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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과 종교
http://theology.ac.kr/institute/dtdata/%EB%AA%A9%ED%9A%8C%EC%9E%90%EB%A3%8C/%EC%8B%A0%EC%95%99%ED%8A%B9%EA%B0%95/%EC%9D%BC%EB%B3%B8%EC%9D%B8%EA%B3%BC%20%EC%A2%85%EA%B5%90.htm
theory.ac.kr/institute/dtdate
-16.08.30-
제 1 절 의식 구조
1. 혼네와 다테마에
일본을 처음 대하는 사람들은 오랜 시일이 지나고 나면 비로소 치장과 무대의 소도구 뒤에 위장된 일본의 참모습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일본인들은 당위와 실재를 분명히 구분할 줄 안다. 곧 우찌(내) 와 노세까이(외: 바깥세상)의 엄격한 구분은 일본 문화의 가장 큰 특징중 하나이다. 공동체 의식은 대개 세 가지로 구분된다. 첫째는 우찌(내)의 세계로서 모든 것을 터놓고 사는, 아니 소위 믿을 수 있는 세계를 말한다. 둘째는 의리의 세계로서 철저한 인사와 예절을 지키며 결코 속마음을 보이지 않고 믿지도 않으나 최대의 친절과 성의로 대한다. 셋째로는 노세까이(외)로서 전혀 관심 밖의 대상으로 철저히 비밀을 보장한다. 이웃집에 살면서도 대문에 들어가기까지는 6개월에서 몇 년이 걸리는 사생활을 보이지 않는 사회이다. 이러한 내를 향한 결집력과 외를 향한 배타성을 일본 문화의 독특한 이중구조라 할 수 있다.
이들이 사용하는 말 가운데 혼네 (본근)와 다테마에 (입전)라는 것이 있는데 혼네는 본심을 뜻하고 다테마에라는 것은 표면상의 태도를 말한다고 할 수 있다. 이들은 우찌 (내)의 세계 이외에서는 결코 본심을 말하지 않는 것을 어려서부터 가르침 받으며 서로 서로 본심을 알기위해 수 시간을 보내며 빙빙 돌며 서로가 서로를 조심해 가면서 다테 마에로 대하기를 좋아하고 또한 그 관계를 서로 마음 상하지 않기 위한(손해 보지 않기 위한) 좋은 예절로 생각한다. 이러한 현상은 심지어는 남편과 아내사이에서까지 수십 년씩 익숙하게 유지되는 경우도 허다하다. 또한 이 모든 것은 대개의 경우 화(화:타협)로서 공동체의 유익을 위해 좋게 받아들여진다.
이러한 것이 대립과 마찰을 해소하는 것으로 사용되나 이를 이중성 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국화와 칼]이라는 책을 쓴 문화 인류학자 루드 베네딕트(Ruth Benedict)는 일본인들의 이중성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고 있다. "일본인은 최고로 공격적이자 비공격적이며, 군국주의적이자 또한 탐미적이며, 불손하면서도 예의바르고, 완고하면서도 적응성이 풍부하며, 유순하면서도 귀찮게 시달리면 분개하며, 충실하면서도 불충실하며, 용감하면서도 겁쟁이이며, 보수적이면서도 새로운 것을 즐겨 맞이한다. 그들은 자기 행동을 다른 사람이 어떻게 생각하는가에 놀랄 만큼 민감하지만, 동시에 다른 사람이 잘못된 행동을 모르게 될 때도 범죄의 유혹에 지고 만다."
그들에게는 성격상 전혀 대립되는 양면이 아무 모순 없이 존재하고 있어 이것이 "날줄과 씨줄" 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2. 집단 의식
일본인의 사회는 단체나 집단 속에서 개성을 누리는 구조로서 개인적인 면보다 집단이 우선되는 구조이다. 예를 들어 기업은 기업주와 고용인 사이에 가부장적 관계가 정착되어 가족의 연장이 되어 있다. 사람들은 최대의 충성심을 표하고 기강과 근면성으로 훌룡한 상품을 생산하며 그 대가로써 보수를 보장받는다. 관료들은 봉사적이고 유능하다.
합의 방식의 유지 덕택에 민주주의는 상류층뿐 아니라 서민 대중에게 까지도 확대되고 있다.
이와 같은 의식의 이면에는 섬나라라는 특수성 때문에 계속해서 문물은 받아들였지만 바다라는 장애물이 있었기 때문에 상당히 강한 고립성을 유지할 수 있었다. 이는 선진 문물 수입의 흐름이 일방적으로 계속되지 않고 때로는 막히는 경우도 있음을 의미하며 그러는 사이 독자적 발전을 할 여유를 가질 수 있었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일본의 해양적 독립성은 문화면 등이 급격하지 않고 보수성이 강
하다는 말이 된다. 이 같은 문화의 보수성, 연속성은 일상의 문화 감각 에서도 형식 존중, 계보 존중의 권위주의적 기풍을 낳게 하였다.
일본인은 전통 관습에 따라 개인은 전체 사회의 보다 큰 이익을 위해서는 자신의 모든 이해를 초월해 규칙에 복종하며 모범적인 본보기에 따라야만 한다. 즉 그들의 사회구조는 개인적인 면보다는 집단이 우선되는 구조이다. 개인의 존재목적은 집단을 위해서인 양 집단 속에 자신을 몰고 남을 의식하며 생활하고 있다. 그들은 자신이 타인과 다르다 기 보다는 동일하며 타인보다 우월하거나 저조하여서 웃음거리가 되는 것은 극히 수치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일본은 예로부터 가족 외에 비 혈연적으로 귀속한 조직이 꽤 발달되어 있었다. 정인(정인), 가원(가원)과 번(번)이라는 조직이다.
먼저 이 정인(정인) 근성을 살펴볼 때 이것은 어떤 일을 할 때에 혼자서 다하는 것이 아니라 분업(분업)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기에 그들은 직장 안에서도 집단적으로 일을 해 나가는 것이 그들의 의식구조이다. 가원(가원)이라는 것은 근대 봉건 사회에서 나타났는데 이것은 고대부터 있어온 기예비전(기예비전)의 계보성과혈연 조직을 중시하는 전통과 도구가와 (덕천)시대 정인들의 현실 봉건 권위와는 또다른 권위 질서에 참여하려는 경향이 결합되어 성립된 것이다.
