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255
9월21일 [성 마태오 사도 복음사가 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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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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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세리가 사도가 되다니...>
끝도 없이 반복되는 악습으로 인한 괴로움이 사무칠 때마다, 어둡고 깊은 죄의 동굴 속에 앉아있을 때마다 큰 위로와 위안을 주는 복음이 있으니, 예수님께서 세리 마태오를 제자로 부르시는 대목입니다.
예수님 시대 당시 세리 마태오 제자 발탁 사건은 제자 공동체뿐만 아니라 유다 사회 전체에 엄청난 스캔들이 되는 사건이었습니다.
당시 세리라는 직업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곧 매국노요 돈만 아는 수전노, 민족의 반역자요 대죄인이라는 말과 동일시되고 있었습니다. 누군가가 세리 일을 하고 있다면, 그는 깊은 어둠의 세계로 발을 들여놓은 사람으로서 가문과 민족의 수치로 여겼습니다. 더 이상 새로운 삶에 대한 희망은 기약할 수 없는 존재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예수님께서는 세관에 앉아있던 세리 마태오에게 가까이 다가가십니다. 그를 눈여겨보십니다. 그의 말못할 내면의 고통을 바라보십니다. 그의 깊은 상처를 들여다보십니다. 그가 평생토록 받아온 수모를 헤아리십니다. 이윽고 세상 다정하고 따뜻한 음성으로 그를 부르십니다.
“나를 따라라.”(마태오 복음 9장 9절)
세리 마태오의 제자단 입적 사건으로 인한 제자들의 반발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제자들 사이에 이런 수근거림도 분명이 있었을 것입니다. 아니, 우리 스승님 해도 해도 너무하신 것 아냐?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세리가 사도가 되다니...그가 우리 동료가 되다니...적어도 이건 아니지 않은가?
평소 배배꼬인 시선으로 예수님과 제자들을 바라보던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비아냥을 더 심했습니다. 정말이지 저 집단은 웃기는 집단이로군. 인간말종 세리를 핵심 멤버로 발탁하다니, 저 집단 미래가 불을 보듯 뻔하군.
이런 분위기 속에서 던지는 예수님의 촌철살인의 말씀이 죄인인 오늘 우리 모두에게 얼마나 큰 위로요 희망이 되는지 모릅니다. 참으로 관대하고 너그러운 주님, 정녕 좋으신 주님이 아닐 수 없습니다.
“튼튼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너희는 가서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배워라. 사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태오 복음 9장 12~13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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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_IZfsb6I-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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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지금 내세에 가게 될 똑같은 세상을 만들며 산다.>
넷플릭스 ‘수리남’은 마약왕 조봉행의 실화를 다루고 있는 드라마입니다. 국정원은 애초에 조봉행을 잡고 싶었지만, 수리남 대통령과 깊은 유착관계가 있는 그를 건들 수는 없었습니다. 그렇게 그를 체포하기 위한 작전이 7년간 진행되었습니다.
국정원은 뜻밖의 조력자를 만나게 됩니다. 영화 속에서는 강인구라는 이름을 가집니다. 그는 수리남에서 마구 버려지는 홍어를 한국에 수입하려 했습니다. 그런데 목사로 사는 조봉행이 그를 마약 밀입국자로 만들어버린 것입니다. 그렇게 돈도 없고 약한 이들을 이용해 한국으로 마약을 밀반입하여 많은 가난한 이들이 죄도 없이 감옥에 갔다고 합니다.
전요한(조봉행) 목사는 신도들과 함께 천국을 만들어갑니다. 그런데 그 천국이란 자신이 왕이 되는 세상입니다. 배신하거나 명령에 불복종하면 바로 총살입니다. 자기만 천국이지 실제로 주위는 지옥입니다.
우리에게도 힘이 주어지면 우리는 그 힘으로 천국을 만들기도 하고 지옥을 만들기도 합니다. 자신이 믿는 천국을 만듭니다. 하지만 권력을 추구하고 있다면 주위는 무자비한 대우를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은 성 마태오 사도의 축일입니다. 마태오 사도는 죄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당신 힘으로 그를 사도로 맞아들였습니다. 자비의 세상을 만드시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에 반대하는 세력이 있었습니다. 바로 바리사이들입니다. 그들은 자신들만 잘 사는 사람이라 여겼습니다. 그들이 만드는 세상은 자신들만 천국이고 주위는 지옥인 세상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가서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배워라.”(마태 9,13)
그들이 바치는 희생은 뇌물이었습니다. 마치 전요한 목사가 힘을 얻기 위해 수리남 대통령에게 주는 뇌물과 같습니다. 그 뇌물은 마약을 팔아서 마련한 것입니다. 우리도 하느님께서 주시는 은총으로 주위를 지옥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가리옷 유다는 권력층이 주는 돈과 신뢰로 하느님까지도 팔아먹는 인간이 되었습니다. 그가 천국에서 은총을 받으면 천국도 지옥으로 만들어버릴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반면 마더 데레사나 이태석 신부는 자신들에게 들어오는 돈으로 무엇을 했을까요? 주위를 천국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분들이 지금 어디 계실지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우리가 힘을 가지게 될 때 내세에 어디로 가게 될지 알게 됩니다. 내가 가정에 들어갔을 때 가족들이 나에게 몰려와서 인사하고 함께 이야기합니까, 아니면 각자 방으로 다 들어갑니까? 내가 천국을 만드는 사람이라면 가족들이 나에게 몰려올 것입니다. 힘이 있을 때 자녀들을 이용해서 나를 높이려 했다면 그 가정은 지옥이 됩니다.
사제도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강의를 많이 다니다 보니까 성당마다 분위기가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분위기는 바로 본당 신부가 만들었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본당 신부들은 각자 자신들이 천국이라고 여기는 세상을 만들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저도 주의하려고 합니다. 내가 만드는 세상이 내가 가게 될 세상이기 때문입니다. 자비가 흘러넘쳐서 천국이 실현된 것이 우리 각자의 성당이 되게 해야 합니다.
캐나다 노바스코샤주의 한 노부부가 한화로 약 125억 원에 달하는 거액을 복권 당첨금으로 받았지만, 이를 전액 기부해 훈훈한 감동과 함께 잔잔한 화제를 일으켰습니다. 78세인 비올렛 라지(Violet Large)씨와 알렌(Allen)씨는 결혼한 지 35년이 넘은 아름다운 커플입니다.
남편인 알렌은 용접공으로서 일했고, 비올렛은 소매업을 통해서 차곡차곡 돈을 모으며 살아온 캐나다의 성실한 부부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복권 우승상금으로 1,130만 캐나다달러가 돌아갔을 때, 그녀는 암에 걸려 화학 치료요법을 받고 있었다고 합니다.
비올렛 부부는 먼저 1,100억 캐나다 달러(한화 약 121억 원)를 남을 돕는데 기부하기 시작합니다. 그녀는 단 1%도 우리 자신을 위해 쓰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들이 베풂을 실천한 곳은 멀리 있지 않았습니다. 암으로 고생하고 있던 비올렛은 자신이 암 치료를 해오던 투루로(캐나다의 항구도시)와 할리팩스에 있는 병원에 기부합니다. 또한 지역 소방서, 교회, 묘지, 적십자, 구세군, 암과 알츠하이머, 당뇨병을 치료하는 기관 등 도움이 필요한 곳에 도움을 주었습니다. 이들은 무려 두 페이지에 달하는 기부자 리스트를 작성하면서 도움이 필요한 곳을 찾았다고 하니, 그 과정이 이 부부에게 어느 정도 고된 노동이었을 것 같습니다. 그들은 말합니다.
