을 때 자주 선조의 뜻을 잃자, 대비 이하 여러 후궁들이 동궁을 대할 때 불경한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빈만은 유독 동궁을 후하게 섬겨서 바라는 바를 모두 은밀히 상에게 아뢰어 이루어 주었다. 유영경이 정인홍을 공격할 때 선조가 한창 동궁에게 노여움을 가졌으나, 빈이 변명을 하여 풀어졌다. 왕이 즉위한 뒤 임해군의 옥사가 일어나자 빈이 궁중에서 힘을 썼기 때문에, 원종 대왕과 의창군이 모두 정사 공신(定社功臣)에 참여할 수 있었다. 왕이 일찍이 말하기를 “내가 서모(庶母)의 은혜를 받아서 오늘이 있게 된 것이니, 그 의리를 감히 잊지 못한다.” 하였다. 이 때문에 빈이 죽을 때까지 원종 대왕 형제들이 모두 탈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