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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204. 묵상글 ( 연중 제4주간 토요일. - 일용할 양식, 마음의 양식, 영혼의 양식.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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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204. 연중 제4주간 토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일용할 양식, 마음의 양식, 영혼의 양식
"예수님께서는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기 시작하셨다."
제가 어렸을 때 대부분 집안에 우환이 있는 것과 같은 고통은 아니더라도
서러움 같은 것이 있었는데 가난의 서러움과 배우지 못한 서러움이었지요.
아주 부잣집이 아닌 한 두 가지 서러움이 대부분 같이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어떤 집은 가난하니 공부하지 말고 일하라는 부모가 있는가 하면
어떤 집은 아무리 가난하고 그래서 굶주려도 어떻게 해서든지
공부를 시키는 부모가 있었지요.
특히 농번기가 되면 자식을 공부시키려는 부모는 아무리 바빠도 학교 가게 하지만,
일을 시키려는 부모는 이렇게 바쁜데 무슨 공부냐고 학교를 가지 못하게 했지요.
그래서 공부를 정말 하고 싶어 한 자식들은 이런 부모 때문에 서러움이 더 컸고,
부모가 공부시키지 않으면 내가 벌어서라도 공부하겠다며 무작정 상경하곤 했지요.
지금 여러분이 생각하면 어떤 것이 더 서러움이고 어떤 것이 더 가여움입니까?
가난한 것이 더 가엾고 서럽습니까? 못 배운 것이 더 가엾고 서럽습니까?
그런데 오늘 복음을 보면 주님께서는 가엾은 마음이 드셔서
군중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주셨다고 합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에서는 빠져 있지만 이어지는 마르코복음을 보면,
주님께서 군중을 배불리 먹이시는 내용이 이어서 나오지요.
그러니까 주님께서는 둘 다 가엾게 보셨지만,
굶주린 군중보다 목자들로부터 마땅히 받아야 할 가르침을 받지 못한 군중이
더 가여웠고, 그래서 많은 것을 가르쳐 주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군중이 목자 없는 양과 같았다는 것은 어떤 뜻입니까?
군중은 가방끈이 짧았고 지도자들 가운데는 참스승이 없었으며,
그래서 주님께서 많은 것을 주셨다는 뜻입니까?
그리고 주님께서 많이 가르쳐주셨다고 했는데 지식을 많이 가르쳐주셨을까요?
목자가 없다는 것은, 지식을 많이 넣어주는 스승이 없다는 것과 다른 뜻입니다.
목자가 없다는 것은, 지식보다는 지혜를 넣어줄 스승이 없다는 뜻일 것이고,
지혜도 세상 지혜가 아니라 하느님 나라의 지혜일 것입니다.
사실 스승도 이끄는 존재지만
목자는 양 떼를 생명의 땅 곧 푸른 풀밭으로 인도하는 존재지요.
그러니까 주님께서 많은 것을 가르쳐주신 것의 의미는,
군중을 배불리 먹여 육신 생명을 잘 살게 하는 것보다
영원한 생명의 하느님 나라를 알려주시고 그곳으로 인도하시고자 함이지요.
그러니 우리가 주님의 기도를 바치며 일용할 양식을 달라고 청할 때도
육신의 양식만이 아니라 마음의 양식도 청하고,
마음의 양식을 청하는 것도 좋지만, 영혼의 양식을 주십사고 청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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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204. 연중 제4주간 토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외딴 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마르 6,31)
오늘 <복음>은 “참된 목자”이신 예수님의 마음을 세 가지로 그리고 있습니다. <첫째>는 지친 제자들을 향한 ‘배려의 마음’이요, <둘째>는 몰려든 군중들을 향한 ‘측은히 여기는 마음’이요, <셋째>는 양들을 가르치는 ‘스승의 마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파견 받았던 사도들이 돌아오자 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외딴 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마르 6,31)
음식을 먹을 겨를조차 없을 만큼 군중이 몰려왔건만, 예수님께서는 지친 제자들에게 ‘가서 좀 쉬어라’고 배려하십니다. “쉬어라”는 이 말씀에서, “하느님께서는 하시던 일을 모두 마치시고 이렛날에 쉬셨다. 하느님께서 이렛날에 복을 내리시고 거룩하게 하셨다.”(창세기 2,3)는 <창세기>의 울림을 듣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쉼”은 하느님께서 창조된 모든 것에게 ‘복을 내려주시고’, ‘거룩하게 하셨음’과 같이,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쉬게 하고, 그들이 한 모든 일에 복을 내리고 거룩하게 하십니다. 그리하여 ‘쉼’ 안에서 당신이 바로 ‘주님’임을 알게 하시는 일입니다. <시편> 작가는 말합니다.
