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以心傳心(이심전심)
以:써 이, 心:마음 심, 傳:전할 전.
어의: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하다. 언어나 문자를 매개로 하지 않고 깨달음을 느낌으로 전한다는 의미로 쓰인
다.
문헌: 선문염승(禪門拈頌)
이심전심은 선종에서 깨달음의 극한 뜻을 전하는 것으로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달하는 심심상인(心心相印)이라는 말이다 비슷한 말로 염화시중(拈華示衆), 염화미소(拈華微笑), 삼처전심(三處傳心) 등이 있다.
석가모니가 마갈타국 영취산에서 여러 제자들을 모아 놓고 법을 설하던 중 꽃을 들어 대중에게 보였다. 제자들이 자신의 가르침을 제대로 알고 있는가를 보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아무도 석가모니의 뜻을 모르는 듯했다. 그런데 대가섭(大伽葉)만이 뜻을 알고 빙그레 웃어 보였다. 그러자 석가모니는 가섭에게 정법안장(正法眼藏), 열반묘심(涅槃妙心), 실상무상(實相無相), 미묘법문(微妙法門), 불립문자(不立文字), 교외별전(敎外別傳) 등 불교의 진리를 전해 주었다.
여기의 교외별전이란 교리 외 다른 가르침을 말하며, 불립문자란 진리는 문자로 표현할 수 없다는 뜻이다. 이심전심은 우리 역사와는 상관이 없지만 많이 쓰이는 불교(佛敎)용어이기에 소개한다.
(임종대 편저 한국 고사성어에서)
耳言致富(이언치부)
耳:귀 이, 言:말씀 언, 致:모을 치, 富:부자 부.
어의: 귓속말로 돈을 벌다. 흥선대원군의 고사에서 유래했다. 지위가 높은 사람에게 아부하여 원하는 것을 획
득하는 경우를 이른다.
문헌: 매천야록(梅泉野錄)
흥선 대원군(興宣 大院君.1820~1898)의 자는 시백(時伯)이고, 호는 석파(石坡)이다. 흥선군은 정권을 잡기 전 안동 김씨의 세도 밑에서 살아남기 위하여 파락호(破落戶) 형세를 하며 궁도령(宮道令)으로 세월을 보냈다. 그러다가 후사가 없던 철종(哲宗)의 후임으로 자신의 둘째 아들 명복(命福)이 고종(高宗)으로 즉위하자 하루아침에 대원군(大院君)이 되었다. 그 후 섭정을 통하여 많은 개혁과 과감한 정치를 하여 그 치적이 컸다. 반면에 쇄국정책을 끝내 고집함으로써 나라를 국제적으로 고립시킨 것은 그의 실정이었다.
그는 외척(外戚)의 아성인 안동 김씨의 주류를 숙청하는 한편 당색을 초월하여 인재를 등용했다. 그리고 부패한 관리를 적발하여 파직시키고, 법률제도의 확립을 통해 중앙집권 정치의 기강을 확립했다.
그가 권력이 집중되는 자리에 있게 되자 그에게 아첨하는 자가 한 둘이 아니었다. 그중에 옛날 기방에서 대원군을 몹시 괴롭히던 안동 김씨 한 사람이 찾아와 발아래 엎디어 그동안 잘못했노라고 싹싹 빌었다. 그러자 대원군은 그를 용서함은 물론이고, 뜻밖에도 소원을 말하라고 했다.
그는 기다렸다는 듯이 ‘소인이 매일 찾아뵙고 문안을 드릴 것이오니 그때마다 제가 대감님의 귀에 귓속말 세 마디씩만 하게 하여 주십시오.’ 했다. 대원군은 ‘그놈 별난 청을 다 하는구나.’ 생각하고 쾌히 승낙하였다.
이튿날부터 그자는 곡 운현궁에 손님이 많이 있을 때에만 들어와서 대원군에게 귓속말을 했다. 그러나 정작 별로 특별한 내용이 없었으므로 대원군이 적당히 대꾸하면 그자는 정색을 하며 말했다.
“안 됩니다. 그럴 수야 있습니까?”
