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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 조지 워싱턴(George Washington, 1732년~1799년)
전쟁 속에서도 으뜸, 평화 속에서도 으뜸, 그의 국민들 마음속에서도 으뜸이었던 사람
헨리 리 3세(Henry Lee III), 조지 워싱턴의 장례식에서의 추도 연설
살피건대, 화성돈(華盛頓: 워싱턴)은 이인(異人: 비범한 사람)이로다. 무기를 들고 일어난 것은 오광, 진승과도 같고, 천하를 분할해 웅거함은 조조, 유비와도 같다. 그러나 세 자 검을 들고 일어나 만 리가 되는 영토를 얻었건만, 참람되이 왕을 자칭하지 않고, 자리를 자손에게 물려주지도 않았으되, 외려 추거(推擧)의 법을 세웠으니 모두 천하위공(天下爲公: 천하를 사유물이 아닌 공적인 것으로 여김)에 따른 것이었다. 나라를 다스림에 있어 선량한 풍속을 숭상하고 무력을 높이지 않았으니, 이 또한 다른 나라들을 둘러보아도 같지 않다.
내 그(워싱턴)의 초상화를 본 적이 있었는데, 기골과 용모가 굳건하고 빼어났으니, 오호라, 인걸이라 아니 부를 수 있겠는가! 미리견(米利堅)은 합중국의 도로써 나라를 세우니, 만 리나 되는 영토를 아우르지만 왕후(王侯)의 칭호를 세우지 않고 세습의 법규도 따르지 않는다. 나라의 일을 공론에 따라 처리하여 고금에 없던 형국을 만들어내었으니 어찌 기이하지 않은가! 고금의 태서(泰西) 인물을 통틀어, 어찌 화성돈이 으뜸간다 하지 않을 수 있으리오!
그렇게 마무리짓고 끝낸다면, 그가 이전에 무엇을 해왔는지와, 이 사이의 관계를 볼때, 그를 살아있는 그 누구보다도 특별한 인간으로 만들 것이며, 그가 우리 세대에서 가장 위대한 인간으로 여겨지게 할 것이다.
조지 3세, 영국 국왕
조지 워싱턴은 미국의 초대 대통령으로, 8년의 임기를 원만하게 보냈고 220년이 훨씬 넘은 현재까지도 미국 정치에서 지켜지고 있는 평화로운 정권교체(Peaceful Transition)가 무엇인지 몸소 보여주며 이를 미국의 정치적 전통으로 만들었다는 점에서 지금도 많은 미국인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미국이 건국 이래 독재자나 쿠데타 없이 민주주의를 지속적으로 펼 수 있었던 것은 이 사람의 공이 매우 컸다고 봐도 과언이 아닌 셈이며, 더 나아가 전 세계적으로 대통령제를 도입한 나라에는 그의 잔향이 짙게 남아있다고 볼 수 있다. 지도자에게나 국민에게나 중요한데, 지도자에게는 조지 워싱턴처럼 권력을 버리고 내려오라는 것과, 국민에게는 진정 지도자란 그렇게 권력을 버리고 국민을 위하는 사람이라는 것. 그리고 현실에서 이런 인물은 매우 드물다. 심지어 조지 워싱턴 이전에는 선출된 군주라는 개념은 있었어도 대통령이라는 개념은 없었으니, 그는 대통령이 어떤 직책인지 역사에 등장시킨 인물이다.
이 전통이라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 민주주의와 선출직 지도자 제도가 제대로 정착하지 못한 나라들의 경우 대통령 제도 자체가 처음부터 어그러진 경우가 많다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당장 한국만 봐도 사사오입 개헌이나 3.15 부정선거 등으로 미국과 달리 첫 방향성이 어그러지니 권력을 잡기 위해선 무엇이든 해도 된다는 정신이 우세해져 5.16 군사정변, 유신 헌법, 12.12 군사반란 등의 사건으로 인해 나라가 오랜 기간 계속 삐그덕거릴 수 밖에 없었다.
이렇게 권력을 깔끔하게 포기한 조지 워싱턴의 행적 때문인지, 민주주의 국가와 민주주의를 좋게 보는 사람들은 이런 조지 워싱턴을 좋게 표현한다. 반대로, 독재 국가나 민주주의에 부정적인 사람들은 조지 워싱턴이 권력을 포기한 행적을 별거 아닌 것처럼 표현하거나 아예 무책임한 것으로 표현한다.
