팬터지는 98년 이후 문학시장에서 ‘황금알을 낳는 거위’로 주목받고 있다. 최대흥행작인 ‘드래곤라자’(황금가지)는 작년 6월 출간 이후 42만부가 팔렸다. ‘용의 신전’‘마왕의 육아일기’(자음과모음)도 각각 27만, 18만부를 돌파했다. 독자층은 10, 20대의 영상세대.
팬터지소설 전문출판사인 자음과모음의 강병철대표는 “일반 대하소설과 달리 팬터지는 아무리 권 수가 많아도 첫권이나 마지막권의 판매부수가 비슷한 것이 특징”이라고 설명했다. 출판사들이 팬터지작가 잡기에 혈안이 돼 컴퓨터통신 공간을 뒤지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 지금껏 팬터지작가는 컴퓨터통신을 통해 인기도를 검증받고 배출돼 왔다.
순수문학쪽도 ‘상업성’과는 별개의 측면에서 팬터지 소설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환상소설이 문학의 새 지평을 열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 때문이다. 서울대 김성곤교수(영문학)는 “환상문학은 정통 리얼리즘이 득세할 때는 폄하됐지만 광기 비이성 야만의 가치가 재조명되는 포스트모던 시대에는 문학과 문화의 중심부로 부상한다”고 설명한다. 60년대 미국에서 ‘문학의 종말’을 주장했던 평론가 레슬리 피들러가 팬터지소설 SF 만화 등을 ‘중간문학’으로 받아들여 수용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 대표적 사례.
그러나 한국의 팬터지소설이 그러한 가능성을 보여주는가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비관론이 우세하다. “현실의 또 다른 얼굴로서의 환상, 현실문제를 풍자하는 작가의 문제의식을 보여주지 못한다면 컴퓨터게임 시나리오에 불과하다”는 지적이다. 〈정은령기자〉
[팬터지소설 찬반공방 요지]이영도- 하응백씨
《팬터지소설 최대 흥행작 ‘드래곤라자’의 작가 이영도씨가 ‘기성문단이 팬터지의 기초조차 모르고 있다’는 반박문을 동아일보에 보내왔다. 이는 문학평론가 하응백씨가 쓴 ‘환상소설의 허와 실’(계간 문예중앙 봄호)에 대한 대응이다. 찬반공방의 요지를 싣는다. 팬터지소설 작가가 본격 공방에 나서기는 처음이다.》
★하응백씨 비판론 요지★
90년대 후반부터 문단 일각에서 환상문학에 대해 주목한 것은 70, 80년대 리얼리즘문학의 시대를 대체하는 새로운 방향의 문학론을 마련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재 유행하는 팬터지소설은 이런 환상문학론과 관련이 없다. 최근의 팬터지소설은 계보적으로 본다면 팬터지의 고전 ‘반지전쟁’을 쓴 J J R 톨킨 류의 팬터지소설→컴퓨터 롤플레잉게임→팬터지소설로 이어지는 것으로서 서양팬터지소설의 사생아이며 컴퓨터게임의 직접적인 자식이다.
또 ‘드래곤라자’에서 볼 수 있듯이 방대한 분량과 복잡한 구성을 정리해놓고 보면 무협지와 하등 다를 바가 없다. 문화산업으로는 응용되겠지만 팬터지소설의 문학적 미래는 없다.
★작가 이영도씨, 평론가 하응백씨 비판에 反論★
‘드래곤라자’가 무협지와 다를 바 없다는 주장은 무협도 팬터지도 모르는 얘기다. 무협은 개인과 세계의 대립을 주된 소재로 취한다. 그래서 개인에게 세계에 대항하는 힘을 부여한다. 이 점에서 볼 때 무협은 코난과 슈퍼맨으로 이어지는 미국 중심의 영웅팬터지와 유사하다. 그러나 ‘드래곤라자’를 포함해 최근 한국에서 발표된 팬터지들은 영웅팬터지와 다른 모습을 띠고 있다.
한국팬터지가 컴퓨터 롤플레잉게임(RPG)의 자식이라는 주장도 수용할 수 없다. RPG의 대부분은 영웅팬터지 구조다. 하씨 주장대로 최근의 한국 팬터지가 게임을 모방한 것이라면 한국에선 하이팬터지 대신 영웅팬터지가 주류를 이뤘어야 옳지 않은가. 결국 이러한 억측은 하씨의 팬터지에 대한 근본적인 이해부족에서 비롯됐다. 그는 팬터지의 원형이 30년대 발표된 영국작가 톨킨의 ‘반지전쟁’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대하소설적 구조때문에 하이(high)팬터지로 불리는 톨킨 작품 이전에 이미 20년대 미국에는 작가 러브크래프트로 대표되는 공포팬터지, 검과 마법으로 혼란을 정복하는 영웅을 주인공으로 하는 영웅팬터지(heroic fantasy) 등이 존재했다. 한국에서 하이팬터지가 선호된 것은 한국 특유의 정서때문이다. 역사가 일천한 미국에서는 자신들의 영웅과 신화를 만들려는 욕구 때문에 영웅 팬터지가 우세했다.
그러나 오랜 역사와 풍부한 신화 전설을 가진 한국의 경우 팬터지작가들은 영웅 대신 그 내부에서 등장인물들이 선을 구현할 수 있는 ‘왕국’을 그리는데 주력해왔다.