3. '화'의식
일본인은 모든 관계에 있어서 국가나 자기가 소속된 공동체를 위해 개인을 죽이고 전체를 살려야 한다는 관점에서 '화'를 그들 최고의 미덕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러므로 도리를 최고로 인정하는 우리 사회의 가치관에 비해 일본인은 작게는 가정, 크게는 소속된 회사단체와 국가라고 하는 본가(천황이 그 상징)안에서만 그들의 존재 가치와 행복을 발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공동체의 이익을 위해서 개인을 죽이고 충돌보다 타협을 찾는 것이 일본인의 '화'의 의식구조이다.
일본의 속담에는 [긴 물건에는 감기면 된다.], [모든 사람이 가는 길을 같이간다.] 그리고 [편치 않은 과거를 물에 흘려 잊어버린다.]는 말이 있다. 이런 말들은 그들의 '화'의 사상을 잘 말해 주고 있다. 일본인들은 어려서부터 전체를 위한 평범아로서 길들여진다. "가정생활은 자기 부정의 수양도장이라야 한다." 곧 여기서 자기 부정이란 [어울림]을 위한 자기부정을 말한다. 그러나 이러한 화의식은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압력과 일상적인 습관 때문에 가정이나 기타 친근한 집단 내에 어떤 문제가 있다는 점을 시인하기가 어렵다. 젊은이들이 공공연하게 비난하는 것은 점잖치 못한 일이고 또 연장자를 공격하는 것도 도리에 어긋나는 일이다. 회사나 관청, 정당 내의 마찰은 항상 은폐되고 이러한 사실을 입 밖에 내면 사태가 개선되기 보다는 혼란을 일으켜 더욱 시끄러워 질뿐이다. 따라서 많은 문제 들은 조화라는 장막뒤로 감추어진다. 결국 문제의 싹을 자르지 않고 의견 차이가 대립으로 번져 곪아 터질때까지 키워나가는 셈이다.
제 2 절 일본의 종교
1. 종교관
다른 많은 나라와 같이 일본인들은 자연의 현상을 대상으로 숭배하는 고유한 의식이 발달되어 있다. 일본 열도에 살고 있던 많은 사람들은 산신(산신)[야마쓰이], 해신(해신)[와타쓰미], 수원신(수원신)[미즈마리노가미] 를 비롯해 여러 가지 다양한 자연물, 자연현상, 동식물을 신으로 삼아 섬겼으며 또 그 지역의 특성에 따라 고유한 제식(제식)을 발전시켰다.
이러한 토속적인 의식들이 후에 발전되고 통합되어 오늘날의 신도(신도)를 형성하게 된것이다. 일본의 원시적인 종교는 우주의 모든 생물, 무생물의 영혼을 갖고 있으며 또한 예배의 대상이 될 수 있다 는 점에 기초를 두고 있다....일본인의 종교 개념 속에 있는 "가미(신"란 인간보다 다소 "위(상"에 불과한 것이며, 인간 사이의 주종관계를 나타내는 "오감이"와 같은 것이다. 즉 "가미(신"를 위한 단어는 처음에는 "높은(upper)" 혹은 "보다 높은(above)"이라는 뜻 이상의 의미는 갖고 있지 않았다.
일본인에게 있어서 "더 높은 존재"(higher begins)라는 것은 "존경 받을 대상"으로 인식되어져 있으며 영적 세계는 이 "더 높은 존재들"에 의하여 형성되며 이들의 이적들로 가득 차 있다고 믿고 있다.
[고사기]와 [일본서기] (720년)에서 전해지는 기기신화(기기신화)에 의하면 [아메노리나가누시노 신]이 나타나고 [다가미무스비], [가미무스비]의 두 신이 나왔다. 이들을 조화 삼신 (조화삼신)이라 한다. 신대(신대)가 7대 계속되고 [이자나끼], [이자나미]의 두 신이 나타나 결혼하여 일본 국토와 많은 신들을 낳았다 한다. 이 신들 중 마지막 신인 아마테라수 오오카미 (천희대신)는 태양 여신이 되려고 높은 곳에서 내려와 태양 여신이 되자마자 첫번째로 짐무텐노(신무천황)가 되었다는 것이다. 다른 신이 뒤를 이어 천황이 되었고 오늘날의 천황까지 이르렀다 한다.
일본 헌법 제 1 조는 "대 일본 제국을 만세일계(만세일계)의 천황이 이를 통치 한다."라는 것이며, 제 2 차 대전 이전의 교과서에는 "일본인이 선조 대대로 각기 유업을 무사히 유지해 온 것은 오로지 역대 천황의 은공인 것이다."라는 기록이 있다. 이렇듯 천황이란 존재는 일본인들의 마음에 깊이 박혀 있으며 신앙의 대상으로 되어 있다.
1946년 1월 천황은 "인간선언"을 하여 "아라히도가미(현인신)"가 아닌 평범한 인간이란 것을 선언하였는데 이와 같은 일은 세계 근대사에서 전혀 희귀한 사례일것이다. 일본인은 "아라히 도가미"였던 이 인간 천황에의 향수와 사도의 정을 버리지 않고 있다. 일본인에게 또한가지 특징은 절대신 개념이 없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한사람이 미션 스쿨에서 세례를 받고 신식으로 결혼식을 올리고 불식으로 장례식을 치른다 할지라도 자타가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 민족이다. 이와 같이 절대신이 없고 인간측의 형편에 따라 종교도 자유로이 되는 일본인의 종교를 벤다산은 "일본교"라고 불렀다. 일본교의 중심은 "신"보다 "인간"이라는 것이다. 일본인은 원래 무신론자로서 인간중심이며, 인간이 피조물이 될 수 없고 신이 피조물이 된다. 인간을 초월하는 신, 종말적 세계관, 교의는 없다. "신학"대신에 "인간학"이 있을 뿐이다.
일본인은 신을 기뻐하고 제사하는 일은 있어도 인간을 초월한 신의 명령을 들고 복종한다는 요소는 전혀 없다. 일본인이 신사(신사), 불사(불사)에 참배하는 것은 종교 행위라기 보다는 보양이며, 즐거운 행각이고 거기서 인간은 축복 요구를 일방적으로 하며 만족한다. 인간에게 무엇인가를 요구하는 종교를 일본인은 싫어한다. 즉 인간 측에서 요구하는 것만으로 충분한 것이다. 신의 말씀을 듣는다는 요소는 거의 없다. 인간은 누구나 죽은 후에는 "신"이 되고 "부처"가 되는 것으로서, 신과 인간 사이란 넘을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생사와 연결되어 있다.