한편, 당시 미국 남부의 웬만한 대지주들이 그랬던 것처럼 워싱턴 본인 역시 농장을 경영하면서 노예를 거느렸다. 워싱턴은 자신의 보금자리 마운트 버넌에 결혼 당시 기준 50여명의 노예를 거느리고 있었지만 사망 직전에는 이 숫자가 300여명으로 늘어났는데, 이는 자신이 운영했던 농장의 규모가 커지면서 노예 수도 점점 더 늘어난 것이다. 게다가 워싱턴은 미국 역사상 최초의 대통령으로 마운트 버넌을 찾는 이들도 많았기에 이를 수발할 인력도 필요해 워싱턴이 사망할 때까지 이들은 단지 잡일만이 아니라 대장장이나 천을 짜는 일 등 다양한 분야에 종사했다.
젊은 시절만 하더라도 노예제에 대한 워싱턴의 견해는 다른 농장주들의 견해와 크게 다를 바가 없었으나 독립 전쟁을 치른 이후 노예제에 대해 점차 비판적인 견해를 가지게 되었다. 허나 노예제 문제가 기껏 하나로 모은 미국을 분열시킬 수 있는 시한폭탄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던 워싱턴은 공식 자리에서는 노예제에 대한 언급을 피했다. 본인의 유언장에는 독립전쟁 때부터 자신을 수발한 비서 흑인을 자신의 사후에 자유인으로 풀어주도록 했으며, 자기 집에 있는 나머지 노예들은 부인 마사가 사망한 후 모두 자유인으로 풀어 주도록 하였다.
워싱턴 본인은 죽을 때까지 노예를 소유했기에, 2020년 BLM 시위가 한창일 땐 워싱턴의 동상이 페인트 테러를 당하거나 스프레이로 노예 소유주, 백악관을 불태워라 등의 메세지가 적히는 수난을 당하기도 했다. 물론 이들은 백악관 공무원들에 의해 주의를 받고 훈방 조치된 뒤, 동상은 백악관 공무원들이 다시 원래대로 복원시켰다.
미국 건국 초기 지도자들은 노예제에 비판적인 경우가 많았는데, 그럼에도 이미 존재하던 노예제에 대한 현실적 제약이 있다보니 노예 제도의 존폐를 헌법에 명시하면 노예제도에 반대하는 북부와 찬성하는 남부의 연합이 균열되어 연방이 와해될 수 있다고 생각하고 개별 주에 찬반 여부를 맡기는 일종의 방임 정책을 썼다. 워싱턴, 제퍼슨, 매디슨의 경우 이렇게 비노예주를 늘려가다보면 노예제 허용주들도 자연스레 이를 폐지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당시의 노예제 인식은 그나마 좋게 봐서 "필요악" 수준 정도였는데, 문제는 이게 시간이 지나면서 이상한 이론들이 나오더니 심지어 정당화되고 이념화되었다는 것.
정치적 번영을 이끄는 특징과 습관들 가운데, 종교와 도덕은 필수불가결의 버팀목이다.
고별사(1796) 中
미국 1달러 지폐에 그의 초상화가 그려져 있다. 이유는 가능하면 많은 이들이 그를 보게 하기 위해서. 하지만 대다수 미국인들은 크게 신경쓰지 않는다. 어찌보면 당연한 소리지만 자주 지폐를 구기고 주머니에 쑤셔넣고 다닌다. 미국 달러 발행 초기부터 조지 워싱턴이 1달러에 배정되어 있었는데, 조지 워싱턴이 1달러 도안으로 캐스팅된 건 1811년이다. 1811년 당시 1달러는 정말 어마어마하게 큰돈이었다고 하니 많이 보라고 1달러에 넣었다는 게 어느정도 납득이 가는 지점이다. 지금이야 1달러 지폐는 아무데나 쑤셔넣는 입장이지만 19세기 초반 당시의 조지 워싱턴 1달러 지폐는 고액권이었다. 미국 달러 발행 초기에는 1달러, 5달러, 10달러 세 종류의 지폐만 있었기 때문이다. 2달러, 20달러 등의 고액권 지폐는 남북전쟁때 추가되기 시작한다.
