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희 가족은 서울에 올라와 일단 후암동에 있는 저의 친정집에 기거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병원마다 미제 홑청을 납품하던제 둘째 남동생이 나서서 남편을 업고 병원에 다녔는데, 후암동 근처 병원은 안 가 본곳이 없었고, 당시 휘경동에 있던 미국인이운영하는 위생병원에도 가 보았지만 남편의 병은 고칠 수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날이 갈수록 병세가 점점 악화된 남편은 진통제로 하루하루를 견딜 뿐 이제 희망도 없고아무런 대책도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저는서울에 올라온 후부터 새벽예배와 수요일예배는 친정집 근처에 있는 후암동전도관으로 나갔고, 일요일에는 이만제단에 다녔는데, 이만제단에서 생명물을 받아 와 남편에게 마시게 하였습니다. 그럴 때면 남편은"이건 그냥 물이 아니야. 다른 사람들은 주지 말고 나만 줘.”하면서 생명물을 잘 받아 마셨습니다.
니, 시동생이 벌떡 일어나며“무슨 전도관 교인들을 데려옵니까?" 하고소리를 버럭 질렀습니다. 하지만 저는 친척들을 설득하여 남편의 장례를 전도관식으로 하게 되었습니다.
신장병을 앓았던 남편은, 생전에 몸이 많이 부어 있었고 얼굴은 누런빛을 띠었는데,참 신기하게도 숨을 거둔 후 시간이 흐를수록 부기가 빠지고 아팠던 사람 같지 않게얼굴빛도 좋아졌습니다. 이튿날 아침, 저는전도관에 다니고 있던 저희 고모 집에 연락을 하여 오시라고 하였고, 제 동생에게는후암동전도관에 가서 남편의 사망 소식을알리고 교인들을 모셔 오라고 하였습니다.얼마 후 후암동전도관 전도사님은 스무 명정도의 남자 교인들을 데리고 저희 집으로찾아왔습니다. 전도사님과 남자 교인들은시신이 놓여 있는 큰방으로 들어와 뺑 둘러앉아 찬송을 부르기 시작하였고, 점심때가지나 생명물로 시신을 씻기기 시작하였습니다.
예배를 드리면서 시신을 씻겨 나가니 시신은 점점 아름다운 모습으로 변해 갔습니다.
살결이 분을 발라 놓은 것처럼 뽀얗게 피어나면서 볼도 발그레하게 되었고, 입술은 바깥쪽에서부터 안쪽으로 붉어지며 나중에는 립스틱을 금방 칠해 놓은 것처럼 새빨간 빛을 띠었습니다. 손톱까지도 핏기가 돌아 불그스름한 것이 꼭 살아 있는 사람 같았습니다. 또한 방 안에서는 향취가 진동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녁때쯤 육촌 시누이 되는 분이 소식을 듣고 찾아오셨습니다. 그런데 그분은 시신이 있는 방에 들어오자마자 울음을 터트리는 것이었습니다. 나이가 많은 어른이라 뭐라고 말씀드리지 못하고 가만히 있었더니,육촌 시누이가 앉아 있던 쪽 시신의 손 색깔이 거무스름하게 변하는 것이었습니다.저는 너무 놀라, 울면 남편에게 좋지 않으니 울음을 그쳐 달라고 육촌 시누이에게 말씀드린 후 다른 방으로 가 계시라고 하였습니다. 옆에 함께 계시던 고모는 축복 캐러멜 몇 알을 까서 남편의 손에 올려 주었는데, 잠시 후에는 손 색깔이 다시 좋아졌지만 처음에 피었을 때처럼 뽀얗지는 않았습니다. 시신이 곱게 피었다는 소식을 듣고,후암동제단 교인들뿐만 아니라 서울에 있는 각 제단에서 많은 교인들이 몰려와 곱게핀 시신을 보고 갔습니다.
