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12.13.月. 흐림
<거제>
굽이굽이 해안선 따라 숨어 있는 하얀 속살들.
동피랑 쪽을 향해 걷고 있는데 동행인이 전화를 받는다. 창원에서 오는 또 다른 일행들께서 통영을 지나치는 길에 통영 종합버스터미널에서 만나자고 연락이 왔다고 한다. 동피랑과 통영의 다른 문화 관광지는 또 언젠가 미래를 기약하기로 하고 우리도 약속장소로 이동을 한다. 시내버스를 타러가면서 사실 통영의 맛이라는 물메기 국과 시락국보다는 일반적으로 널리 알려진 충무김밥과 꿀빵에 얽힌 이야기를 동행인同行人이 해준다. 도넛처럼 팥앙금을 밀가루 반죽 안에 가득 넣어 기름에 튀겨낸 빵에 진짜 꿀을 발라 학교에서 팔았는데 그 때 사먹었던 맛이 기억에 남아 있는 통영에서의 학창시절의 추억이라고 말한다. 또 충무김밥을 사들고 배에 타서 통영에서 집이 있던 남해까지 가는 동안 따뜻한 연통에 기대앉아 먹었던 충무김밥 맛도 잊을 수가 없다고 한다. 마침 버스 정류장 앞에 있는 제과점에 진열된 꿀빵을 보며 내가 손가락으로 가리키자 요새 꿀빵은 겉에 물엿을 발라놓아서 옛날 맛이 제대로 안 난다며 그 꿀빵들을 무심히 쳐다본다.
신거제대교나 거제대교를 동쪽으로 건너가면 그곳부터는 거제 땅이다. 오늘의 만남 장소인 정해펜션까지 질러갈 수 있는 14번 국도를 제쳐두고 거제 해안선을 따라 반시계방향으로 굽이굽이 돌아가는 1018지방도 위로 올라선다. 거제의 숨어있는 속살을 낱낱이 보여주겠다며 일부러 해안선 생김새대로 따라가는 구舊 도로로 들어 선 것이다. 그로부터 두 시간여 동안은 오직 거제 땅 남쪽 끝에 자리한 일운면 망치리 정해펜션에서의 하룻밤에 들떠 있는 나에게 안겨준 예상하지 못한 큰 선물膳物이고, 복에 겨운 환대歡待라고 밖에 무어라고 표현할 수 있을까!
구불구불 해안로를 따라 가다보면 해변이 보이는 곳은 죄 해수욕장이요, 푸른 바다에 솟은 것은 모두 섬인지라 생긴 그대로가 그림이고 시선 닿는 대로 풍경이 된다. 가멸찬 눈호사豪奢란 이럴 때 쓰는 말이다. 가다 서서 구경을 하고, 가다 멈춰 넋을 놓은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니지만 먼지 풀풀 날리는 비포장도로가 옛날의 향수를 솔솔 불러일으키는 ‘홍포-여차 전망도로’의 4Km 구간은 거제가 미래를 위해 숨겨놓은 아름다운 길임에 분명하다. 눈앞에 펼쳐지는 푸른 바다위로 대·소병도를 포함한 60여 개의 섬들이 잔잔한 햇살아래 부스러진 별처럼 빛나고, 그 위를 맴도는 바람은 달빛을 걸어놓은 듯 은은하게 흔들린다. 또 이곳에서 바라보는 일몰日沒은 그 처절한 아름다움이 장관壯觀이라 하니 언제고 일부러라도 와서 누군가의 손을 마주잡고 한 번쯤은 보리라 생각을 한다.
징검다리 송년회.
전주에서도 오시고, 포항에서도 오시고, 대구에서도 오시고, 진주에서도 오시고, 창원에서도 오시고, 양산에서도 오시고, 부산과 남해에서도 오셨다고 한다. 그래서 모인 사람 수가 스무 명이 훨씬 넘는 대가족이다. 커다란 창으로 남해가 송두리째 내다보이는 이층 거실에 모여 왁자지껄 떠들면서 먹고 마시고 노는데 그 흥겨움이 난장亂場이다. 남해바다 속을 돌아다니던 물고기들은 몸을 바쳐 모두 회膾로 변신을 했고, 육지를 돌아다니던 네발 달린 짐승들은 죄 바비큐로 분장을 하고 교자상 위에 고스란히 놓여 있다. 그 사이사이에 놓인 것은 제주도와 중국과 대구에서 제 깜냥대로 한가락을 하며 놀아봤다는 술병들이다. 교자상을 뒤덮고 있는 손맛과 입맛과 정맛情感에다 산해진미를 더해놓았으니 송년회 마련은 제대로 된 셈이다. 해가 성성한 오후4시 못 미친 시간부터 시작된 해넘이 잔치가 밤 자정이 지나도록 그치지 않았으니 오늘 모인 징검다리 가족 분들 모두가 참으로 무던한 양반들이다.