[흐름] 날개돋친 팬터지소설
(99.7.16, 한겨레)
팬터지 소설들이 여름 출판 시장을 후끈하게 달구고 있다. 방학에 맞춰 일제히 쏟아져 나온 팬터지 소설들의 각축은 `책들의 전쟁'이라 불러도 좋을 만큼 격렬하다.
출판사 황금가지가 펴낸 이영도씨의 <퓨처 워커>(전 7권 예정)는 지난주 초판이 나온 지 이틀 만에 1·2·3권 1만5천질이 동이 났다. 출판사 자음과모음이 오랜 시간 뜸들여 내놓은 홍정훈씨의 <비상하는 매>(전 11권 예정)도 <퓨처 워커>와 함께 나온 뒤 1·2권 1만질이 3일 만에 다 팔렸다.
한국적 팬터지 소설의 원조로 불리는 이우혁씨의 <퇴마록> 시리즈 `말세편'(들녘 펴냄, 전 3권 예정) 1권은 판매 속도가 앞의 두 책보다 더 빠르다. 지난주 동시에 나온 이 소설은 초판 4만부가 하루 만에 나간 데 이어 지금까지 10만부가 넘게 팔렸다. 출판사 솔의 <봉신연의>(안능무 편역, 이정환 옮김, 전 5권 예정)는 이 삼두마차를 뒤에서 쫓는 추격자다. 역사팬터지라고 이름 붙은 이 중국 소설은 사전홍보 없이, 1·2권 5천질이 1주일여 만에 독자
의 손에 들어갔다.
열풍과도 같은 팬터지 소설 붐은 불황의 출판시장에서 비슷한 예를 찾아보기 힘들다. 지난주 나온 공지영씨의 소설집 <존재는 눈물을 흘린다>가 지금까지 4만여부 팔린 것, 그리고 지난 2월에 나온 신경숙씨의 <기차는 7시에 떠나네>가 지금까지 20만부 가량 팔린 것이 비교될 만하지만, 이들의 인기도 팬터지 붐에는 미치지 못한다.
팬터지 소설의 이런 열풍은 어디서 불어오는 것일까. 우선은, 최고의 지명도를 자랑하는 세 작가의 작품이 동시출간돼 경쟁을 벌이고 있다는 점에서 이유를 찾을 수 있다. <퓨처 워커>는 지난해 <드래곤 라자>로 선풍을 일으킨 이영도씨의 새 작품인 데다, 컴퓨터 통신에 연재되는 동안 180만회의 조회수를 기록했다. 홍정훈씨의 <비상하는 매>는 통신에 연재된 4년 동안 조회수 370만회를 넘긴 통신상의 최고 인기작이었다. <퇴마록>의 인기는 두 말이
필요치 않다. `말세편'에 앞서 나온 <퇴마록> 12권은 지금까지 4백만부가 훨씬 넘게 팔린 초대형 베스트셀러다. 자음과모음의 강병철 사장은 “지난해와 비교해볼 때 판매속도가 2배 정도 빨라졌다”면서 “세 작품의 경쟁이 한몫을 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팬터지 소설의 이런 성장에 비하면 그 역사는 극히 짧은 편이다. 팬터지 소설이라는 말이 알려진 것은 지난해 7월 황금가지가 <드래곤 라자>를 내놓을 때 이 소설을 팬터지 문학으로 홍보하면서부터다. 뒤이어 자음과모음이 <용의 신전>을 출간해 경쟁구도를 형성하면서 팬터지소설은 마니아층을 넘어 일반인에게까지 널리 알려지게 됐다. 서양의 팬터지 소설 양식과 다소 다른 <퇴마록>의 출간(94년)을 기점으로 쳐도 팬터지 소설의 발흥은 6년이 채 되지 않는다.
팬터지 소설의 최대 공급처는 컴퓨터통신 공간이다. 지난 92년 하이텔에서 팬터지동호회가 결성된 뒤로 아마추어작가들이 우후죽순으로 태어났고, 그들 가운데서 유명 작가들이 군계일학처럼 튀어나왔다. 현재 통신공간상에서 쉬지 않고 작품을 연재하는 작가는 50~70명 정도에 이르고, 작품을 써 올리는 아마추어들을 모두 합하면 1천명이 넘을 것으로 추정된다.
지난해 이후 팬터지 소설의 매출액 규모는 어림잡아 100억원 남짓하다. 국내외 작품을 모두 합쳐봐야 20종이 채 되지 않는 상황에서 권당으로 따지면 일반 도서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큰 편이다. 강병철 사장은 “팬터지소설은 종류에 상관없이 낱권당 최소 2만권은 팔린다”고 귀띔했다.