“너희는 멈추고(곧 쉬고) 내가 주 하느님임을 알아라.”(시편 46,11)
또한, 두 번씩이나 반복되는 “외딴 곳으로 가서”라는 말씀을 들으면서, 우리는 “이제 나는 그 여자를 외딴 곳 광야로 데리고 가서 다정히 말하리라. ~너는 나를 ‘내 남편’이라 부르리라. ~내가 너를 아내로 삼으리니, 네가 주님을 알게 되리라.”(호세 2,16-22 참조)는 <호세아서>의 울림을 듣습니다. 그러니 “외딴 곳”에서 벌어질 일은 바로 이 일입니다. 당신을 낭군이라 부르게 되고, ‘주님’을 알게 되는 일입니다.
한편, 예수님께서는 피곤함에 지친 제자들은 쉬게 하시면서도,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습니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과 같았기 때문입니다.”(마르 6,34). 이는 <민수기>(27,15-17)의 표현을 연상시켜줍니다. 거기서 모세는 하느님 백성이 “목자 없는 양처럼” 되지 않도록 한 사람을 세워달라고 간청합니다(1열왕 22,17). 목자의 주요업무 중 하나는 양떼를 위한 음식을 마련하는 것이고, 모세는 광야에서 만나를 공급하고(탈출 16장), 엘리사는 백 명을 먹이기 위해 빵의 양을 늘렸듯이(2열왕 4,42-44), 예수님께서도 이제 그러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먹을 음식을 마련하기에 앞서, 먼저 “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주기 시작하였습니다.”(마르 6,34). 그들이 진정으로 굶주리고 목말랐던 것은 바로 ‘진리’인 생명의 말씀이었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양들을 “진리”에로 인도하는 이가 바로 “참된 목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먼저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참된 양식’을 받아먹는 ‘양’이어야 합니다. 오늘 진정, 우리가 그분의 ‘양’이라면, 우리를 ‘측은히’ 여기시는 그분에게서 ‘진리’인 말씀의 양식을 얻을 것입니다. 그리고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할 것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외딴 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마르 6,31)
주님!
저를 외딴 곳, 당신의 거처로 데려 가소서.
당신 안에 쉬게 하소서. 그 쉼 안에서 사랑에 젖게 하소서.
당신 사랑을 알게 하소서. 그 사랑 안에서 당신을 낭군이라 부르게 하소서.
오, 주님! 당신만이 진정한 쉼이오니, 당신 사랑의 속삭임 안에 쉬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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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204. 연중 제4주간 토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너무 바빠서 기도합니다
사람은 때때로 쉬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지금 하고 있는 일과 환경에서 벗어나 자유를 누리고자 합니다. 그런데 맘먹고 쉬려고 하면 꼭 일이 생기고 맙니다. 그러니 때로는 지금 자리를 떠나는 것이 필요하고, 어느 특정한 날을 정하여 쉬는 것보다 일상 안에서 쉬는 법을 배워야 하겠습니다.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도 좋지만 지금하고 있는 일을 즐기는 법을 터득해야 오래도록 지치지 않을 것입니다.