일본인들은 범신 사상과 함께 절대적인 '신'과 '나'라는 관계가 명확치 않으므로 신 앞에 있어서의 개인의 책임 그리고 그것을 범했을 때의 신과 사람 앞에서의 죄의식이 결여되어 있다. 그래서 기독교인이 생겨난다하더라도 상황에 따라서는 "전향", "배교"하는 자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일본인에게는 절대의 신 개념을 체험케 되는 것과 죄는 하나님의 거룩한 표준을 파괴한 것이므로 회개하고 예수 이름으로 성령의 침례를 받아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야 할 것이다.
2. 재래 종교
1) 신도
신도는 일본 고유의 자연 종교이며 신도의 신을 제사지내며, 모시고 있는 곳이신사이다. 신도에서 말하고 있는 신은 대신사마다 모t시고 있는 신이 다르다. 처음에는 자연물이라 자연 현상을 신이라고 하였다가 차츰 조상을 모시는 것으로 되었다. 따라서 신도에는 특정한 교조나 교전이 없다. 일본 신화에서는 [팔백만노신:야호요로즈노가미(수많은 신)]이라고 하는 말이있듯이 신들의 수는 극히 많았다. 그러나 [고사기]나 [일본서기]의 신화 부분에서는 천황의 황조신(황조신) [천희대신:태양신]을 중심으로 정리되어 불교 유교의 영향을 받아 이론화되어 있다.
신도의 상징물들은 거울, 보석과 칼이며 이것은 태양여신인 첫 번째 천황에게 주어졌다고 말한다. 그러나 실제적으로는 초기의 침략자들이 한국에서 가져 왔을 것이다. 이러한 것들은 태양, 달과 번개를 나탸낸다. 거울은 천황가의 조상신을 위한 신사인 이세다이진구 (이세 대신관) 안에 있고 칼은 나고야의 앗슈다궁 안에 보관되어 있다. 그리고 보석은 환제의 궁 안에 보관되어 있다. 이러한 신도는 발전된 신학이 없고 교훈이라기보다는 단순한 의식으로서의 심신의 정화에 강조점이 있다.
현재 신도는 전국에 109,937개소의 신궁과 신사를 가지고 있으며 신도수는 신앙에 관계 없이 일본 국민 전부를 신자로 간주한다. 신년 정초에는 초예(초예:하쓰모오데)라고 하여 신궁이나 신사를 찾아 한 해동안의 평안과 사업의 번창을 기원하는 데 1988년 정초에 3일간 참배한 사람은 8,000만명이 넘었다. 신도는 명치 시대에 국교로 제정되었는데, 전성기에는 마을마다 1개 이상의 신사가 있어서 무려 193,200개소나 되었다고 한다. 신궁이나 신사 전부 국가에 의해 관할되었으나 1945년의 패전 후 부터 종교법인에 의해 신사 본청에서 관할하도록 되어 있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관에서 관할하는 관사가 224개소나 있고, 민간이 종교법인에 의해 관할하는 민사가 109,713개소나 된다. 신도와 기존의 민속 신앙인을 합하면 아직도 인구의 70%선을 육박하고 있다.
초기의 신도는 교의면 에서 심신의 청정과 청결을 주로 강조하는 극히 단순한 형태를 보였으나 세부적인 의식면에서는 종파에 따라 매우 다양한 양상을 보였다. 이에 따라 종파간의 대립은 끝없이 계속되었다. 일본의 구조 자체를 살펴보면 일본의 천황 중심이라고 하는 것이 흔들리지 않는 국기가 되어 이 천황을 중심으로 한 종교가 전 국민을 결속시키는 보이지 않는 저력이 되어 있는데 이 구조자체, 이 오랜 전통을 깨뜨리지 않고는 기독교가 그 속에 들어간다고 하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일이다
2) 불교
기원전 5세기경 인도에서 성립한 불교는 중앙아시아를 거쳐 기원전 1 세기경중국에 전해졌다. 중국에 퍼지고 4세기 후반에는 고구려와 백제에 6세기 초 신라에 전해졌다. 일본에는 이미 5세기 경부터 대륙에서 건너온 사람들 사이에서 신앙되었던 것 같다. 고문에서 부처, 보살의 상이 있는 사불사수경(사불사수경) 등이 출토되었다. 6세기에는 고대국가의 확립과 함께 불교의 수용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처음 불교는 일본인들의 신봉을 받기는커녕 그들을 혼란시켰다. 더구나 당시일본 조정에는 신도가 상당한 뿌리를 내려 불교를 억압했다. 그러나 불교를 공적으로 승인하느냐의 문제를 가지고 소아씨(소아씨)와 물부씨 는 두 세력이 다투었는데 불교를 신봉했던 소아 씨의 승리로 불교가 일본 문화의 한 바탕이 되었다.
그리고 서기 594년 국교로 인정되었다. 불교는 일본에 들어온 지 얼마 안되어서 율령국가(율령국가)의 터전을 닦고, 쇼토쿠태자 (성덕태자) 의 호불적인 태도를 기반으로 하여 급성장하게 되었다. 일본 조정의 위대한 정치 지도자였던 쇼토쿠태자의 주도 아래 불교를 널리 포교하고 수 많은 사찰을 건립하고 많은 승려들을 중국에 보내 불교 수업을 시켰다. 서기 8세기경에 이르러서는 신도와 불교가
하나로 혼합하는 현상이 나타났다.
이것은 주로 불교측에서 주도하였고 불은 신의 상위에 놓고 신도부터의 가르침을 받아 보살이 된다고 하며 일본의 신들에게 불교식의 이름을 붙혀 주었으니 천조대신은 대일여래라고 부르기도 했다. 이 외래의 불교가 일본고유의 신의 신앙을 포용하여 불교 자체로서는 비소화 (비소화)되면서도 일본화의 길을 간 것이다.14세기중엽에 이르러 불교는 교리적인 면보다는 교단을 확고하게 하는 데 두드러진발전을 보이면서 정부와 결합하여 세속화되는 경향이 현저해졌고 본래의 성격이 많이 변화되어 권위종교, 특정종교가 되어버렸다.
근간에 두드러지게 성장한 남묘호렌교 (남묘법운교)는 불교의 일연종 (일연종)에서 분파된 것으로 10| 14세기에 생겨난 종파로 우리나라에도 상륙하여 신도들이 늘고 있다. 현재의 일본 불교는 7개 종계에 202개 종파로서 대규모의 교세를 가지고 있다. 각 사원은 신도 관리를 위해서 컴퓨터를 설치하고 정확한 업무 처리를 하고 있다. 신도 수는 현재 7천 5백만 명에 이르고 있어 전 인구의 70%에 해더된다.