그러나 우리나라 팬터지 소설은 주요장르로 굳어진 미국이나 일본에 비하면 아직 초보 수준이다. 발전 가능성도 무궁무진하다. 이런 추정의 근거는 컴퓨터 통신·게임을 즐기는 사이버세대의 확산에서 찾을 수 있다. 팬터지소설을 읽는 독자가 대부분 사이버세대에 속하는 10대 중반에서 20대 초반에 몰려 있고, 컴퓨터 문화가 상대적으로 발달되지 않은 비서울권에서는 팬터지소설에 대한 반응이 잠잠하기 때문이다. 잠재 시장이 넓게 퍼져 있다는 얘기 다. 게다가 팬터지 소설 작가들이 극소수를 빼고는 20대 초·중반에 몰려 있어, 이들의 성장 잠재력도 팬터지 소설의 미래에 중요한 변수로 작용할 수밖에 없다. 황금가지의 장은수 편집장은 팬터지 소설 시장의 현황을 “강보에 싸인 아기”에 빗대면서 “순식간에 어른으로 성장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팬터지 소설의 또다른 성장 가능성은 영화·만화·애니메이션·게임 같은 인접 산업과의 연계에서 찾을 수 있다. 일본에서는 이미 보편화한 현상이다. 우리나라에서도 그 싹이 활발하게 자라고 있다. <퇴마록>이 지난해 영화화한 데 이어 <드래곤 라자>가 내년 방영을 목표로 텔레비전용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되고 있으며, 이경영씨의 <가즈 나이트>는 출판만화로 제작중이다. <용의 신전>의 경우, 10여개 업체에서 애니메이션 제작 제의가 들어온 상태
다. 순문학의 외곽에서 서자 취급 받던 팬터지 소설이 바야흐로 출판시장의 한 축으로 비상하고 있는 참이다. 고명섭 기자
[문화쟁점-팬터지소설]문학인가 위험한 오락물인가
(99년 08월 16일, 세계)
이른바 본격 문학작품들이 갈수록 독자들에게서 외면받고 있는 가운데 팬터지(환상)소설들이 그 자리를 급격하게 채워가고 있다. 서점가에는 이미 오래전부터 팬터지소설 코너가 따로 마련돼 있고 순문학작품들의 판매량을 월등히 상회하는 현실이다. 컴퓨터와 영상세대인 20대 초반이 이 소설의 주 독자층이다.
국내에 팬터지 붐을 일으킨 책은 하이텔에 연재해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던 이영도씨의 「드래곤라자」(황금가지)를 필두로 김예리씨의 「용의 신전」(자음과 모음). 이후 홍정훈의 「비상하는 매」를 비롯해 이영도의 「퓨처 워커」 등이 속속 출간돼 출판가를 뜨겁게 달구고 있다. 이들 팬터지소설에는 인간의 능력을 훨씬 능가하는 드래곤 족이 나오는가 하면 돼지처럼 생긴 괴물 오크 족이 있고 귀가 뾰족한 요정 엘프 족과 난쟁이 족, 마법사 등이 출현해 종횡무진 사건을 만들어나간다. 대부분 검과 마법이 다스리는 서양 중세풍의 분위기를 깔고 있고 줄거리 또한 모험이나 역사, 전쟁을 그리는 경우가 많다.
그동안 문단에서는 이러한 팬터지소설들을 의도적으로 무시해온 편이다. 이런 류의 작품들은 굳이 비평의 대상으로조차 삼지 않겠다는 태도였다. 그러나 놀라운 속도의 시장 장악력을 보이는 팬터지소설에 대해 방관만 하고 있을 수 없다는 분위기가 문단에도 팽배해지고 있다. 오는 25일에는 이화여대에서 평단의 비평가들이 대거 참여하는 심포지엄 「한국환타지문학의 오늘과 미래」도 개최된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는 팬터지소설이 우리 문학의 새 로운 출구로 활용될 수 있다는 긍정적인 입장과 순문학의 발밑을 파는 위험한 오락물일 뿐이라는 극단의 입장이 공존하고 있다. 상반되는 두 견해를 들어본다. <曺龍鎬기자>
[문화쟁점-반대]황당한 환상요소 가미한 무협지 불과
(99.8.16, 세계)
소설의 가장 중요한 두 요소는 현실과 환상이다. 예를 들어 「홍길동전」에서의 현실은 적서차별로 대표되는 봉건사회의 신분제도와 조선 관료사회의 부패성이다. 작가는 이러한 현실에서 벗어나기 위해 새로운 유토피아- 「율도국」이란 환상을 창조한다. 이 환상은 현실에 대한 비판적 기능을 지니면서 보다 나은 삶을 향한 인간의 희망을 표현하는 것이다. 이처럼 현실과 환상은 소설에서 상호 보완적 작용을 하는 것이다.
시대에 따라 혹은 작가의 취향에 따라 현실이 비중을 더 차지할 때도 있고 환상쪽에 무게가 주어지는 경우도 있다. 한국 현대소설의 주류는 리얼리즘이었다. 그것은 일제 강점, 6.25, 분단, 파행적 정치상황 등에 직면하여 소설이 사회적 비판기능을 수행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리얼리즘 소설이라 해도 환상적 요소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것이 꿈 희망 전망이라는 다른 말로 불려졌을 뿐이다.
지난해부터 팬터지(환상)소설이 유행의 물결을 타고 있다. 「드래곤 라자」를 필두로 「용의 신전」 「마왕의 육아 일기」 등이 그것이다. 이 소설들은 대개 컴퓨터통신 공간을 통해 등장했고 조회수가 많아지자 출판이 되었고 그 중 일부는 베스트셀러의 반열에 오르기도 했다. 여기에서 오해가 발생했다. 팬터지소설과 위에서 언급한 환상소설, 혹은 문학의 환상성을 혼동하는 경우가 왕왕 있는 것이다. 현재 유행하고 있는 팬터지소설은 무협지를 문학의 반열에 올리지 않듯이 문학이 아니라 오락이며 문화상품이다.