20세기 위대한 별이었던 슈바이처는 “현대인이 하루에 단 몇 분이라도 밤하늘을 쳐다보며 우주를 생각한다면 현대 문명이 이렇게 병들지는 않았을 것이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음식을 먹을 겨를조차 없이 바쁘게 지냈습니다. 그래서 배를 타고 외딴곳을 찾아 떠났습니다. 휴식을 취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느님께서 창조를 마치시고 이렛날에 쉬셨습니다. 그리고 이렛날에 복을 내리시고 그날을 거룩하게 하셨으니(창세2,2-3) 휴식은 재충전의 기회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예수님과 제자들이 가는 곳에 이미 도착하여 진을 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배를 타고 이동하였는데 모든 고을 사람들이 육로를 통해 이동하였다는 것은 어떤 어려움도 기꺼이 감당하였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동시에 그들의 적극적인 태도를 엿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모든 고을에서 나왔다는 것은 자기들의 삶의 현장을 떠났다는 것을 말해주는 데 그만큼 예수님께는 인기가 좋았습니다. 스스로 내 세워서가 아니라 사람들이 그분을 둘러쌌습니다. 바깥에 있으려 해도 사람들이 그분을 중심에 모셨습니다. 그분에게 매력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군중을 보시고 측은한 마음이 드시어 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기 시작하셨습니다. 가르쳐 주셨다는 것은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고기를 잡아 일시적으로 먹여 주시는 것이 아니라 고기를 잡는 방법을 알려주셨다는 것으로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가르침을 통해서 영적인 갈증을 채우게 된다는 것입니다. 세례를 받으면 그것으로 모든 것이 끝난 것처럼 지내시는 분이 많은 데 사실은 이제 시작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고 또 부족한 것은 다시 배우고 ……주님께서 가르쳐 주셔야 할 것도 많고 우리가 배워야 할 것도 많습니다. 한 번에 모든 것을 이룰 수는 없는 법입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 예수님께서는 주변에 사람이 많아서 너무 고달프셨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사랑이시고 우리에 대한 사랑이 크시기에 모든 수고로움을 수고로움으로 생각하지 않으셨습니다. 십자가의 성 요한도 “사랑에 불타는 영혼은 조금도 피로하지 않고 또 남을 피로하게 만들지도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측은한 백성과 함께할 수 있음이 오히려 기쁨이요, 행복입니다. 그렇게 할 수 있는 원동력은 외딴곳에 있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산에 들어가 밤을 새우시며 기도하셨습니다(루가6,21). 이른 새벽, 동트기 전 외딴곳에서 당신을 파견하신 아버지 하느님의 뜻을 헤아리는 시간을 결코 소홀히 한 적이 없으셨습니다.
주변에 사람이 많으면 많을수록 기도하지 않으면 안 되셨던 주님을 바라봅니다. 바쁘다는 핑계로 기도를 소홀히 할 수 없음을 생각합니다. 오히려 너무 바빠서 기도하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진정한 휴식은 주님과 더불어 사는 것입니다. 무슨 일을 해도 내 일을 고집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일을 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마태11,28).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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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204. 연중 제4주간 토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엠이 부부들과 멕시코 과달루페 성지엘 다녀왔습니다. 우리를 안내하는 형제님이 깜짝 놀라서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제가 성지순례 안내를 오래 했지만 이렇게 형제님들이 많은 순례단은 처음 봅니다.” 그동안 순례를 오면 대부분이 자매님들이었다고 합니다. 40명이 순례를 왔는데 남자는 신부님 포함 2명인 적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번 순례는 자매님보다 형제님이 더 많은 유일한 순례라고 합니다. 10부부에 사제인 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쿠르즈나 골프 모임에는 형제님들이 많은 편인데 성지순례에는 형제님들이 적었다고 이야기합니다. 성지순례에 형제님들이 적은 이유에 대해서 잠시 생각해 봅니다. 첫째는 경제적인 이유가 있을 것 같습니다. 맞벌이 부부가 많기에 형제님들이 기꺼이 자매님을 위해서 성지순례의 은총을 양보하는 것 같습니다. 두 번째는 우선순위의 이유가 있을 것 같습니다. 자매님들은 성지순례의 기쁨을 잘 알기에 기꺼이 시간을 내고, 기도합니다. 형제님들에게 우선순위는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는 것일 수 있습니다. 운동과 취미활동일 수도 있습니다. 이번 순례를 함께 하면서 형제님들이 성지순례의 은총을 받아들이는 결단을 많이 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형제님들의 우선순위에 성지순례가 맨 위에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합니다.
