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12.13.月. 흐림
백일이 채 안 지난 갓난아기의 맑은 울음소리도 듣고, 방파제 끝에 서서 외도外島 왼쪽 귀에 매달려 솟아오르는 장한 태양도 보고, 바다 끝 외로운 등대에 올라 해무 사이로 가물거리는 대마도의 긴 얼굴도 보고, 바다에서 지금 건져낸 담쑥한 고등어 회 맛도 보고, 가덕도에서 거제까지 이어주는 거가대교의 시원스런 자태도 구경하면서 그곳 아니라면 맛보고 느끼지 못할 수많은 것들을 가슴에 안고 돌아왔습니다. 내가 가고 싶어서 갔고, 보고 싶어서 간 곳입니다. 미처 보지 못한 얼굴들이 아쉽기는 하지만 무엇보다 좋았던 것은 그곳에서 만난 우연偶然과 필연必然들이랍니다. 우연이 반복되면 필연이 되고, 필연을 뜯어보면 우연의 모음이지만 우리는 우연을 통해서 필연이 이루어지기를 소망하며 살아갑니다. 그리고 우연을 차곡차곡 쌓아가면서 필연을 만들어가며 또 살아갑니다. 이번 1박2일의 징검다리 송년회 모임 여정旅情이 반듯하고 충만한 필연으로 향하는 든든한 노둣돌이라는 생각에 몹시도 즐거웠습니다. 우연과 필연을 만들어내는 가슴 설레는 시간들과 두 낮 한 밤을 함께 한 많은 분들께 따뜻한 고마움을 진하게 느끼는 대목입니다.
<통영>
서호시장의 원조 시락국 집에서 점심을.
진주에서 탄 시외버스가 1시간가량 달려 우리를 내려 준 곳이 통영 종합버스터미널이다. 통영 종합버스터미널에서 차부밖으로 나와 많은 예술인들을 키워낸 통영의 햇살을 받으며 시원한 바람을 가슴 깊이 들이마신 뒤 시내버스를 타고 시내로 향한다. 통영은 거의 초행길이라 나 혼자서 라면 길을 묻고 찾아가면서 지도를 손에 들고 돌아다녀야하겠지만 이 고장에서 학교를 다닌 동행인同行人이 있어서 세세한 설명과 함께 차분하고 여유 있는 통영탐방 길이 된다. 십몇 년 전, 이 고장이 본래 제 이름인 통영統營을 되찾기 전 아직 충무忠武라 불릴 때 오후 느지막이 도착해서 잠만 자고 아침 일찍 지나쳤던 곳이라 언젠가는 꼭 와보고 싶었던 곳이다. 그때의 느낌으로 참 언덕이 많은 곳이구나.라는 기억이 어렴풋이 남아있는데 오늘도 시내버스가 몇 개의 언덕을 오르내리며 시내 중심부로 향한다. 어느 도시든 그 지역을 대표하는 문화와 관광의 거점지역이 있기 마련인데 여기도 바로 그런 곳 중의 하나라고 한다. 서호시장에서 통영 여객선 터미널을 지나 바닷가 길을 따라 걷다가 중앙시장과 동피랑을 둘러보기로 하고 그에 앞서 이른 점심을 먼저 해결하자고 의견을 통일한다.