최근의 팬터지소설은 컴퓨터의 RPG(Roll Playing Game.역할 놀이게임)에 자극받아 탄생한 소설이다. 때문에 소설의 내용적 특성을 분석해 보면 무협지적 구성, 지구상의 어디에도 없는 철저한 가상 공간, 가상의 시대, 세계 각국 신화의 엉터리 차용, 비속어를 포함한 철저한 구어체 사용, 마법과 같은 황당한 요소에 의한 줄거리 전개 등이 단번에 드러난다. 현재 유행하는 팬터지소설은 통신망을 토대로 성장하여 일부 출판사의 상업주의적 전략으로 그 기반을 공고히 하고 나아가 컴퓨터 게임, 애니메이션, 팬시산업으로 이어질, 문학이라기보다는 활자로 된 신종 문화상품이다. 내용적으로도 현금의 팬터지소설은 황당무계한 환상적 요소를 가미한 변형된 신종 무협지일 뿐이다.
문제는 이러한 신종 무협지를 문학의 이름으로 상품화하려는 일부 출판사의 상업적 전략이다. 팬터지소설이 마치 새로운 환상문학의 탄생인 것처럼 부풀려댄다든지 미국과 일본에는 어떤 종류의 팬터지소설이 얼마만큼 팔렸다든지 하면서 앞으로 한국소설의 출구가 바로 팬터지소설이라고 주장하는 것을 보면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다. 문학의 이름으로 문학을 훼손하는 행태는 약간의 금전은 얻을지 몰라도 결국 문학의 이름으로 단죄된다. 문학적 입장에서 본다면 현금의 팬터지소설은 재능있는 젊은 예비작가를 迷惑(미혹)에 빠뜨리며 문학의 고유한 환상성을 훼손시키는 활자로 된 公害(공해)에 불과하다. 문학은 더 깊은 곳에, 더 높은 곳에, 더 넓은 곳에 있다. <하응백 문학평론가>
[문화쟁점-찬성]현실비춰보는 거울기능 충분히 갖춰
( 99년 08월 16일, 세계)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환상문학을 옹호한다. 그러나 내가 옹호하는 것은 환상문학이라는 장르이지 현재 국내에서 산출되고 있는 한국식 환상문학 그 자체는 아니다. 최근 등장해 인기를 얻고 있는 국내의 환상소설 중에는 문학적 가치가 충분한 것도 있겠지만 그렇지 못한 것들도 많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환상문학의 문학성은 과연 무엇으로 가늠할 수 있을 것인가. 환상문학의 궁극적인 목적은 현실비판이다. 즉 비록 환상세계를 다루고는 있지만 환상문학은 언제나 현실세계로 귀환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마치 SF나 역사소설의 궁극적인 목적이 우회적인 현실비판이 듯이 환상문학의 「환상」역시 현실을 비춰보는 거울의 기능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만일 환상문학이 컴퓨터 게임처럼 단순히 오락만을 추구하거나 환상 그 자체만을 다루는데 서 끝난다면 거기에서 가치있는 문학적 의미를 발견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래서 환상문학에서 환상은 「또 다른 리얼리티」라고 불린다. 즉 현실과 환상은 상반적이거나 배타적이 아니라 마치 동전의 양면처럼 상호 보충적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왜 환상문학의 대가인 보르헤스가 「이 세상에 현실만큼 환상적인 것은 없다」라고 말했나 하는 이유이다. 현실과 환상의 경계가 무너진 것은 보르헤스나 나보코브를 비롯한 포스트모던 작가들의 새로운 현실인식 때문이었다. 그들은 환상을 억압하고 이성에만 특권을 부여했던 모더니즘적 사고방식에 반발해 비이성적 환상과 이성적 현실의 조화를 주장했으며, 현실세계만을 다루던 전통소설이 벽에 부딪쳤을 때 환상세계의 새로운 가능성에 주목했다. 그리고 그 결과는 환상문학의 부상이었다.
환상문학은 오랫동안 지배문화에 의해 위험하고 저속한 것으로 분류되어 주변으로 밀려났으며, 어둠과 광기의 문학으로 비난받아 왔다. 그러나 환상문학의 원조들인 루이스 캐롤이나 CS 루이스나 JRR 톨킨은 사실 모두 옥스포드대 교수들이었다. 또한 광기와 비이성과 야만을 재조명하고 포용하는 미셸 푸코식의 시각이 확산되면서 환상문학은 점차 문화와 문학의 중심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최근에는 문학이란 근본적으로 환상적이며, 환상문학이야말로 전자매체와 영상매체의 막강한 위력 앞에 그 가능성이 고갈된 전통적인 문학양식에 새로운 상상력을 제공해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현실을 바라보는 보다 더 포괄적이고 복합적인 시각을 환상문학이 제공해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고급문화와 본격문학을 중시하는 모더니즘적 엘리트주의에 젖어 환상문학 자체를 부정하거나 불신해서는 안될 것이다.
최근 환상문학의 부상은 바로 그러한 맥락에서 주목할 만한 문화적 현상이다. 다만 환상문학의 이름을 빌린 저속한 통속문학이 수준 높은 환상소설을 밀어내고 그 자리를 찬탈해서는 안될 것이다.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고 사이비가 진짜를 밀어내는 것이 엄연한 오늘날의 현실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것을 경계하고 제동을 거는 작업은 물론 비평가들의 몫이다. 오늘날 비평가들의 책무가 그 어느 때보다도 더 중요한 것도 사실은 바로 그러한 이유 때문이다. <김성곤 문학평론가.서울대 영문과 교수>
[MX] 우린 환상세계로 간다‘판타지소설 붐’
(99.8.23, 경향)
용이 인간과 교류하고 때로 적대시하는가 하면 또다른 괴물을 물리치기 위해 인간과 동맹을 맺는다. 난쟁이와 요정이 인간소년과 친구가 되고, 인간과 용의 혼혈아가 공주와 결혼한다. 마법은 일상적으로 벌어진다. 쥐가 갑자기 요정으로 변한다. 시간과 공간, 삶과 죽음의 경계도 쉽게 넘나든다.
