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한 현실적 이유 때문에 그녀는 내 머리카락을 없앤 데 대해 서운하게 여겼다. 그것만으로도 나의 장래 신부에게 줄 달피가 여럿 생길 수 있었던 것이다. 벌써부터 나의 부친과 조모는 그 신부감에 대해서 의논하고 있었다. 나는 그들이 식사하는 방에 이웃한 다른 방에서 돗자리에 엎드려 책을 읽다가 그들이 하는 이야기를 엿들었다.
그들은 10마일쯤 떨어진 곳에 살고 있는, 나보다 약간 나이 많은 어떤 훌륭하고 아름다운 처녀의 집안에 대해서 자기들끼리 대강 의견이 일치되어 있었다. 앞으로 3,4년 후면 나도 다 자랄 것이다. 15세나 16세에는 장가를 들여야 한다, 고 그들은 생각했다. 내가 알기로는 내 친구 서춘도 벌써 정식으로 약혼을 했으나, 우리 집 어른들이 내 약혼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들을 때에는 별로 기분이 좋지 않았다. 나는 서양식 학교에 다니기 전까지는 장가를 들면 좋을 거라고 생각했었으나, 박수산도 아직 장가를 들지 않았고 또 그런 것은 이제 모두 구식으로 여겨질 뿐이었다. 나는 결혼을 불신하기 시작했다. 그런 것은 바보들만 다니는 콧물의 서당처럼 시간 낭비일 뿐이다. 나는 공부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내가 머리카락을 깎은 것은 조혼(早婚)에 치명적인 장애가 되는 것으로 우리 가문의 큰 재앙으로 여겨졌다. 중매쟁이가 나의 단발(斷髮)을 신부 집에서 절대 모르게 한다 할지라도, 우리 집안의 가문을 고려할 때 내가 상투도 없이 결혼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나의 부친은 나를 볼 때마다 화를 내고 분을 참지 못하는 것 같았으므로, 나는 조모와 작은 숙모가 결혼하기 전에 살았던 동네로 피신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곳에서 나는 사촌 한 사람과 박수산의 도움을 받으며 여러 주일 동안 숨어 지냈다. 마침내 우리 집안의 분규 수습을 떠맡고 나선 작은 숙모가 나를 데리러 왔다.
그녀는 모든 일을 원만하게 수습할 묘안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는 내가 도로 머리를 기르기만 한다면 부친이 나를 틀림없이 용서해줄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런 일은 집안을 생각할 때 별로 어려운 일도 아닐 테고, 그렇게만 하면 앞으로는 아무 일 없을 것이라고 그녀는 나를 달랬다. 결국 나는 그 절충안에 동의하고, 중간 정도로 머리카락을 기르기로 했다.
나의 작은 숙모는 이 소식을 가지고 돌아갔고, 식구들은 고맙게도 나의 머리가 좀더 빨리 자라게 하기 위하여 온갖 약품과 머릿수건 한 개를 샀다. 나의 조모는 이제 쌀을 담가두었던 물을 닭살이에게 먹이지 않고 아주 조심스럽게 모았다가, 규칙적으로 1주일에 한 번씩 그것으로 내 머리를 감겨주었다. 나는 머리를 감은 뒤에는 곧 작두쇠네 헛간 꼭대기나 우차를 넣어두는 곳 같은 비밀스런 방을 찾아갔고, 작두쇠는 내가 시키는 대로 내 머리카락 전체를 조금씩 쳐내고 했다. 그는 가위질을 썩 잘했다.
열흘에 한 번 정도로 우리 집 노인들은 내 머리카락을 재어보았다. 그들은 날이 가고 달이 가도 전과 마찬가지로 전혀 길어지지도 전혀 짧아지지도 않고 똑같은 상태에 머물러 있는 내 머리카락에 어리둥절하였다.
“이 머리카락은 통 자라지를 않는군. 알 수 없는 일이야.”
옥동야만은 내 짧은 머리카락을 좋아했다.
“멋지잖아? 내가 보기엔 귀여운데 뭐! 그렇지?” 하면서 옥동야는 내 머리를 손으로 쓸었다. “청파야, 나도 사내아이였으면 틀림없이 머리를 깎았을거야.”
이때 그녀는, 자기 남편될 사람의 머리카락도 짧았으면 좋겠다는 노래를 지어불렀다. 나의 조모는 그녀를 꾸짖더니, 절은 세대 전체에 대해서 심하게 꾸중했다.
“흥! 계집애는 오라비 앞에서 공손할 줄도 모르고, 사내아이는 머리카락을 잘라내는구나. 다음엔 무슨 짓들을 할 테냐? 머리카락도 어른을 거역하느라고 일부러 안 자라는 게다.”
옥동야는 소매를 얼굴을 가리고 웃으면서, 자기 새 옷에 댈 옷고름을 보러 뛰어갔다. 작은 숙모도 돌아서서 몹시 웃었다. 그녀는 내 조모가 시키는 대로 꼬박꼬박 양모제(養毛劑)를 발라주었지만 별로 효과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뭔가 미심쩍은 것을 결코 입 밖에 내지 않고 있었다. 심지어 나의 부친은 조모에게 이런 말까지 하였다. “벌써 석 달이 된 걸 아세요? 그애 머리카락에는 귀신이 붙었나봐요. 도무지 자라지를 않는군요.”
