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아버지는 한량이었다.
인물 좋고 말 잘 하고 노래 잘 하며, 술마시는 거에 관해선 누구에게도 밀리는 일이
없었다는 시골 한량이었다. 옛날 시골에서 약간의 전답과 새 집을 물려받았으면
나름 밑천이 있는 셈이었는데 그마저 내가 중학교에 갈 무렵 다 팔아먹었다.
그런 아버지는 늘 내 인생의 반면교사였다. 슬픈 일이지만 사실이었다.
3년 전 어머니가 먼저 떠나신 후에도 아버지는 혼자 꿋꿋하게 지내면서 늙어갔다.
수도권에 사는 내가 한 달에 꼭 한 번씩 반찬을 해가지고 다녀오는데 솔직히 이젠
그마저도 쉽지 않다. 가까이 사는 막내가 세상에 보기 드문 효자인지라 정성으로
챙기는 바람에 혼자 잘 지내신다.
이번에 다니러 갔더니 감기로 거의 거동을 못하신다.
병원에 가자했더니 어제 막내와 함께 다녀왔다고 완강히 거부하고 화장실 가는 게
불편한 지경이라 내가 두 번이나 속옷을 갈아 입히고 빨아 널었다.
아버지의 속옷을 빨며 생각이 참 많았다.
1970, 80 년대 도시에서 실패하고 농촌으로 들어오는 이들에게 내 아버지는 정성을
다해 정착을 도왔고, 그들이 죽으면 직접 염을 해서 묻기도 했다.
하지만 가족에겐 무책임했다. 자식들이 각자 알아서 공부를 해야 했으니 말이다.
당신이 밖에서 쌓은 선업( 善業) 의 높이만큼 가족에겐 소홀했고 가족이 힘들었다면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 그저 조상님 모시는 게 최고의 덕목이라 생각하고, 한량으로
사는 아버지와 나는 늘 대립했다. 큰아들의 숙명이었다.
막내 남동생은 천사처럼 아버지를 돌보고 여동생 둘은 발만 빼지 않을 뿐 외면하는데,
나는 늘 책임감에 시달리고 기본을 다 하면서도 막내동생에게 아주 미안해 한다.
두 번이나 아버지 속옷을 갈아입히고 빨래를 해서 널며 나의 어린시절에 가족들에게
무심했던 아버지와 현재의 측은한 모습이 교차되어 생각의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집으로 오는 차 안에서 이어령님의 책 '생명이 자본이다' 에서 읽은 후 내 인생관처럼
생각하는 라틴어 경구만을 자꾸 되뇌었다. 나 또한 머지 않은 일일 테니.
Festina lente (페스티나 렌테 / 천천히 서두르라)
천천히 서두르라 !!
2024.03.27
앵커리지
첫댓글
우선, 앵커리지님의 글이
제게는 감동을 줍니다.
옛날 어른들은 대부분이 밖에서 잘 하시고
자신의 가족에게는 자상하지 않습니다.
그분들은 제 생각엔, 유교 탓인 것 같습니다.
그렇게 하는 행동이 군자다운 면모라고 생각하셨나 봅니다.
사실, 유교를 잘 못 받아들인 것이지요.
제 친정 아버지는
자식들에게 사랑이 너무 엄격했습니다.
제 남동생도 아버지를 이해하지 못했지만,
저는 동생에게, 그시절로써는 아버지는
책임감은 있었다고 강조하면서 달랩니다.
앵커리지님의 반면교사라는 말을 지지 합니다.ㅎ
맞습니다.
저도 학문적으로 유교를 잘 알지는 못하지만
한국의 유교는 공자의 가르침 중 예(禮) 만을
중시하고, 인(仁)은 무시했다는 글이 있습니다.
저는 장남으로서 그런 아버지가 너무나 싫었고
지금도 생각이 많이 다릅니다. 제 업이지요.
우리 시대의 아버지와 그 아버지의
맏아들... 함축된 이야기들이 참 많을 것
같습니다.
전 막내라... 동 시대 맏이들이
어깨에 짊어졌던 그 짐에 얽힌
애환들을 많이많이 듣고 싶습니다.
가난해진 시골 집안의 장남이 져야 했던
그 무게를 어찌 필설로 다 할까요.
가족은 가난에서 헤매는데 조상님 모시는
일만을 앞세우는 가장을 어찌 평가할까요.
그 시절의 문화라고 하기에 너무나 무책임한
행동이었고 가족은 희생되어야 했으니까요.