판타지(Fantasy·환상, 초현실) 소설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장면들. 작품의 무대는 북유럽 어디쯤이라는 추측만 가능하다. 기사와 마법사가 주요 등장인물. 그러나 사람인지조차 불분명한 그냥 「생물체」도 자주 등장한다. 요즘 신세대들은 이런 비현실적인 상황과 그 속에서 벌어지는 모험에 열광한다.
판타지소설은 90년대 초반 PC통신 연재를 통해 10~20대 네티즌을 중심으로 광범위한 마니아층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지난해 7월 「드래곤라자」(이영도)의 출판을 시작 10~40대로까지 독자층을 넓혀가고 있다. 서점가에까지 판타지 돌풍을 일으킨 「드래곤라자」는 최
근까지 42만부가 팔렸다. 그후「용의 신전」(김예리)과 「마왕의 육아일기」(방지나)가 각각 35만부, 10만부를 돌파했다. 넓은 의미에서 판타지소설로 묶을 수 있는 「퇴마록」(이우혁)은 1백30만부나 팔려나갔다. 또 「가즈나이트」(이경영) 25만권, 「카르세아린」(「귀환병이야기」(이수영) 8만부 등 판타지소설이 베스트셀러 상위권을 차지하고 있다.
판타지 소설의 작가는 마니아들에게 연예인 못지않은 스타. 「가즈나이트」의 「가즈사랑모임」 등 30통신에서 활동하고 있다. 이들은 「버그잡기」란 이름으로 소설을 분석하고 연구하면서 작가와 통신 교류를 갖는다. 연재가 늦어지면 팬들이 후속편을 쓰기도 한다. 「비상하는 매」의 작가 홍정훈은 책이 출간되기도 전에 그의 필명(휘긴)을 딴 「휘긴사랑모임방」이 개설됐고 심지어 그를 신으로 추앙하는 「휘긴교」라는 집단까지 등장했다.
신세대들이 판타지소설에 열광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우선 판타지소설이 신세대에 익숙한 컴퓨터게임과 같은 구성, 전개방식을 가졌기 때문이다. 또 하나는 철저한 가상의 무대를 배경으로 하기 때문에 고단한 현실의 흔적을 발견할 수 없다는 점이다. 기존 문학 창작자들이 중요한 가치로 여겼던 「현실을 드러내면서 독자들로 하여금 고통을 공유토록 요구하는 글쓰기」를 판타지소설에서는 찾을 수 없다.
평론가들은 50년대 출간된 JR R 톨킨의 「반지전쟁」이 국내 판타지소설 작가들에게 영향을 미쳤다고 분석한다. 출판시장의 15%를 차지하고 있는 일본 판타지소설에서도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다. 국내 판타지소설은 「반지전쟁」에 등장하는 북유럽의 신화를 기본틀로 삼아 작가의 개성에 따라 다양한 변주를 만들어 내고 있다.
비현실적이라는 점에서 판타지소설은 흔히 무협지와 비교되기도 한다. 그러나 무협지가 전적으로 활자문화 세대를 대상으로 했다면 판타지는 기본적으로 비활자세대, 즉 사이버세대가 대상이라는 것이 가장 큰 차이점. 또 판타지소설에서는 무협지처럼 주인공이 초월적인 영웅으로 묘사되지 않는다. 선과 악, 적군과 아군의 경계가 없고 권선징악을 내세워 주인공이 복수의 칼날을 휘두르지도 않는다. 판타지소설에서는 다양한 사람이 다양한 생각으로 좌충우돌한다.
국내 판타지소설은 사이버공간에서 태어났다. 현재 소설로 출간된 판타지물은 대부분 92년 무렵부터 PC통신에 연재된 것들이다. 주독자층은 컴퓨터와 PC게임에 익숙한 사이버세대. 네티즌들 사이에서 판타지소설의 인기는 폭발적이었다. 「비상하는 매」 3백만회, 「드래곤라자」 90만회 등의 조회 수를 기록하며 선풍을 일으켰다.
그래서 판타지소설은 사이버시대의 새로운 창작민주주의란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다는 평을 듣기도 한다. 판타지 작가들은 출판사 편집자 같은 「지식권력」의 취사선택이 아닌 대중의 선택과 검증을 거쳤다. 사이버 작가들은 대부분 험난한 입시과정을 막 통과한 대학생신분으로 글쓰기를 시작했다. 현재의 인기 판타지 작가들은 대부분 대학생들. 20대 초반의 PC통신 마니아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애초부터 출판을 목표로 하지 않고 그냥 좋아서 분방하게 쓴 글들. 따라서 작가와 수용자간에 정서적 밀착감과 공감대가 형성돼 있다. 기성 문인이나 비평가들에게 조악한 문장과 표현이라고 비판을 받으면서도 이들은 사이버를 매개로 한 신세대만의 문법과 문체를 따른다.