또 어떤 때는 이렇게 말했다.
“최선을 다하여 분부 받들겠습니다.”
그곳에 있던 여러 손님들은 그 광경을 보고 모두 깜짝 놀랐다. 당시 대원군 앞에서 감히 ‘안 됩니다.’ 라고 대답하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주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그를 대단한 사람으로 생각해서 그자와 가까이 하고자 그 집은 문전성시(門前成市)를 이루었고, 얼마 안 되어 큰 부자가 되었다.
그자는 하찮은 벼슬아치보다는 치부를 하는 것이 훨씬 낫다고 생각하였으니, 대원군보다 한술 더 뜨는 농간(弄奸)꾼이었다.
(임종대 편저 한국 고사성어에서)
李莞之密(이완지밀)
李:성 이, 莞: 빙그레할 완, 之:어조사 지, 密:몰래 밀.
어의: <이완>의 치밀함을 이르는 말로, 조선 효종 때 훈련대장 이완에게서 유래했다. 자기의 소임을 주도면밀
하게 처리하는 경우를 뜻한다.
문헌: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고금청담(古今淸談)
조선 제16대 인조(仁祖. 1595~1649) 때 이괄(李适)의 난을 평정했던 무신 이완(李莞. 1579~1627)은 경기도 여주에서 이수일(李守一)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이순신(李舜臣)의 조카로서 장군을 보필했는데, 이순신 장군이 노량해전에서 전사하자 그 사실을 알리지 않고 독전(督戰)하여 승리를 거두게 했다. 정묘호란(丁卯胡亂) 때에는 압록강을 건너 싸웠으나 중과부적으로 패하자 병기고에 불을 지른 후 뛰어들어 분사(焚死)했다.
그는 어릴 때부터 남다르게 장난이 심하여 보는 이들의 가슴을 졸이게 했다.
그가 일곱 살 때, 하루는 그의 아버지가 볼일이 있어 출타하고 큰 사랑이 비게 되었다. 완이는 넓고 깨끗한 장판방에서 혼자 놀다가 벼룩을 발견했다. 그는 벼룩을 잡으려고 쫓아다니면서 송곳으로 내리 찔렀다. 삽시간에 방바닥이 송곳 자국으로 벌집이 되었다.
마침 청지기가 들어와 그 광경을 보고 깜짝 놀라서 말렸다.
“도련님, 이게 무슨 짓이오? 아버님께서 돌아오시면 꾸지람을 들을 줄 모르시오?”
그러나 완이는 송곳을 뺏어들더니 아랫목 벽에 달라붙은 벼룩을 힘껏 내리 찔렀다. 그때 아버지가 외출에서 돌아왔다. 청지기는 넙죽 엎드려 벌벌 떨며 고했다.
“애기 도련님이 송곳으로 벼룩을 잡느라고 장판을 이렇게 만들었습니다.”
“그래, 잡기는 했느냐?”
“네! 잡았습니다.”
“그럼 됐다. 사내는 하고자 하는 일은 끝까지 해내는 그런 기백이 있어야 하느니라.”
그러고는 아들의 머리를 한번 쓰다듬어 줄 뿐 망가진 장판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완의 집 대문 밖에는 조그마한 대장간이 있었다. 그곳의 대장장이는 주로 말편자나 징을 만들었는데, 편자를 만들면 땅바닥에 획 던져두었다가 다 식은 후에 모아서 목판에 담았다. 이완은 가끔 밖에서 그 편자를 만지작거리면서 놀다가 돌아가곤 하였다.
대장장이는 대갓집 도련님이라 만지고 장난을 쳐도 그러지 말라고 야단을 칠 수가 없어 그냥 두었다.
그런데 어느 날, 무심코 이완을 보니 편자 한 개를 집어 얼른 바지 속 사타구니에 끼고 어기적거리며 집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다음날도 그랬다.
대장장이는 괘씸한 생각이 들었으나 나무라거나 빼앗았다가는 괘씸죄에 걸려 좋지 못한 일을 당할까 두려워서 은근히 제지(制止)할 방법을 찾았다.