통영에 오면 물메기국과 시락국 맛을 봐야 한다면서 동행인이 앞장을 서자 나도 뒤따라 서호시장 안을 돌아다닌다. 저 많은 시락국 집중에서 어느 집 손맛을 볼까 고민하다 결국 아짐씨들께 묻고 조언을 얻은 뒤 골목 끝에 붙어 있는, 빨간 글씨로 원조라고 쓰인 간판이 걸려있는 집으로 들어간다. 지나쳐온 다른 시락국 집들은 한산하기만 하던데 이 집은 사람들로 빼꼭한 게 빈자리가 날 동안 잠시만 기다려 달라고 한다. 통영에서는 이 국을 시락국이라 부른다지만 보통 시래기 국이라 부르는데 우리가 어렸을 때야 겨울철이면 노상 먹고 살았던 흔하디흔한 국거리였으나 마치 기억 속의 낭만과 함께 입에 미어지게 밀어 넣고 우물거리는 꽁보리밥처럼 요즘에는 옛날의 그 맛이 별미가 되어 있는 음식 중 하나이다. 홀 안에는 긴 식탁이 있고, 스텐리스 통에 반찬이 담겨 식탁 가운데 놓여 있어서 옆에 있는 빈 접시에 반찬은 각자 먹을 만큼 담아서 먹게끔 되어 있어서 바쁜 일손을 많이 줄일 수 있도록 식탁차림이 되어 있다. 빈자리에 앉자 뜨거운 밥과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시락 국이 내 앞에 턱 놓인다. 장어를 고아낸 육수에 삶은 시락국은 된장 냄새 푸근하던 기억 속의 시래기 국보다는 미끈하고 다소곳한 맛이었지만 혀끝을 스치고 입 안을 매끈하게 감돌아 목구멍 저 아래로 내려간다. 밥을 말아놓은 시락국을 한 수저 떠먹을 때마다 된장에 박아놓았던 통고추와 통 멸치젓갈을 젓가락으로 부지런히 날라다 먹는다. 알맞게 짠 것은 씹으면 씹을수록 입 안이 고소해진다. 그 덕택에 오후 내내 물이 어찌나 쓰이던지 달새 님이 보내온 야콘즙을 연신 집어먹게 된다. 시락국 집 바로 맞은편에는 옛날 대장간이라 불러 마땅할 철공소가 한 집 있어서 불꽃 튀기는 쇳덩이들을 쳐다보다 시장 골목을 나선다.
통영항 여객선 터미널이 들뜬 내 마음을 데려다주는 곳은 어느 섬일까.
서호시장 뒤편으로 길 하나 건너면 통영 여객선 터미널이 있다. 터미널 분위기는 작고 아담한 공항청사 같은데 이런 느낌이 그다지 틀리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땅에 있는 모든 길에는 글씨와 선이 색깔 별로 다양하게 그려져 있어서 모든 정보를 표시하고 있지만 바닷길과 하늘 길에는 아무런 표식標識도 표시表示도 없다. 그렇다고 해서 바닷길이나 하늘 길을 아무데나 다녀도 좋다는 뜻은 아니다. 그곳에도 분명 가야할 곳과 가지 말아야 할 곳이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 드넓은 바다와 공활한 하늘을 여행하기 위한 손님들을 맞는 곳이 공항청사와 여객선 터미널이다. 유한한 선을 따라가는 육지의 노정路程보다는 무한한 공간을 옮겨 다녀야 하는 입체적인 승객을 맞이하는 공항청사와 여객선 터미널은 그에 걸맞는 분위기와 상호 유사한 느낌을 가지고 있어도 좋을 듯하다. 어쩌면 끝 모를 이별이 대기석 의자 등받이에 운명처럼 배어 있는, 한 번 떠나면 영영 돌아오지 않을지도 모르는 절박함이 창가 구석마다 스며있기에 공히 미지의 세계에 대한 호기심과 불안감이 교차되고 있는 장소이어서 더욱 그럴는지도 모를 일이다.
“통영항 여객선 터미널에서 출발해서 욕지도와 연화도를 돌아보는 두 밤 세 날짜리 일정도 좋고요, 여기보다는 거제도 쪽에서 출발하여 매물도와 소매물도를 돌아보는 코스도 아주 좋지요. 그뿐 만은 아니지요. 가까이로는 한산도과 비진도가 있고요, 사량도도 있지요. 조금 멀리에는 두마도, 상노대도가 그리고 더 멀리 가고 싶다면 국도가 좋지요. 여름철에는 해수욕을 겸한 피서객으로 붐비지만 그 철만 비켜간다면 바다와 섬의 호젓하고도 끝없이 외로운 낭만을 즐기기에 그만한 것이 없을 겁니다. 아마 육지가 갖지 못한 유일한 감성이 아닐까 생각합니다만.”