“우리는 더 이상 나그네가 아닙니다. 우리는 이 주에서 사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돈은 우리의 건강이나 행복을 살 수 없습니다. 본래 우리의 것이 아니었던 돈에 대해서는 일말의 후회도 없습니다. 우리는 둘이 함께라는 것에 충분히 만족합니다.”
이분들이 갈 곳은 어디일까요? 천국일 수밖에 없습니다. 힘이 들어왔을 때 주위를 천국으로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내 주위는 천국인지, 지옥인지 살펴야 합니다. 나는 잘 모릅니다. 내 주위 사람들이 내 앞에서 천국처럼 편안해하는지 아니면 눈치를 보며 두려워하는지 보면 됩니다. 내가 만드는 세상이 내가 내세에도 살 세상과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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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서 길을 가시다가 마태오라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있는 것을 보시고 “나를 따라오너라.”하고 부르셨다. 그러자 그는 일어나서 예수를 따라 나섰다. (마태오 9,9-13)
As Jesus passed by, he saw a man named Matthew sitting at the customs post. He said to him, “Follow me.” And he got up and followed him.
<(2)희생 제물이 자비의 열매를 맺으려면>
오늘은 마태오 복음사가 축일입니다. 우리가 잘 알듯이 마태오는 세리였습니다. 부자고 죄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에게 “나를 따라라”라고 하셨습니다. 아마도 마태오가 예수님을 자신의 집에 초대한 것 같습니다. 그곳에는 역시 많은 세리와 죄인도 함께 있었습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자신을 특별하다고 여기는 사람 같았으면, “나를 뭐로 알고 매국노들과 창녀들과 함께 식사하라고 하느냐?”라며 따졌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 안에서 행복하셨습니다.
이때 역시 바리사이들이 나타나 예수님의 행동을 못마땅해 합니다. 그들은 죄인들을 가까이하는 사람도 죄인이 된다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의 죄에 물들지 않는 분이심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튼튼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의사는 병든 이들과 함께하지만 부끄러워하지 않고 그 병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의사가 병자와 함께하지 않는 것이 부끄러운 일입니다. 그러며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가서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배워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왜 이 말씀을 하시는데 “희생 제물”이 등장할까요? 바리사이들은 희생 제물을 바치고 있었습니다. 물론 예수님도 바치고 계셨을 것입니다.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의 의무였습니다. 이 희생 제물의 가장 초기 모델은 역시 ‘선악과’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를 바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특별해지기 위해서입니다. 하느님처럼 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 결과로 자신의 죄를 이웃에게 떠넘기고 이웃을 심판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희생 제물을 바치지 않았기에 이웃을 향한 자비를 잃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왜 바리사이들은 희생 제물을 바치면서도 자비심이 전혀 없는 인간이 되어버렸을까요? 그 이유는 특별해지기 위해 바쳤기 때문입니다. 선악과를 바치라는 이유는 하느님이 아니시면 누구라도 특별할 수 없음을 배우고 되새기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선악과를 바치며 더 특별해지려고 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바리사이들이 마치 카인처럼 제물을 바쳤음을 알 수 있습니다. 카인은 자신을 특별한 사람으로 여겨서 더 특별해지기 위한 목적으로 제물을 바쳤습니다. 그러나 제물 봉헌의 목적은 내가 가진 모든 것은 주님의 것이기에 주님이 그것을 주시지 않으면 나는 세상에서도 가장 비천인 인간이 될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깨닫고 기억하는 것입니다.
‘갓 오브 이집트’(2016)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이 영화에는 이집트의 신들과 인간들이 공존합니다. 이집트를 다스리는 왕들은 신이고 백성들은 인간들입니다. 신들은 인간들보다 몇 배나 몸집이 더 크고 보통은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싸울 때 변신하면 무시무시한 모습이 됩니다. 이집트 임금의 아들이 왕의 자리를 물려받는 자리에서 그의 삼촌이 와 현 임금인 자신의 형을 죽이고 왕의 자리를 물려받는 조카의 두 눈을 빼버립니다. 그런데 한 좀도둑이 보물이 있는 곳에 잠입하여 눈 하나를 훔칩니다. 그러는 가운데 자신의 여자 친구가 화살에 맞아 죽습니다. 그 좀도둑은 그 눈의 주인인 신에게 가서 자신이 눈을 하나 돌려줄 테니 소원을 들어달라고 합니다. 두 눈을 잃고 실의에 빠져있던 신은 어디 파리 같은 게 와서 자신을 놀리냐며 그 좀도둑을 죽이려 합니다. 그러나 좀도둑은 워낙 민첩한 데다 신은 앞이 보이지 않으므로 결국에는 그의 청을 들어주겠다고 합니다. 여자 친구를 살리기 위해 목숨을 거는 한 인간의 모습을 보며 그도 감동합니다.
나중에 자신 대신 왕위를 차지하고 있는 삼촌과 대결 중에 그는 나머지 눈 하나와 자신에게 눈을 찾아 준 한 인간의 생명 중에 어느 것을 선택해야 하는지의 상황에 놓이게 됩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눈 대신 한 인간을 살리는 것을 선택합니다. 삼촌은 신이 인간을 살리기 위해 자신의 눈을 포기하는 모습을 보며 비웃습니다. 그러나 주인공 신은 두 눈을 잃어보았기에 자신도 눈을 잃으면 한 인간과 별반 다를 바 없는 존재임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그런 겸손한 모습 때문에 결국 삼촌을 몰아내고 다시 왕의 자리에 오르게 됩니다.
