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 여행 5 - 예루살렘에서 티베리아에 도착해 갈리리 호수를 보다!
1월 22일 : 예루살렘 - 장거리 버스 - 갈릴리 호수 : 티베리아
1월 22일 예루살렘 야파거리 시온광장에 자리한 메노라 호텔에 체크아웃을 하고는 중앙 버스
터미널로 이동하여 언제나 처럼 철저한 몸수색을 받고는 티베리아 행 버스에 오릅니다!
우리 부부는 1월 16일에 우즈베키스탄의 타쉬켄트를 거쳐 이스라엘 벤구리온 공항에
내려 버스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들어와 셰루트를 흥정해 베들레헴을 다녀왔습니다.
그러고는 여행사 1일 투어에 참가하여 사해의 마사다 요새와 엔게디를 보고는
예루살렘성 안은 물론이고 제2성전이며 박물관등 신시가지 까지 보았습니다.
오늘 예루살렘에서 티베리아행 장거리 버스를 탔는데..... 버스는 요르단강 서안
팔레스타인 자치 지구인 고도 여리고를 우회해서는 요단강을
따라 북상하는데, 1시간도 못되어 황량한 바위산이며 사막이 없어져 버립니다?
불모의 사막지역을 달리던 버스는 어느샌가 나무며 작물이 푸르게 자라고 있는
비옥한 평야가 펼쳐지는 것을 보고는 그 급격한 변화에 그저 놀랄뿐입니다.
*** 바다처럼 넓은 베드로의 호수 라는 갈릴리의 도시 티베리아 ***
우리 버스는 북상해서는 이윽고 갈릴리 호반 도시인 티베리아에 도착해
여행안내 책자에서 보고 적어간 아비브 호텔을 찾아 체크인을 합니다.
아비브 호텔은 취사 시설 까지 갖춘 넓은 방에 텔레비젼이며 스팀도 잘나와 처음으로 호사를
하는데...... 아침 제공에 65달러니 요금도 괜찮은 수준이고 갈릴리 호수가 보여 더욱 좋습니다.
1896년에 가뭄이 들어 물이 마르자 키부츠 기느사르에서 2천년 전에 예수님
당시 베드로가 물고기를 잡았던 시절의 배가 발굴되었다니 놀랍네요!!!
우리 부부는 걸어서 프롬나드 라고 불리는 갈릴리 호수에 앉아 지는 해에 비취는 호숫가
를 바라보며 캔맥주 하이네켄 한잔을 기울이노라니 모든 시름이 없어집니다.
여기 갈릴리 호수 건너편에 둘러선 산들의 모습이 점차 어둠에
잠기고 오리떼들의 모습도 사라질 즈음 일어서려는 데...
*** 갈릴리호수에 해가 집니다 ***
왠 노인이 다가와서는 "떡 다섯 개, 고기 두 마리!" 를 외쳐도 우리가 별 반응이
없자 이번에는 일본어와 중국어로 같은 말을 되풀이하는 걸 보니.....
*** 베드로 피쉬 물고기 ***
우리가 동양 3국 중에 어느나라 사람인지 아직 파악이 되지 않는 모양인데..... 그래도 이곳
갈릴리 호수는 기독교 성지순례 장소이다 보니 한국인이 많이 오는가 보다고 짐작합니다.
우리가 그간 수십차례 여행을 다니다 보면 "니 하오!" 가 50% 이고, "곤니찌와!" 는 30% 이며
"코리아 나 안뇽!" 이 10% 에 나머지 10% 는 국적이 짐작이 가지 않는듯 쳐다보는데....
융프라우와 예루살렘에 베들레헴과 갈릴리는 대뜸 한국인으로 짐작하는게 성지순레 때문이라?
마눌과 둘이서 호수를 뒤로 하고는 걸어서 돌아오다가 티베리아의
부서진 성벽을 바라보니.... 문득 옛 일이 생각이 납니다.
*** 티베리아의 엣날 기독교 십자군 성벽 ***
1099년에 제 1차 십자군이 예루살렘왕국을 세운이래 십자군은 레반트에 5개 기독교 왕국을 세웠는
데.... 1187년 갈릴리 호수변의 티베리아는 프랑크(프랑스) 인 레몽 백작의 영지 였는데,
그때 이슬람 투르크측 살라딘의 반격으로 티베리아를 점령하니 예루살렘의 십자군은 노하게 됩니다.
특히 레몽 백작의 부인이 성안의 탑에서 이슬람 투르크인들의 공격을 받아 결사항전
하고 있다지 않은가? 더욱 성전(템플) 기사단 척후가 전멸당하기 까지 하였으니.....
1187년에 1만 2천명의 십자군 대군이 티베리아 호수를 바라 보는 저 너머 언덕 까지 진격
하였으나 그만 아랍의 맹주 살라딘에게 포위되어 염천 더위에 물 마저 떨어지니...
결국은 패하는데 이것을 "하틴의 전투" 라 하고 이로인 해 십자군의 위세가 기우는 것입니다.
