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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오이...”, “휘오이...”, 애달픈 휘파람소리.
물속에서 전복 소라를 따면서 참았던 가쁜 숨.
한번에 내쉬고 빠르게 들이키는 해녀들 숨비소리.
고통으로 일그러진 해녀 얼굴과 함께 그 숨비소리.
비가 오나 바람 부나 물결에 시달리며 일하는 해녀.
저녁이면 돌아와 우는 아이 젖먹이며 밥을 지었다.
해녀들이 바다에서 물질을 하는 모습을 우연히 보거나
해산물 파는 해녀들은 가족 생명줄을 등에 지고 살아간다.
한라산에 눈 녹으면 겨우내 잦은 풍랑과 추위로
바다에 나가지 못했던 해녀들이 본격적으로 물질.
그래서 제주민들은 숨비소리에서 봄을 먼저 느낀다.
'바다의 신' 영등할망이 제주에 내려오는
겨우내 기간에는 물질이 금기시되는 탓이다.
‘애기짐과 미역짐은 무거워도 내려놓지 않는다’
'유네스코 세계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된 제주해녀들의 축제.
2017. 9.30 ~10.1 제주시 구좌읍 세화리 해녀박물관에서 개최.
10회째 해녀축제를 이같이 개최하기로 결정했다고 24일 밝혔다.
유네스코 문화유산 등재후 첫행사.
축제 전날 저녁에는 '한국 해녀의 밤'
전국 7개 시도의 출향해녀와 도내 102개
어촌계를 대표하는 해녀들이 모여 공연한다.
축제 첫날에는 그동안 해녀물질 경연대회를
해녀물질 재연 형식으로 변경하여 개최된다.
"이번 축제는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제주해녀문화를 귀성객, 관광객 모두의 축제가
되도록 꾸밀 계획입니다." - 제주도 해양산업과장 -.
............................제주해녀............................
산소탱크 없이 바닷 속에서 해산물을 채취하는 여성.
전 세계에서 제주와 울릉도, 일본 일부 지역에 만 있다.
2016년 11월 제주해녀 문화는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인류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된.,'제주 해녀문화'는
‘물질’과 ‘잠수굿’, ‘해녀노래’ 등 총체적으로 포함.
물질은 해녀들이 바다에서 해산물을 채취하는 행위.
잠수굿은 위험한 잠수 해녀들이 안전과 풍요를 기원하는 굿.
해녀노래는 제주 해녀들이 물질하러 나가면서 부르는 노동요.
해녀 여럿이 돛배를 타고 먼 바다로 나갈 때 노를 저으며 부른다.
파도 세기에 따라 ‘이여싸, 져라져라, 이여도사나,
이여사나’ 등의 후렴구가 붙는 것이., 노동요 특징.
해녀는 생업수단의 하나로 비롯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문헌상으로는 고려시대인 1105년(숙종 10) 탐라군(제주도)
구당사(勾當使) 부임 윤응균이 "해녀 나체조업을 금한다" 기록.
1628년(인조 6) 제주도로 유배된 이건 한문수필 '제주풍토기'
"잠녀들은 벌거벗고 바다 밑으로 들어가 미역을 따고 나온다."
"남녀가 뒤섞여 일하면서도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이 놀랍다"
당시까지는 남녀 구분없이 물질을 했으며
조선 후기로 가서 여성만 일한 것으로 변화.
1702년(숙종 28) 제주목사 겸 병마수군절제사 이형상이
화공 김남길에게 그리게 한 '탐라순력도'에도 해녀가 등장.
'탐라순력도' 중 '취병담 뱃놀이' 병담범주(屛潭泛舟) 편에는
제주시 용두암 근처에서 작업복을 입고 잠수하는 해녀의 모습.
해녀가 되는 여성들은 7~8세부터 헤엄치는 연습을 시작한다.
어린 시절부터 물질을 생활에서 배웠으며 15~17세 정도에 독립
해녀로서 왕성한 활동시기는 40세 전후, 60세 전후까지 해녀 생활.
대부분 농사일을 겸하는 경우가 많다.
물질 잠수 작업은 주로 봄에서 가을까지
물질은 바닷가에서 하는 ‘갓물질’이 있고
여럿이 배타고 나가 하는 ‘배물질’이 있다.
물질 작업은 하루에 3~4시간 정도 진행한다.
대개 수심 5m 정도에서 작업하지만, 때때로
수심 20m까지 들어가 2분 이상 잠수도 한다.