표적 종파는 일연계의 37개 종파로서 3천만명이고 정토 진종계 (정토진종계)가 1천 4백만명에 달하고 있다. 그러나 신도수는 1930년대에 들어서면서 계속 하강세를보이고 있다. 절은 전국에 75,000개소에 이른다. 일본인의 생활에서는 불교와의 관계가 대단히 밀접해서 신도(신도)가 아니더라도 절에 참배하고 장례식을 불교식으로 행하며 죽은 후에는 불교상(불교상)의 이름을 붙인다. 일본의 문학, 미술, 건축 혹은 일본인의 사상, 도덕등 문화 전반에 걸쳐 불교가 대단히 강하게 영향을 주고 있다. 이렇게 해서 불교는 기독교 선교에 있어서 넘어야 할 큰 장애물인 것이다.
3) 유교
유교의 고전 충효지인애의 5원칙, 역사의 중시 등, 유교의 특색이 일본에 도래한 것은 6세기 초에 백제에서 오경박사에 의해였고, 그 후 9 세기까지에 걸쳐서의일이다. 이것은 한국의 거대한 영향의 첫 물결이었다. 그러나 유교는 불교에 가려서 17세기 중앙 집권적인 도꾸가와 막부의 등장과 함께 정치와의 관련성이 종래에 없이 인식되고서야 겨우 무대에 등장하기에 이른다. 유교가 강조한 것은 리법에 따른 합리적인 자연의 질서이고 인간은 엄한 윤리적인 지혜의 소유자에 의해서 통치되어야 한다는 점이었다.
사서오경등의 문헌이 존중되었지만, 성직자는 없고 종교적인 의식도 없었으며있는 것이라고는 지배자에 대한 충, 부모에 대한 효 뿐이었다. 그리고 사회적인규범을 준수하는 것을 중심으로 옳게 생각하고, 옳게 사는 것이 강조되어 "일종의 교양과목"의 위치를 굳혔다. 이러한 유교는 19세기의 일대 변혁기를 그냥 넘길 수는 없었다. 유교의 우주관은 구미의 근대 자연과학의 지식에 비하면 부정확한 것이었다. 그 도덕적 가치관은 고대의 사회와 정치제도에 밀착하고 구미의 위협을 눈앞에 두고 있었으므로 유교적 우주관의 포기는 불가피한 시대적 요청으로 간주되었다.
현대의 일본인은 도꾸가와 시대의 선인들과는 달리 분명한 공맹의 학도들은 아니다. 그러나 그들의 가치관이나 윤리관은 아직도 유교적인 색채가 짙다. 전통적인 철학이나 종교 가운데 유교만큼 큰 영향을 남기고 있는 것은 없을 것이다. 정치는 도의에 입각해야 한다는 신조, 대인관계나 인간적 성실의 중시, 교육이나 근면의 신뢰 등은 여전히 일본인의 의식을 뒷받침하는 사상적 배경으로 남아 있는 것이다.
3. 현대적 종교 동향
일본은 명치유신 이후 군주헌법 제도였으며 군부가 종교 문제에까지도 관여하여 지배하려 했다. 명치시대 초기의 칙령 중에서 "신들을 참배함과 신도 종교의 의식을 존중시함은 일본 제국의 일대 귀중한 것이고 국책과 교육의 기본적 원리이다... 그러므로 종교와 정부의 일치하는 방법이 다시 일어나야 될 것이다." 라고 선포되었다. 이와 같은 칙령의 의미는 1930년대에 종교와 국가는 서로 분리될 수 없는 의미와 아울러 충분히 활용되도록 압력을 받아서 원만한 시행을 보았다.
일본의 헌법에 "일본 국민은 안녕과 질서에 손해되지 않는 한 그리고 국민의의무에 반대되지 않는 한 종교적 신앙의 자유를 누릴 수 있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신도 정신을 배경으로 한 일본 정부는 천황의 초상화에 최대의 경레를 할 것과신사 참배를 강요하기에 이르렀다. 처음에는 일본 기독교 연맹에서 이를 반대했다. 1930년대에는 기독교 단체와 주일(주일) 선교부에서 합동으로 성명서를 공포하여 이를 반박하였다. 그러나 1936년에 광신적인 신도 군벌가들이 정권을 잡고 신사 참배를 강요한 때에 일본 기독교 연맹에서는 그 입장을 바꾸어 "우리는 신도의신사는 종교적이 아니라고 정부에서 내린 정의를 그대로 인정한다." 고 선포했다. 1937년 중일 전쟁 발발에 있어서 일본 기독교 연맹은 성명서를 내고 "우리들은 정부 성명의 취지를 이해하고 협력, 일치하여 진충보국(진충보국)을 수행한다."
고 말하며 성공회 문서는 "이번 사변은 성전이다."라고 까지 말한 바 있다.
1945년 일본은 태평양 전쟁에서 패함으로써 민주주의 나라로 재생했다.8월 일본은 연합국이 제시한 포츠담 선언을 수락하여 항복했다. 그 선언 제 10항에는 일본 내에서 종교의 자유와 확립을 요구했다. 1946년 1월 1일 천황은 신년을 맞아 조서(조서)를 내려 스스로 현인신을 부정하였다. 이 조서는 [천황의 인간 선언]이라 불린다. 그것은 천황을 신으로 믿고 천황에게 충성을 다하는 것이 [신민]으로서의 의무이고 그 이상 영예스러운 것이 없다고 배워온 국민에게 큰 충격을 안겨 주었다. 그리고 연합군 최고 사령관의 발안으로 새로운 헌법을 준비하여 정부가 채택했다. 일본 유사 이래 처음으로 1946년 헌법이 새로이 제정되면서 모든 종교에는 자유가 보장되었다. 이 신 헌법은 제 20조의 조문을 다음과 같이 선포했다.
[종교상 자유는 모든 시민에게 보증이 되어 있다. 아무런 종교단체든 국가에게서 아무런 특권을 받지 못할 것이며 아무러한 권한도 행사하지 못한다. 누구에게든지 어떠한 종교 활동과 기념식과 의식이나 실지에 참여하라고 강요해선 안 된다. ]
일본의 사회는 구미의 기독교 사회나 중동, 아시아의 이슬람 사회처럼 역사적으로 단일 종교가 지배적으로 독점한 적은 없다. 민족과 언어가 거의 단일인데 반해 종교가 다원적으로 발달해서 병존하고 있는 것은 일본 종교의 현저한 특징이다. 이러한 일본 사람의 의식 속에는 어떤 종교도 결국은 같다는 생각이 지배적이다. 일본은 지금 세계 최고의 기술을 가진 국가로 인정받고 있으며 미국과 함께 경제 최강국으로서 세계의 경제를 리드하고 있는 국가이다. 그러나 그들은 이와 같은 경제적 부와 높은 수준의 문화를 추구하는 것이 진정한 행복을 줄 수 없다는 사실을 점점 더 깊이 느끼고 있는 것이다. 매년 정초 3 일이 지나면, 정월의 첫 참배 인파로서 매스컴이 떠들썩해진다. 1985년도 첫 참배객 인파는 전국각지에서 8,175만명에 달하여서 사상 유래가 없는 숫자를 기록했다고 한다.