일운면 망치리의 일출.
눈을 뜬다. 잠자리가 바뀌어 장담할 수는 없지만 아침6시 전후라고 방안에 가라앉아 있는 어둠이 알려준다. 잘됐다! 이왕이면 남도 끝에 서서 바다에서 떠오르는 일출을 보고 싶어서이기 때문이다. 눈알을 이리저리 굴려본다. 왼쪽 눈이 아래쪽으로 눌리는 듯하던 통증이 많이 가라앉았다. 다행이다! 며칠 전부터 실핏줄이 터졌는지 점점 아파오던 왼쪽 눈이 어제는 제법 심해졌기에 눈 안쪽으로 통증이 옮겨가는 느낌을 받아서 사실 술을 마시면서도 신경이 쓰였는데 그 흥겨운 분위기 덕택에 눈알은 내리누르던 통증이 무장해제를 해버린 모양이다. 간단히 씻고 나서 일행 한 분과 정해펜션을 나와 길 건너 방파제를 향한다. 방파제 끝에는 이른 아침낚시를 즐기는 한 가족이 있을 뿐 해맞이를 하러 나온 사람은 나뿐인 듯하다. 바다가 하늘같고, 하늘이 바다 같아 경계가 서로 불분명한 세상을 추근히 쳐다본다. 바람이 없어도 굼실거리는 새벽 바다는 커다란 고래의 등처럼 한가롭다. 수평선 언저리부터 붉은 기운이 위로 서서히 번져간다. 정면에 바라보이는 외도外島를 감싸고 있는 하늘이 점점 벌개지더니 어느 순간 외도 왼편에 붉은 기운이 성성해진다. 잔바람이 불며 큰 물위에 작은 물결을 만들더니 붉은 기운을 순식간에 온 바다에 퍼트려놓는다. 외도 왼쪽 귀를 타고 올라오는 선한 주홍색 덩어리를 나는 지켜본다. 도화지를 칠해가는 아이들의 크레용 칠 같은 순한 주홍빛 햇살이 갈래갈래 퍼져 나오더니 한순간이나마 외도와 바다와 하늘을 빛 속에 삼켜버린다. 외도에서 날려 올린 등 같은 붉은 해가 온몸을 드러낸다. 부챗살로 내쏘던 빛살이 점점 투명해지며 바다와 하늘을 선명하게 보여준다. 또 새날이 시작된 것이다.
서이말 등대 가는 길.
그 동안 군사시설 통제지역으로 묶여 있다가 최근에 열렸다는 서이말 등대까지 해안선 따라 구불구불 이어진 무성한 숲길이다. 길바닥은 포장되어 있지만 사람의 발길을 별로 타지 않은 주변의 나무와 숲이 잘 우거져 있는데다 해안 벼랑 아래로는 푸른 물결 위로 얼굴을 뾰쪼롬히 내놓은 채 손끝에 닿을 듯한 외도와 내도가 둥실 떠있다. 작은 달 부스러기 닮은 앙큼한 섬들이 점점이 모여 있고, 붉은 꽃을 매단 동백이 검푸른 잎사귀를 흔들며 그간 왕래가 드물었던 사람을 반기는 모습이 시골 아낙처럼 순박하다. 삼삼오오, 각자의 걸음걸이에 맞춰 모였다 흩어지고 만났다 나뉘면서 숲길을 걸어간다. 가는 도중에 띄엄띄엄 동백나무 군락이 보이는데 나무들이 실하게 잘 자라있다. 12월 남해의 바람이 흔들흔들 흘러 다니며 바다와 이곳의 겨울 소식을 전해준다. 간간히 그것 말고도 아주 오랜 옛날 이야기도 들려주는데 멀어졌다 가까워졌다 하는 바람의 귓속말이 메아리 되어 울려나면서 따뜻한 입김만을 느낄 뿐 정작 이야기는 알아듣지 못하고 있다. 그러다보면 어느새 숲이 다하는 곳에 서 있는 하얀 등대가 보인다.