작업할 때는 중간에 2~3차례 휴식을 취한다.
기량 정도에 따라 상군(上軍), 중군(中軍), 하군(下軍)
상군 해녀는 물질 잘하는 해녀로 존경과 대우를 받는다.
19세기 말부터 전국 해안으로 출가(出稼) 조업을 나갔다.
객주의 인솔에 따라 일본 각지와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중국 랴오둥 반도의 뤼다(大連), 산둥 성의 칭다오(靑島)까지
1920년대부터 8·15해방까지 일본에 1,500명, 8도연안에 2,500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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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기준 활동하는 해녀의 수는 4,300명 정도다.
지역별로 제주시에 2,400여명, 서귀포에 1,890여 명.
연령별로는 70대가 가장 많으며 60대, 50대가 그 다음.
80세 이상임에도 해녀로 활동하는 사람은 480여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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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양도(飛揚島)·우도(牛島)·
상추자도(上楸子島)·하추자도·
횡간도(橫干島)·가파도(加波島)·
마라도(馬羅島) 등 8개의 유인도와
54개의 무인도로 이루어진., 제주도.
제주도는 화산폭팔로 용암이 분출되어 형성된 섬.
지질학적으로 산방산은 75만년전 화산폭팔로 형성
한라산은 2만5천년 전, 용머리해안은 80만년전 형성.
송악산은
약 3천년 전
화산 폭팔로 형성.
환태평양 지진대에 속한.,제주도.
언제 또 화산이 터질지 모를.,지진대.
울릉도는 2500만년전 화산이 2번 분출.
그리하여, 2중 분출로 생성된 화산섬이다.
비양도(飛揚島)는 제주에서 가장 나이 어린 섬.'
한반도에서 가장 최근에 생긴 섬은.,비양도(飛揚島).
조선시대 인문지리지 ‘신증동국여지승람 제38권에 의하면
우리나라에서는 유일하게 생성된 생년월일 기록이 있는 섬이다.
“고려 목종 5년(1002년) 6월, 산이 바다에서 솟았다.
산에 4개 구멍이 터지고 붉은 물을 5일간 내뿜고 그쳤다.”
또 고려 목종 10년(1007년)에도 화산활동이 있었다."는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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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제주도민은
대부분 천민 신분으로 묶여
'출륙(出陸)금지령' 법에 따라
제주에서 육지로 벗어날 수 없었다.
그러므로, 제주도민은 양반, 중인, 천민 등
조선시대 신분 차별에 대한 개념이 모호하다.
그래서, 제주도 생활풍습은 육지와 전혀 다르다.
잠녀들은 바다에 잠수하여 각종 해산물을 채취.
'여성 잠수부' 해녀는 주로 제주도에 많이 분포.
제주도 자연환경에서 강인한 생활력을 보여준다.
보통 15~16세부터 시작하여 60세 전후까지 물질.
봄가을에 물질을 하며 , 대부분 농사일과 겸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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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나 지금이나 이국적인 풍경., 제주도.
'흑돼지 우리' 담위에 높이 있는 개방식 화장실.
볼일 보는 며느리와 시아버지의 대화도 자연스럽다.
조선시대 유교관으로는 이해못할 놀랄 일.
고려 때부터 왜구의 침입 약탈이 잦았던.,제주.
살기 위해 볼일을 보면서도 망봐야 했던 생활풍습.
제주 여성은 시부모님이나 친정 부모님이
홀로 남으셔도 건강 하시면 모시지 않는다.
단, 병들어 운신 못하시는 경우에만 모신다.
워낙 척박한 환경이라
돌림병, 풍토병 등이 극심한 편.
옛부터 후손이 끊긴 가문이 많았다.
하여, 한 가족의 몰살을 막기 위한 예방조치
제주민에게는 오랜 세월 굳어진 전통적인 풍습.
제주 여성은 생활력 강해 실질적인 가정의 가장이다.
집안의 대소사는 가장인 제주여성이 대부분 결정한다.
즉, 실질적으로 가정을 이끌어가는 사람이 가정의 가장.
제주해녀들은 대부분 한 가정의 가장.
척박한 제주도 환경에서 살아 남으려면
딸린 식구들을 굶기지 않는 사람이 곧 가장.
한겨울 바다물 속에서 알몸 조업하는 제주해녀.
해녀는 수련에 따라 기량이 달라 계층이 있다.
