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종 즉위 후 이자겸의 전횡을 [고려사]에서는 이렇게 전한다.
“자기 족속을 요직에 포열하고 관작을 팔았으며, 당인을 많이 심어 스스로 국공이 되고 예우를 왕태자와 같게 하며, 그 생일을 인수절(仁壽節)이라 부르고 내외가 하례하는 글도 전(箋)이라 칭하게 하였다. 여러 아들이 다투어 제택(第宅)을 지어 가로에 잇닿았고, 권세가 더욱 성하게 됨에 뇌물이 공공연하게 행하여져 사방에서 선물이 모여들어 썩어가는 고기가 항상 수만 근이나 되었다. 남의 전토를 강탈하고, 그 종들을 내놓아 차마(車馬)를 노략하여 자기의 물건을 수송하니 주민들이 모두 수레를 부수고 소, 말을 팔아 도로가 소란스러웠다.”
이러한 이자겸의 작태를 못마땅하게 여긴 것은 예종에게 총애를 받았던 신료 한안인이었다. 한안인은 이자겸이 조회에 잘 나오지 않고 주요 국사를 집에서 처리하며, 뇌물을 받고 관직을 남발하는 것을 비난하였다. 평소 한안인을 못마땅하게 여겼던 이자겸은 한안인을 역모죄로 몰았다. 한안인이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과 자주 회동하는 것을 빌미 삼아 예종의 동생 대방공 왕보를 임금으로 추대하는 역모를 꾸민다고 모함한 것이다. 이 사건으로 이자겸은 한안인을 귀양길에 암살하고 그와 관련한 사람들 50여 명을 유배하거나 벼슬에서 내쫓아 권력 기반을 공고히 하였다. 한안인을 제거한 이후에는 그를 싫어하는 예종 대의 여진정벌의 공신 최홍재 등을 욕지도로 유배 보내 중앙 권력무대를 독차지하게 되었다. 이로써 확고하게 권력 기반을 구축한 이자겸은 조선국공(朝鮮國公)이라는 책봉을 인종에게 강요하였고, 조서에 이름을 쓰지 않고 경으로 부르지 않게 하는 특혜를 받아내기도 하였다. 실제로 이자겸은 인종을 손가락질로 부르기까지 하였다고 한다. 아무리 외손자이자 사위이기는 하나 한나라의 국왕을 손가락으로 부른다는 것은 신하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자겸은 자신의 집에 의친궁 숭덕부라는 이름을 붙이고. 자신의 생일을 인수절이라고 부르기까지 하였다. 생일에 ‘절’을 붙이는 것은 왕이나 태자에게만 허락되는 것이었다. 이자겸의 방자함이 여기까지 이르자 김부식 등이 반발하여 이를 공식화시키는 것은 무산되었지만 실제로 이자겸 본인이나 그에게 아부하는 자들은 이자겸의 생일을 ‘인수절’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외교에서도 이자겸의 전횡은 끝이 없었다. 그는 사사로이 송나라에 사신을 보내 표(表)를 올리고 토산물을 바치는 등 국왕처럼 행동하였다. 또한 자신을 스스로 지군국사라고 칭하기까지 하였다. 지군국사란 국사를 처리하는 직책이라는 의미이다. 또한 금나라가 강성해지자 다른 신하들이 금과 사대관계를 맺는 것을 반대함에도 불구하고 정적을 모두 제거한 이자겸은 자기 마음대로 금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군신관계를 맺기도 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