다음엔 좀 밝은 글을 써야겠습니다 ^^
아버지의 속옷까지 빠시며 참 효자이십니다
저도 장남인 형이 아버지를 끝까지 집에서 모셨기에
형에게 늘고마움과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때 형네 집에 계시던 아버지를 몇번 목욕시켜드린
적은 있습니다
저는 효자가 절대로 못 됩니다.
그산님 형님께서 아버지를 끝까지 집에서 모셨다면
형님보다는 형수님을 칭찬해야 할 겁니다.
누구나 늙고 몸이 병약해지다가 죽는 건데 어찌
그리 지혜롭지 못한지 안타깝습니다.
우리네 아버지들은
왜 그랬는지 모르겠습니다.
물론 모든 아버지들은 아니겠지만요.
홀로되신 아버지를 외면할 수 없는
장남의 고충 이해합니다.
동생이 잘 보살펴 드려도 장남의
마음은 편하지가 않지요.
편찮으신 아버지의 속옷을 빨때에
앵커리지 님 마음에 수많은 생각이 교차했을 것
같습니다.
저도 맏며느리라 장남의 힘듦이
마음에 와닿습니다.
큰아버지께서 홀로 장수하셨는데, 그때
큰집 누님이 "울아버지 어서 가셨으면
좋겠다" 며 안타까워하던 마음을 이제는
이해할 것 같습니다.
우리는 낀세대라서, 위로는 비슷한 성향의
아버지를 모시고도 아래로는 늙도록 손주를
봐주는 경우가 많지요.
그래도 감사하며 삽니다 ^^
아버지에 대한
애증이 크실 것 같은데
그래도 아들노릇 잘 하셨습니다.
저는
돌아가신 시어머니를
반면교사로 삼고 삽니다.
어찌 그러셨는지...
대한민국의 장남,장녀로 산다는거
짓누르는 그 무게감에 피로감만 높지요.
사시느라고 애쓰셨습니다.
토닥토닥요^^
우리 세대까지는 큰 자식의 무게가 아주
무겁지요. 이젠 바뀌었지만요.
살면서 가장 경계한 것이 무책임한 가장이
되는 거였어요. 무능함은 변명이라도 할 수
있지만 무책임은 용납이 안 되거든요.
위로 고맙습니다 ^^
내 아버지는 좀 아쉬운
78연세에 가셨는데
누구 손 하나 안 빌리시고
어머니랑 계시다 가셨지요
모두의 복이구나
감사했습니다
다른거 다 몰라도
떠나는 복만큼은 아버지를 닮아야지 하지만
기도할 뿐입니다
아들이 아버지 속옷을 빨래함도
다행이다 싶습니다
마음대로 되는 건 아니지만, 살짝 아쉽다고
할 나이에 편히 갈 수만 있다면 그게 최상의
인생 마무리 라고 봐요.
@앵커리지
제 아버지는 막걸리를 좋아하셨는데
어느날 제가 시골집에 간다고 편지를 보냈더니
대문앞에 동백꽃을 항아리 가득 꽂아두고
저를 기다리고 계시더라고요.
61세에 심장마비로 갑자기 돌아가신 아버지가
많이 그립답니다.
@제라 에구 안타까워라.
내 딸들도 나중에 아버지를 그리워 했으면
좋겠습니다.
딸들이 세상을 잘 살아가라고 조금 강하게
대한 것을 이해할 날이 있겠지요.
이번주에 작은딸이 손주들과 함께 오는데
장미꽃을 준비해야 할까 봐요 ^^;;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24.03.27 16:06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24.03.27 18:03
@제라 제라님
대문 앞에 동백꽃을 꽂아두었다는 말에 눈물이 나요
비슷한 스승을 가지신 앵커리지님~^^
그 저미는 가슴을 조금이나마 알 것 같습니다.
저는 막내아들인데
맏이 구실을 하고 살았습니다.(물론 제대로 하진 못했어요^^)
결혼 후에는 그 짐을 아내가 졌드랬죠~
하여~늦게 철들면서 부터는 받들어 모시며 감사하게 살고 있습니다.^^
그 아픔이 참 큽니다.
대놓고 원망할 수도 없고, 내던져버릴 수도
없이 끌어안고 가야 하는 상처지요.
그래서 혼자 산으로 갑니다 ^^;;;
참 무겁게 읽힙니다.
부모님의 속마음은 무엇일지~
헤아리기 어려울 때가 있데요.
1930 년생에 6.25 참전용사인 아버지의
시대를 다 이해할 수는 없겠지요.