하군으로부터 중군, 상군, 대상군으로 올라간다.
해녀계층에 ‘군(軍)’자를 사용하는 것이 흥미롭다.
안전을 위해 대상군 명령에
절대 복종하는., 제주 해녀들.
단체로 알몸 조업도 강행한다.
물속에서 오랫동안 숨 안쉬고 일하려면
물의 저항을 최소한으로 줄여야.,안전한다.
특히, 겨울철에는 생존을 위해 알몸으로 조업.
조선시대 유교관으로는 이해 못할.,광경.
저체온증으로부터 살아남기 위한.,비상 대책.
제4빙하기 후, 인류가 살아남기 위한 생존 비법
혼욕은 동아시아 화산지대의 공통적인 전통 풍습.
1만8천 미신들이 주민들과 공존하는.,제주.
미신은 신앙의 대상이 아니라 함께 사는 가족.
부엌에도 있고 뒷간에도 있고 장독대에도 있다.
척박한 환경 속에서 혼이 된 고인들과 악령들.
산자와 이미 죽은 자와 악귀들이 공존하는.,제주.
조선시대 육지에서는 더욱 이해하기가 힘들었을듯.
제주 특유의 전통 풍습들, 방언까지 독특하여
조선시대를 지배한 유교관과 상반되는.,제주도.
특히, 제주해녀는 국법으로 육지 왕래를 금했다.
인조 재위 때부터 제주 여성은., 출륙(出陸) 금지령.
섬에서 나갈 수 없고 육지 남성과 결혼할 수도 없었다.
하여, 조선 후기 제주 여성은 더욱 육지로 나갈 수 없었다.
조선개국 후 300년이 지난, 1703년 제주목사 이형상.
제주도민은 공자, 맹자, 유교 서원은 관심조차 없었다.
뱀, 귀신, 도깨비 등을 섬기는 신당 129곳에서 미신이 만연.
거기에다가 제주목사 이형상을 기절초풍하게 한 것은
해녀들이 알몸으로 바다에 뛰어들어 해산물을 채취하는 풍습.
엄격한 유학자였던 이형상은 제주 풍습을 강압적으로 바꾸는 조치.
129곳 신당을 모두 불태웠고
해녀들의 알몸 잠수를 금지했고.
동성동본 간 혼인을 법으로 막았다.
제주목사로 있던 2년 반 동안
일부다처 및 남녀 혼욕을 엄금.
500 사찰과 500 신당을 없애 무당과 승려를
모두 귀농시켜 유교 이념을 실현한 제주목사.
그외 제주도 시조인 고을나, 양을나, 부을나.
세 형제를 모신 삼성(三聖) 사당(祠堂)을 세워
모든 관원이 제주도민과 함께 참여해 제사 지냈다.
제주목사 이형상의 제재와 회유책에도 불구하고
제주도의 독특한 풍습과 미신은 개선되지 않았다.
하여, 제주 여인은 아예 육지로 왕래할 수 없게 한 것.
1792년 정조 때는 제주 인구의 감소를 막기 위하여
제주 여인은 아예 뭍으로 나가지 못하게 한.,시기였다.
1795년(정조 19년) 태풍이 불어 제주도민 1만명 아사.
태풍의 영향으로 최악의 흉작이 들이닥친 때문이었다.
제주도민들은 자연환경때문에 자급자족할 수 없는 환경.
...........................출륙금지령.....................
조선 개창 이후에 중앙 집권화가 안정기에 접어들며
15세기에 이르러 제주에 대한 중앙정치의 간섭도 강력.
그 지나친 간섭은 제주도민들을 유민(流民)으로 내몰았다.
제주유민은 전라도 경상도 해안과 심지어
중국의 해랑도(海浪島) 지역까지 떠돌았다.
당시 제주유민들에게는 특별한 명칭이 따라 다녔는데,
'한라산의 별칭' 두독야지(頭禿也只), 두모악(頭毛岳) 등.
혹은 해산물을 채취하여 생활한다고 하여.,포작인(鮑作人) 등.
조선시대 제주도민이 제주를 떠나야 했던 원인으로는
중앙 관리와 지방 토호의 이중 수탈, 왜구의 빈번한 침입,
제주도민들에게는 과중한 진상과 그에 따른 부역의 증대 등.
세월이 지나갈수록
제주 유민의 수가 증가
제주 인구는 감소하였다.