다음날, 대장장이는 이완이 나올 때쯤 되어 아직 다 식지 않은 편자를 마당에 던져두었다. 그런 다음, 이완이 편자를 훔칠 틈을 주느라고 슬그머니 뒷문으로 나가 문틈으로 살펴보니 아니나 다를까 방금 던져놓은 편자를 얼른 사타구니에 끼우고 일어서는 것이었다. 그러나 덜 식은 쇠라 뜨거운지라 그만 털썩 주저앉아서 엉덩방아를 찧더니 아무 말 없이 집으로 들어갔다.
조금 있다가 이완이 큰 수밀도(水蜜桃) 두 개를 들고 나왔다.
대장장이가 능청스럽게 말했다.
“도련님, 그 복숭아, 저도 하나 주구려.”
“그럴까?”
이완은 선선히 내주었다. 대장장이는 얼른 받아서 덥석 한입 물었다. 순간 펄쩍 뒷면서 얼굴을 찡그렸다.
“에쿠! 똥이잖아. 퉤! 퉤! 퉤!”
이완은 그제야 혀를 낼름 내밀어 약을 올리며 말했다.
“이놈! 양반을 속였는데 그 아가리에 똥이 안 들어갈까!”
얼마 뒤, 나라에서 갑자기 전국의 대장간에 칙령을 내렸다. 말편자 다섯 섬씩을 조정으로 보내라는 것이었다.
대장장이는 사람을 더 고용하여 밤낮으로 만들었지만 다섯 섬은커녕 석 섬도 만들 가망이 없었다. 그 소식을 들은 이완은 하인을 시켜 그동안 광에 쌓아 두었던 편자들을 모두 꺼내어 대장장이에게 보냈다. 대장장이가 크게 감읍한 것은 당연했다.
세월이 흘러 효종(孝宗. 1619~1659) 때였다. 이완은 국방을 책임지는 훈련대장(訓練大將)이 되었다.
어느 날 밤, 모처럼 집에서 마음을 놓고 자고 있는데 긴급한 일이 있으니 즉각 입궐하라는 칙령이 내렸다.
그런데 깊은 밤중에 부르시는 것이 아무래도 심상치 않았다. 그래서 조복 속에다 갑옷을 감춰 입고 나섰다. 대궐문을 막 들어서는데 일시에 화살이 빗발치듯 날아왔다. 영문을 모르고 황황한 걸음으로 어전에 들어서니 효종이 말했다.
“허!허!허! 참, 장하오. 장수는 언제나 주밀하여야 하는데 과연 이 대장은 빈틈이 없구려. 내 이 대장의 마음 자세를 한번 시험코저 함이었소.”
잠시 담소를 나눈 뒤 퇴청하려 하자 효종은 황모대필(黃毛大筆)한 자루를 하사하였다.
이완이 집으로 돌아와 생각하니 임금이 대필을 준 데에는 무슨 뜻이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칼로 붓대를 쪼개어 보니 돌돌 말린 종이쪽지 하나가 들어 있었다.
‘금일 인시(寅時)에 대장휘하의 군을 인솔하고 남대문으로 입성하여 삼문을 두드려라.’
“성루에 쌓여 굳게 닫힌 남대문을 어떻게 진입할꼬?”
걱정이 앞선 이완은 잠시 생각하다가 군사들에게 자루를 하나씩 가지고 노들나루에 가서 모래를 담아 남대문 성벽에다 기대어 쌓게 하였다. 그러고는 날이 밝기 전에 군사들을 이끌고 남대문 성벽을 넘어 대궐로 진입하였다.
“상감마마. 지금 훈련대장 이완이 군사를 몰아 궐문으로 들어오고 있습니다.”
보고를 받고 뛰쳐나온 효종은 이완을 불러 노고를 치하하고 돌아가게 했다.
역시 효종은 국가안위를 책임진 대장으로서의 주밀함을 시험했던 것이다.
(임종대 편저 한국 고사성어에서)
泥田鬪狗(이전투구)
泥: 진흙 니. 田:밭 전, 鬪:싸울 투, 狗:개 구.
