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성하는 호박 / 김성신
입장을 바꿔 생각해 봐
심장이 파인 다음
곰곰 고아지는 일에 대해
이웃들이 함께 테이블 앞에서 읽히면
쉽게 끓어오르지
빚, 이자, 독촉장이 큰 통에 고아질 때
오감을 오래전 땅에 묻었을지라도
밤은 이럴 때 자라나서 캄캄해졌지
바람이 주는 통증에 둔감했던 이파리며
결실을 독촉 받던 노란 꽃,
될대로 되기만 바랐던 내가
수령, 납부, 당첨 같은 말들을 자꾸 되뇌다 보면
눈물 대신 앙다문 파리한 입술이 지워질까
눈꺼풀이 사라져버렸어
묵묵히 갚아내야 하는 것들 끼니로 채워주면
허물 벗듯 난 다시 물이 될까
툭툭 보글거리다 밀어 올리는 동그라미
구절양장九折羊腸으로 한 시절 꺾이며 내려가다
물기에 젖어 혹은 썩어 사라져야 하는 것은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기차 소리를 발뒤축으로 밟는 일이다
식욕이 무덤이 되는 일에 대해서
울적해질 때
나는 남은 호박 줄기들을 다시 모아 햇빛 쪽으로 간다
꽃이 핀다 모르는 척
* 김성신 시인
1964년 전남 장흥 출생. 원광대 한문교육학과 졸업. 광주대 대학원 문예창작학과 박사과정 수료.
2017년 《불교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
2016년 원주 생명문학상, 2016년 용아 박용철 전국 백일장 차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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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이 작품에서 시적 전개 방식의 표준을 본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가장 기본에 충실한 작품이라는 생각이다.
시의 기본을 말할 때 정답은 없지만, 필자가 생각하는 기본은 비유와 은유가 자연스러워야 하며
비유와 은유의 흐름에 정확하게 일치하는 성찰이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생경하거나 채집된 단어의 조합이 어불성설이거나 시적 흐름에 저해가 된다면 중언부언이 되며
시적 내용이 아무리 곡진하다 해도 전달되는 경로의 문제로 인하여 독자에게 오면
전혀 다른 내용으로 이해를 하게 될 오독의 여지도 많게 된다.
김성신의 작품은 촘촘하게 엮은 그물을 연상하게 한다.
첫 연에서 마지막까지 문장의 행보가 내밀하다.
또한, 앞뒤 문장과 사고의 개연성이 합리적이다.
호박이 나고 자라서 식탁 위에서 조리되는 과정과 자신의 삶을 비교한, 단순히 비교에 그친 것이 아닌
성찰의 결론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 김부회 (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