최근에는 동경의 원숙(하라쥬꾸)나 신숙(신쥬꾸)에서 다방등을 회장(회장)으로한 "가두 설교"가 젊은이에게 인기가 있다고 한다. 설법자도 승려뿐만이 아니라탤런트, 만담가등 여러 부류이며 인간과 영계(영계)의 관계를 설명하는 사람, 인생론을 이야기 하는 사람... 등 내용도 다양하고, 더우기 "가두 설교"는 동경뿐만이아니라 각지로 확산되고 있으며 정기적으로 모이는 젊은이가 상당수 있다고 한다. 이 특장은 종교에 구애 받지 않고, 인생관을 들어서 거기에서 벽에 부딪힌 자신이나 아무것도 아닌 불안감을 해소할 조언을 얻고자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일본은 불교, 유교, 기독교, 민주주의, 전체주의, 자본주의, 공산주의 등 갖가지 철학들을 훌륭하게 융합시켜 그 일부를 흡수, 소화시켰다. 그러나 이제 일본은 정신적 위기에 직면해 있다. 이같은 일본의 위기를 정치인들은 다시금 군국주의의 부활과 대국주의 고양이라는 목표로 타계하고자 하는 것 같다. 1983년 수상인 나까소네 야스히로 수상이 태평양 전쟁의 영을 받든 청국신사에 참배 한 사실은 신도와 군국주의적 부활의 한 단면이다.
제 3 장 일본의 기독교
제 1 절 일본 기독교 선교 역사
일본 기독교회사는 사비에르(Xavier)가 1549년 가고시마에 도착하여, 예수회파의 가톨릭 전도
가 시작된 시기를 기독교 선교의 기점으로 하고 있다. 1500년대를 일본 사에서는 "전국시대"라고 부
르고, 실력이 제일인 군웅 할거의 시대로 간주되며, 전통 적인 봉건시대가 붕괴되기 시작하고 근세의
싹이 눈뜨기 시작한 시기라고 보고 있다. 일본 카톨릭 교회사는 1549년부터 시작되어 활발한 전도의
시기, 박해, 침체의 시기를 거쳐서 명치유신 때까지 계속되어 왔다. 물론 카톨릭 교회사가 명치 유신때까지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지만, 대체로 잠복한 크리스챤들이 일본의 문호 개방과 함께 부활한 시기까지를 대상으로 하고 있다. 여기서는 1867년 명치유신 전후까지를 기술하고자 한다. 일본 개신교 선교사는 미일조약이 맺어진 1858년 이듬해 부터 시작되는 것이 정설이므로 카톨릭 교회사에 이어서 계속 기술하려고 한다.
1. 카톨릭 선교
일본의 카톨릭 선교는 1549년 8월 사비에르(Francisco de Xavier)가 일본의 카고시마에 도착한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카고시마의 영주인 시마쯔기히사는 사비에르를 환영하며 그에게 거주지를 마련해 주고 포교활동을 허락하였다. 그 일행은 카고시마에서 13개월동안 머물면서 약 100명에게 세례를 주었다. 그 후에 선교사들은 일본 전국을 통일한 오다노부나가의 포교 허가로 인하여 1576년 교오또에 난반지 교회당과 1580년에 아즈찌에 신학교를 설립하였다. 그리고 영주들의 힘에 의하여 급속도로성장하여 이찌구, 히라도, 야마구치, 사까히 지역까지 이르게 되었다.
약 30년 후인 1582년에는 신도 수 15만여명, 교회당은 200여개, 선교사는 59명에달하였고 1590년대에의 신도 수는 당시 일본 총인구의 1.3%인 30여만 명이나 되었다. 이런 성장의 배경에는 통상무역의 이익을 위해 카톨릭 신도를 우대한 영주들의 실리적 자세가 무엇보다 더욱 많이 있었다. 그러나 개중에는 진정한 카톨릭에로의 개종이상류 지도층에서 일어나 1587년 도요토미 히데요시(풍신수길)에 의한 금교령이 내려지기까지 상당수의 영주와 제후들이 세례를 받았다. 이들은 자신이 개종하고는 자기영내의 백성들에게 카톨릭에로의 개종을 강제로 요구하곤 하였다.
지도자들의 개종을 통한 전도의 효과가 가장 이상적임을 깨달은 선교사들은 자연적으로 이들의 개종에 신경을 쓰게 되었다.오무라스미다다는 나가사끼의 땅을 교회에 바쳐 카톨릭 선교에 큰 공헌을 하였다. 또한 나가사끼는 일본 전국의 복음화를 위한 선교의 중심지로 '소로마'라고 불리워지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갑자기 검은 구름이 지평선 저쪽에서 몰려들기 시작하였다. 그리스도인의 강력한 후원자였던 노부나가가 암살을 당하고 그의 후계자들인 도요도미히데요시와 도규가와이에야스는 그리스도교에 핍박을 가하기 시작했다. 1582년 천하에 권세를 한손에 장악한 히데요시는 얼마동안 노부나가의 경우와 같이 카톨릭에 대해 상당한 관용을 베풀었다. 그러나 점차로 확장되어가는 카톨릭에 대해 그는 두려워하는마음이 생겼는데, 첫째는, 자기의 지배령내에 이질적인 신을 섬기는 크리스챤의 세력이 커지는 것을 두려워 했다.
그래서 그는 먼저 "반천년 추방령"을 내렸다. 당시에는 40명의 신부와 73명의 수사가 있었는데 이들은 하라도에 모아서 국외로 추방하려고 했으나 배편이 없다는 구실로 선교사들은 사실상 남아 있었다. 이러한 중에 카톨릭 선교에 또 하나의 어려움이 찾아왔는데 그것은 스페인이 포르투갈과 경쟁하는 무역국으로 등장하면서, 1593년에 프란시스코 회의 선교사를 일본에 파송하며, 1587년 필리핀에서 멕시코로 향하던 스페인의 산팰리패호가 일본에 표류해 왔는데 그 승무원의 한 사람이 일본에의 카톨릭 전도는 스페인의 영토 확자의 수단이라고 말한데서 전국적으로 금교령이 내려지게 되었다. 그 해 11월 루손섬에서 총독의 사자(사자)로 온 밥티스타(P.Baptista-프란시스코파) 등 선교사 7명과 일본인 신도 19명등 모두 26명을 나가사끼(장기)에서 처형하였다. 이러한 도요도미 히데요시의 그리스도교 박해의 직접적 동기가 된 것은 스페인의 제국주의적인 영토 확장에 대한 두려움이었다고 할 수 있다.