어의: 진흙탕에서 싸우는 개라는 말로, 서로 헐뜯거나 다투는 것을 이른다. 원래는 함경도 사람의 강인한 성격
을 평한 말이었다.
문헌: 대동기문(大東奇聞)
조선의 태조(太祖)가 공신 정도전(鄭道傳. 1337~1398))에게 팔도(八道) 사람들의 성격을 한 구절로 평하여 보라고 했다. 그러자 정도전은 경기도는 경중미인(鏡中美人. 거울 속에 비친 미인)), 충청도는 청풍명월(淸風明月. 맑은 바람과 밝은 달빛), 전라도는 풍전세류(風前細流. 바람 앞에 하늘거리는 가는 버드나무), 경상도는 송죽대절(松竹大節. 소나무와 대나무 같은 굳은 절개), 강원도는 암하노불(巖下老佛. 바위 아래 늘근 부처), 황해도는 춘파투석(春波投石. 봄 물결에 던져진 돌맹이), 평안도는 산림맹호(산림맹호. 산속 숲에 사는 거친 호랑이))라고 대답했다. 그러나 태조의 출신지인 함경도에 대해서는 감히 평을 내리지 못했다. 태조가 어떤 말이라도 괜찮으니 말해보라고 재촉하자 정도전은 이렇게 말했다.
“함경도는 이전투구(泥田鬪狗)입니다.”
그러자 태조의 얼굴이 금방 벌개지니 눈치를 챈 정도전은 곧 말을 고쳐 대답했다.
“함경도는 또한 석전경우(石田耕牛. 돌밭을 가는 소)이기도 하옵니다.”
그제야 태조의 얼굴빛이 밝아지면서 후한 상을 내렸다.
조선 후기의 지리학자 이중환(李重煥. 1690~1752)은 자신의 저서 <택리지(擇里志)>에서 우리나라 팔도에 대한 위치와 그 역사적 배경 등을 광범위하게 논하였다. 이 책은 팔도총론(八道總論)과 복거총론(卜居總論) 두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다.
팔도총론에서는 전국을 8도로 나누어 그 지리를 논하고, 각 지지방의 지역성을 출신 인물과 결부시켜서 밝혔다. 그리고 복거총론에서는 살기 좋은 곳을 택하여 그 입지 조건의 타당성을 설명하였다.
팔도총론은 지방지(地方誌)에 해당하고, 복거총론은 인문지리의 총설에 해당된다. 사람이 살 만한 곳의 입지 조건으로서 지리(地理)와 생리(生利), 인심(人心), 산수(山水) 등 네 가지를 들었으며, 또 가거지류(可居地類)와 피병지(避病地), 복지(福地), 은둔지(隱遁地), 일시유람지(一時遊覽地) 등으로 분류하였다.
여기에 나오는 각 지방마다의 별칭은 아래와 같다.
경기(京畿)에는 도(道)자를 붙이지 않는 것이 원칙이어서 별칭이 없고, 영남(嶺南)은 경상도로서 조령(鳥嶺)과 죽령(竹嶺)의 남쪽을 말한다. 호서(湖西)는 충청도인데, 충북 제천 의림지호(義林池湖)의 서쪽이라는 뜻이다. 호남(湖南)은 전라도인데, 전북 김제 벽골제호碧骨堤湖의 남쪽이라는 뜻이다. 영동(嶺東), 또는 관동(關東)은 대관령 동쪽이라는 뜻이고, 해서(海西)는 평안도로 철령관의 서쪽이라는 말이다.
이전투구란 성어는 정도전 자신이 창작한 말이 아니고 이전부터 팔도 사람들의 특성을 그렇게 평가하던 말 중에 들어 있던 것이다. 지금은 이 말이 아주 막돼먹은 싸움질이나 난장판을 비유하지만 원래는 사람의 성격을 평가한 말이었다.
(임종대 편저 한국 고사성어에서)
理主氣從(이주기종)
理:다스릴 리, 主:주인 주, 氣:기운 기, 從:따를 종.
어의: 이(理)가 주를 이루고, 기(氣)가 보완한다는 뜻이다. 성리학(性理學)의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에서 유
래하였다.
