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문(雲門)의 일일시호일(日日是好日)
절정에 달했던 단풍도 쇠락하여 산사의 뜰에는 수북하게 낙엽이 딩굽니다. 저들은 어디서 왔다가 이제 어디로 또 떠나는지....어제가 입동이었습니다.
우리도 저 뜰의 낙엽처럼 찬바람 맞는 날 쇠락해지면 또 어딘가를 향해서 떠나야 할 테입니다. 정녕 나는 어디로부터 와서 어디를 향하여 떠나야할 것인가 아득히 그 길이 막막하여 찬바람이 더욱 더 차갑게만 느껴집니다.
존재하는 만물은 오고 또 와도 다 오지 못하니
다 왔는가 하고 보면 또 다시 오네,
오고 또 오는 것은 시작 없는 데로부터 오는 것
묻노니, 그대는 처음에 어디로부터 왔는가?
존재하는 만물은 돌아가고 또 돌아가도 다 돌아가지 못하니
다 돌아갔는가 하고 보면 아직 다 돌아가지 않았네,
돌아가고 또 돌아가고 끝까지 하여도 돌아감은 끝나지 않는 것
묻노니, 그대는 어디로 돌아 갈 건가?
화담(華潭) 서경덕(徐景德)은 일찍이 이와 같이 노래했습니다.
어디로부터 와서 또한 어디를 향하여 돌아갈 것인지, 참으로 ‘어디로부터 와서 어디로 돌아가는 것인지......’ 하지만,
봄에는 꽃이 있어 좋고
여름에는 청량한 바람이 있어 좋으며
가을에는 밝은 달이 있어 좋고
겨울에는 흰 눈이 있어 좋다는 어느 시인의 노래가 있습니다.
이렇듯 ‘날마다 좋은 날’이 되려고 한다면 마음에 근심과 걱정, 번뇌가 없어야 할 것이라, 무차별(無差別)과 무분별(無分別)의 중도정상(中道頂上), 즉 중도의 정수리에 서야 할 것입니다. 중도란 어정쩡한 마음자세나 마음가짐을 일컫는 것이 아니라 가장 적극적이고 절대적인 마음이라 하면 좋을 것입니다.
근심과 걱정, 번뇌란 뭔가 어정쩡하고 어수선하여 밝지 못한 마음상태로 상대적 차별과 분별을 일으키기 때문에 생기는 마음의 병입니다.
어느 보름날 운문선사(雲門禪師)께서는 대중들을 모아놓고 다음과 같이 말씀했습니다.
“그대들에게 지나간 15일 전의 일에 대해서는 묻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앞으로 15일 이후의 일에 대하여 한마디씩 해 보라.”
그러고는 정작 대중들의 말은 들어보지도 않은 채, “일일시호일(日日是好日 날마다 좋은 날)”이라 하고는 조실 방으로 들어가 버렸습니다. 도대체 이것이 무슨 뜻일까?
일일시호일(日日是好日), 즉 날마다 좋은 날이란, 날이면 날마다 항상 즐거운 날이라는 뜻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살아가면서 정말로 날마다 좋은날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날마다는 고사하고 이따금씩 좋은 날도 얼마 되지 않습니다. 항상 어렵다고 징징 짜는 날이 더 많습니다. 어떻게 하면 날마다 좋은 날을 보낼 수 있을까요?
일일시호일(日日是好日)이라는 말은 선어록(禪語錄)의 백미 <벽암록(碧巖錄)>에 등장하는 화두(話頭)로 중국의 선승 운문문언(雲門文偃, 864~949)선사의 말씀입니다.