봉헌은 왜 하는 것일까요? 가진 것을 주님 것으로 인정하며 바쳐보고 불편해 보아야 자신이 주님이 주시지 않으면 아무것도 아닌 존재임을 깨닫기 위해서입니다. 따라서 희생 제물을 진정한 의도로 한 이들은 사람들 앞에서 특별한 존재라 느낄 수 없습니다. 그래서 누구와도 잘 섞이게 되고 이 능력이 구원의 도구가 됩니다. 희생 제물이 이웃을 향한 자비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안 바치는 것이 낫습니다. 영화에 관심이 있는 분이라면 현재 ‘마블’과 ‘DC’의 대결을 흥미 있게 지켜보실 것입니다. 마블에는 아이언 맨이 있고 토르나 캡틴이 있습니다. DC엔 오히려 우리가 잘 아는 슈퍼맨, 원더우먼, 배트맨이 있습니다. 하지만 매번 마블이 흥행하고 DC는 만드는 것마다 거의 망하고 있습니다. 이 차이는 마블은 자신들의 능력을 잃었을 때의 고뇌와 비참함, 그리고 그것을 통한 깨달음에 비중을 두는가 하면, DC는 무조건 더 강력해져서 이기는 게 좋다는 힘의 논리만을 강조합니다. 하지만 관객은 그런 초인적인 인간을 보면서도 슈트가 벗겨진 아이언 맨, 망치를 잃은 토르, 방패를 빼앗긴 캡틴의 모습에서 우리 자신의 나약함과 부족함을 봅니다. 그러니 공감을 할 수밖에 없고 흥행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귀중한 것을 잃어 봐야 나 자신의 처지를 알게 되고 그렇게 내가 가진 것에 큰 의미를 두지 않으며 모두 가진 모습을 하면서도 가난하고 비천한 이웃과 잘 섞일 수 있는 사람이 됩니다. 포도밭의 한 그루 무화과나무가 되려 하지 맙시다. 다른 포도나무처럼 주님께 자신의 포도를 봉헌하는 포도나무가 됩시다. 언젠가 그 무화과나무 한 그루는 잘려나가게 되어 있습니다. 희생 제물이 이웃을 향한 자비로 이어지려면 특별해지려는 마음을 희생 제물을 바치는 것으로 끊어버리려는 의도가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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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고등학교에 입학하면서 친하게 지내던 친구들이 있었습니다. 제가 키가 크지 않았기 때문에 주로 앞 번호의 친구들과 친하게 지냈습니다. 1979년에 입학했으니 벌써 43년이 지났습니다. 같은 교복을 입었고, 방과 후에는 학교에 남아 농구도 하였습니다. 제가 고등학교에 다니던 때는 격랑의 시대였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이 서거하였고, 신군부가 등장하였고, 민주주의를 열망하는 광주 민주화 운동이 있었습니다. 저는 그런 격랑의 시대가 있었다는 것을 신학교에 가서야 알았습니다. 43년이 지난 친구들의 모습을 봅니다. 형준이는 일찍 미국으로 이민 와서 우편배달부 일을 하였습니다. 찬행이는 조경에 관심이 있어서 아직도 조경 일을 하고 있습니다. 정식이는 대학을 중도에 포기하고 자동차 중개업을 하고 있습니다. 달순이는 반도체와 친구가 되어 반도체 회사에서 일하였습니다. 저는 사제가 되어서 지금 미국에서 지내고 있습니다. 같은 학교를 다녔지만, 같은 과목을 배웠지만 친구들이 하는 일은 모두 달랐습니다. 이렇게 흐르는 시간 속에 우리는 익어가고 있습니다.
1982년에 신학교에 입학했습니다. 교가는 이렇습니다. “진세를 버렸어라. 이 몸마저 버렸어라. 깨끗이 한 청춘을 부르심에 바쳤어라. 성신의 그느르심 아늑한 이 동산에 우리는 배우리라 구원의 Veritas!" 친구들은 10년간 신학을 배우고 1991년 사제가 되었습니다. 31년 동창사제로 지내고 있습니다. 제가 신학교에 다니던 때는 교회에 큰 행사들이 있었습니다. 1984년에는 103위 성인의 시성식이 있었습니다. 성인이 되신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께서 방한하셨고, 시성식 미사를 봉헌하였습니다. 1989년에는 44차 세계성체 대회가 있었습니다. 한국교회는 10년마다 100만 명씩 신자가 늘어나는 성장의 시대였습니다. 같은 신학교를 나왔지만, 동창 신부님들의 직책은 아주 달랐습니다. 본당 사제로 지내는 친구, 교구청에서 지내는 친구, 신학교에서 지내는 친구, 장애인 복지시설에서 지내는 친구, 교포 사목을 하는 친구가 있습니다. 저는 뉴욕에서 가톨릭평화신문을 만들고 있습니다. 이렇게 직책은 다르지만 우리는 모두 사제로 지내고 있으며 흐르는 시간 속에 익어가고 있습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부르실 때 하나의 희망을 주신 것처럼, 그리스도의 몸도 하나이고 성령도 한 분이십니다. 그리스도께서 나누어 주시는 은혜의 양에 따라, 우리는 저마다 은총을 받았습니다. 그분께서 어떤 이들은 사도로, 어떤 이들은 예언자로, 어떤 이들은 복음 선포자로, 어떤 이들은 목자나 교사로 세워 주셨습니다. 성도들이 직무를 수행하고 그리스도의 몸을 성장시키는 일을 하도록, 그들을 준비시키시려는 것이었습니다. 받은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가십시오. 겸손과 온유를 다하고, 인내심을 가지고 사랑으로 서로 참아 주며, 성령께서 평화의 끈으로 이루어 주신 일치를 보존하도록 애쓰십시오.” 우리의 신앙은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시작되었습니다. 신앙인으로서 우리가 하는 직분은 다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겸손과 온유를 다하는 것입니다. 인내심을 가지고 서로 참아 주는 것입니다.
오늘은 마태오 복음사가 축일입니다. 어둠 속에 있던 마태오는, 절망 중이던 마태오는, 조롱과 멸시를 받던 마태오는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사랑과 자비의 주님, 용서와 온유의 주님을 만났습니다. 그래서 마태오는 이제 또 다른 세상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세상 무엇보다 소중한 주님의 말씀을 전해 주었습니다. 우리 또한 복음을 전하는 사도가 되면 좋겠습니다. “튼튼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너희는 가서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배워라. 사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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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9,9-13: “나를 따라라.” 그는 예수를 따라나섰다.
마태오 사도는 본래 로마를 위해 세금을 걷는 세리였다. 이 직업은 당시 유대인들에게는 매국노와 같은 미움을 받는 직업이었다. 세리였기 때문에 미워하고 좋아하지 않으면서도 어쩔 수 없이 착취당하는 그런 처지였다. 이러한 세리가 예수님께 불림을 받고 예수님의 사도가 되었다. 마태오는 60-90년 사이에 마태오 복음서를 아람어로 저술하여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려고 하였다. 마태오는 동방으로 가서 순교하였다고 하는데 에티오피아나 페르시아에서 순교하였다고 전해진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세관에 앉아있는 마태오를 부르신다. 마태오는 즉시 예수님을 따라나섰다. 마태오는 자기 집에 예수님을 모셔서 음식을 대접하였다. 여기에 마태오는 지금까지 함께 일하며 사귀었던 친구들도 함께 초대하여 식사하였던 것 같다. 아마 그들을 부른 것은 주님을 따라나서기 전에 그들과 인사를 하는 기회를 만들었을 것 같다. 이렇게 예수께서는 죄인들과 세리들과 함께 자리하게 되었고 또 그렇게 된 것을 본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예수님을 비난한다. 제자로 삼는 것도 너무나 큰 죄인인 세리를 뽑고, 노는 것도 그런 부류하고만 논다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이 말을 들으시고 한 마디로 그들의 입을 막아버리셨다. “튼튼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사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12-13절)
주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을 사람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 인간이 어떤 처지에 놓여있건 하느님께서는 우리 인간 모두가 당신의 자녀로서 살기를 바라시고 부르신다. 그러나 거기에 대한 응답이 마태오처럼 즉시 일어나서 그분을 따르듯이 응답을 할 것인지 아닌지는 각자 인간의 의지적인 응답에 달렸다. 언제나 하느님 앞에 우리 자신이 부족하고 죄스러운 인간임을 느끼지만, 항상 주님의 가르침으로 되돌아가는 삶, 회개하는 삶이 있다면 그것으로 주님께서는 기뻐하신다. 마태오와 같이 세관에 있는 것이 지금까지 편안하고 안정된 것이었겠지만, 용감하게 그 자리를 떠나 전혀 새로운 세계로 들어가려고 하는 용기가 필요하다. 언제든지 이렇게 첫발을 내딛기가 어려운 것이다.