성지순례의 은총을 양보하지 않고, 우선순위에 성지순례를 먼저 놓았던 형제님들과 함께 했던 성지순례였습니다. 부부가 함께 손을 잡고 성지순례를 하는 모습도 무척이나 아름다웠습니다. 성지순례 첫날 미사를 드리기 위해서 성당엘 갔는데 그 성당에서 혼배미사가 있었습니다. 이 또한 하느님의 축복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미사 참례에 앞서 부부들은 혼배미사를 드린 신랑과 신부에게 축복을 주었습니다. 화목한 가정을 이루고 있는 부부가 축복을 주었기에 신랑과 신부는 아름다운 가정을 이루리라 생각합니다. 낯선 곳에서 혼배미사를 볼 수 있었던 부부들도 혼인의 첫날을 생각하며 부부의 사랑을 새삼 확인했을 것 같습니다. 저는 22년 전에 서품 10주년 기념으로 동창신부님들과 과달루페 성지순례를 했었습니다. 그때 찍은 사진을 보니 정말 젊고 생기가 넘쳤습니다. 힘과 열정은 있었지만 성지순례의 의미를 제대로 느끼지 못했습니다. 동창들과 함께 있다는 즐거움이 더 컸기 때문입니다. 성지순례가 우선순위가 아니라 성지순례로 포장된 동창모임이었던 것 같습니다. 22년 시간이 흘러 엠이 부부들과 함께 성지순례를 하니 피정을 겸한 순례가 되었습니다.
1521년 스페인은 신대륙으로 왔습니다. 원주민들에게 신앙을 전하는 것은 쉽지 않았습니다. 원주민들은 고유의 문화와 종교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총과 대포로 그들의 땅을 차지하는 것은 가능했지만 총과 대포로 그들의 마음을 얻는 것은 불가능했습니다. 그때 과달루페의 성모님은 원주민 후안 디에고에게 발현하였습니다. 성모님은 후안 디에고에게 성모님이 발현한 곳에 성당을 세우라는 말을 주교님에게 전하라고 하였습니다. 후안 디에고는 성모님의 메시지를 주교님에게 전하였지만 주교님은 배우지 못한 원주민의 이야기를 믿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만약 성모님의 메시지가 맞는다면 ‘증표’를 가져오라고 하였습니다. 후안 디에고는 성모님께 주교님의 이야기를 전하였고, 성모님은 장미꽃을 주교님에게 전해 주라고 하였습니다. 12월의 장미는 있을 수 없지만 후안 디에고는 가지고 있던 틸마에 장미를 담아 주교님께 갖다 드렸습니다. 주교님께 장미를 드리는 순간 틸마에 성모님의 성화가 새겨지는 ‘표징’이 일어났습니다. 주교님께서 요구하는 증표를 성모님께서는 성화라는 표징으로 보여주었습니다. 그것이 유명한 과달루페 성모님의 성화입니다.