풍신수길(풍신수길)에 이어 정권을 잡은 덕천가강은 무역과 종교를 분리하는 정책을 유지하여 해외 무역의 발전을 꾀하였으므로 카톨릭은 묵인되는 상태가 되었다. 그러나 포르투갈, 스페인의 무역을 제어하려는 화란, 영국의 카톨릭 공격, 선전이 덕천가강을 금교로 기울게 하였다. 그리하여 1613년엔 전국적으로 카톨릭 금교령, 선교사 추방령을 내렸다.
덕천가강은 1616년에 죽고 수충(수충)이 뒤를 잇는데 수충 시대의 경도(경도)의 대순교(1619년 50여명을 화형에 처함), 장기(장기)에서의 대순교(1622년,160명을 넘는 신도), 그다음 가광(가광) 시대(1623년 이후)에 강호(강호)에서 70여명을 념는 순교등이 계속되었다. 일본에서의 크리스챤 순교자의 수는 여러가지 추측이 있지만 유명, 무명의 사람을 합하여 4| 5만명이 될 것이라는 것이다.
이 때에 기독교 탄압을 철저히 하기 위해 신도의 현상 붙인 밀고(밀고)가 권장되 었고 신도 색출의 방편으로써 성모의 모습이 새겨진 그림판을 발로 밟게 하는 후미에 (답회)도 1629년에 시작되었다. 그리고 모든 사람은 반드시 어느 절인가에 소속되어 카톨릭 신도가 아니라는 증명을 승려로부터 받아야 하는 데라우께(사청)제도가 1613년 이래로 시행되었고, 신도의 생사, 혼인, 신분, 성명, 나이등이 기입되어 있는 종문개장(종문개장)이라는 일종의 호적제도 역활을 겸한 제도도 나타났다.
카톨릭 신도에 대한 박해와 탄압이 극심하게 되자 신도들 속에서 난들이 일어났다. 1637년 큐우슈우(구주) 지방의 시마하라(도원) 반도의 영주는 마찌구라이게지 (송창중차) 였고 아마구사섬의 영주는 데라자와요시다까(사택성고)였다. 이들은 백성을 너무 심하게 착취하였고 카톨릭에 대한 취급이 너무 가혹하였다. 어느날 교인들이 산굴에서 몰래 예배하고 있을 때 갑자기 포졸들이 덥쳐 난이 벌어졌다. 사태는급격히 악화되어 12만명의 군대가 동원되었으며 이 싸움은 거의 100일이 다 되었을때 겨우 진압되었다. 이 때 주동자였던 마스다시로도까시다(익전사랑시정)를 비롯하여 수만명이 학살당하였고 이 난으로 인하여 전국에 있는 카톨릭 신도를 체포하라는령이 내려져 각처의 선교사와 교인들을 검거하여 무차별하게 처형하였다. 이 난을 [시마하라(도원)의 난, 아마구사(천초)의 난]이라고 부른다.
탄압이 극도에 달하자 공공연하게 교인으로서 생활하는 사람은 눈으로 찾아 볼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신앙의 맥이 끊어진 것은 결코 아니었다. 교인들이 신앙을 유지하는 데에는 두가지 형태가 있었다. 하나는 잠복교인으로 숨어서 신앙을 유지하였고, 다른 하나는 겉으로는 불교나 신도 속에서 카톨릭 신앙을 지킨 숨은 교인들의형태이다. 그 후 1859년에 체결된 일불조약의 통역을 위하여 선교사가 일본에 들어오게 되었다. 1865년 3월 17일에 나가사끼(장기)의 오우라(대포) 천주당이 낙성식을 올렸으며, 그곳에 프랑스인 신부 쁘띠장이 상주하였다. 그 후에 잠복교인들이 찾아왔고 1868년의 보고에 의하면 나가사끼에 2만명의 교인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을 일본 카톨릭 선교사에서 "크리스챤의 부활"이라고 한다.
1873년에는 카톨릭 신도들이 추방지에서 돌아오고 1874년에는 카톨릭에대한 금제가 사라지게 되었다. 카톨릭 일본 선교의 역사는 초기 카톨릭의 부흥과 침체와 박해와 탄압이 반복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2. 개신교 선교
도꾸가와 정권의 250여년에 걸친 쇄국 정책은 기독교 신앙을 철저히 억압하고 금지하였으나 점차로 국내외의 정세는 개국의 방향으로 기울어져 가고 있었다. 일본에서의 개신교 선교는 미국, 영국의 교회에서 이미 선교 대상국으로 선정죄어 선교의문이 열려지기를 기도할 뿐만 아니라 선교 준비 헌금도 바쳐지고 있었다. 이러한준비 결과로 1854년 일본은 250여년간의 기나긴 쇄국 정치의 종지부를 찍고 미국과화친조약을 맺고, 1858년에는 미일 수호 통상 조약을 체결하였다. 이 조약의 8조에
서 일본에 있는 미국인 스스로가 그 나라의 종교를 믿고 교회를 거류지 내에 건립함이 가하다고 규정했다. 단, 일본인 에게는 1614년 이후 여전히 금지된대로였다. 이리하여 미국인에게만이라도 가까스로 일본에서 개신교의 예배 행위가 처음으로 허용되었다. 일본에 개신교 선교사가 정식으로 선교활동을 시작한 갓은 1859년부터였다.
미국 감리교의 리긴스(J.Rigins) 선교사와 윌리암스 (C.M.Williams) 선교사가 나아 사끼에 상륙하였고, 미국 장로교의 헵번(J.C.Hebane) 선교사 부부와 미국 개혁파의브라운(S.R.Brown) 선교사와 베르벡(G.F.Verbeck) 선교사 그리고 시몬즈(D.B.Simons)선교사가 요꼬하마에 상륙한 것이다. 그 후에도 1882년까지 209명의 선교사가 들어왔고 이들은 대부분 교육사업에 종사하였다. 선교사들은 개항 도시라는 제한지역에 거주하면서 무사들과 주로 접촉하게 되었다. 이 무사들은 명치 유신이후 사농공상의 신분 제도가 폐지됨으로써 생계를 이어 가기가 어려워져서 새로운 소외 계층으로 등장한 몰락무사들이다. 이들은 새로운 지식을 구하기 위하여 선교사의 집으로 모여들었다. 일본 개신교 선교사로 요코하마(횡빈) 밴드의 발라(J.H.Ballagh), 구마모도(태본) 밴드의 주동자인 젠스(L.L.Janes), 삿뽀로(찰황) 밴드의 주동자였던 클라크(W.S.Clark) 등이 유명하다. 이들 선교사들은 배후에 교파를 갖고 있었으나, 일본이란 토양에 있어서는 한정된 개항 도시에서 협력하여 선교에 임하여 스스로의 교파를주장하지 않았다.