동행인의 설명을 듣고 있다 보니 근래 조금은 식상해진 듯한 여행에 새로운 활기가 부어지는 것 같다. 통영이나 거제를 출발지로 삼아 떠나는 며칠간의 섬 여행은 올 겨울 내가 준비할 수 있는 최고의 여행계획이 되지 않을까하는 생각에 마음이 미리 부풀어 오른다. 불타는 태양이나 하얀 갈매기가 아니더라도, 오직 검푸른 수평선 하나만으로도 나는 충분히 외로움에 주릴 듯한 낭만浪漫의 포만감飽滿感을 맛볼 수 있을 테니까.
통영을 길러온 햇살과 바람.
통영항 여객선 터미널을 빠져나와 바닷가 길을 따라 걸어간다. 멸치잡이 배들이 물결에 맞춰 가볍게 흔들리며 떠있다. 저기 보이는 언덕 높은 곳이 동피랑이고, 그 아래쪽에는 중앙전통시장이 있다고 설명을 해준다. 그리고 예전에는 이 부근에 일본식 집들이 많이 있었는데 지금은 재개발로 거의 다 없어져버렸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일본식 집이 한두 채 보인다. 일제강점기 시절에 일본인들이 짓고 살았던 집을 적산집敵産家이라고 한다. 외벽은 어두운 색깔의 나무로 지어졌고, 큰 창이 있는데다 지붕에는 기와가 올려진 이런 적산집에 대한 추억이 나도 있다. 미닫이 방문과 넓은 방, 마루 바깥쪽에 또 미닫이 창문이 달려있었고, 커다란 가마솥처럼 생긴 쇠 욕조가 있었던 낡은 집의 기억은 아주 오랜 나의 유년幼年의 기억에 속해있다. 쇠 욕조 바닥에는 나무판이 깔려 있어서 뜨겁지는 않았지만 언제나 김 가득 서린 욕실이 조금은 무서웠고 항상 신비로웠다.
하얀 배들이 등을 기대고 있는 부두는 눈이 부실만큼 푸른 햇살 아래 빛나고 있다. 그 햇살 틈 새로 돌아다니며 파도 위에 금빛 물비늘을 만들어내고 있는 바람도 햇살만큼이나 몸을 번뜩이며 춤추고 있다. 다른 곳의 그것과 무엇이 다르기에 저 햇살과 바람은 이 고장에서 유독 많은 문인文人들과 예술가藝術家들을 길러내었을까?
(- 징검다리를 밟고 돌아다닌 세 도시 이야기, 통영 -)
첫댓글 진주에서 만나 통영 서호시장, 여객터미널과 바닷길을 딸라 걸으면서 본 항남동의 일본집, 윤이상선생님의 음악당이 있는 남망산공원, 동피랑과 중앙시장 ... 자세한 설명에 그날 잠시 머리속에 떠올려 봅니다, 즐거운 1박 2일이었네요~ ^^*
근데, 어쩐 일이어요. 100차때 상한 몸은 원상회복이 되셨는지요? 정말로 그 때 많은 분들에게 몸에 멍을 들게해서 정말 죄송했답니다. 그래서 내린 결론이 매해년 한 차례는 운동회를 통해 몸을 단련시켜야 하겠구나... 진주도 그립고 통영이라는 글자만 보아도 설레이는 곳이네요. 통영은 마치 어머니의 자궁처럼 평온하고 아늑한 최고의항구지요. 통영이 가고 싶네요.
뜻밖의 만남이 더더욱 반갑다는걸 실감시켜 준 긴울림님.....
같이한 시간들 소중히 간직하겠습니다...
우리도 통영을 훓고 오려고 했는데 피곤이 몰려와서....ㅎㅎㅎ
내 幼年의 흔적이 짠물처럼 베어 있는곳 !!! 그래서 더 정겨운곳 언젠가는 돌아가리라!! 통영!! 한참을 고향에 놀다 갑니다 !! 지금쯤 겨울 바람에 방패연이 파란 하늘에 하얀선을 긋고 있을까???
우연이든 필연이든 그렇지않든 같은 공간에서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었던 인연들이 참 소중하게 느껴집니다.
언제나 항구는 알 수는 없지만 흥분되는 기대감을 품게 해주는 것 같습니다. 통영에 가면 어디로 가는 배이든 아름답고 환상적인 풍경을 보여줄 것 같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