내가 이렇게 하면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할까? 하는 착각 때문에 우리는 이를 실행하지 못하는 경우가 너무나 많다. 이러한 생각을 버리고 과감히 일어날 수 있을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을 다시 한번 잘 알 수 있고, 또 변화되어 가는 나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주님의 뜻 안에 머무르려 노력할 때, 우리는 진정한 자유를 누릴 수 있다. 예수님께서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요한 8,32) 하셨다. 마태오 사도와 같이 매 순간 용감한 결단으로 주님의 부르심에 즉시 응답할 수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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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부르심과 응답>
“예수님께서 그곳을 떠나 길을 가시다가 마태오라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라.’ 그러자 마태오는 일어나 그분을 따랐다.”(마태 9,9)
이 이야기를 겉으로 보이는 표현만 보면, 예수님께서 길을 가시다가 마태오라는 사람을 우연히 보셨고, 그를 보자마자 제자로 부르셨고, 마태오는 부르심을 받자마자 아직 누구인지도 모르는 분을 따라나선 것으로 생각하기가 쉬운데, 그것은 아니고, 예수님께서는 그 전부터 마태오를 눈여겨보셨고, 그가 사도가 될 만한 사람이라는 것을 아셨기 때문에 그를 부르신 것으로, 또 마태오 쪽에서는 이미 예수님을 알고 있었고, 믿고 있었고, 부르심에 응답할 준비가 되어 있었기 때문에 곧바로 응답한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 옳습니다.
이 이야기는, 예수님께서 마태오라는 사람을 신앙인으로 부르신 이야기가 아니라 사도로 부르신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무나 사도로 부르지 않으셨습니다. “그 무렵에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시려고 산으로 나가시어, 밤을 새우며 하느님께 기도하셨다. 그리고 날이 새자 제자들을 부르시어 그들 가운데에서 열둘을 뽑으셨다. 그들을 사도라고도 부르셨는데,”(루카 6,12-13)
<예수님께서는 사도들을 부르시는 일을 먼저 하시고, 나중에 정식으로 그 사람들을 사도로 임명하셨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부르심’과 ‘임명’ 사이의 기간은 아마도 일종의 수련 기간이었을 것입니다. 사도들 쪽에서 생각하면, 그들은 그 기간 공식적으로 응답할 준비를 했을 것입니다. 사도들의 응답은 그들 자신이 원한 일이었습니다. 원하지 않았다면 준비하지 않았을 것이고, 준비하지 않았다면 응답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성경에 ‘주님께서 어떤 사람을 부르시고 그 사람이 응답한 이야기’가 많은데, 그 이야기들 가운데에서 이사야 예언자의 이야기는 오늘날의 우리에게 좋은 모범이 되는 이야기입니다. “그때에 나는 이렇게 말씀하시는 주님의 소리를 들었다. ‘내가 누구를 보낼까?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가리오?’ ‘제가 있지 않습니까? 저를 보내십시오.’ 하고 내가 아뢰었더니(”이사 6,8) 주님께서는 우리가 이사야 예언자처럼 “제가 있지 않습니까? 저를 보내십시오.”라고 ‘능동적으로’ 나서기를 바라실 것입니다. 물론 그렇게 나선다고 해서 다 뽑히는 것은 아닙니다. 뽑는 것은 주님께서 당신의 권한으로 하시는 일입니다. 그래도 어떻든 그런 능동적인 태도가 신앙인의 올바른 모습입니다. <아마도 마태오 사도도 그렇게 능동적인 모습을 보였을 것입니다. 적어도 마음속으로 열렬하게 희망했을 것입니다. 다른 사도들도 마찬가지이고.>
그런데 주님께서 불러 주시기를 간절하게 바라더라도 자신의 여러 가지 부족한 점들을 의식하면서 주눅이 들 수도 있고, 그래서 응답하기를 주저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예레미야 예언자의 경우가 좋은 예입니다. “주님의 말씀이 나에게 내렸다. ‘모태에서 너를 빚기 전에 나는 너를 알았다. 태중에서 나오기 전에 내가 너를 성별하였다. 민족들의 예언자로 내가 너를 세웠다.’ 내가 아뢰었다. ‘아, 주 하느님, 저는 아이라서 말할 줄 모릅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말씀하셨다. ‘′저는 아이입니다.‵ 하지 마라. 너는 내가 보내면 누구에게나 가야 하고, 내가 명령하는 것이면 무엇이나 말해야 한다. 그들 앞에서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너를 구해 주리라. 주님의 말씀이다.’”(예레 1,4-8) <모세의 경우도 비슷합니다. 하느님께서 모세를 부르셨을 때 모세는 “제가 무엇이라고 감히......”라고 말하면서 응답하기를 망설였는데, 그때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겠다. 이것이 내가 너를 보냈다는 표징이 될 것이다.”(탈출 3,12)>
주님은 우리를 불러서 일을 맡기고 내버려 두시는 분이 아니라, 항상 함께 계시면서 우리가 응답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고, 또 우리가 그 일을 해낼 수 있도록 도와주시는 분입니다. 어쩌면 마태오 사도도 자신의 직업이라든지 여러 가지 약점들 때문에 자신 없는 태도를 보였을지도 모릅니다. 만일에 그랬다면 주님께서는 “내가 너와 함께 있겠다.”라고 약속하시면서 그에게 힘과 용기를 주셨을 것입니다. 복음서에는 “나를 따라라.”라는 말씀만 기록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마라. 나만 믿고 나를 따라라. 내가 항상 너와 함께 있겠다.”라고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오늘날의 우리를 부르실 때도 그렇게 힘과 용기를 주시면서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그 주님을 믿고 ‘능동적으로’ 응답하는 일, 그것이 바로 우리가 할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마태오 사도를 부르신 이야기 뒤에는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다고 시비를 거는 바리사이들과 논쟁을 벌이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 이야기에 들어 있는 예수님 말씀은, 마태오 사도를 부르신 일과는 직접적인 상관이 없는, ‘당신의 사명’에 관한 말씀입니다. (그 이야기와 그 이야기 속에 있는 예수님 말씀은, 마태오 사도를 가리켜서 그가 죄인이라고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튼튼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라는 12절의 말씀과 “사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라는 13절의 말씀의 뜻은, “나는 ‘모든 사람’을 구원하러 왔다.”입니다. ‘모든 사람’이 죄 속에 있으므로, ‘모든 사람’을 회개시켜서 구원하려고 메시아께서 세상에 오셨습니다. 나자렛 예수님이 바로 그분, 메시아라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구원하려고 오셨기 때문에 ‘모든 사람’을 만나셨습니다. 하느님 앞에서는, ‘모든 사람’이 회개해야 할 죄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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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대구대교구 강수원 베드로 신부님]
세리 마태오는 다른 공관 복음서들에서 ‘레위’로 소개됩니다.(마르 2,14; 루카 5,27 참조) 주님께서 마치 시몬에게 ‘베드로’라는 이름을 주셨듯이, 레위에게 마태오라는 새 이름을 주신 듯합니다. 마태오라는 이름은 히브리 말 이름 ‘마티트야’에서 온 것으로 ‘주님의 선물’이라는 뜻입니다. 동족에게 세금을 걷어 로마에 바치는 세리였던 그가 제자로 부르심을 받은 일은 정녕 주님의 선물이었습니다. “‘나를 따라라.’ 그러자 마태오는 일어나 그분을 따랐다.” 소명과 응답이라는 이 단순한 장면은 그 자체로 언제나 감동을 줍니다. 예수님께서 사시던 카파르나움(마태 9,1; 마르 2,1 참조)의 세리였던 마태오는 예수님에 관하여 이미 많은 소문을 들었을 것입니다. 그가 평소에 세리라는 수입이 보장된 직업과 매국노라는 비난 사이에서 깊이 고뇌하며 떳떳하고 기쁜 삶을 살고 싶은 열망을 품지 않았다면, 어찌 예수님의 말씀 한마디에 모든 것을 버리고 따라나설 수 있었겠습니까?