문헌: 선문염송(禪門拈頌)
유학(儒學)에서 이 세상의 모든 존재는 이(理)와 기(氣)의 두 요소로 이루어져 있다고 주장한다.
여기서의 이는 우주 만물의 존재 권리를 말하고, 기는 우주 만물을 구성하고 있는 근원이 되는 기운, 즉 에너지를 말한다. 이는 형태와 작위가 없는 무형무위(無形無爲)의 형이상(形而上)의 존재이고, 기는 형태와 작위가 있는 유형유위(有形有爲)로 형이하(形而下)의 존재를 말한다. 따라서 형이상의 이는 도(道)로서 만물을 생성하는 근본이요, 기는 형이하의 기(器)로서 만물을 생성하는 재료다.
달리 설명하면 이(理)와 기(氣)는 우주의 근본을 이루는 태극(太極)을 말하는데, 태극은 일음일양(一陰一陽)으로 되어 있으며, 이 음양은 오행(五行)으로 이루어져 있다. 오행은 만물화생(萬物化生)을 뜻하는 것으로서 만물이 낳고 성장하고 열매를 맺는 과정을 말한다.
도(道)는 음양을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으며, 그래서 일음일양지위도(一陰一陽之謂道)라고 말한 것이다. 따라서 기(氣)를 떠나서는 이(理)도 존재할 수 없으며 기 또한 이를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는 것이 이기설(理氣說)이다.
여기서 기(氣)는 곧 성(性)이고, 또 형질(形質)을 가지고 있으며, 그 형질은 운동하는 것을 말한다. 이에 반하여 이(理)는 형질도 없고, 운동도 하지 않으며, 다만 기를 통해서만 파악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理)로 파악하지 않으면 기(氣)의 이 같은 작용도 불가능한 것이다.
이와 같은 이기이원론이 중심이 되어 실천윤리를 주장하게 되었는데 조선시대에는 이 성리학(性理學)이 학자들에 의해 크게 제창되었다. 성리학은 이러한 이론을 근간으로 이(理)를 중시하는 학파와 기(氣)를 중시하는 학파로 분리되었으며, 여기서 이주기종(理主氣從)이라는 말이 나오게 된 것이다.
이기론에서 기대승(奇大升)과 서경덕(徐敬德)과 이황(李滉)과 이이(李珥)의 이론을 보면 다음과 같다. 서경덕은 한마디로 이와 기는 관념적으로는 구분할 수 있으나 구체적인 마음의 작용에 있어서는 이기를 분리할 수 없다고 하여 이기공발설(理氣共發說)을 주장하였다.
이에 대하여 이황은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이면서도 이 우위론인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을 주장하였다. 이에 반하여 이이는 같은 이기이원론이면서도 기발이승도설(氣發理乘途說)을 주장하였는데 이러한 학설 전개가 나중에 영남학파(嶺南學派)와 기호학파(畿湖學派)로 대두되었다.
말하자면 이황의 이론을 존중하는 파는 영남학파로 주리론(主理論)적 경향을 보이고, 이이를 종사로 하는 기호학파는 주기론(主氣論)적 경향을 띠게 된 것이다.
한편 양설을 취사선택하여 절충식 입장을 보이는 학자들도 있었다. 그 내용을 보면 이(理)로부터 기(氣)를 보면 이(理)가 주(主)가 되고 기(氣)로부터 이(理)를 보면 기(氣)가 주(主)가 된다는 주장이었다.
(임종대 편저 한국 고사성어에서)
已瞻新日(이첨신일)
已: 이미 이, 瞻:볼 첨, 新:새 신, 日:날 일.
어의: 이미 새로운 해를 보았다는 말로, 어떤 일을 이미 결정하여 그렇게 진행하고 있다는 뜻이다.
문헌: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고려의 무신 강조(康兆. ?~1010)가 제7대왕 목종(穆宗. 980~1009)을 살해하고 현종(顯宗)을 세우는 쿠데타를 일으켰다. 이에 거란(契丹)의 성종(成宗)은 그를 핑계로 1010년에 40만 군사를 이끌고 2차 침략을 감행했다.