등대 앞에 서면 수평선에 걸려있는 대마도가 보인다. 여기서야 빛바랜 흑백 산수화처럼 옅게 보일 뿐이지만 대마도는 두 개의 섬으로 나뉘어 있는, 산이 많고 나무가 울창한 푸른 섬이다. 그래서 대마도의 다른 이름으로 목섬木島이라고도 부른다. 이십여 년 전 대마도에 갔을 때 그곳 사람들이 날씨가 좋은 날에는 부산이 보인다고 했지만 보지 못했다. 또 그곳 해변 가로 한국에서 떠내려 온 라면 봉지나 빈 음료수 병들이 너무 많아 가끔 쓰레기 수거를 해야 할 정도라는 말을 듣고 함께 웃기도 했었는데 그 말은 사실이었을 것이다. 홋카이도오北海島나 오키나와沖繩라면 몰라도 대마도는 남의 땅이라는 생각이 별로 들지 않는다. 대마도의 위치가 일본 땅인 규슈와의 거리가 132Km인데 비해 서이말 등대에서의 거리는 불과 55Km라고 한다. 거리상으로도 그러하지만 원래 우리의 풍속이 마루를 딛고 서서 보이는 것은 전부 우리 마당이라는 사고방식이 강한데다 해류의 흐름으로도 서로 연결되어 있어서 대마도가 낯설지 않고 익숙해 보이는 것이다.
이런 외딴 등대에서 하루 내내 바다를 바라보며 근무를 하는 사람들은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을 해본다. 바다에게 말 걸고, 하늘에다 말 하고, 나 혼자 대답하고. 그렇게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등대에서 돌아서서 나올 때까지 그 생각을 하고 있다.
이별이 있기에 더 아름다운 만남.
거가대교 전경도 둘러보고, 기념사진도 찍고, 점심으로 맛난 멍게 비빔밥도 먹으면서 하룻밤 이틀 낮에 걸친 송년회를 잘 마무리한다. 아무리 즐겁고 흥겨운 일이라도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게 마련이고, 만남 뒤의 이별이란 다음 만남의 빌미를 제공하는 암묵적인 약속이자 은근한 기대감의 색다른 표현방식이라는 걸 우리들은 알고 있다. 내년 6월에 감포에서 다시 만날 징검다리 모임은 그 명칭을 무어라고 해야 하나?
(- 징검다리를 밟고 돌아다닌 세 도시 이야기, 거제 -)
첫댓글 멍게향이 아직도 입속에 있는 듯...정해팬션 거실에서 보는 떠오르는 아침해가 너무 아름다웠지요..^^*
1박2일 징검다리 송년회 모임 과정을 상세히 적어 놓으셨네요
서이말 등대가는길은 정말 예뼜죠?...군부대시설로 묶여 있지 않았더라면 아마도 바닷가 주변에 펜션 짓는다고 다 개발했었텐데..그나마 다행이라 생각하며 시민들의 휴식공간으로 잘 보존됐으면 좋겠더라구요
긴울림님 감포 모임때도 꼭 참석해 주실거죠?..멀리서 오셔서 더 반가웠습니다.
푹~~ 빠졌다 갑니다!! 날씨가 많이 춥습니다!! 건강 조심하십시오^^&
주홍빛이 부채살처럼 번지던 수평선 뒤로 엎어 놓은 쟁반모양의 대마도를 정해팬션 마당에서 잠시 바라보고
해를 등지고 바다와 멀어 지면서 내내 아쉬웠었는데 긴울림님의 글로 위로 받았습니다.
바다와 섬이 있어 더 좋은 곳에서 참으로 따듯한 징검다리 송년회를 하셨네요. 다음번에는 저도 불청객으로라도 가보고 싶어집니다.
모놀이라서 가능한 이야기이겠지요. 긴울림님 덕분에 편안히 거제에서 놀고 온듯합니다. 감사합니다. 건안하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