생전에 치아 상태가 매우 나빠서 틀니를 끼고 다녔다. 선천적으로 치아가 약했던데다가 호두 껍질을 이로 깨먹는 습관이 있었고, 양치질을 할 때 매우 힘을 꽉 주고서 했기 때문에 이에 상당히 무리가 갔다. 워싱턴은 하루 3번씩 양치를 꼼꼼히 했다고 하지만 담배가루를 치약으로 썼기 때문에 오히려 증상을 더 악화시켰다. 이 때문에 워싱턴은 젊은 나이부터 치아가 빠졌고, 젊어서부터 치통으로 고생을 했다. 심지어 미국의 독립전쟁이 끝났을 당시 그의 치아는 몸소 철사로 묶어서 간신히 붙들어 매달았을 정도였다. 조지 워싱턴의 절친한 친구 치과의사 존 그리우드가 조지 워싱턴의 치아 상태를 해결하기 위해 내린 해법은 이를 모두 뽑고 틀니를 만들어 주는 것이었다. 이때 조지 워싱턴은 의치를 만드는 대가로 약 15달러를 지불했다. 그리하여 초대 대통령 취임 당시까지 남아있는 치아는 왼쪽 아래턱에 있는 제2소구치 하나가 전부였다. 이렇게 되자 틀니를 할 때까지 옥수수빵과 스프 말고는 아무것도 먹지 못할 정도가 되었고, 이후 대통령에 다시 취임해달라는 제의에 모양이 안서자 자신의 집 노예의 치아와 하마뼈, 바다코끼리 엄니, 밀랍과 금으로 만든 틀니를 만들어 끼우고 다녔다. 문제는 이 틀니가 너무 커서 잘 맞지도 않을 뿐더러 금으로 스프링을 만들다보니 툭하면 입이 벌어지는 모양새여서 워싱턴은 항상 입을 꽉 다물고 업무를 수행했는데 그 모습이 마치 뾰루퉁한 모습을 연상케 했다. 워싱턴의 초상화는 많지만 전부 입술을 삐죽 내민 모양으로 남은 건 이 때문이다.
실제 워싱턴이 연설을 길게 한 기록은 찾기 드문데 그것 역시 틀니가 입에 맞질 않아 언제나 틀니가 입 밖으로 튀어나갈 것을 걱정해서 일부러 말을 짧게 했기 때문이다. 설상가상으로 이 치아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닳아 없어지는 데다가 재료의 성질상 기공이 많아서 미세한 구멍에 찌꺼기가 끼기 쉬웠다. 워싱턴은 포도주를 자주 마셨는데, 그 결과 의치가 변색되고 썩어버리는 바람에 지독한 냄새가 났으며, 워싱턴은 그 냄새가 역겨워 항상 입을 부풀린 채 다녔다. 게다가 이물질을 너무 많이 물고 있었기에 나중에는 입안 곳곳이 곪아서 턱 일부가 뭉개지기까지 할 정도가 됐다. 후일 워싱턴이 대통령에서 물러나 남은 여생을 자기 집에서 보낼 때 화가 길버트 스튜어트는 그의 마지막 모습을 초상화로 남겨두고 싶었는데 틀니를 너무 오래 껴서 볼 살이 늘어나다보니 틀니를 뺀 말년에는 볼살이 늘어져 화가가 입 속에 솜을 넣어서 그림을 그려야 할 정도가 됐다. 다만 그 틀니가 어지간히 사람을 괴롭혔는지 솜을 넣고 그린 워싱턴의 초상화는 이전과는 다르게 엄청나게 자상한 모습이다.초상화
당시 워싱턴의 틀니를 만들어준 사람은 당대 최고의 치과 의사이자 임플란트의 시조인 이삭 그린우드의 아들 존 그린우드로서 그는 워싱턴의 의치를 만들었다는 것을 광고로 손님을 끌어모아 엄청난 돈을 벌었다. 허나 정작 그 광고의 주인공인 워싱턴은 위에서 설명했듯이 틀니로 인해 엄청난 애로사항을 가지고 살았기 때문에 그린우드에게 자주 불만을 표했으며, 툭하면 그린우드가 돌팔이라고 투덜댔다.