하느님의 예언자라고 들어 알고 있던 분께서 죄인인 자신에게 “나를 따라라.” 하셨을 때, 지독히도 원망스러운 그 모든 과거를 온전히 용서받고 새 삶으로 초대받은 그 순간에, 마태오가 느꼈을 전율과 환희가 생생히 느껴집니다. 죄와 부덕함을 인정하며 하느님의 자비에 자신을 온전히 열었을 때, 탐욕과 억압의 장소인 세관이, 그리고 죄인들과 세리들의 식탁이, 하느님의 은총이 베풀어지는 구원의 자리가 되었습니다. 주님과 죄인들을 탓하며 구원의 기쁨에서 스스로 멀어졌던 바리사이들이 아니라, ‘부르심받은 사람답게 겸손과 온유 그리고 인내와 사랑을 실천하면서’(제1독서 참조) 우리 모두 주님의 사랑받는 제자로 살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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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권경렬 베드로 신부님]
오늘은 성 마태오 복음사가 축일입니다. 마태오 복음사가는 갈릴레아 호수가에 있는 가파르나움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뒷날 마태오 복음서를 썼고, 전승에 따르면 동방에서 신앙을 전파하였다고 합니다.
오늘 복음은 마태오 복음사가와 예수님의 첫 만남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멸시와 비난을 받던 인생이 어떻게 복음을 전하는 인생으로 변하였나 하는 이야기입니다.
요즘 나오는 티브이 광고에 이런 게 있습니다. ‘알고 있는 사람의 전화번호는 많다. 그런데 정작 전화를 걸 사람은 없다. 삶을 다시 생각해봐야 한다.
오늘 성서는 세리였던 마태오의 삶을 통해 우리의 삶을 다시 생각해보기를 권하고 있습니다.
마태오는 세리였습니다. 당시 세리는 돈은 많이 벌지만, 멸시와 비난을 받는 직업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아마도 틀림없이 면전에서는 굽신거리며 비위를 맞췄을 것입니다.
마태오 앞에서는 세금을 낮춰달라고 굽신거리며 아양을 떨고, 뒤돌아서서는 멸시와 비난을 했을 것입니다. 세리였기 때문에 멸시와 비난은 받았지만, 세리였기 때문에 많은 사람의 대접도 받았을 것입니다.
마태오 자신도 사람들이 자기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알고 있었고 자기 자신도 떳떳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또 알고 지내는 사람은 많은데 정작 마음을 털어놓고 지낼 사람은 없었을 것입니다. 돈을 많이 버는 소위 잘 나가는 직업과 좋은 집, 갖가지 호화로운 가재도구들을 갖추고, 먹고 입고, 하고 싶은 것 다 하고 살고 있는데, 마음은 행복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건듯 부는 바람에도 가슴 저 밑바닥까지 쓸쓸해지고, 외톨이로 사는 자기 삶에 대한 회의가 듯 찾아오곤 했을 것입니다. 진정으로 대해주는 사람 하나 없는 삶이 얼마나 허탈한지…. 삶에서 진정한 것들은 돈으로는 살 수 없음을 어렴풋이나마 느끼고 있었을 것입니다.
마태오 그는, 축 늘어진 어깨, 촛점 없는 눈동자, 어둡고 우울한 얼굴로 세관에 앉아서 소문으로 듣던 예수라는 젊은이를 열광하며 폭풍처럼 몰려오는 군중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때 예수께서 그런 그를 보시고 부르십니다. 그는 서슴없이 따라나섭니다. 그리고 예수와 동행하며, 삶에서 진정으로 찾아야 할 것을 보고 듣고 느낍니다.
자신이 알고 있던 세상 그 너머를 체험합니다. 그리고 그는 때때로 찾아들어 자신을 무겁게 짓누르던 그 절망감이 행복감으로 바뀌는 걸 체험합니다. 어둡고 무거웠던 마음이 밝아지고 가벼워지는 걸 체험합니다. 자유로움, 해방감, 행복이란 자신의 움켜쥔 손을 펴는 것이라는 걸 체험합니다.
이제 그는 자신의 것을 내어놓을 수 있습니다. 가진 것을 다 내어놓습니다.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 줄 알게 된 사람이 가는 길로 걸어갑니다.
가난한 사람에게 자신의 가진 것을 내어놓습니다. 자기에게 억울함을 당한 사람들에게는 뉘우치며 배로 갚습니다. 삶을 깨우치며, 자신의 가진 것을 다 내어놓음으로써 그는 자유인이 되었습니다.
그 후 마태오는 예수의 행적을 기록하고, 진정한 해방이 무엇인지 자유가 무엇인지 행복이 무엇인지, 자신이 보고 듣고 깨친 것을 사람들에게 전합니다.
우리가 변화되는 때는, 이미 오래전부터 들려오던 내면의 목소리에 그제야 대답하는 때일 것입니다. 이런저런 일들을 통해 오래전부터 우리를 부르시며 말을 걸어오시는 하느님의 목소리에 “예‘ 대답을 하는 순간이 우리에게 새로운 하늘과 새 땅이 비로소 열리는 순간일 것입니다.
앞으로만 달려가던 우리가 머리를 들어 비로소 하늘을 보며 우리의 삶을 돌아보고 ’참삶이란 무엇일까?‘ 하며 고뇌하는 그 순간이 새 삶이 열리는 시작일 것입니다.
”주님의 목소리가 들려오거든 너희 마음을 무디게 가지지 말라“ 드물게 찾아오는 어떤 획기적인 일에서가 아니라, 우리가 늘 만나는 자잘한 일상들에 얼마나 예민하게 깨어있는가? 나와 내 주위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나의 마음을 얼마나 열어놓는가?
그것이 주님의 목소리를 듣는 열쇠이며, 결단을 내려 하느님의 것을 선택하며 살아갈 때 우리의 삶은 마태오의 삶처럼 변화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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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대교구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님]
전통적으로 마태오 복음의 저자를 세리 마태오로 여겼지만, 학자들의 의견은 다릅니다. 여기서는 주석학 논쟁을 언급하기보다 교회가 왜 세리 마태오를 마태오 복음의 저자로 여겼는지에 주목하여 묵상했으면 합니다.