나는 열한 살 반이었다. 박수산의 학교에서는 더 배울 것이 없었다. 서울에는 신식 고등학교가 대여섯 개 있는데 나는 그중 한 학교에 갈 자격이 있다고 그는 말하였다. 나는 서울의 고등학교에 대해 그에게서 여러 가지 충고를 받았다. 송전치 근처에는 고등학교가 없었다. 이제 내가 할 일은 오직 하나뿐이었다. 나는 신비로운 서울, 서울을 향해 남쪽으로 가야 했다.
나는 항상 이 도시에 대해서 이야기를 들어왔지만, 서양의 학문을 공부하는 데 있어서도 그곳이 나라의 중심지란 이야기는 그때 처음 들었다. 나의 부친, 미치광이 시인 그리고 박사 당숙은 모두 관리의 자격으로 그곳에서 산 적이 있었다. 전에는 어떤 계급의 젊은이건 모두 만방(萬邦) 황제의 부름을 받으면 그에게서 벼슬을 얻기 위해 서울로 갔다. 동양의 모든 도시와 마찬가지로 석벽(石壁)으로 둘러싸인 서울에는 낭만•모험 때로는 나그네에게 주어지는 영광, 호화로운 저택의 장관 그리고 흰옷이나 명주로 지은 아름다운 옷을 입은 멋진 시인 양반 등이 있었으나, 과거에는 서양의 학문은 전혀 전해지지 않았었다.
“할머니” 하고 나는 넌지시 말했다. “저 서울에 갔으면 해요. 박사가 되려면 서울에 가야 한 대요.”
가엾은 조모! 그녀는 아직도 미치광이 시인 때문에 애태우고 있었고, 작은 숙부는 또다시 방랑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녀는 마음이 딴 데 있어 내 말은 아예 문젯거리도 안 된다는 듯이 나를 그저 끌어안기만 했다. 설사 나의 부친이 과학적 학문을 별로 반대하지 않는다 하더라고, 우리 집에는 나의 그런 새로운 의견을 지원해 줄 만한 돈이 없었다. 그러나 나는 단념하지 않았다. 비가 구름으로부터 땅으로 내려야 하듯이, 나는 꼭 서울에 가야만 했다. 거기에는 학교들이 있었다. 나는 이 문제를 옥동야와 의논했다. 그녀는 언제나 내 행동을 보아왔고 그것을 훌륭한 일로 생각했다. 그녀는 나에게 협력했다. 그녀는 내 부친의 금고 열쇠를 훔쳐 내게 가져다 주며 그걸 이용하라고 나를 충동질했다.
“서양 학문을 해도 역시 박사가 되고 말거야. 내가 알기로는, 너는 훌륭한 박사가 될 사람이야. 배나무집 고모가 늘 그렇게 말했어.”(그녀는 배나무 밭에서 사는 아이 못 낳은 고모를 말하는 것이었는데, 언제나 그 고모를 매우 현명한 여자로 생각하고 있었다.)
“빨리 금고를 열어!” 하고 옥동야는 말했다.
나의 부친은 일본 정부의 후원을 받고 있는 동양척식주식회사에 억지로 그의 땅-이번에는 그가 간직하고 싶어하던 매우 비옥한 땅-을 또 팔아넘겼다. 그 값으로 그는 20달러 가량을 받았는데, 그 돈이 바로 금고 속에 들어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감히 그 돈을 내 교육비로 달라고 말하지는 못했었다. 그가 서양식 학교를 싫어했을 뿐 아니라, 그런 청을 하면 화를 내고 나를 때렸기 때문이었다.
“열어!” 하고 옥동야는 자꾸 재촉했다. “필요한 대로 가져가란 말야.”
나는 몹시 두려웠다. 반백의 긴 수염을 한 나의 부친, 오직 유교적 전통만을 고수해온 나의 부친, 그가 죽었건 살아 있건 간에 내가 절대시해야 할 나의 부친이 눈에 보이는 것 같았다. 나는 서울을, 그 넓은 세계를, 그리고 기대되는 그곳의 학문 들을 생각했다. 그러자 외부의 강압과도 같은 그 무엇이 내 손을 잡고 그 작은 열쇠를 돌리는 것같이 느껴졌다. 한국 화페들이 눈앞에 흩어졌다. 얼마간의 은화와 약간의 금화 그리고 네모난 구멍이 뚫어진 크고 둥근 동전들이 많았다. 그것들은 내 생전 처음 보는 많은 돈이었다. 옥동야는 문간에서 망을 보고 서 있다가 그 많은 돈을 구경하기 위해 뛰어왔다.
“이젠 서울로 갈 수 있어!” 하고 그녀는 기뻐 날뛰며 소곤거렸다. “전부 가져가, 다 필요할거야.”