보수적 평론가들은 판타지소설 작가를 치열한 문제의식이나 수련과정 없이 유행에 편승한 아마추어일 뿐이라고 폄하한다. 현실도피적인 집단 취미활동을 대표 집필한 게 판타지소설이라고까지 극단적인 평가를 내린다. 문학평론가 하응백 교수(충남대)는 『문학이라기보다는 활자로 된 신종 문화산업이며 서양 판타지소설의 격세유전된 사생아이면서 컴퓨터게임의 직접적인 자식』이라며 『판타지소설의 문학적 미래는 없다』고 단언했다. 판타지소설은 단지 유행에 불과한 「반사이버, 반활자」인 변종으로 곧 게임 등 순수 사이버 혈통에 밀려날 것으로 전망하는 학자도 있다.
그러나 판타지소설 옹호론자들은 『나름의 방식으로 현실을 드러내고 문제의식을 제기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판타지 작가인 이영도씨는 『현실을 보기 위해서 환상을 만들어내는 소설』이라고 항변했다. 이런 논란과 관계없이 판타지소설은 이미 하나의 장르로서 뚜
렷한 독자층을 형성하고 있다. 여기에는 「새로운 상품」에 목말라 있는 「자본」의 논리도 작용한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판타지소설은 사이버라는 탄생배경에 맞게 단일 문화상품으로서의 소설에 그치지 않고 애니메이션-PC통신-만화-게임으로 이어지는 복
능성을 인정받고 있기 때문이다.
사이버세대의 새로운 의식과 변화하는 사회구조가 만들어낸 판타지소설. 대중소설이라는 의미를 넘어 위한 문화현상으로 자리잡은 모험서사물. 다만 전통적 문학기능인 현실적 가치와 고도의 상징성을 확보할 때 판타지소설의 비현실과 환상적 리얼리티가 수준높은 문학으로 새로운 자리를 차지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판타지소설의 작가이자 독자
인 신세대의 몫이다. /안치용기자ahna@kyunghyang.com/
[2001 책의 흐름] 가능성 보인 팬터지소설
(2001/2/6, 중앙)
2001년 새해 국내 지식사회의 논의는 어떻게 방향을 틀어갈 것인가. '행복한 책읽기' 팀은 예견되는 핵심 어젠더로 판단되는 5개의 영역과 이 논의의 중심축이 될 단행본 5종을 각각 골랐다. 5개 영역은 ▶ '젊은 문학 팬터지' 와 인문학적 성찰▶계속되는 경제위기 어떻게 봐야 하나▶미국의 헤게모니와 한국사회의 대응▶사회 시스템과 마인드의 혁명▶즐기는 문화의 시대 도래 속의 시민 등이다.
이 5종은 최근 1년새 나온 책을 중심으로 선정했으며, 이를 통해 '한
국인 올 한 해 무엇을 생각할 것인가' 를 전망해 봤다.
"공상의 자유는 감옥에 가둔다고 해서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 '드래곤 라자' '퓨처 워커' 로 한국 팬터지 문학의 가능성을 보여줬던 작가 이영도씨의 신작 '폴라리스 랩소디' 는 그 안에 나오는 이 말을 한 편의 호흡이 긴 스토리로 바꿔보이고 있다. 물론 주인공 오스발이 하는 이 대사는 현실의 문제를 일깨우기도 한다. "자유는 환상입니다. 세상에 자유로운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
팬터지 소설의 서사구조는 현실과 환상을 넘나들도록 되어 있다. 그래야만 문학이 요구하는 주제의식이라는 것이 살아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영도씨의 작품은 이런 점에서 줄타기에 어느 정도 성공하고 있다고 판단된다. 기존의 정통문학 독자들에겐 이 작품의 특이한 소재, '퓨전언어' 의 남용, '무국적성' 을 적당히 가장하는 점, 섬세한 상황설정의 부족 등이 아직 불만스러울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철학을 전공한 내가 정색을 하고 이 팬터지 서사에 주목하는 이유는 따로 있다. '영상문화의 체험' 이 녹아든 글쓰기와, 가볍지만은 않은 주제를 줄곧 동반하는 역설, 풍자, 재담, 허를 찌르는 대사 등은 젊은 세대들에게 환영받을 것이라는 점 때문이다.
또 있다. 철학을 포함한 인문학이 의무감을 가지고 읽어야 할 텍스트는 요즘 같은 디지털 시대에는 팬터지 문학도 당연히 포함해야 한다. 어쨌거나 오스발의 대사를 역으로 패러디하면, "환상은 자유이다. 하지만 이 세상에 환상 속에 사는 사람은 없다. 자유로운 환상을 즐길 뿐이다. " 그래서 환상문학은 그 존재 의미를 획득한다.
팬터지의 개념은 리얼리티의 개념 만큼이나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도 '영혼론' 에서(감마편 제3장) 팬터지에 대해 자세히 설명 그는 환상을 감각.주관적 견해.객관적 사고 등과 비교하면서, 그리스어 판타지아(phantasia)가 빛을 뜻하는 파오스(phaos)에서 유래함을 주목한다. 즉 시각은 '감각 중의 감각' 이며 판타지아는 '보는 것' 과 연관이 있다는 것이다. 이는 환상과 현실의 교류를 의미한다. 또한 에피쿠로스는 팬터지를 '시뮬라크르에 의한 표상' 으로 인식했다. 문제는 어떻게 팬터지가 문학이 되는지일 것이다.