과달루페 성모님의 성화에는 현대과학의 힘으로는 규명하기 힘든 표징들이 있다고 합니다. 먼저 틸마는 선인장으로 만들었는데 길어도 20년이면 삭아서 없어진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제 곧 500년이 되는데 아직도 틸마는 완벽하게 보존되고 있습니다. 저도 순례 중에 과달루페 성모님의 성화를 보았습니다. 틸마에 새겨진 색은 자연에서 구할 수 있는 도료가 아니라고 합니다. 나사의 과학자들이 광학 현미경으로 2000배 이상 확대해서 성모님의 눈을 보았더니 그 눈에 사람들의 모습이 새겨져 있다고 합니다. 과달루페 성모님의 성화가 현대의 과학으로 설명하기 힘든 표징이 있는 것도 신앙의 징표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성모님의 뜻을 충실히 따랐던 후안 디에고의 뜨거운 신앙입니다. 의심을 버리고 후안 디에고의 말을 믿고 따른 주교님의 신앙입니다. 그 신앙이 열매를 맺어서 800만 명이 넘는 원주민들이 자신들이 가졌던 토착 신앙을 버리고 가톨릭으로 개종했습니다. 총과 대포로는 열수 없었던 마음을 과달루페에서 발현하신 성모님이 열어 주었습니다. 요한 바오로 2세 성인은 과달루페 성모 성지를 4번 방문하였습니다. 그리고 아메리카 대륙의 보호자로 과달루페 성모님을 선포하였습니다. 멕시코 인들에게 일생에 한번 쯤 과달루페 성모님을 만나지 않았다면 그는 진정한 멕시코 인이 아니라는 말이 있다고 합니다.
22년 전 성지순례에도 이런 이야기를 귀담아 들었다면 저의 신앙은 더욱 뜨거워졌을 것 같습니다. 그래도 늦지 않았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제게 다시금 과달루페 성모님을 만날 수 있도록 기회를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데리고 따로 한적한 곳으로 가셔서 쉬셨다고 합니다. 제자들이 복음 선포하는 동안 제대로 먹지도 못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재충전의 시간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더욱 열심히 복음을 선포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저를 따로 부르셔서 엠이부부들과 함께 과달루페 성모님을 만나도록 이끌어 주셨습니다. 감사할 일입니다. 저도 재충전의 시간을 가졌으니 제게 주어진 일을 더욱 열심히 하도록 하겠습니다.
“너희는 따로 외딴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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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204. 연중 제4주간 토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책을 읽다가 친구와 전화하는 이런 대화 내용을 볼 수 있었습니다.
“여보세요?”, “응, 너구나. 요즘 어떻게 지내니?”
“좋아, 넌 어때?”, “사실 엉망진창이야. 아파서 병원에 갔더니 글쎄 암이라는 거야.”
“그래? 뭐 새로운 소식은 없고?”
설마 이렇게 대화하는 사람이 있을까 싶지만, 현대인에게 이런 모습을 어렵지 않게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즉, 남의 말은 전혀 듣지 않으면서 자기 말만 하는 사람입니다. 예전에 어린 학생들과 노래방에 갔던 적이 있습니다. 이 학생들은 제게 이렇게 말하면서 마이크를 넘겼습니다.
“신부님이 먼저 한 곡 불러주세요.”
노래를 선곡해서 부르는 데, 아무도 제 노래를 들어주지 않습니다. 모두 자기 노래를 선곡하느라 바빴습니다. 그 모습을 보면서, 들어주지 않는 노래를 왜 부르고 있는가 싶어서 정지 버튼을 누르고 마이크를 넘겨주었습니다. 그 뒤 노래를 부르기보다 열심히 학생들의 노래를 들어주었고 열심히 손뼉을 쳐주었습니다.
저의 경우는 남이 노래를 들어주지 않으면 굳이 부를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데, 요즘 아이들은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 남이 듣든 말든 상관없이 자기만 노래 부르면 된다는 식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대화도 그랬던 것일까요? 들어주지 않는 말의 홍수 속에서 외로워하는 사람이 늘어날 뿐입니다. 따라서 스스로 생각해보십시오. 만약 내가 한 말만 기억나고, 남이 했던 말이 기억나지 않는다면 나 역시도 듣지 않는 사람입니다.
인간관계의 시작은 내가 말하는 것에서가 아니라, 남의 말을 들어주는 데서 이루어집니다. 주님께서도 우리와의 관계를 더 좋게 하시려고 직접 우리에게 말씀하시지 않는 것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대신 우리의 말을, 어떤 말이든 상관없이 모두 들어주십니다. 왜냐하면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곁에는 늘 많은 사람으로 가득했습니다. 그들은 모두 요구사항의 말을 가지고 있었지요. 육체적인 아픔을 해결해달라는 말, 마귀를 쫓아 달라는 말, 영적 부족을 채워줄 수 있도록 해달라는 말…. 그 밖의 많은 청원의 말로 예수님과 제자들은 음식을 먹을 겨를조차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을 물리치지 않으십니다. 가엾은 마음, 바로 사랑하는 마음에 그들의 모든 말들을 들어주셨던 것입니다.