예수님 시대에 세리는 민족의 배신자이자 하느님을 등진 죄인으로 낙인찍힌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사람을 복음서 저자로 여긴 초세기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이념은 상당히 파격적이었습니다.
초세기 신앙인이라고 우리와 다를 것이 있었겠습니까. 초세기 신앙인들이 예수님을 따르면서도 의심하고 주저한 흔적은 복음서 곳곳에 나타납니다. 그런데도 세상의 이치와 논리에 따르지 않고 사회적으로 지탄받는 이들 또한 교회 공동체와 함께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게 된 것은 순전히 예수님의 삶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회적 약자와 죄인들과 함께 식사를 즐기신 모습이 복음서에 숱하게 등장하지요. 쉽게 생각하고 지나칠 장면이 아님에도 우리는 대수롭지 않게 그 장면들을 읽습니다.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가장 비난받는 이들과 함께 식사하고 술 한잔 나누는 이가 있다면, 그가 재림하신 예수님이시라면, 우리는 아마도 예수님을 비난하고 경고하고 훈계하며 급기야 쫓아내고 죽일 수도 있을 것이라 저는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아픈 이에게 의사로 오셨습니다. 제 잘못으로 아프든 타인의 차별과 억압으로 아프든, 아픈 이가 있으면 일단 고쳐 놓고 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 사회에서는 많은 사건이 터지고, 그로 말미암아 상처받은 이들이 수없이 많습니다. 자기 일이 아니라고 함부로 내뱉는 비난의 말들이 아픈 상처를 더 후벼 파는 죄인들의 무지함이라는 사실을 기억했으면 합니다.
알면 얼마나 알고 정의로우면 얼마나 정의롭겠습니까. 참된 지혜이시고 참된 공정을 펼쳐 보이시는 하느님이신 예수님께서는 오늘 죄인 마태오와 함께 식사하십니다. 바리사이만 멀찍이 떨어져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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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님]
예수님의 부르심에는 우리와 다른 방식이 있습니다. 우리는 사람을 볼 때 그의 출신 배경과 경력, 인맥과 학벌을 중요하게 여기지만,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의 속마음을 보시고, 그가 하느님 나라에 헌신할 가능성을 보십니다.
자기 민족에게서 세금을 거두어 로마 제국에 바치는 세리의 직업은 유다인들에게 혐오와 비난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런 세리를 제자로 부르시는 예수님의 속셈은 무엇이었을까요?
세상의 모든 필연은 우연에서 시작되었다는 말이 있습니다. 마태오가 세리가 된 것은 숙명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먹고살 길을 찾는 방식들 가운데 우연한 순간 내 평생직장이 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내가 하는 일이 신념에 따른 일이라고는 하지만, 대부분 주어진 일을 열심히 하는 것에 충실한 사람들도 많습니다. 세상의 잘못된 조직과 이념으로 희생되는 수많은 사람을 생각하면 그렇습니다.
세리인 마태오의 직업은 이방 민족의 지배 속에서 하느님 백성의 지위를 잃은 이스라엘 백성의 처지와 모순을 알려 주는 상징적인 면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삶의 모순으로 닥친 죄의 현실을 치유하시려고 오셨습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것은 각자의 능력이 비교되는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임을 강조하십니다.
우리는 모두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여러분이 받은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가십시오. 겸손과 온유를 다하고, 인내심을 가지고 사랑으로 서로 참아 주며, 성령께서 평화의 끈으로 이루어 주신 일치를 보존하도록 애쓰십시오.” 우리가 새겨들어야 할 바오로 사도의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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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나를 따라라>
마태오 9,9-13 (마태오를 부르시고 세리들과 함께 음식을 드시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길을 가시다가 마태오라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라.” 그러자 마태오는 일어나 그분을 따랐다. 예수님께서 집에서 식탁에 앉게 되셨는데, 마침 많은 세리와 죄인도 와서 예수님과 그분의 제자들과 자리를 함께하였다. 그것을 본 바리사이들이 그분의 제자들에게 말하였다. “당신네 스승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이오?” 예수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튼튼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너희는 가서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배워라. 사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나를 따라라>
나를 따라라
너만의 길 멈추고
나를 따라라
가던 길 돌아서서
나를 따라라
몸과 맘 정성껏
나를 따라라
힘찬 발걸음으로
나를 따라라
기쁨과 희망으로
나를 따라라
늘 한결같이
나를 따라라
앞길이 희미해도
나를 따라라
뒤돌아보지 말고
나를 따라라
쓰러져도 다시 일어나
나를 따라라
채우기보다 비우러
나를 따라라
가지기보다 나누러
나를 따라라
살기보다 살리러
나를 따라라
나를 따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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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희생제물이 아니라 자비>
예나 지금이나 천대를 받고 따돌림을 당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마태오라는 인물은 세금 징수원으로 천대를 받는 사회계급에 속해 있었습니다. 유다인들은 세리를 부정하게 돈거래 하는 사기꾼이나 탐욕스러운 사람으로 취급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런 사람을 부르시고 그 집에서 함께 음식을 나누셨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 사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그것은 세리들도 하지 않느냐?”(마태 5,44-46) 하신 말씀을 몸소 실천하셨습니다.
그리고 “당신네 스승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이오?”(마태 9,11) 하며 비위에 거슬린다고 생각하는 바리사이파 사람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튼튼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태 9,13)
죄인을 부르러 오신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시고 있는 것이 참으로 다행스럽습니다. 매일 다짐하지만 흔들비쭉인 우리의 마음을 헤아리시는 주님이 계시니 행복합니다. 성경을 보면, 다윗이 “내가 주님께 죄를 지었소.”(2사무 12,13) 하고 자기 죄를 고백함으로 용서를 받았고, 이스라엘 백성들도 자루옷을 걸치고 흙을 뒤집어쓴 채 단식을 하여(느헤9,1) 회개하였습니다.
요나도 죽음의 뱃속에서 살려달라 외쳤더니 그 호소를 하느님께서 들어 주셨습니다.(요나 2,3) 세리도 ‘오, 하느님! 죄 많은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루가 18,13). 하고 기도했고, 자캐오는 주님의 부름을 받고 재산의 반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주고 남을 속여 먹은 것에 대해서는 그 네 곱절을 갚아 주겠다고 말씀을 드렸고, ‘오늘 이 집에 구원이 내렸다.’(루가 19,8-9)는 기쁜 소식을 들었습니다.
십자가위의 오른 쪽 죄수는 ‘예수님, 선생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에 저를 기억하여 주십시오.’하고 간청하여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루가 23,43)는 확답을 얻었습니다. 죄인임을 인정하고 고백하는 가운데 자비를 입게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병자에게 의사로서 다가가셨고, 외적인 병을 치료하는 것을 뛰어넘어 뿌리를 다스리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진정 회개하는 죄인에게 구원의 기쁨을 허락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한없는 사랑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우리도 그분이 사랑하신 그 사랑으로 이웃에게로 다가가야 하겠습니다. 이런 사람, 저런 사람 차별 없이 사랑해야 하겠습니다.