그리고 일본인 교직자를 빨리 양성하여, 그들이 일본교회를 지도할 수 있도록 일본교회의 자립, 자치, 자전을 권하였다. 그들은 교육사업, 성서번역, 찬송가 작성 등에 있어서는 각 교파 출신의 선교사들이 합심하여 일을 하였다. 일본에 온 선교사는 압도적으로 미국인이 많았고, 다음에 영국, 캐나다, 독일의 순서였다. 그래서 일본 교회는 압도적으로 미국 선교사의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미국 선교사의 영향으로서 신앙 면에서 특기할 만한 것을 들자면, 신앙에 있어서의 개인주의적 경향(individualism), 리바이빌리즘 (rivivalism), 근본주의 신학, 엄격한 청교도적 도덕관 등을 들 수가 있다.
한편 이들의 약점은 교회관의 빈약과 일본의 토착 문화에 대한 경시, 가톨릭에의 비판적 태도등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일본의 초대 교회 발생에 있어서 3밴드의 이야기는 유명하다. 3밴드란, 요코하마 밴드, 구마모도 밴드, 삿뽀로 밴드 셋을 말한다. 밴드란 '맹약'을 뜻한다. 먼저 요코하마 밴드는 1872년에 요코하마의 외국인 선교사들이 신 년 초 주기도회를 개최하는데서 대학생들이 모여 기도하고, 회개하고, 세례받기를 원하는데서 이루어졌다. 여기에서 신앙의 부흥이 일어나 일본에서 처음으로 요코하마 공회가 성립되었다. 둘째로 구마모도 밴드는 1972년 이래 구마모도 약학교에서 교사로 남북전쟁때 포병 대위였던 잰즈를 초청한데서 비롯되었다. 그는 선교사는 아니었지만, 그리스도의 이야기를 숨김없이 털어 놓는 가운데, 1875년 말경 신앙을 고백하는 자가 30-40명에 이르렀고, 기도회 및 성서 연구를 통하여 신앙의 부흥이 일어났다. 그 후 요코하마양학교는 폐교되었으나 대부분의 청년들이 도시샤(동지사)로 옮겨 가일층 신앙의 길을 추구하기에 이르렀다. 그들은 동지사를 중심으로 관서 지방의 전도에 진력하여 일본의 삼대 교파의 하나인 조합 교회(조합교회)를 만들었다
세째로 삿뽀로 밴드는 삿뽀로 농학교에 농학교사로 초청되었던 클라크는 철학과도덕을 가르치는 데는 그리스도교 밖에 없다고 하여 그리스도교를 당당히 가르쳤고,1879년에 학생 15명이 '예수를 믿는 자의 계약'을 맺고 세례받기로 하였다. 삿뽀로 밴드의 출신으로는 유명한 우찌무라간죠(내촌감삼)가 있고 이들은 독립심이 강한 것이 특징이었다. 클라크가 삿뽀르를 떠날때 "소년들아, 대지를 품어라!(Boys,be ambitious)"라는 말을 남겼다는 것은 유명한 말이다. 1880년대에 도에 지나친 서구화가 있은 후, 1889년에는 만세일계(만세일계)의 천황이 지배하는 대일본제국의 헌법이 발포되어, 일본의 방향을 천황제 절대국가, 일본전통 회귀 등 "일본 주의"로 급선회하였다. 1890년에는 교육 칙어가 나와 초등학교에서 고등학교에 이르기까지 천황제 교육, 신민교육을 철저 화시키기에 이르렀다. 이와 같이 천황 지상주의의 국체가 공고히 되어가는 마당에, 그리스도교는 어리석게도 헌법에 비로써 선교의 자유가 명문화 되어 그리스도교가 불교나 그 밖의 일본 전래의 종교와 동등하게 보호받는 것을 감사하여 기뻐하였던 것이다.
천황은 신민에게 헌법을 은혜로 선물로 준 것으로서, "일본 신민은 안녕질서를 방해하지 않고 또 신민된 의무에 배지하지 않는 한에 있어서 신교의 자유를 갖는다." 제 28조)는 신교 자유 조항은 "안녕질서", "신민의 의무"에 의하여 묶었던 신교의 자유였다. 그리고 바로 이 헌법 발포와 함께 정면에서부터 "안녕질서", "신민의 의무"의 항을 가지고 총 공격을 받은 셈이 되었다. 1890년대의 그리스도교 공격에 의하여 신자 수는 격감되고, 미션 스쿨에 등록하는 학생도 적어졌다. 국가주의적 보수반동의 지배에 더하여, 그리스도교 내에서는 독일 신학의 영향을 받고 근본에서부터 동요되기 시작하여, 신앙의 에너지를 잃어가고 있었다. 교회 자체의 분열도 보였다. 유학생은 귀국하여 소위 그리스도교국이라 불리는 서구 제국은 윤리, 도덕 면에 있어서 그만큼 그리스도 교적이 아닌 것을 지적하였다.
우수한 청년들이 차례로 정부나 국가기관, 또는 기엽에 흡수되어 교회에는 나오지 않게 되었다. 일본 전래의 불교, 신도의 세력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일본의 프로테스탄트가 다시 한 번 회복의 계기를 잡으려고 한 것은 1900년 이후의 20세기 전도(전도) 활동대 부터였으나, 일본의 그리스도교는 1890년의 반국가, 비국가라는 정평(정평)의 위협을 향상 받고 있었으므로, 청일(1894), 노일(1905)의 전쟁이 일어나자 그리스도교의 충을 나타내는 절호의 기회로 삼아 이 전쟁을 시인하고 이에 적극적으로 참가한 것이다. 일본 프로테스탄트의 열세 콤플렉스에서 나오는 애국 운동에서의 적극적 참가는 전쟁중에도 볼 수 있었다.