주님의 이 모범을 따라, 우리 역시 들어주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자기 말만 주저리주저리 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이의 말을 잘 경청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과 우리의 사랑 관계처럼, 나의 이웃과도 사랑의 관계를 만들어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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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가 있다는 말은 영원하다는 의미로, 황금기가 올 거라는 의미도 아닙니다. 바로 오늘을 ‘사랑’하겠다는 허락, 자유, 인내를 뜻합니다(테리 허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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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204. 연중 제4주간 토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하느님 중심의 삶
-외딴곳-
“주님은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어라.
푸른 풀밭에 나를 쉬게 하시고,
잔잔한 물가로 나를 이끄시어, 내 영혼에 생기 돋우어 주시네.”(시편23,1-3ㄱ)
오늘 화답송 시편은 그대로 오늘 미사를 통해 실현되는, 오늘 복음의 주님을 만나는 외딴곳에 대한 묘사같습니다. 날마다 하느님 중심의 삶을 확고히 해주는 외딴곳 성전에서의 미사전례입니다.
새옷을 입으면 마음이 새롭고 기분이 좋습니다. 세월 흘러 나이들어도 마찬가지입니다. 참으로 믿는 이들에게는 하루하루가 하느님의 선물이요 새날이자 새하늘, 새땅입니다. 오늘 2월4일은 봄이 시작된다는 입춘이고 내일은 연중 제5주일이자 정월대보름입니다.
“입춘대길 건양다경(立春大吉 建陽多慶)”
‘봄이 시작되니 크게 길하고 경사스러운 일이 많이 생기기를 기원합니다’라는 뜻으로 오늘 입춘날 대문에 많이 써붙이는 문구입니다. 이 또한 주님의 은총을 상징합니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입춘대길은 조선시대 남인의 거두 허목이, 건양다경은 노론의 영수 송시열이 만들었다 합니다.
매월 첫주 금요일 고백성사 보는 날이 참 좋습니다. 날마다의 미사 역시 좋습니다. 그대로 오늘 복음의 주님을 만나는 외딴곳을 상징하는 고백성사요 성전미사입니다. 불행중의 불행이 주님을 잊고 사는 것이요 자기를 잊고 사는 것입니다. 궁극의 삶의 의미, 삶의 중심, 삶의 목표, 삶의 방향인 주님을 잊고, 길을 잃고 사는 것입니다.
“주님의 나의 빛, 나의 구원이시다.”(시편27,1ㄱ)
어제의 화답송 시편 후렴은 바로 주님은 내 삶의 중심이라는 고백입니다.
“주님은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어라.”(시편23,1)
오늘의 화답송 시편 후렴 역시 주님은 내 삶의 중심이라는 고백입니다.
얼마전 은평성모병원에 갔을 때 시편 성구가 한눈에 들어왔고 감동했습니다. 주님만이 참된 치유자요 구원자라는 고백입니다. 의사분들을 한없이 겸손하게 하는 고백입니다. 정말 기도하는 의사들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주님께만 구원이 있습니다.
당신 백성 위에 당신의 복을 내려 주소서.”(시편3,9)
우리가 외딴곳에 만나는 하느님은 우리 주 예수님을 통해서, 예수님과 함께, 예수님 안에서입니다. 오늘로서 제1독서 히브리서는 끝납니다. 오늘 히브리서 말씀이 우리에게 예수님은 어떤 분인지 잘 보여줍니다. 그대로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축복 말씀입니다.