그때 내 부친의 근심에 찬 두 눈이 눈앞에 보이는 것 같았다. 그는 겨울에 가족을 먹여 살리려고 이 돈을 따로 두었던 것이다. 그에게는 이보다도 훨씬 더 많은 돈이 필요했다. 나는 울음을 터뜨렸다.
“이건 도저히 못 가져가겠어. 나는 그러고 싶지 않아.” 이렇게 말하며 나는 금고 문을 닫았다.
옥동야는 크게 실망하고 있었다.
“그러다가는 절대로 출세하지 못할거야.”
그래서 마침내 우리는 타협했다. 나는 거기서 30센트쯤 꺼냈다. 옥동야는 그때 가끔씩 그녀의 외조모한테서 용돈을 얻는 대로 몇 년 동안 저축해온 1달러를 내게 주었다. 그리고 내가 작두쇠와 연구에게 이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세 사람 중 한 사람이 되기로 한 약속을 실행하기 위해 서울로 떠나면 오랫동안 다시 만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을 때 그들이 톡톡 털어 내게 준 2달러도 가지고 있었다. 이런 식으로 모아진 것이 모두 3달러를 조금 넘었다. 서울까지 300마일을 걸어간다고 치면 그것으로도 충분하다고 나는 생각했다.
떠날 때 나는 바른길로 출발하지 않고, 마을 사람들이 다니지 않는 좁은 길을 일부러 택하였다. 이 길은 두 농장 사이로 뻗어 있었다. 여기에는 키가 10피트나 되는 수수와 옥수수가 자라고 있었다. 옥동야는 나를 배웅하기 위해 한참을 따라왔다. 우리는 수수와 풀에 묻은 이슬로 흠뻑 젖었다. 그녀는 울고 있었기 때문에, 눈과 얼굴이 얼마쯤은 눈문에 또 얼마쯤은 아침 이슬에 젖어 있었다. 우리는 곧 풀이 무성한 계곡의 큰 둑 위로 나갔다. 그녀는 현명하게도 식용 푸른 잎사귀를 따러가는 척하고 바구니를 들고 나왔다.
내가 작별인사를 하자 그녀는 진지하게 말했다.
“언젠가는 나도 멀리 가서 공부하고 싶어질거야. 내가 사내아이라면 지금 너랑 같이 갈 수 있을 텐데.”
나는 곧 돌아오게 될 것이라며, 서울에서 내가 배우게 될 것을 가르쳐주었으나, 그녀는 자꾸 울기만 했다. 내가 떠나고 나면 이곳에 몹시 싫증을 느끼게 될 것이라고 그녀는 말했다.
“나한테 엣 글을 가르쳐주려 할 사람은 하나도 없을거야.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어른이 되겠지. 이젠 아무도 없어. 을춘은 너 같지 않아.”
나도 눈물을 흘렸다. 나는 누구보다도 그녀를 사랑했고, 내 조모보다도 더 그녀를 사랑했다고 생각한다.
“어쨌든 나는 가서 장래에 할 일을 준비해야 해”라고 나는 그녀에게 말했다.
“그래, 너는 꼭 새로운 박사가 될거야” 하고 그녀는 맞장구를 쳤다.
눈물을 펑펑 쏟으면서 그녀는 손을 흔들다가 소매에서 긴 손수건을 꺼내어 흔들었다. 내가 본 그녀의 마지막 모습은 눈물과 수수의 이슬에 젖은 얼굴이었다. 3월이었으므로 나는 아직 겨울 두루마기를 입고 있었다. 지난해 9월에 짚더미 속에 묻어둔 양배추가 아직 나오지 않았으니-나는 특별히 그런 것을 둘러보았다-앞으로로 추운 날이 좀더 계속될 것 같았다. 그러나 냇물에는 얼음이 없고, 물 위로는 여기저기 솟아오는 부드럽고 조그만 녹색 잡초들만이 보였다. 눈에 띄는 눈(雪)이라고는 오직 먼 산 꼭대기에 있는 것뿐이었다. 그것은 마치 그곳에는 저 긴 여행 중에 우리를 굴복시킬 유월의 더위가 없다고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대기는 푸른 가지에 새싹을 내밀고 있는 버들개지처럼, 이제 막 시작된 나의 미래에 대한 희망으로 충만해 있었다. 노고지리는 이별의 슬픔을 노래하는 듯하고, 울새는 내가 흔히 솔숲에서 듣던 귀에 익은 노래로 작별을 고하는 것 같았다. 버들개지는 곧 꽃피겠지만, 나는 금년에는 강둑 옆에서 버들개지로 피리를 만들 수 없게 되었다.
나는 나의 부친이 만든 짚신을 신고 있었다. 등에는 미치광이 시인이 달필로 중국의 시와 한국의 시 중 훌륭한 것만 골라 베껴놓은 두 권의 시집, 공책, 펜과 잉크 등을 짊어지고 있었다. 나의 빡빡머리에는 박수산이 내게 준 서양 모자를 쓰고 있었다. 그리고 이제 나는 마을을 뒤에 남겨두고 큰길로 나가 서울로 향하였다…….
천리길 ……/ 험난한 수학(修學)의 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