조선 중기 제주도민이 제주를 떠나는 것을 금지한 정책.
15세기 조선 정부의 중앙 집권화가 안정기에 접어들면서
제주에 관한 중앙 정부에서의 통제 및 간섭도 강력해져갔다.
남자는 부역, 공역, 군역에 얽메이어
여자가 생계 및 집안 살림을 도맡아 했고
노동력이 부족하면, 여자도 부역에 동원되었다.
조정의 지나친 행정 및·경제적 간섭은
제주도민을 유민(流民)으로 내몰았던 것.
조상 대대로의 고향을 등지고 떠나게 한 것.
가장 큰 이유는 온갖 명목의 잦은 수탈 때문이었다.
감귤 진상, 전복 등 해산물 진상, 부역, 공역, 군역 등.
해가 거듭될수록 제주유민은 증가하고 제주 인구는 감소.
조선 정부 입장에서 제주는 지정학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무시하지 못할 효용 가치가 있었다.
일본과 중국을 잇는 거점으로서 방위 전략 상 중요.
경제적으로는 명과의 말 무역에 있어.,말 생산지.
제주 지역의 특산물 또한 조선시대에 중요한 자원.
감귤 등 농산물, 전복 등 해산물, '말 소' 등 축산물.
조선 중기, 제주도민이 제주를 떠나 제주 인구 감소로
특산물의 진상, 군액의 축소 등이 심각한 과제가 되었다.
1629년(인조 7) 8월 13일 조정에서는 출륙금지령을 실시.
공무에 해당하는 사람만 육지를 오고갈수 있었고
그 관문도 '조천진 & 화북포구' 만으로 제한하였고
특히, 제주도민 인구 감소를 막기 위해
여자가 출륙하는 것은 더욱 엄격하게 금지.
특히, 제주 해녀에게는 엄격하게 적용되었다.
조정의 입장에서 효과적인 유민 정책이었지만,
제주도민들에게는 육지와의 단절로 고립을 초래.
조정의 강화된 수탈은 '양제해 모반.' 등을 불렀다.
또한 탐라국 시대 해상을 왕래하며
무역하던 배를 만들던.,조선 기술과
배를 다루던 항해 기술이 단절되었다.
범선의 운항은 금지되었고,
떼배 만 어장 인근을 맴돌면서
고기잡이 물때를 기다려야 했다.
'1629년(인조 7) 8월 13일 ~ 순조 말,1825년'
200년 간 출륙금지령에 묶여 살았던 제주도민.
출륙금지가 풀리자 과감히 탈출을 시도한 건 제주해녀.
해조류 채집을 위해 제주해녀들이 해외까지 뭍으로 진출.
그전까지는 몰래 뭍으로 진출하여 일했던 것이 고작이었다.
1880년 경남 울산 방면으로 진출한 것을 시작으로,
서해·남해·동해 바닷가는 제주 해녀의 차지가 되었다.
15세기 때부터 남해안으로 ‘출륙이주(出陸移住)’하며
그들이 꿈꾸던 ‘이어도’를 그려보곤 했던 제주 해녀들.
"이어도 사나~" 제주민요에는 그녀들의 아픔이 담겨있다.
조선시대 제주도민을 섬에 고립시켰던., 출륙금지령
제주 언어의 독특한 고유성을 보존할 수 있게 되었고
민간신앙 및 제주 전통 풍속이 보존되는 계기가 되었다.
...........................................................................
제주 해녀가 물질하기 위해
다녔던 제주도 해안가 작업로.
하나로 모두 이어 연결된.,올레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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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제주 해녀 비바리
옛 생활상을 둘러 볼 수 있다.
.......................올레길........................
올레란 제주 방언으로 좁은 골목이란 뜻이며,
통상 큰길에서 집의 대문까지 이어지는 좁은 길.
언론인 서명숙이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영감을 받아 시작, 사단법인 제주올레에서 관리.
제주도 외곽을 한 바퀴 걸을 수 있도록 이어져있다.
제1코스-시흥초등학교에서 광치기 해변, 총 15 km.
21개 코스가 만들어져 있으며 각 코스는 15 km 정도.
평균 소요시간이 5~6시간, 총 길이는 약 425km이다.
주로 제주의 해안지역을 따라 골목길, 산길,
들길, 해안길, 오름 등을 연결하여 구성되며,
제주 주변의 작은 섬들을 도는 코스들도 있다.