톨킨은 1938~39년에 걸쳐 쓴 '나무와 나뭇잎' 에서 팬터지 문학이 무엇인지를 이론과 실례를 들어 보여주고 있다. 이 책은 '요정이야기에 대하여' 라는 에세이와 '니글이 그린 나뭇잎' 이란 스토리로 구성돼 있다. 전자는 긴 주석들이 붙은 한편의 논문이고, 후자는 그 논문에서 주장한 바를 실제 작품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여기서 톨킨은 "팬터지는 인간의 자연스러운 행위" 라고 단언한다. 따라서 그것이 이상하고 비현실적이라는 비판을 받아도, 모든 사람들에게 "팬터지는 하나의 인권" 이라고 선언한다. 다만 그는 팬터지가 팬터지 문학이 되기는 무척 어렵다는 것을 강조한다. 팬터지 문학은 쉽게 보이는 현실이 아니라, '현실의 내적 구성' 을 표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완성적인 작품은 만들어내기 어렵지만, 일단 '작품' 으로 탄생하면 '서사 예술' 의 정수가 된다. ' 톨킨이 주장하는 팬터지 문학의 성패는 놀랍게도(어쩌면 너무 당연하게도) 작가가 얼마나 합리적인 태도로 작품 구성을 하는지에 달려 있다. 밝은 태양 밑에서 일어나는 가시적 사건들에 대한 철저한 인정 위에서 현실의 내적 구성은 표출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마치 '앨리스' 의 작가 루이스 캐롤이 철저한 논리적 구성 위에서 난센스의 유희를 펼치는 데 성공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톨킨 자신이 '나무와 나뭇잎' 의 내용을 구성한 방식도 이런 맥락에 닿아 있다.
팬터지에 대한 심도 있는 이론과 그에 바탕한 실제 작품은 나무와 나뭇잎의 관계와 같기 때문이다. 한국에서도 이제 팬터지 소설은 단순한 문화계의 화제가 아니라, 주목해야 할 '현상' 이 되었다. 이는 무엇보다도 팬터지 소설에 연관된 적지 않은 인구의 숫자 때문이다
. 더구나 그것이 온라인과 오프라인에 걸쳐 있다는 사실은 그 문화적 중량을 가늠하게 한다. 문학평론과 함께 폭넓은 인문학적 지원이 요구되는 것은 그 때문이다.
그러나 현재 우리나라의 상황은 '나뭇잎' 만 있고 '나무' 는 없는 꼴이다. 즉 팬터지 소설들은 있는데, 팬터지에 대한 이론도 작품에 대한 비평도 거의 부재한 상태다. 작가라는 관점에서도 서구에서는 톨킨과 C S 루이스의 경우처럼 학문적 성과를 축적한 역량 있는 작가들이 팬터지 문학에 참여했지만, 우리는 지금 그렇지 못하다. 팬터지 문학의 창작에 관록있는 작가의 참여는 문화적 토양을 위한 훌륭한 거름이 될 것이다. 당연한 말같지만 '환상(fantasy)문학' 을 위해서는 '환상적(fantastic) 작가' 가 필요하다. 끝으로 2001년 벽두에 팬터지 소설을 주목하는 좀 색다르고 '환상적' 인 이유는, 앞으로 영글어갈 환상문학이 '초지구성(Meta-globality)' 과 연관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환상적 관점도 현실과 무관한 것이 아니다. 문학이 인류사적 변동과 맞물려 있다면, 21세기 우주시대에 고대나 중세적 상상 속에 있던 '드래곤' 의 의미는 결국 무엇인가□ 이 말에 대한 해석은 독자들의 환상적 능력에 남겨두고자 한다.
김용석 <철학자.전 그레고리안 대학 교수>
<5개 영역별 신간 5종>
▶디지털 인문학: 이영도 ‘폴라리스 랩소디’
▶미국 헤게모니: 브레진스키 ‘거대한 체스판’
▶경제 위기: 강경식 ‘換亂 일기’
▶시스템 혁명: 김성주 ‘나는 한국의 아름다운 왕따가 되고 싶다’
▶예술 대중화: 노성두 ‘천국을 훔친 화가들’
1997년 설문조사에서 영국인들은 ‘반지의 제왕’의 작가이며 현대 환상문학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J.R.R 톨킨(1882∼1973)을 20세기 최고의 작가로 뽑았다. 그러나 비평계의 시선은 싸늘했다. 비평가들은 독자들의 수준에 의문을 품으면서, 상업적으로 성공한 작품과 질적으로 뛰어난 문학 작품은 전혀 다른 문제라고 주장했던 것이다. 톨킨에 대한 이런 비판은 비단 오늘날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현대 판타지 문학의 최고로 손꼽히는 ‘반지의 제왕’은 지난 50년 동안 학계에서는 계속 외면당했지만, 아이러니컬하게도 독자들에게는 꾸준한 사랑을 받고 있는 것이다.
서사시와 역사의 만남
‘반지의 제왕’(1954∼1955)을 쓴 톨킨은 작가일 뿐만 아니라 학자이기도 했다. 그는 옥스퍼드 대학에서 앵글로색슨어와 중세문학을 가르쳤다. 그의 연구서로는 ‘거윈 경과 녹색의 기사’와 ‘베오울프’가 유명하다. 그리고 소설로는 동화 ‘호빗의 모험’이 있으며, 그의 명성을 세계적으로 알린 ‘반지의 제왕’은 바로 ‘호빗의 모험’의 후속 편으로 쓰여지기 시작한 것이다.