일부 목사들은 일본적 그리스도교, 황도(황도) 그리스도교를 제창하여 성서보다 일본의 신화, 천황제 사상쪽으로 깊이 들어갔다. 명치 초기, 대정(대정) 시대에 일시 자유롭게 꽃피었던 일본의 프로테스탄트는 점차로 일본 사회의 문화, 사회, 사상 면으로 공헌해 왔음에도 불구하고, 전쟁 중의 그리스도교가 진리를 희생하여 일본의국가주의, 군국주의와 야햐하여 살아남았다는 사실은 양심적 크리스천 뿐 아니라, 그리스도교에 적지 않은 기대를 걸고 있던 일본의 일반 지식인에까지 큰 실망감을 주
었다. 그러나 이 같은 굴욕적인 모습이 일본 기독교의 전부는 아니었다. 신사참배 거부이든지 병역 거부이든지 간에 스스로의 신앙적 양심에 따라서 다른 사람과는 다른 행동을 과감하게 시도한 사람의 경우도 있었다. 당시 일본 기독교는 복음에 입각한 역사의식을 분별치 못하고 하나의 호국 종교로 ,국가의 사종교로 전락하고 말았던 것이다.
제 2 절 최근의 기독교 현황
패전 후 일본에는 4,000여명의 개신교 선교사들이 몰려 들었다. 그 대부분은 미국인이었다. 이 홍수같이 몰려든 선교 세력들은 대부분 피차간의 협의나 계획 같은것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거의 모든 신참 선교부들은 앞서 들어온 선교부들과 마찬가지로 도시에 정착하였다. 따라서 이렇게 막대한 숫자에 이르는 일군들의 존재에도 불구하고 일본 농촌지역의 선교 사업은 아직 시작도 안 된 형편에 있었다. 그나마 종교적 감정이 한번도 강력해 본 일이 없는 이 개인주의자들의 나라에서는 개인들에 대한 개별적인 전도가 선택받는 유일한 전도 방식인 것으로 여겨졌다.
얼마 안가서 선교부들의 기대는 무너졌고 일본 사람들은 경제 건설에 전념하게 되었으며, 따라서 기독교 선교의 문제는 거의 전적으로 관심권 밖으로 밀려나고 말았다. 다이묘오(대명) 시대를 예외로 하고 일본에서 유일한 복음화 수단은 개인적인 전도외 에는 별다른 길이 없는 것으로 서구인들은 결론지었다. 그러나 오늘날 일본에서 차지하는 기독교의 영향력은 인구비율 1%정도로 나타나는 숫자상의 암시보다 훨씬 더 크다. 일본의 기독교인들은 교육수준이 높은 집단이며 영향력이 큰 어떤 자리에도 기독교인들을 찾아 볼 수 있다. 또한 기독교 복음이 윤리와 원칙에서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 상당수에 이르고 있다. 1945년과 1960년 사이에 일본에서는 복음 전도 활동이 대단히 활발하였다. 1958년에 일본 성서공회 총무는 "이제는 성경이 국민의 책이 되고 있다. 우리의 고전 문학 보다도 앞서게 되었다." 고 기록하였으며 1977년에는 성경이 가장 많이 팔린 책이었다. 그렇지만 여전히 복음을 받아들였으때 일본인은 세계에서도 대단히 저항적인 국민으로 간주되었다.
지역교회들은 아시아의 기준에 비하여 예외 없이 소규모였다. 교인 수는 평균 50여명 정도이다. 일본인들은 교회 생활을 시작한 후에도 약 90%가 얼마 후에는 다시 가정과 사회, 불평등한 결혼의 압력과 샅샅이 스며드는 일본적인 영적 암흑의 영향력으로 인해서 다시 타락하고 마는 실정이다. 신도와 불교의 영향이 아직도 일본이들에게 작용되고 있고 강력한 국가주의의 교육에 의하여 반기독교 사상이 아직도 농후하며 기독교 금지의 영향이 잔존해 있으며 기독교 사상과 서양 사상에 대한 국민의 혼동으로 인하여 기독교는 활발한 발전을 보지 못하고 있다. 1982년 통계의 일본 개신교회의 실태를 살펴보면 일본에는 6,030 개쯤의 교회들이 있으며 이것은 30년 전에 비해 284배 증가한 것이다. 그러나 시군소재지 중에 아직도 교회가 들어가지 않은 곳이 무려 150개 지역이나 되며, 신자 재적수가 약 70만명에 활동적인 신자수는 약 40만명, 아침 예배 출석자는 약 20만 명으로써 인구의 0.58%밖에 되지 않는다. 중규모 이상의 한 교회당 평균 교인수는 제적(세례 교인) 62명에 주일예배 출석수는 33명 꼴로 통계되어 있다.
오늘날 일본에는 2,560명의 선교사들이 일하고 있으며 140개의 기구들에 의해협력을 이루고 있다. 대표적인 선교부로는 OMS,TEAM,OMF,JEB,WEC 등인데 이들은 모두 일본의 여러 지역에서 전도와 교회 설립을 하고 있다. 특히, JMHE(Japan Mission for Hospital Evangelism) 같은 기구들은 교회 지원사업, 병원 전도, 라디오와 문서 전도 사업에 관련되어 있다. 그리고 950개 대학의 2백만 학생들을 위해 K.G.K.(IFES), C.C.C., 네비게이토 등이 활발하게 학생 전도를 위해 힘쓰고 있다. 이 학생 전도는 일본 선교의 전략적 사업인데 이 학생 전도의 성장과 확장을 위해서 많은 요청이 시급한 일이다. 현재일본이 크리스챤들은 2,000년대까지 10%의 크리스챤을 위해 기도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선교사들도 부인을 포함하여 현재 일본에는 61명이 활동하고 있다.
통계에 따르면 인구의 약 0.34%가 가톨릭 신자이며, 0.44%가 120여개의 개신교교단에 소속되어 있고 그나마 자유주의 물결로 기독교 인구의 435명당 1명만이 진실한 복음주의 신자일뿐이라고 한다. 이는 2000명을 실은 지하철이 27번 지나가는 중에 진실한 성도가 한 명이 끼어 있는 셈이 된다. 숨막히는 영적 흑암이다. 그러나 일본 사람들이 한국 사람들보다는 믿는 것이 더딜지 몰라도 한 번 확실한 체험을 갖게 되면 신실한 신자가 되기는 그리 어려운 문제가 아니라고 한다. 따라서 확실히 말씀을 증거하는 표적과 이적으로 입증하는 사역과 권능 있는 제자 훈련 사역이 뒷받침된다면 일본의 복음으로 말미암는 부흥의 때는 멀지 않으리라 생각되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