“영원한 계약의 피로, 양들의 위대한 목자이신 우리 주 예수님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끌어올리신 평화의 하느님께서 여러분에게 온갖 좋은 것을 마련해 주시어 여러분이 당신의 뜻을 이루게 해 주시기를 빕니다. 그분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당신 마음에 드는 것을 우리에게 해 주시기를 빕니다. 예수 그리스도께 영광이 영원무궁하기를 빕니다.”
하느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온갖 좋은 것을 다 베풀어 주시니 우리는 감격에 벅차 예수 그리스도께 영광이 영원무궁하기를 빌게 됩니다. 좋은 글은, 좋은 시는, 좋은 기도문은 늘 읽어도 새롭고 좋습니다. 제 행복기도도 그러합니다. 원래는 감사기도였다가 행복기도로 바꿨고 또 바꾼다면 예닮기도로 바꾸고 싶습니다.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님을 통해 하느님께 바치는 기도입니다. 참으로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기도요 예수님을 닮게 하는 기도입니다. 주님 호칭 다음에 “참회합니다”, “믿습니다”를 넣으니 대만족입니다.
“주님
참회합니다
믿습니다
사랑합니다
감사합니다
기뻐합니다
차고 넘치는 행복이옵니다
이 행복으로 살아갑니다
주님
눈이 열리니
온통 당신의 선물이옵니다
당신을 찾아 어디로 가겠나이까
새삼 무엇을 청하겠나이까
오늘 지금 여기가
당신을 만나는 외딴곳이자 하늘 나라 천국이옵니다
곳곳에서
발견하는
기쁨, 평화, 감사, 행복이옵니다
살 줄 몰라 불행이요 살 줄 알면 행복임을 깨닫나이다
끊임없는
찬미와 감사의 기도와 삶중에
당신을 만나니
당신은 우리를 위로하시고 치유하시며
기쁨과 평화, 희망과 자유를 선사하시나이다
주님
당신은 저의 전부이옵니다
저의 사랑, 저의 생명, 저의 기쁨, 저의 행복이옵니다
하루하루가 감사요 감동이요 감탄이옵니다
날마다 새롭게 시작하는 아름다운 하루이옵니다.
이제 당신을 닮아
온유와 겸손, 인내의 사람이 되는 것이
제 소망이오니 간절히 청하는
제 기도를 들어주소서
당신께 영광이 영원무궁하기를 빕니다. 아멘.”
외딴곳 쉼터에서 바치기에 참 좋은 기도문입니다. 관상과 활동은, 파견派遣과 귀환歸還은 영적 삶의 리듬입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파견되었던 제자들은 주님께 귀환하여 자기들이 한 일과 가르친 것을 다 보고합니다. 귀환하여 외딴곳에서 주님과 깊은 친교와 기도시간으로 충전되면 제자들은 또 파견될 것입니다. 주님께 돌아와 미사봉헌 후 다시 파견될 우리와 흡사합니다. 이어지는 말씀이 참 반갑고 고맙습니다. 바로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너희는 외딴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
그대로 주님의 사목적 배려입니다. 일에 중독되어 쉬지 못하는 것도 큰 병입니다. 그러니 때로 죄책감 없이 “노(NO)”라고 말하며 외딴곳의 쉼터를 마련하여 번아웃된 심신을 충전하는 것이 분별의 지혜입니다. 예수님과 제자일행이 외딴곳의 쉼터에 도착했을 때, 기다린 것은 예수님 말씀에 굶주린 군중이었습니다. 분별의 잣대는 연민의 사랑입니다. 예수님은 목자없는 양들과 같은 군중이 가엾은 마음에 들어 쉴 사이도 없이 많은 것을 가르쳐 주셨다 합니다.
빵에 앞서 말씀입니다. 말씀과 빵, 결코 이 순서가 바뀌어선 안됩니다. 말씀은 생명이요 빛이자 영입니다. 인간의 본질은 말씀입니다. 우선적으로, 근원적으로 말씀을 갈망하는 인간 영혼들입니다. 그러니 말씀으로 해갈되어야 할 영적 목마름이요, 말씀으로 충족되어야 할 영적 배고픔입니다. 말씀의 가르침에 이어 5천명을 배불리 먹인 빵의 기적입니다. 그대로 말씀전례와 성찬전례로 이뤄진 성체성사 미사를 상징합니다.