그 후 1958년 3월 12일 저는 소사신앙촌에 입주하여, 양재 공장에서 근무하게 되었습니다. 처음 며칠 동안은 등이 후끈후끈하더니 어느 날부터는 생수가 강같이 흐른다는 표현처럼 배 속이 시원하였고 그런 느낌이 날마다 계속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며칠에 한 번씩 공장을 순회하러 오셔서종업원들에게 안수를 해 주시기도 하셨고,안찰을 해 주실 때도 있었습니다. 당시는한창 인기 있던 시온복신앙촌 사람들이 착용했던 멜빵바지 형식의 간편한 작업복,1958년 1월 소사신앙촌에서부터 착용하기시작했다. 생산에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는데, 매일 밀려드는 주문으로 밤늦게까지 일을 하고 나면 다리를 못 움직일 정도였지만, 자고 아침에 일어나면 언제 아팠느냐는 듯이 가뿐하고 상쾌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항상 함께해 주시는 생활이었기에 너무나 기쁘고 즐겁기만 하였던 것입니다. 저는 소사신앙촌 양재 공장에서 몇 년 동안 근무하다가 1961년 소비조합 활동을 시작하여 1962년 덕소신앙촌에 입주한 후에도 계속 소비조합으로 활동하였습니다.
그 후 1995년 기장신앙촌에 입주하여 장례반 일을 맡게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장례반 일을 하면서 생명물로 시신을 씻기면 누구나 할 것 없이 생전보다 더 고운 모습으로 피어 가시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기억에 남는 분이 있습니다. 1995년 8월 어느 날 아침 양로원에서 빨리 와 달라는 연락을 받고 시신을 씻길 때 쓰는 대야 두 개를 들고 뛰어가 보니, 예전에 전도사님으로 활동하셨던 박말자 할머니가 돌아가신 것이었습니다. 생전에 모습도 살결이 시커먼 데다가 그리 고운 분은 아니셨는데, 병환으로 고생하시다 돌아가셔서 그런지 시신의 모습은 더욱 좋지 않았습니다. 저는 양로원 선우혜국 원장님의 도움을 받아 박말자 할머니의 시신을 씻기기 시작하였습니다. 후두암으로 돌아가신 박말자 할머니는 가슴과 목 그리고 한쪽 눈두덩에 혹같이 딴딴한 것이 툭튀어나와 있었습니다. 원장님과 저는 시신을 깨끗이 씻기면서 그 혹이 혹시 터지지나 않을까 걱정을 했습니다. 시신을 씻기면서 생명물을 시신의 입에 두 컵 정도 떠 넣어주었는데, 한 방울도 흘림 없이 다 넘어갔습니다. 그리고 시신을 다 씻긴 후에는 고운 한복으로 갈아입히고 홑이불을 덮어 놓고 나왔습니다.
오후 3시경 입관예배를 드리려고 기장신앙촌의 많은 교인들이 시신이 있는 양로원 2층 방으로 모였습니다. 하나님 찬송가 테이프를 틀어 놓고 찬송을 부르는 가운데 시신을 씻기려고 아침에 덮어 두었던 홑이불을 젖혔는데, 박말자 할머니의 목과 눈에 튀어나와 있던 혹이 쏙 들어가 흔적도 찾아볼 수가 없는 것이었습니다. 또 가슴 쪽에 나 있던 혹도 온데간데없었습니다. 어찌된 일인지 너무나 신기하였습니다. 양로원 원장님이 하시는 말씀이, 몇 시간 전 고려병원 의사가 사망 확인을 하러 왔을 때 꾹꾹눌러 보면서 혹이 딱딱하다는 말을 했는데, 그때 자신도 만져 보니 시신의 혹이 딴딴하게 있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계속 그 혹이 터질까 봐 걱정을 했었는데 이렇게 감쪽같이 없어졌다며 놀라움을 금치 못하는 것입니다. 또한 시신을 다 씻겨 입관해 놓으니 시신이 어쩌면 그렇게 예쁜지 얼굴에 분을 발라 놓은 것같이 새뽀얘지고 고운 모습이었습니다. 박말자 할머니의 세 아들 내외는 시신이 곱게 핀 모습을 보며 너무나 감격하여 어찌할 바를 몰라하였습니다. 그리고 기장신앙촌 교인뿐만 아니라 마침 축복일이라 박말자 씨와 친분이 있는 덕소신앙촌 교인들도 많이 참석하여 이 놀라운 광경을 지켜보았습니다.
한없이 내려 주시는 은혜에 기뻐하면서 지금까지 이 길을 따라왔습니다. 깨우쳐 주시고 이끌어 주신 하나님 은혜에 감사드릴 뿐입니다. 앞으로 남은 여생도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며 더 열심히 정성을 다해 하나님을 끝까지 따르고 싶습니다.
신앙신보〈205회 1999. 12. 12./19. 게재〉
첫댓글 잘 읽고갑니다
잘보고 갑니다
잘보고갑니다.
읽으니 기분이 좋아집니다. 감사합니다.
잘보고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