틀니로 인해 초상화가 상당히 무뚝뚝하고 권위적으로 보이는 것과 달리, 보기와는 달리 상당히 자유분방하고 쾌활한 사람이었다. 워싱턴은 관저에서 카드놀이를 열광적으로 즐겼고, 무료하면 관저를 나서 여우사냥에 심취했으며 다과회도 자주 열어 많은 사람과 대화를 나누는 것을 좋아했다. 또한 제법 미식가라서 음식에도 까다로웠으며 앞서 말한대로 포도주에는 사족을 못 썼다. 게다가 독립전쟁 이전부터 재력가로 한 이름 날렸기에 아메리카 대륙 버지니아 식민지 사교계에선 나름 알아주는 사람이었다. 또한 역사가들이 당시 문서를 뒤져본 결과, 워싱턴은 카스웰 메시 향수와 파우더 뿌린 가발을 자주 쓰는 등 외모를 꾸미는 것을 좋아하는 멋쟁이였다. 섹드립도 종종 즐겼는지 독립전쟁 때 자신의 부관에게 "애인을 기쁘게 하려면 열심히 자신의 무기를 갈고 닦아라."라는 발언을 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일각에선 워싱턴이 흑인 노예와 불륜을 저질렀고, 한겨울 엄동설한에 자신이 사랑하던 흑인 노예를 만나러 갔다가 폐렴에 걸려 죽었다는 이야기도 떠도는데 폐렴에 걸려 치료 도중 과다출혈로 죽은 건 사실이지만 흑인 노예와의 불륜설은 증거가 없다. 다만 흑인 노예와는 아니었지만 이런저런 염문설은 많았는데, 명확히 밝혀진건 없다.
워싱턴 D.C., 워싱턴 주 등 워싱턴의 이름을 딴 지명이 많은데, 미국은 물론이고 심지어는 해외에도 존재한다.
어렸을 때부터 승마를 즐겼는데, 이 덕분인지 기골이 장대하고, 생전 마지막으로 쟀던 조지 워싱턴의 키는 188cm로 이는 어지간한 운동선수와 맞먹는 키이다. 특히나 18세기 당시엔 위생, 의학이 발달하지 않았던 시기였던걸 감안하면 엄청난 장신이다. 지역마다 차이는 있지만 당시 유럽 남성의 평균 신장이 보통 165cm 정도였다. 현재의 관점으로 봐도 상당히 큰 키인데, 영양 상태가 좋지 않던 당시 기준에선 거의 거인 수준이었을 듯. 지금도 미국의 대통령들의 평균키보다 크다. 거기에 어깨가 떡 벌어진 당당한 체격과 더불어 비율과 기럭지가 좋아서 키와 덩치가 더욱 커보인다. 현재 미국 남성의 평균키가 176cm라는 걸 생각하면 현재 기준으로 2m는 되는 셈.
천연두를 앓아서 곰보였다. 1751년 결핵에 걸린 이복형 로렌스의 요양을 위해 바베이도스로 여행을 갔을 때 걸린 것인데 이게 콤플렉스였는지 이오시프 스탈린과 마찬가지로 초상화에는 이것이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미합중국 국군에서 연공 서열이 가장 높은 군인이기도 하다. 생전 그가 전역할 땐 중장(Lieutanant General)에 불과했지만 1976년 미국 독립 200주년을 맞아 미 의회가 법률을 제정하고 제럴드 포드 대통령이 추인하여 그를 3계급 특진해 대원수(General of the Armies)로 추서하였다. 엄밀히 따지면 이 법에 "'General of the Armies'라는 칭호는 6성 장군에 해당한다"라고 직접 언급되지는 않았지만 당시 미군에는 5성 장군인 원수 계급까지 있었고 이 법에는 "'General of the Armies' 칭호는 과거이든, 현재이든 미합중국군의 다른 모든 계급에 선임한다"라고 명시해놓았기 때문에 사실상 6성 장군 계급과 마찬가지이다. 이 칭호를 받은 군인은 워싱턴 말고도 존 조지프 퍼싱도 있지만 퍼싱은 대원수가 아닌 사실상 원수 계급으로 이 칭호를 받은 것이 제2차 세계 대전 때 정식으로 원수 계급이 신설되면서 퍼싱의 계급에 대한 논란이 생기자 당시 미 육군 장관 헨리 스팀슨은 "퍼싱의 계급은 다른 원수 계급에 선임한다"고 해석을 내렸고 워싱턴의 사후 추서 때 정식 계급으로 신설되면서 대원수 계급으로 덩달아 올라간 케이스이다. 또한 법을 통과시킬 때 '연공 서열에서 워싱턴이 퍼싱보다 앞선다'라고 못박아놨기 때문에 미군에서 연공 서열이 가장 높은 군인은 워싱턴이다.