2006년 서명숙은 산티아고 순례길을 2006년 걸었는데,
함께 한 영국기자와 "본국에 돌아가면 같은 길을 만들자."
귀국 후, 영국 기자가 영국에 같은 길을 만들었다는 소식.
이후 2007년 9월 올레 1코스를 만들었다.
길 곳곳에 상징물로 표시하고 있는 점들과
패스포드 스탬프도 산티아고 순례길과 같다.
2010년 산티아고 순례길 방문자 27만 명.
2012년 제주도 올레길 방문자는 110만 명.
계획적인 코스 개발과 홍보를 통해
도보여행지로 성공한 제주 올레길은
제주도의 관광사업에 크게 기여했고
전국적으로 도보여행 열풍을 가져왔다.
올레길 이후에 전국 곳곳에서 도보여행 코스들이 생겨나고 있다.
지리산 둘레길, 남해 지겟길, 무등산옛길, 충남연가, 남한산성길 등.
2013년 4월 28일에 양평군에 제주올레와의 협력으로 만들어진 물소리길.
국내에서 뿐만 아니라 일본 규슈에도
제주올레 컨설팅으로., 규슈올레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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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레'는 ‘집 대문에서 마을 길까지 이어주는 좁은 골목’
2007. 9월 1코스~ 김녕에서 하도로 이어지는 20코스 개장.
우도, 추자도, 가파도 부속섬, 본섬 포함 25개 코스.,395km.
'하도 ~종달' 21코스 개장하여
제주도 한바퀴 도는 올레길 완성.
올레는 제주의 아름다운 풍경과
독특한 문화를 만끽할 수 있는 길.
25개 코스 올레길에는 제주 여행지 대부분 포함.
제주를 대표하는 바다, 포구, 해안 절벽, 오름, 마을.
유배지 흔적, 일제강점기, 4․3 사건 흔적도 볼 수 있다.
25개 코스 중
사람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과
인적드문 곳도 있다.
특히, 서귀포 해안을 따라 이어지는 1~10코스.
성산일출봉부터 남원큰엉, 외돌개, 주상절리, 갯깍,
산방산, 송악산 등 수려한 자연경관으로 유명한 명승지.
제주시 애월 - 곽지패총
인류가 바다에서 먹을 것을 구하기 시작한 패총시대
제주 해녀의 역사는 기원 전보다 더 거슬러 올라간다.
제주는 1만 8천 신(神)들이 살고있는 '신들의 고향'이다.
육지와 격리된 섬의 환경은 열악하다.
제주도의 토지는 척박하고 바람은 거세며,
우리나라에서 태풍을 가장 먼저 맞이하는 곳.
자연 재해 극복을 위한 독특한 민간신앙이 많은 제주도.
이웃과 가족의 안녕을 기원하고, 풍농과 풍어를 기원한다.
제주도는 돌, 바람, 여자가 많아 삼다도(三多島)라 불리지만,
신화와 무속 문화 또한 이에 못지 않게 많이 남아 있는 곳이다.
조선시대 제주섬에 "당오백 절오백"이란 말이 있었듯
당(堂)은 제주도 주민들의 민간신앙과 뗄 수 없는 관계.
1970년대 초, 제주도 내 행정마을 202곳(자연마을 550곳).
신당이 250여곳
신당이 없는 마을은
없다 해도 과언 아니다.
당의 신은 주민들에게 신앙의 대상.
마을 보호 수호신으로 전해 내려왔다.
1만 8천 신(神)들의 고향(故鄕).,제주도.
2017년 정유년 정월(음력 1월)을 맞아 제주도 마을마다
무사안녕, 풍요기원, 마을제가 2월 초순까지 잇따라 열렸다.
마을제는 한반도 전역에서 도시 농촌, 산간 해안마을 구분없이
널리 실시되었으나 미신타파 등을 이유로 일제 강점기 때 된서리.
새마을운동이 시작된 1970년대 또 탄압.
그후, 근대화에 밀려 상당 부분 사라졌다.
1990년대 이후 부활해 의례가 이어지고 있다.
일제 강점기 때 마을제를 조사해 기록을 남겼던
일본인 무라야마 도모즈미 - “마을제는 생활 지역과
조건을 같이 하는 마을 주민들이 재해를 피하고, 생활을
증진하는 행복을 구하기 위해서, 신께 빌고 평안한 생활을
즐기려는 목적에서 각자의 마음을 하나로 하여, 1년에 1회
또는 여러 차례 제사를 모시는 향토적 연중행사들 중 하나.”