밉살스러운 사람은 더 큰 사랑으로 더 많이 사랑해야 합니다. 보기 싫어도 사랑해야 합니다. “아무리 해도 다 할 수 없는 의무가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사랑의 의무입니다”(로마 13,8공동번역) 우리는 사랑에로 불리움 받았습니다. “사랑의 핵심은 용서입니다. 사랑의 본질은 상대의 실수를 이해하고 도와줄 방법을 아는 것입니다.”(프란치스코 교황)
그러므로 “여러분이 받은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가십시오. 겸손과 온유를 다하고, 인내심을 가지고 사랑으로 서로 참아주며,”(에페소서 4,1-2) 최선에 최선을 다하십시오.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제물이 아니라 자비다.”(마태 9,13)라고 하신 말씀의 의미를 되새기며 그 은혜를 기억하는 가운데 기쁨을 간직하시기 바랍니다. 마음을 다하여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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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언젠가 이메일을 통해 도움을 청하는 메일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조금 난감했습니다. 솔직히 제가 이분을 알지도 못하고, 또 그 상황도 전혀 모르는데 어떻게 도울 수가 있겠습니까?
이 분은 몇 년째 저의 묵상 글을 보고 있다면서 친밀감을 표시합니다. 그러나 저는 전혀 알지 못합니다. 또 갑곶 성지 초창기에 자주 왔었다고 말합니다. 역시 기억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저를 잘 알고 있으니, 도움을 당연히 줘야 하는 것처럼 메일을 보내신 것입니다. 그냥 무시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분을 모르니까요.
어떤 형제님으로부터 필요할 때만 연락하는 친구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자기 필요할 때만 연락하고, 친구의 연락에 대해서는 아무런 응답도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얼마 전에 그 친구가 경제적인 어려움을 호소하면서 돈을 빌려달라고 부탁했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해줬다고 하더군요.
“필요할 때만 연락하면, 필요한 것을 얻을 수 없어.”
필요한 것을 얻기 위해서는 필요하지 않을 때도 깊은 관계를 만들어야 합니다. 필요할 때만 연락하면서 필요한 것을 얻기 바라는 것은 지나친 욕심과 이기심입니다. 그런데 주님께도 이런 모습을 취했던 우리는 아닐까요? 필요할 때만 기도합니다. 과연 필요한 것을 얻을 수 있을까요?
예수님 시대의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께 관심이 컸습니다. 왜냐하면 이제까지 보여주신 표징과 힘이 되는 말씀은 ‘메시아가 아닐까?’라는 가능성을 갖기에 충분했기 때문입니다. 특히 로마의 지배를 받는 상태에서 진정한 해방을 가져다줄 메시아의 도래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지요. 그래서 계속해서 자신들이 믿을 수 있는 확실한 표징을 요구했습니다.
그들은 어떤 표징을 보여주어도 믿을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로마로부터의 해방이라는 필요한 것만을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욕심과 이기심에서 벗어나는 자신의 변화는 전혀 생각하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세리들과 먹고 마시는 모습을 보면서 “당신네 스승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이오?”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많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라고 하셨습니다. 사랑의 실천만을 우리에게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실천은 전혀 하지 않으면서, 자기 필요한 것만을 계속 청하고만 있는 우리가 아닐까요?
주님께서 부르는 사람은 능력 있고 재주 많은 사람이 아닙니다. 욕심과 이기심을 내려놓고 겸손하게 주님과 함께하는 사람을 지금 부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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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구원의 출구>
- 따름의 여정, 부르심과 응답, 공동체의 일치 -
오늘은 성 마태오 복음 사가 축일입니다. 역시 순교자 복음 사가이기에 빨간 제의를 입습니다. 마태오는 갈릴래아 태생인 듯 하며 마르코 복음에 의하면 알패오의 아들로 원래의 이름은 레위였습니다. 예수님이 시몬에게 베드로라는 이름을 주신 것처럼, 레위에게 마태오라는 이름을 주신 것으로 보고 있으며 교회 전통 역시 둘을 동일한 인물로 봅니다.
마태오라는 이름은 ‘하느님의 선물’이라는 히브리어 ‘마티아’에서 유래하며 그 이름 뜻대로 마태오는 오늘 복음에서처럼 은총의 선물처럼 주님께 불림을 받습니다. 열두 사도중의 하나인 마태오는 특별히 유대교에서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유다계 그리스도인들을 위해 히브리어 또는 아람어로 복음서를 저술했다고 전해집니다. 전승마다 차이는 있지만, 마태오는 “로마 순교록”에 따르면 에티오피아에서, “예로니모 순교록”에 따르면 페르시아까지 가서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한 것으로 알려 집니다.
교회미술에서 성 마태오는 성경에 언급된 ‘살아 있는 네 생물’중 날개 달린 사람(천사)의 모습으로 표현되며, 이렇게 일치시킨 분은 리옹의 주교 성 이레네오였습니다. 성 마태오가 복음 사가는 세리였던 경력으로 특별히 은행원과 장부 기장자, 회계사와 세무 직원들의 수호성인이 되었습니다. 동방교회에서는 그의 축일을 11월16일에 기념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보면 마태오의 성소는 그 이름 뜻처럼 순전히 하느님의 선물이었음을 봅니다. 마태오처럼 우리의 성소 역시 주님의 선물임을 새롭게 확인하게 됩니다. 참으로 주님을 만나 부르심을 받아 응답했기에 비로소 마태오의 운명은 바뀌고 완전히 새로운 삶의 시작이 된 것처럼, 우리도 그러합니다. 그러니 우리 역시 날마다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해 새롭게 시작하는 날이어야 합니다.
여기에서 착안한 강론 제목이 ‘구원의 출구’입니다. 구원의 출구인 주님을 만나 부르심에 응답한 마태오입니다. 지하 주차장에서 출구를 통해 나오는 것처럼 출구를 찾지 못하면 자동차는 지하에서 계속 헤맬수 있습니다. 부질없는 질문이지만 만일 마태오는 물론 우리가 구원의 출구인 주님을 만나지 못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마태오는 평생 구원의 출구를 찾지 못하고 세리 레위로 인생을 무의미하고 허무하게 마쳤을 것이며 우리 역시 방황하다 세상을 마쳤을 수도 있습니다.
사실 세상에는 평생 구원의 출구인 주님을 찾아 만나지 못해 무의미하고 허무하게 살다가 아까운 인생 마치는 이들도 많을 것입니다. 마태오의 예수님과의 만남은 우연이 아닌 은총의 섭리였음을 봅니다. 세관에 앉아 진리이신 주님을 찾는 마태오의 갈망을 한 눈에 알아채신 주님은 즉시 그에게 명하십니다.
주님은 죄인 세리라는 선입견이나 편견없이 마태오의 “있는 그대로”의 순수한 마음을, 갈망과 열정을 직시하십니다. 참으로 부르심에 앞서 주님을 찾는 마태오의 간절한 갈망이 전제됨을 깨닫습니다.
“나를 따라라.”
구원의 부르심입니다. 길에서 누군가를 기다리다가 길이자 구원의 출구이신 주님을 만남으로 이제부터 단조롭고 무의미한 일상에서 탈출하여 참길이신 주님을 따르는 새 삶이 시작된 마태오입니다. “나는 불림받았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말처럼, 지금까지 존재감없는 삶에서 이제부터 존재감 충만한 삶을 살게 된 마태오입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죽는 그날까지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따라 나서는 ‘따름의 여정’에 오르게 된 마태오요 우리의 삶이기도 합니다.