워싱턴이 도끼로 아버지가 아끼는 벚나무를 베었을 때 그가 솔직하게 말하자 아버지가 용서해줬다는 일명 벚나무 이야기가 나름 유명한데, 이 이야기는 목사 행세를 했던 외판원 웜스란 사람이 워싱턴의 위인전이 너무 얇다고 생각해 맘대로 붙인 이야기였다. 워싱턴 생가엔 벚나무가 없다. 더군다나 원래 버전은 워싱턴을 포함한 형제들이 같이 놀다가 벚나무 가지를 꺾어먹는 것이었고, 이때 무려 4살짜리 막내 워싱턴이 자기가 했다고 말했다는 비범한 내용이었다. 사족으로 이 Parson Weems는 벤자민 프랭클린이 소년 시절에 물건을 팔면서 가격을 깎고자 하는 손님에게 가격을 계속 올리면서 시간을 소비하고 있기 때문에 가격이 올라간다고 했다는 이야기를 지어내기도 했다. 이 윔즈라는 남자는 나중에 일명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에 대한 위인전도 썼다.
아메리칸 조크에서는 이 일화를 다음과 같이 유머스럽게 설명한다.
선생님: "조지 워싱턴이 벚나무를 자른 것을 솔직하게 이야기했을 때, 그의 아버지는 그를 용서했습니다. 왜일까요?"
학생: "네, 조지 워싱턴은 아직 도끼를 손에 들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초대 대통령에 군인인지라 진지하고 근엄한 성격으로 많이들 알고 있는데 실제로는 소탈하고 농담도 많이 하는 성격이었다. 독립전쟁 중에 배를 타고 기습공격을 할려고 하는데 헨리 녹스 라는 뚱뚱한 부하가 워싱턴을 위해 자리를 만들어 줄려고 움직이자, 헨리의 엉덩이를 툭 차면서 배 가라앉지 않게 엉덩이 조심히 움직여라 하고 놀리거나, 부하들에게 애인들이나 아내를 위해 무기를 잘 관리해라 같은 섹드립도 했다.
위스키와 인연이 좀 있는 인물인데 영국과의 전쟁으로 국고가 바닥나자 위스키에 세금을 매겼다가 폭동이 일어나서 곤욕을 치른 적이 있다. 그런데 반란을 일으킨 쪽에도 사정이 있는 것이, 애팔레치아 개척지역민들은 험난한 산맥으로 곡물을 나르는 대신 남는 곡물로 만든 위스키를 운반하는 걸 선호했을 뿐더러 현금이 귀했던 개척지의 사정상 위스키는 일종의 화폐로도 사용되어 왔었다. 즉 이들에게 위스키는 없어서는 안 되는 생필품이었던 것. 워싱턴 정부는 위스키세를 사치세로 생각했는데 이들에게는 소득세가 된 셈. 결국 반란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지자 워싱턴 본인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반란을 토벌하면서 연방정부의 권한을 증명하기도 하였다. 이는 미국 역사상 대통령이 직접 군사를 이끈 최초이자 최후의 친정이었다. 이렇게 보면 워싱턴과 위스키가 악연일 수도 있겠지만, 그가 퇴임하던 해, 워싱턴은 버지니아 주에 증류소를 세웠고 사망하기 전까지 미국 최고의 양조업자가 되었다.
독립군 시절에 영국군과 내통하던 요리사가 조지 워싱턴을 독살하려고 했다는 카더라성 일화가 있다. 그 요리사는 조지 워싱턴이 평소 즐겨먹는 요리에 독을 바른다는 계획을 세웠는데, 그 독이라는 게 다름이 아니라 토마토였다. 그 요리사는 토마토를 바른 요리를 워싱턴이 깨끗이 비우자 계획이 성공했다고 생각해 영국군에게 밀서를 보냈다. 물론 토마토엔 독 따위 없었으므로 워싱턴에겐 아무 이상도 없었다. 토마토의 영양가를 생각하면 남 좋은 일만 시킨 셈. 다만 이 일화는 다른 대통령 버전도 떠도는 것(특히 에이브러햄 링컨)을 볼 때 진짜 있었던 일인지는 확인이 필요하다.
1789년 10월 5일에 빌려간 책을 죽을 때까지 반납하지 않았다. 뉴욕 소사이어티 도서관(New York Society Library)에서 2권의 책을 빌렸다. 각각 국제관계학을 다룬 'The law of nations'와 영국 하원의 토론 내용을 담은 'Commons debates'라는 책이었다. 연체료는 누적된 액수와 인플레이션 등을 감안할 때 약 30만 달러. 이 책은 2010년에 반납되었다. 해당 책 자체는 찾지 못해서, 워싱턴 기념 사업회에서 해당 책과 같은 판본의 책을 따로 구입해서 반납했다. 연체료는 도서관 측에서 면제해줬다.