그것은 1차 침략 때 겨우 강동 6주만을 점령하고 실패한 것을 만회하려는 구실이었지만 명분은 고구려의 내분을 내세웠다.
“고려국에서 강조가 전 왕을 죽이고 새로운 왕을 세웠는데 그에 따른 대역의 죄를 묻기 위하여 군사를 보내노라.”
이에 현종은 거란과 평화 협상을 진행하려 했지만 실패했다. 그러자 강조는 이번 거란의 침범은 그 원인이 자신에게 있으니 직접 나아가 싸우겠다며 해동도통사(海東都統使)가 되어 30만의 군사를 거느리고 압록강을 건너 흥화진(興化鎭)으로 쳐들어갔다.
이때 강조는 검차(檢車.일종의 장갑차)를 창안해 겉에 많은 칼을 꽂아 적을 가까이 오지 못하게 하고, 그 안에서 활을 쏘아 적을 공격했다. 그러나 적의 위세가 워낙 강하여 전세는 점점 불리해져갔다.
강조와 부사 이현운(李鉉雲)이 모두 무술이 뛰어나고 씩씩한 것을 본 거란의 성종은 두 사람을 자기 사람으로 만들고 싶었다. 그래서 두 사람을 사로잡고 먼저 강조에게 자기의 신하가 되라고 권고했다. 강조는 한 마디로 거절했으나 이현운은 ‘이미 새 해를 보게 되었으니(已瞻新日.이첨신일), 이 마음 어찌 고향 산천을 생각하오리까?’ 하며 항복의 뜻을 표했다.
강조는 노하여 이현운을 발로 차면서 ‘너는 고려 사람인데 어찌하여 말을 그렇게 하느냐?’ 하고 꾸짖었다.
어떤 일을 잊거나 배반한 자를 빗대어 이르는 말이다.
(임종대 편저 한국 고사성어에서)
梨太成洞(이태성동)
梨:참배 리, 太:클 태, 成:이룰 성, 洞:마을 동.
어의: 배가 커서 이루어진 마을이라는 말로, 서울의 이태원동 지명에서 유래했다. 무엇이든지 하나의 특색이나
장점이 있으면 그것으로 성공하거나 유명해질 수 있다는 의미로 쓰인다.
문헌: 한국(韓國) 지명(地名)이야기
한국의 지명(地名) 중에는 배나무 리(梨)자가 들어가는 동네 이름이 많고, 또 배나무가 번성하는 동네는 대부분 살기 좋은 동네이다.
서울의 이태원(梨太院)도 그중의 하나다.
이태원은 배나무가 많고, 그 열매도 유난히 크고, 탐스러워 클 태(太)자를 써서 이태원이라 했다. 그러나 그 이름에는 가슴 아픈 사연이 담겨 있기도 하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게 되었다. 그리고 전 국토가 초토화되고 갖가지 문화재와 아름다운 금수강산이 불길에 휩싸였다.
당시 이태원에는 운종사(雲宗寺)라는 절이 있었는데 수십 명의 여승(女僧)들이 수도(修道)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왜병들이 서울에 입성하여 그곳을 본거지로 삼게 되자 여승들에게 큰 수난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수도하는 스님에게 무도한 일본 병사들이 밥을 짓게 하는가 하면 아예 농락까지 했다. 이처럼 피비린내 나는 전쟁 통에 피해를 본 여승은 한둘이 아니었다. 특히 여자이기에 겪는 고통은 말할 수 없이 컸다.
평화롭던 마을 이태원에 불어 닥친 왜란의 회오리는 너무나 큰 상처를 남겼다. 그러다가 이순신 장군이 해전에서 연전연승을 거두자 해로가 끊긴 왜군들이 허둥거리기 시작했다. 바로 그때 도요토미가 사망하게 되니 7년 왜란은 끝을 맺었다.
그런데 그 일본인들이 물러간 뒤 임신한 여승들이 속출했다. 시대의 비운을 떠안은 그 여승들 중에는 더러 자괴감에 빠져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도 있었다. 그런 와중이라 계속해서 절에 머물러 있을 수도 없었다. 그들은 갈 곳이 없어 길거리에서 방황했다. 이를 보다 못한 관가에서는 흙으로 움막을 지어 추위에 떠는 여승들이 모여 살게 했다.