‘반지전쟁’이라는 이름으로 출간되었다가 최근 재번역 되어 다시 선보인‘반지의 제왕’은 중간계라는 상상의 세계에서 일어난 방대한 사건을 다룬다. 이 작품은 모두 6부로 구성된 한 편의 소설이다. ‘반지의 동반자’, ‘두개의 탑’, ‘왕의 귀환’으로 나뉘어 출판되는 바람에 흔히 3부작으로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한 편의 소설인 것이다.
‘호빗의 모험’의 주인공 빌보는 모험 중에 우연히 반지를 손에 넣는다. 간달프는 이 반지가 암흑의 군주 사우론의 힘을 담고 있으며, 사우론이 그 반지에 숨겨진 힘을 이용해 모든 중간계를 노예화시키려고 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런데 암흑의 군주에게 반지를 빼앗기지 않으려면 그 반지가 만들어진 ‘운명의 산’의 용암에 그것을 던져서 파괴하는 길 밖에 없다. 하지만 ‘운명의 산’은 사우론 왕국의 심장부에 있다. 반지를 가지고 있던 빌보의 사촌인 프로도를 비롯해서 요정족, 난쟁이족, 인간들, 마법사들, 호빗들로 구성된 일곱 명이 반지를 파괴하는 임무를 띠고 여행을 떠난다. 이 작품은 善의 상징인 이들과 惡의 화신인 사우론과의 전쟁 이야기가 교차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톨킨은 작가로서의 자신을 그의 가장 유명한 단편 소설의 하나인 ‘니글의 잎사귀’(1945)의 주인공 니글과 비교한다. 이 작품에서 니글은 하나의 잎사귀를 그리기 시작하지만, 나무와 숲과 경치를 모두 그릴 때까지 그림을 멈추지 못한다. 이와 유사하게 ‘반지의 제왕’에서 톨킨은 상상의 언어를 만들기 시작한다. 그리고 나서 그 언어를 말하는 종족을 상상하고, 북구와 게르만족의 신화와 핀란드의 서사시 ‘칼레발라’에서 영감을 받아 서사시와 역사를 설계한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반지의 제왕’은 그가 구축하고 있던 신화의 결과물일 뿐이며, 그는 자신을 작가라기보다는 연대사가로 생각했고, 중간계의 발견자로 여겼던 것이다.
‘반지의 제왕’은 20세기 경향비평의 대표적 희생양이 된 작품이다. 페미니스트들은 이 작품을 여성 혐오주의적 소설로 규정했고,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은 현대적 세계관이 없다고 비판했다. 또한 기독교인들은 무신론적이라고 평했으며, 참여작가들은 도피문학으로 선고하면서 정치성의 결핍을 지적하기도 했다. 분명히 이 작품은 선과 악의 구조로 이루어져 있으며, 개인의 행동이 선이라는 대의를 위해 희생되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그리고 중세 이후 사라진 영웅적 행동을 찬양한다. 또한 선이 반드시 승리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런 진부한 구조를 가지고 있는 이 작품을 독자들이 그토록 사랑하고 열광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그 매력은 향수에 있는 것 같다. 미니멀리즘 시대에 톨킨은 거대한 서사물을, 윤리가 사라진 시기에 영원한 윤리를 강조한다. 또한 영원한 청춘을 꿈꾸는 시대에 그는 인생의 유한성은 벌이 아니라 특권이라고 주장하고, 권력이 자기 자신을 정당화하는 플루토의 힘으로 여겨지는 시대에, 그것을 믿지 않도록 가르친다.
진부한 구조에 열광하는 이유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바로 이런 진부성에서 우리는 21세기 문학의 미래를 점칠 수 있다. 그는 신화를 창조함으로써 좌절과 환멸의 시대를 살고 있는 오늘날의 독자들에게 희망을 주면서 그들과 하나가 되었다. 톨킨의 문학은 현실에서 벗어난 환상의 세계라는 한계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보르헤스의 상상의 세계인 ‘틀뢴’이 실제 세상에 침투하는 것처럼, 앞으로의 문학이 현실과 접목되어 톨킨의 한계를 극복할 경우에는 무한한 가능성이 있음을 보여준다.
90년대 후반 들어 부쩍 회자되기 시작한 판타지 문학은 하나 같이 톨킨의 작품을 모델로 삼고 있다고 밝히고 있다. 하지만 톨킨의 작품은 항상 이해된 것은 아니었고, 제대로 모방된 것도 아니었다. 그의 작품은 환상이라는 매체를 통해 언급되지도 않던 문화, 침묵하고 있던 문화, 가려졌던 문화, 억압되었던 문화, 표현되지 못했던 문화를 다룰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준다. 이런 가능성을 제대로 포착하고 형상화할 때에만, 우리나라의 판타지 문학은 ‘이차적 현실’을 다룬 ‘이차문학’으로 머물지 않고, 제대로 된 문학으로 평가받을 수 있을 것이다.
천리안에서 가져왔습니다.
이글은 우리가 그토록 논하던 것들의 핵심은 아닐까 생각합니다.
단순히 한사람의 의견이라고 하기에는 문제의 핵심을 찌르고 있습니다.
팬터지 문학에대한 전반적인이해와 질문 그리고 그 문제의 답 초기 팬터지의 문제점은 지금도 그대로 내려오고 있습니다.
어쩌면 저글은 미래을 예측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현재상황과 저글에서 예측한 상황은 그리 크게 다를바 없거든요
한가지 질문입니다. 토론은 분명 답을 찾기위한 과정 그렇다면
만약 최선의 답이 이미 제시되어있는 상황이라면 토론은 무슨의미가 있는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