하지만 장남으로서 글로 다 쓰지 못한 아픈
일이 많아서 아버지를 다 이해하기엔 많은
시간이 필요할 듯합니다.
우리 아버지가 생각이 나서 가슴이 먹먹합니다
아버지 속옷을 빨아드린 앵커리지님이 한없이 부럽습니다
시골장에 가셔서 쓰러지는 그날까지
아프다는 표현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아, 가리나무님 부친께서는 가시는 날까지
일을 하셨군요. 아버지가 그립다는 의미를
온전히 이해하진 못 해도 짐작이 갑니다.
저도 제 아버지를 좀 더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겠습니다.
제 아버지도 74세의 연세로 돌아가시기 직전까지
일하셨지요. 이북에서 오신 분들은 대부분 일가친척 하나 없는
이곳에서 살기 위해 잠시도 쉬지 않으려 하신것 같습니다
홀로 계신 아버님의 마음도
편치만은 않으실겁니다
노 부모님들의 마음속엔
그동안 자녀들에게 좀 더
잘해주지 못한게 회한으로 남겠지요
지금처럼 그렇게 잘 살펴
드렸으면 합니다.
수국화님의 의견을 읽고 나니 생각이 좀
달라집니다. 의견 고맙습니다.
안그래도
시부모님 연배셨던 앵커리지님 부모님이
궁금했었는데
여기서 소식을 접하게 되네요 ㆍ
3년 간격으로 두 분 다 돌아가시고나니
어디다 대 놓고
자식 자랑할 곳이 없더이다ㆍ
미웠다 고왔다 하는 게
노부모 모시고 사는
평범한 자식 마음인 듯해요
툭ㅡ던져 놓은 보따리안에
무엇이 들었을까
안 보고 아는
어머니 장보따리같은
앵커리지님 글
소통 1수위랄까요
감사요
쏟아내고 싶은 얘기가 어디 이것 뿐일까요.
다 쏟지는 못해도 이렇게라도 덜어내야
더 버틸 것 같더이다.
정말로 잘난 아들 집에 오는 날 잡히거든
알려주소서.
도시한량이자 하루 두갑 하루
두병은 기본이었던 울 아버지
미워할래야 미워할 수 없었던
지금은 사무치게 그리운~
막내인 저를 많이 사랑해주신~
췌장암 말기인데 가족
고생시킨다고 수술. 항암치료거부하고
진통제드시고 삶을 정리
자연사를 선택하셨지요
부친이 가고있는 그 길을
앞으로 수도 없이 그림자 밟으면서 챙기실 앵커리지님
부디 심신 건강하소서~^^♡
부친께서는 합리적인 판단과 결단력을 갖춘
분이셨군요.
그런 분들이 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지만
참 어려운 결단이었을 겝니다.
감사합니다.
아버지의 노릇을 못하면서 아버지라고 근엄하고 수시로 엄마에게 행패부리는 그옛날 아버지들.. 그런걸 답습안하려고 저는 평생 노력했습니다. 근데 모르겠습니다. 자식들이 내가 죽은후 평가하겠지요..
저도 늘 경계하는 게 그것입니다.
싫어하면서 닮는 게 핏줄이라는데... 더욱
돌아보고 조심하려 합니다.
앵커리지님 수고 많으셨습니다.정성껏 모시는 동생이 있으니 그나마 다행입니다
저도 그리 생각합니다.
고맙고 미안한 마음이 늘 가득합니다.
가족을 애증의 관계라고
냉정하게 정의하기도 하더군요.
많이 불편했을 가족사를
솔직하고 담담하게 글로 털어
내셨습니다.
엥커리지님께서 겪으신 모든 고난이
이미 숙성의 과정을 넘어선 듯.
향기를 발하네 합니다.
잘 보셨습니다.
부대끼고 상처도 주지만, 끝까지 끌어안고
가야 하는 게 가족이지요.
글엔 쓰지 않았지만 어머니의 사랑이 있어
자식들은 잘 자랐습니다. 고맙습니다.
글을 읽으며
부끄럽기만 합니다
저는
아버지께 해 드린 게 없어서~
어렸을적 주전자 들고
막걸리 사다 드린 심부름 말고는..
저도 별로 해드린 건 없고 장남으로서 그저
부친과 대립만 해서 부끄럽습니다.
3년 전 어머니께서 돌아가실 때 너무 후회가
돼서 아버지께는 조금이라도 다가가려 하는
정도일 뿐이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