이런 사연 때문에 나중에 그곳 마을 이름을 다를 이(異)자와 아이 밸 태(胎)자를 썼던 때도 있었는데 그때 피해를 입은 여승들의 처지를 담아 이른 것이었다고 한다. 지금은 옛날의 운종사가 어디에 있었는지조차 알 수 없을 정도로 발전하여 국제적인 관광지가 되었다. 그러나 이태원에 외국어 간판이 번쩍거리고 있는 것은 옛날의 그 이름값을 하는 것이라 생각되기도 한다.
(임종대 편저 한국 고사성어에서)
理判事判(이판사판)
理:이치 리, 判:나눌 판, 事:일 사.
어의; 이판승은 불경의 연구와 참선에만 전념하는 승려를 일컫고, 사판승은 절의 운영 및 경리사무 등을 맡아
보던 승려를 말한다. 오늘날에는 막다른 데에 이르러 어찌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음을 이른다.
문헌: 이판사판야단법석(理判事判野壇法席)
이판사판은 이판(理判)과 사판(事判)의 합성어로서, 이판승(僧)은 참선, 경전, 공부, 수행 등 불교의 교리를 연구하는 스님이고, 사판승(僧)은 절의 재물과 살림을 맡아 관리하는 스님이다. 그러니까 이판사판의 용어는 불교 조직의 핵심용어다.
조선말의 학자 이능화(李能和)는 그의 저서 <조선불교통사(朝鮮佛敎通史)>의 하편 <이판사판사찰내정(理判事判寺刹內情)>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조선의 사찰에는 이판승과 사판승의 두 종류의 승려가 있다. 이판승은 참선하고, 경전을 강론하며, 수행하고 홍법 포교하는 스님이다. 속칭 공부승(工夫僧)이라고도 한다.
사판승은 생산에 종사하고, 절을 관리하거나 사무 행정을 꾸려 나가는 스님들로, 속칭 산림승(山林僧)이라고도 한다.
산림이란 절의 모든 사무와 재산 관리를 통틀어 일컫는 말이다.
이렇게 사찰 내에서 하는 역할에 따라 두 가지로 나뉘었던 것이 차츰 교구가 확장되고 사찰마다 주지(住持)가 책임자로 정착되면서 이판 스님과 사판 스님 사이에 묘한 문제가 일어났다. 이판 스님과 사판 스님 중에 누가 주지가 되는가에 따라 운수승(雲水僧)과 주지 사이에 밀도가 달랐던 것이다. 즉 이판승인지 사판승인지 출신에 따라 흐르는 기류가 달랐다는 말이다.
그래서 산사를 찾는 객성은 그 절의 주지가 이판승 출신인지 사판승 출신인자 알아야 처신하는 데 옹색하지 않았다.
사실 이판과 사판은 그 어느 한쪽이라도 없어서는 안 되는 상호관계를 갖고 있다. 이판승이 없으면 부처님의 지혜 광명이 이어질 수 없고, 사판승이 없으면 가람(伽藍)이 존속할 수 없다. 그래서 청허(淸虛), 부휴(浮休), 벽암(碧巖), 백곡(百谷) 스님 등 대사들은 이판과 사판을 겸했다.
그러나 조선시대 척불(斥佛)이 고조되자 나중에는 이판승이나 사판승이나 스님이 된다는 것은 마지막 신분 계층이 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조선이 불교를 배척하고 유교(儒敎)를 국교로 세우면서 스님은 성안에 드나드는 것조차 금지되었다. 때문에 이판이 되었건 사판이 되었건 스님이 되는 것은 마지막이 되는 것을 의미했다. 그래서 서로 믿고 의지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숭유배불(崇儒排佛) 정책으로 인간대접 받기가 힘들었던 시대였는데 그래서 이판, 사판은 마지막 끝장을 의미하는 뜻으로 변질되고 지금과 같은 말로 전해졌다.
(임종대 편저 한국 고사성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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