알링턴 국립묘지와도 어느 정도 관련이 있는데 국립묘지가 위치한 부지가 바로 워싱턴의 아내인 마사의 개인 재산이었다. 마사가 워싱턴과 재혼한 이후 워싱턴이 마사의 개인 재산까지 관리했는데 위에서 설명했다시피 1802년 마사가 세상을 떠나자 워싱턴의 의붓손자 조지 워싱턴 파크 커스티스가 마사의 개인 재산이었던 친할아버지 대니얼 파크 커스티스의 개인 농장을 상속받았고 조지 워싱턴 파크 커스티스에게는 장성한 자녀가 딸 메리 애나 1명 뿐이라서 이 농장은 1857년 조지 워싱턴 파크 커스티스가 사망한 후 딸 메리 애나와 그의 사위에게 돌아갔는데 이 사위가 바로 로버트 E. 리이다. 그리고 남북전쟁 시기에 리가 아메리카 연합국 측에 가담하면서 리 일가가 남부로 떠나자 연방 정부는 이 농장을 매입해 전사자들을 위한 국립묘지를 조성했는데 이 곳이 바로 알링턴 국립묘지이다.
이 이름을 본딴 워싱턴 주도(Washington State Road)가 있으며 범례는 그의 실루엣을 형상화했다.
족보상으로 영국 국왕인 엘리자베스 2세와 먼 친척으로 연결된다. 조지 워싱턴의 진외증조부인 어거스틴 워너 주니어의 큰 딸이 워싱턴의 할머니고, 막내딸의 후손 중에 퀸 마더가 있다.
역대 미국 대통령 중 개인 자산이 제일 많은 대통령이었다. 이 기록은 무려 220년 동안 깨지지 않다가 2016 대선에서 도널드 트럼프가 이 기록을 깼다. 월스트리트의 분석에 의하면, 가장 재산이 많았을 때 그 액수는 현재의 한화로 8천 8백억 가량이다.
워싱턴의 생일인 2월 22일은 1879년부터 1971년까지 '워싱턴 탄신일(Washington's Birthday)'이라는 이름의 연방공휴일이었으나 1971년에 통일 월요일 휴일 법으로 2월 셋째주 월요일로 바꾸어 연휴로 통합해서 쉰다. 또 명칭도 '대통령의 날(Presidents' Day)'로 정해 역대 대통령들을 모두 기념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식적인 이름은 '워싱턴 탄신일'라고 정해져 있으며, 조지 워싱턴이나 에이브러햄 링컨 같이 평가가 높은 대통령들의 비중이 크다.
조지 워싱턴의 초상화와 영국과 관련된 에피소드. 미국이 독립한 뒤 버몬트 주의 정치인인 이든 앨런(Ethan Allen)은 영국을 방문했다. 공식 일정을 수행하던 도중 용변을 해결하기 위해 화장실에 갔는데, 거기엔 조지 워싱턴의 초상화가 있었다. 당연히 미국과 워싱턴을 조롱하기 위한 의도였다. 화장실에서 돌아온 앨런에게 영국인이 워싱턴의 초상화를 보았냐고 묻자 앨런은 보았다고 대답했고, 거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는 질문에 대해 "참으로 초상화를 걸기에 어울리는 장소이더군요. 영국인이라면 누구든지 그(워싱턴)를 보고 오줌을 지릴 테니 딱 어울리는 장소 아닙니까?"라고 말했다고. 에이브러햄 링컨 시절부터 내려온 이야기로, 링컨 본인이 꽤 좋아한 이야기라고 한다. 하지만 실화의 여부는 불분명하다.
외모나 이름도 영국식이고, 영어를 사용했고, 집안도 이민자 출신에 독립 전쟁을 이끌었기 때문에 잉글랜드 지역에서 태어난 것으로 알고 있는 사람도 있으나 조지 워싱턴은 북아메리카에서 태어났다.
워싱턴 시대의 지도자들
조지 워싱턴이 대통령에 취임한 1789년 당시 세계 각국의 지도자들은 다음과 같다. 물론 조지 워싱턴이 해당 지도자들과 전부 관계를 가졌다는 건 아니고, 존재 자체는 인지하고 있었다고 보는 것이 맞다. 미국과 일본이 처음 외교관계를 맺은 시점과 미국과 조선이 처음으로 접촉한 시기가 1850년대이다.
보면 알겠지만 미국을 제외하면 상당수가 현재는 사라진 국호, 왕조, 전제군주정임을 알 수 있다. 그에 반해 미국은 18세기 말의 국호와 체제를 현재까지도 유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