여기서 놀랍고 감사한 것은 예수님과 제자들만의 외딴곳이 아니라 배고파 모인 모든 군중들에게도 외딴곳이 배움터이자 쉼터가 샘터가 되었고 모두 영육으로 충전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니 외딴곳을 상징하는 성전 미사가 얼마나 큰 은혜인지 깨닫게 됩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최고의 참 좋은 선물이 미사입니다.
주님은 날마다 외딴곳의 쉼터이자 배움터이자 샘터인 이 거룩한 성전 미사를 통해 우리의 지친 영육을 치유 충전시키시어 세상 삶의 자리에 복음 선포자로 파견하십니다.
“제 한평생 모든 날에,
은총과 자애만이 따르리니,
저는 오래오래, 주님 집에 사오리다.”(시편23,6).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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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204. 연중 제4주간 토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언젠가 피정을 하고 싶어서 어렵사리 시간을 냈습니다. 그리고 여기저기 알아본 후 어떤 수도원의 피정에 참여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피정을 신청하고 그날 그 시간에 피정에 집에 도착했습니다. 배정받은 방에 짐을 풀고 피정 지도 신부님과의 만남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지도 신부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오늘은 첫날이니까 쉬는 것이 어떨까요? 푹 주무시는 것도 앞으로의 우리 여정에 도움이 될 것입니다.
이런 말을 들으니 정말로 피곤이 밀려왔습니다. 저녁 식사 전까지 깊은 단잠을 잤습니다. 저녁 식사를 한 후 다시 한번 그 신부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밤은 별다른 일정이 없습니다. 그냥 편하게 쉬십시오.
그렇게 이틀이 지났습니다. 저는 의문이 생기기도 하고, 초조해지기도 했습니다. 왜냐하면 피정하러 왔는데 피정은 하지 않고 쉬고만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도 신부님께 물었습니다.
신부님! 피정은 언제 시작하나요?
신부님께서는 웃으시며 대답하셨습니다.
우리의 피정은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다만 기도할 수 있는 힘을 얻기 위해 세상에서 지친 몸과 마음을 쉬고 하고 있을 뿐입니다. 혼란스러운 세상 속에서 살다가 갑자기 그 혼란스러움을 가지고 기도에 임한다면 기도가 순탄히 이어질까요? 기도도 힘이 있어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잘 쉬는 것이 중요합니다.
주님께서는 오늘 제자들에게 외딴곳으로 가서 쉬라고 하십니다. 제자들의 지친 몸과 마음을 쉼으로 초대하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늘 우리를 당신 안에서의 쉼으로 초대하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초대를 알아채지 못하거나 무시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안에는 근심과 걱정, 불안함과 초조함이 늘 우리를 괴롭히고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 안에서 잠시 쉬어 보십시오. 마음 구석에 보따리 풀어 헤치고 잠시 쉬어 보십시오. 그렇게 마음을 평안히 하면 우리는 다시 기도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하다 보면 익숙해집니다.
치간솔이나 치실을 쓰시나요? 저는 씁니다. 쓴 지 얼마 되지는 않았지만, 요즘은 애용하고 있습니다. 물론 치아 건강에 도움이 된다고 해서 사용하게 되었지만, 처음에는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양치만 잘하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치간솔이나 치실을 사용하는 것이 오히려 편하게 느껴집니다.
기도도 이와 마찬가지 아닐까요? 처음에는 불편할 수 있습니다. 우리 생활 한 부분을 내어서 기도하는 것이 쉽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기도를 꾸준히 하다 보면, 그리고 기도의 맛을 느끼게 될수록 기도는 우리에게 익숙해지고 더불어 하루의 힘이 되어줍니다. 마음마저 상쾌하게 만들어줍니다.
하다 보면 익숙해집니다. 기도도 선행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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