한문에서 똑같은 글자가 겹치면 복수입니다. 그러므로 ‘일일(日日)’은 ‘날마다’이고, ‘호일(好日)’은 ‘좋은 날’ ‘길일(吉日)’ ‘생일(生日)’을 가리키고, ‘시(是)’는 ‘바로 ○○이다’라는 뜻입니다. 생일날은 왠지 기분이 좋고 잘 먹는 날이므로 ‘날마다 생일’이라고 해도 되고, 날마다 즐거운 날‘이라고 해도 될듯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날마다 좋은 날’이란 사실 생일도 길일도 운수가 좋은 날도 아닙니다. ‘날마다 좋은 날’이란 바로 ‘번뇌 망상이 없는 날’ ‘근심 걱정 등 번민이 없는 날’ 또는 마음이 평온하고 활기찬 날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날마다 좋은 날’이 되려면 근심과 걱정 등 번뇌가 없어야 합니다. 번뇌가 있으면 그날은 괴로운 날입니다. 이런 날이 겹치면 ‘날마다 좋은 날’은 간데없고 ‘우울한 날’의 연속입니다. 만사가 싫어지고 삶에 의욕이 없어집니다. 지옥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날마다 좋은 날이 되려면 마음이 평온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날마다 좋은 날’이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날마다 좋은 날은 자신이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만일 즐거움이라는 것이 무언가 운수나 재수 등 일진(日辰)에 좌우되고, 주식 값이 올라야 하고, 옆에 함께 놀아줄 친구가 있어야 한다면 그것은 타자(他者)에 의지한 즐거움입니다. 주체적인 행복, 주체적인 즐거움이 아닙니다. 그것은 날마다 좋은 날이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대들에게 지나간 15일 전의 일에 대해서는 묻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앞으로 15일 이후의 일에 대하여 한마디씩 해 보라.”
‘15일 이전의 일에 대해서는 묻지 않겠지만 15일 이후의 일에 대하여 한 마디씩 말해 보라’는 이 단락은 제시어(질문)입니다. 그리고 ‘날마다 좋은 날’ 즉 ‘일일시호일(日日是好日)’은 답어(答語)입니다. 말하자면 운문선사는 스스로 문제를 제시한 다음 답까지 한 것입니다. 혼자서 차(車) 포(包)를 다 친 것입니다.
일일시호일(日日是好日)이 된다는 것은 근심이나 걱정, 번뇌 망상이 없는 마음상태, 무집착(無執着), 공(空)의 상태, 깨달은 상태입니다. 그런데 ‘15일 이전의 일에 묻지 않겠지만 15일 이후의 일에 대해서 한 마디씩 해 보라’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이 문답을 푸는 열쇠는 바로 15일 이전과 15일 이후에 있습니다. 옛 중국의 선원에서 조실스님의 법어는 한 달에 여섯 번(1. 5. 10. 15. 20. 25일)있었습니다. 운문선사가 이 법어를 한 날은 마침 보름(15일) 날이었습니다. 15일은 한 달의 딱 절반입니다. 한 달을 둘로 나누면 어떻게 될까요? 둘로 나누는 것은 이분법입니다.
그것은 차별이고 분별심이며 집착이고 중생심입니다. 깨달음의 세계는 무차별. 무분별이어야 하고, 중도(中道). 공(空)의 입장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둘로 나눈다면 중도(中道)가 될 수 없습니다.
또 15일 이전은 과거입니다. 과거사를 생각하는 것은 쓸데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15일 이후 즉 미래는 중요한 일입니다. 수행자로서 어떻게 살 것인지? 향후의 삶, 비록 이것은 수행자가 아니라고 할지라도 누구에게나 중요한 과제입니다. 향후 어떻게 살 것인지, 거기에 대해서 한 마디씩 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즐거운 나날을 보내자면 먼저 번뇌에 휘둘리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번뇌에 휘둘리지 않으려면 감정에 좌우되지 말아야 하고, 감정에 좌우되지 않으려면 모든 것을 하나로 보아야 합니다. 둘로 나누면 어느 한 쪽에 경도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뭣고(?)
사실 운문선사가 말한 15일 이전과 15일 이후란 제자들에게 내민 함정, 트릭입니다. 15알 이전과 이후를 나눈 것은 차별심이라는 함정을 만든 것입니다. 그냥 ‘일일시호일(日日是好日)’이라고 해도 충분했습니다.
생각 생각 모두 놓아버리면
옳음과 그름의 처소(處所)가 없어
생각 없는 한 생각이 항상 새로워
매일 매일이 참으로 좋은 날일세. 이뭣고(?)
2010.11.08.염화당 중홍.
첫댓글 옴 아비라 훔 캄 스바하
성불하십시오
즐겁게 사시면 됩니다. 맑은 날이 있듯이 흐린날도 있답니다. 좋은 것만 생각하세요. 나쁜것은 잊어버리고! 성불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