주변으로부터 죄인 취급 받으며 세관에서 “혼자” 고립, 소외된 삶을 살다가 마침내 예수님의 제자공동체에 합류하여 이제부터 “더불어” 주님을 따르는 구원의 여정에 오른 마태오입니다. 교회공동체, 수도공동체에 속한 우리의 모습도 마태오와 흡사합니다. 예수님 제자들의 공동식사는 그대로 이 거룩한 미사잔치를 연상케 합니다. 공동체의 일치를 이뤄주는 공동식사의 미사잔치입니다. 바로 여기 예수님께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하는 공동식사에 이의를 제기하는 바리사이들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의 오늘 복음의 절정입니다.
“튼튼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너희는 가서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배워라. 사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참으로 예수님을 통해 회개한 죄인을 사랑하시는 대자대비하신 하느님의 모습이 잘 드러납니다. 회개한 죄인들의 공동체가 바로 예수님의 제자 공동체요 우리가 속한 교회공동체입니다. 죄가 없어서, 잘나서 불림받은 우리가 아니라 병자요 죄인이기에 은총으로 불림 받았음을 깨닫습니다. 깊이 잘 들여다보면 세상에 병자 아닌 사람, 죄인 아닌 사람 하나도 없습니다. 이걸 깨달을 때 저절로 감사요 겸손입니다.
이런 자비로운 예수님을 공동체의 중심에 모시고 혼자가 아닌 더불어 주님을 따르는 여정중의 우리들입니다. 오늘 제1독서 에페소서에서 바오로의 가르침이 참 적절합니다. 세상에 문제없는 공동체는 없습니다. 에페소 교회 공동체 역시 내외적으로 불화와 이단의 위협을 겪고 있음이 분명하며 바오로 사도는 공동체 성원들 모두가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라 하시며 공동체의 일치의 방법을 알려 주십니다.
“겸손과 온유를 다하고, 인내심을 가지고 서로 사랑으로 참아주며, 성령께서 평화의 끈으로 이루어 주신 일치를 보존하도록 애쓰십시오.”
공동체의 중심인 주님을 바라볼 때 이렇게 살 수 있고, 이렇게 살 때 공동체의 중심인 주님을 닮습니다.
이어지는 공동체의 특성인 하나에 대한 강조가 참 인상적입니다.
하나의 희망,
하나의 그리스도의 몸,
하나의 성령,
하나의 주님,
하나의 믿음,
하나의 세례,
하나의 만물의 아버지이신 하느님,
모두가 하나 중심의 일치의 공동체임을 깊이 깨닫게 됩니다. 특히 하느님께서 계시지 않은 곳이 없다는 무소부재(無所不在), 그분의 힘이 이르지 않는 곳이 없다는 무소부지(無所不知)의 하느님에 대한 묘사도 은혜롭습니다.
"그분은 만물 위에, 만물을 통해, 만물 안에 계십니다."
참으로 공동체의 중심이신 주님과의 관계가 공동체의 일치에 얼마나 결정적인지 깨닫습니다. 참으로 모두가 공동체의 중심인 주님을 사랑하여 날로 주님을 닮아가는 것이 공동체 일치의 유일한 지름길임을 깨닫습니다. 마침내 우리는 모두 하느님의 아드님에 대한 믿음과 지식에서 일치를 이루고 성숙한 사람이 되며 그리스도의 충만한 경지에 이르게 됩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이에 결정적 도움이 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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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나를 따라라.' 그러자 마태오는 일어나 예수님을 따랐다."(마태9,9)
<죄인을 부르러 오신 예수님!>
예수님께서 길을 가시다가 세관에 앉아 있는 세리 마태오를 부르십니다. 당시 세리는 죄인 취급을 받았던 인물이니, 예수님께서 죄인을 부르신 것입니다. 죄인인 마태오는 일어나 예수님을 따라나섭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복음(마태9,9-23)이 전하고 있는 것처럼, 예수님께서는 죄인을 부르러 이 세상에 오셨고, 지금도 그런 죄인들을 부르고 계십니다.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어울리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본 바리사이들이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말합니다.
"당신네 스승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이오?"(마태9,11)
이 말을 들으신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튼튼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너희는 가서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배워라. 사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태9,12-13)
죄인을 부르러 오신 예수님! 죄인들을 부르시고, 죄인들과 함께 어울리시는 예수님!
저는 이런 예수님을 믿고 따라가고 있습니다. 저는 이런 예수님이 참 좋습니다. 그래서 저는 매일, 아니 매순간 이런 임마누엘이신 예수님 앞에서 죄인임을 고백합니다. 은혜를 받기 위해서.
오늘 독서는 사도 바오로의 옥중서간(에페소서.콜로새서.필리피서.펠레몬서) 중에 하나인 에페소서의 말씀인데,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권고합니다.
"주님 안에서 수인이 된 내가 여러분에게 권고합니다. 여러분이 받은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가십시오. 겸손과 온유를 다하고, 인내심을 가지고 사랑으로 서로 참아 주며, 성령께서 평화의 끈으로 이루어주신 일치를 보존하도록 하십시오."(4,1-3)
오늘도, 죄인인 나를 불러주신 자비이신 주님께 깊은 감사와 찬미를 드리면서,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살아내려고 애쓰는 자녀들이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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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i90Ts0ahS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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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나를 따라라." 그러자 마태오는 일어나 그분을 따랐다.(마태 9, 9)
성숙의 계절
가을의
기쁨입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삶이 있었기에
마태오 복음이
있을 수 있습니다.
마태오 복음의
한 구절 한 구절이
살아있는 말씀이고
살아있는
진리입니다.
보고 듣고
다듬고 골라서
마태오 복음이
탄생합니다.
기쁨으로
살게하시는
하느님이십니다.
기쁨을 나누는
마태오 복음사가
축일입니다.
십자가를 다르게
볼 수 있게 하는
마태오 복음입니다.
부활을 통하여
진리에 눈뜨는
시간입니다.
교회 공동체 안에
살아 계시는
주님이십니다.
마태오 복음을
통해 예수님의
참된 사명과
간곡한
가르침을
다시 만납니다.
사랑하고 용서하는
공동체 정신으로
우리를 초대합니다.
밖으로만 향하던
우리의 시선을
우리와
함께 하시는
주님의 현존으로
옮기게 됩니다.
주님의 현존으로
우리 삶의 참모습을
보게됩니다.
교회 공동체의
잘못된 관점을
바로잡게 됩니다.
신앙생활의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님을 통해
새로운 가치관을
세우는 기쁨입니다.
마태오
복음과의
만남은
예수님과의
만남입니다.
가르침을
주시는
만남은 참된
은총이며
축복입니다.
자신이 처해 있는
자리에서 최선을
다한
성 마태오 사도
복음사가의 삶에서
성숙한 부르심의
응답이 말씀으로
깊어지는 삶임을
배웁니다.
말씀의 내면화는
말씀의 실천입니다.
우리 또한
남겨야 할 것은
감사와 기쁨이라는
말씀의 나눔입니다.
성숙한 삶은
말씀으로
탄생되는
기도와 실천의
삶임을
다시 배우는
성 마태오 사도의
축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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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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