*** 살라딘의 이슬람군이 십자군을 격파한 하틴전투 ***
살라흐 앗 딘은 예루살렘 왕국의 국왕 기 드 뤼지냥를 생포하였으며 아코, 시돈, 베이루트 및 야파
를 빼앗은후, 9월 20일 무슬림 군대에 의해 예루살렘이 재차 포위되자 성 안의 기독교도들은
1차 십자군이 자행하였던..... 1099년의 대량 학살에 대한 복수의 칼이 두려워서 몸서리를 칩니다.
상황의 심각성을 안 레몽은 살라딘과의 동맹을 파기하고 예루살렘에 충성을 맹세하니 예루살렘은 2만명
대군을 소집했지만 1187년 7월 3일 살라딘 병사 3만명에게 처참하게 격파당하니 하틴전투인데 포로로
잡힌 르노 드 샤티용은 살라딘이 직접 목을 벴고.... 특히 성전 기사단과 구호기사단을 모조리 죽였습니다.
예루살렘성의 발리앙 디블랭은 바위의 돔을 파괴하고 도시를 폐허로 만들겠다며 엄포를 놓자 살라딘은
배상금을 받는 항복을 허락하니 라틴 성직자들과 시민들은 몸값을 낸후 재산을 가지고 예루살렘을
떠났고 살라딘의 동생 알 아딜은 값을 치르지 못해 노예가 될 기독교도 2천명을 대가 없이 석방 합니다?
1187년 10월 9일 예루살렘에 입성한 살라딘은 감격에 벅차 눈물을 흘렸으니, 550년전 칼리파 우마르
가 이슬람 역사상 처음으로 도시에 입성하였을 때처럼 성묘 교회에 대한 간섭을 하지 않았으며
다만 690년에 이슬람의 성전으로 세워진 바위의 돔 위에 있던 십자가는 그대로 방치할 수 없었습니다.
갈릴리 지방은 예수님이 처음 포교에 나섰던 땅으로 베드로를 만났던 곳이기도 한데
그후 유대인들이 2세기 후반에 로마군에 의해 추방 당하고 비잔틴인들이
차지했던 이 땅은..... 7세기에 마호멧의 후손인 아랍인들의 수중에 넘어가게 됩니다.
11세기 말에 침공한 프랑크인들의 십자군이 12세기에 패퇴하고 다시 아랍의 땅이 되었으니...
이후 천년 세월동안 팔레스타인인들이 대를 이어 살아왔는데, 유럽의 유대 사회에서
시오니즘 운동이 일어나 20세기 중반에 다시 유대인들의 수중으로 들어가 오늘에 이릅니다.
밤에 호텔 방에서 텔레비젼을 보는데 온통 난리도 아닙니다. 오늘 우리가
버스를 타고 떠나온 바로 그 예루살렘야파 거리 에서.....
팔레스타인인이 자동소총을 난사해 수많은 사람이 죽고 다쳤다는 것이네요?
만약에 우리 부부가 하루만 더 예루살렘에 머물렀더라면 거기는 우리가 돌아다녔던
지역이라.... 자칫햇으면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온몸이 오싹해 집니다.
우리가 이 나라 이스라엘에 도착한후 일주일만에 야파 남쪽에서 결혼식장에서
인간 폭탄이 폭발 한 것을 비롯하여 무려 "4건의 테러" 가 있었으니....
이건 이스라엘 입장이고, 팔레스타인 입장에서 보자면 독립운동 이겠습니다?
윤봉길의사나 안중근 의사의 의거도 우리나라에서 보면 독립운동이지만, 일본인의 입장에서
보면 테러인데... 오늘날 중동에서 벌어지는 이런 참사를 우리는 "테러" 라고 부르니,
팔레스타인인들과 아랍인들은 우리 한국인들과 서방세계 사람들이 원망스럽겠습니다.
그러니까 서양인들이 일본측 입장대로 안중근과 윤봉길을 테러리스트 라고 부르는 식이니까요?
테러가 일어나면 즉각적으로 대처하는 이스라엘군의 보복 공격까지 포함하면 하루도 편할날이
없으니.....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양측에서 강경파들이 득세하는 한 평화란 없겠습니다?
이스라엘이든 아랍의 팔레스타인 어느 측이든 간에 억울한 마음이야 비할데가 없겠으나, 자신의
주장을 접고 상대방의 존재를 인정하고서야 화해와 평화가 시작될 것입니다. 하지만 어느시대
어느나라에서든 강경파는 그 주장이 선명하고 애국적으로 비취니 온건파를 누르는게 현실 입니다.
첫댓글 나를 만나지 못하는 사람은 길이 없다고 했다
노년에 이르면 내면(內面)을 바라보며 길을 찾고,
꿈을 향해 걸어가라고 한다.
남이 보기에 아름답게 사는 것을 넘어
스스로 느끼기에 아름다워야 한다는 것이다.
오늘도 건강관리 잘하시고 품격 높은 삶 되시길 바랍니다.🫷🫸
이스라엘에 3번째 갈 날을 기다리는데....
저눔의 전쟁이 좀체 끝날줄을 모릅니다?
@가라치코 글게요
여러가지로 힘드네요
@캬페지기 언젠가는 끝날 날이 있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