제주의 마을제는 음력 1월 1일
추자면 묵리를 시작으로 2월 초순까지
160여개 마을에서 치러졌으며 정월을 맞아
마을에 따라 포제, 해신제, 동제, 동사제, 토신제,
당제, 이사제, 마을대제 등의 이름으로 마을제를 봉행.
제주에서 거행되는 마을제는 크게 남성과 여성들이
각각 주관하는 포제와 본향 당굿(당굿)으로 구분된다.
포제는 남성들이 주관하는 유교식 제법으로 지내는 마을제이고,
당굿은 여성들이 주관하고 심방(무당)이 진행하는 무교식 마을제.
납읍리 마을제와 함께 제주도의 대표적 마을제인 송당리 마을제는
본향당에 모신 당신이 ’여신’으로 무교식 포제의 전형을 보이고 있다.
본향당은 마을을 지켜주는 수호신을 모신 사당이자
‘당 신앙’의 뿌리로 본향당 신화의 중심이 되는 곳이다.
본래, 송당리에는 세 마을에 각각 따로 신당이 있었다.
윗송당에는 농경신이자 여신인 금백주,
샛송당엔 세명주, 알송당엔 수렵 목축신이자
남신 소로소천국이란 신이 있어 제사를 지냈다.
1841년 조선시대 제주 목사 이원조가 쓴 <탐라록>에는
탐라국 왕이 몸소 농사를 지으며 농업을 장려하던 풍속과 함께
풍년을 기원하던 의식에서 탐라국 입춘굿이 유래한 것으로 전한다.
북두칠성의 첫째 별.,탐랑성(貪狼星)
'탐랑성이 관장하는 별 나라'.,탐라(耽羅).
탐랑성의 성주(星州)가 창조여신 마고(麻姑).
.......................마고................................
마고신화는 단군 이전에 우리 민족의 생성 신화.
천지를 창조, 오늘날 인류의 기원이 된.,마고여신.
세상의 위치가 정해지자 지리산의 여신이 된., 마고.
모계사회 천지창조 여신이
지리산의 여신이 됐다는 것은
여성의 역할이 축소된 것을 상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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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천왕봉 天王' 성모상.
'마을의 수호 여신'을 모신 신당.,본향당.
육아, 치병을 위해 '7, 17, 27'일에 찾는 일담당.
매월 8일 '곡식의 수호신' 뱀을 모시는.,여드렛당.
생업과 관련된 이들이 다니는.,해신당 & 산신당 등.
제주의 음력 1월은 각 마을마다 시작되는 굿으로 분주하다.
1만8천 신들의 고향답게 새해 첫 ‘신년과세제’를 지내기 때문.
제주에는 풍부한 무속이 전해오는데 그 중에 대표적인 것이 ‘굿’
제주에는 마을마다 신들이 거처하는 장소 당(堂)이 있다.
마을을 수호하고 모든 일을 관장하는 성소이며, 제사장소.
'신들의 고향' 송당에서는 소천국과 금백주가
혼인하여 아들 18명, 딸 28명, 손자들을 낳았다.
이들이 제주도 각 마을에 흩어져 본향당신이 된 것.
새해가 되면 ‘신년과세제’를 드리는데
이 제사는 다른 제사 때보다 규모가 크다.
송당본향딩
송당본향당에서는 음력 1월 13일에,
와흘본향당에서는 음력 1월 14일 대제.
와흘본향당은 출입이 제한되어 있지만
당제가 열릴 때에 한해 방문이 가능하다.
탐라국 시대부터 이어진 제주도 유일의 전승문화축제인
탐라국입춘굿은 도민들의 평안과 풍요를 기원하는 행사.
2월3일(금)에.,제주목관아 및 원도심 일원에서 열림난장,
춘등걸궁이 2월4일(토)에는 춘경문굿과 입춘굿이 열린다.
탐라 신화공원
설문대할망 전설의 고향.,영실오름
화산폭팔, 제4 빙하기, 지구온난화, 노아의 대홍수 등.
천재지변 때 생존을 위하여 서남해 저지대 민족 대이동.
'엑소더스'를 주도한 옛조상의 민간 신앙들이 정착된 흔적.
'제주의 옛 이름' 영주(瀛洲)에 숨겨진.,마고지나.
'영주 방장 봉래' 삼신산 중 하나인.,한라산(영주산)
'마고 궁희 소희' 태고의 창조여신 후손., 삼신인(三神人).
'마고의 후손'., 영주.
'궁희의 후손'., 방장.
'소희의 후손' .,봉래
'제주 조상의 시조이자 삼신인., 고씨, 양씨, 부씨.
'제주 삼신인에게 시집 온.,'영주, 방장, 봉래' 여신.
그래서, 예나 지금이나 '신혼부부들의 천국'..제주도.
천국(天國) 같이
이국적인 풍경들.
갓 결혼한 선남선녀들이
첫날밤의 부푼 꿈을 안고
신혼여행지로 찾는.,제주도.
마을마다 아늑한 위치에 있는.,신당.
주민들이 신과 은밀히 대화를 나누는 곳.
집안의 크고 작은 일을 당신에게 고하는 곳.
태고(太古)의 어부와 해녀를 관장하는.,신당(神堂).
제주사람들의 일상생활에서 신앙의 중심은 무교(巫敎)
자연을 인격화 하고, 조상을 신성하게 여기는.,민간 신앙.
마치, '전설의 고향'인듯
생소하고도.,낯선 풍경들.,'
'제주에서는 왜 여자만 물질을 하는걸까?'
'제주의 남자들은 왜 물질을 하지 않는걸까?'
'제주에 해녀(海女)만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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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안가에서 미역, 천초, 해초, 소라 전복 해삼 문어 등을
아무런 기계 장치 없이 나잠업으로 캐면서 살아가는 여인들.
아직도 제주도 전역에 약 5,000명 해녀가 나잠업으로 생업을 영위.
<삼국사기> 503년(문자왕 13)조., ‘가즉섭라소산'.
'珂則涉羅所産’에서 珂(가)는 제주의 진주 혹은 패류.
단시간에 잠수하여 전복과 같은 해산물을 채취한.,기록.
<고려사> 1079년(문종 33)조.,'탐라 구당사
윤응균(尹應均)이 큰 진주 두 개를 바쳤는데,
별처럼 빛났으므로 야명주(夜明珠)라고 하였다.'
<고려사> 1276년(충렬왕 2)조.,'원나라에서
임유간(林惟幹)과 아실미리(阿室迷里)를 파견하여
제주의 진주를 얻으려고 했으나 실패하자 이 해 가을에
제주민의 진주 100개를 탈취하여 원나라로 돌아갔다는 기록.
1489년(성종 20년) 성종실록에는
“신이 듣건대 연해에 와서 사는 제주인,
농사짓지 아니하고 고기를 잡아 살아가기에
여러 읍의 수령들은 복작우 혹은 포작간(鰒作于)..”
(복작우는 어업에 전념하면서 전복을 따던 남성들.)
1679년 정의현감이 작성한 '남천록(南遷錄).,기록.
“포작인 수가 대단히 많아 족히 진상에 응할 수 있었고
경신년(1620) 이후로는 거의 사라졌다”라고 쓰여져 있다.
전복을 따던 남성들이었던 포작인이
여성들에 의해 대체되었음을 알 수 있다.
제주 방언 ‘보재기’는 어부이면서 전복을 따는 사람.
'세종실록' '지리지'에 제주목의 토공 품목으로 나타난
전복(全鮑)·인복(引鮑)·추복(搥鮑)·조복(條鮑)·곤포(昆布)
등은 바로 해녀와 포작인들의 작업으로 캐낼 수 있었던 것.
이건(李健)이 쓴 '제주풍토기(濟州風土記)'.,잠녀 기록.
“해산(海産)에는 생복(生鰒)·오적어(烏賊魚)·분곽(粉藿)·
옥두어(玉頭魚) 등 (중략) 곽(藿)을 채취하는 여자가 잠녀.
2월부터 5월 전까지 바다에 들어가서 곽(藿)을 채취한다.
적신노체(赤身露體)로 호미를 가지고 바다 밑 미역을 채취.
남녀 서로가 섞여도 부끄러워하지도 않고 생복(生鰒)을 채취.
1694년 제주목사 '이익태' 작.,'지영록(知瀛錄)'
“미역을 캐는 잠녀가 많게는 8백 여명에 이르는데
깊은 물속 미역 채취는 채복녀(採鰒女)나 다름없다.
익숙하지 못하다고 핑계대어 위험한 것을 피하려 한다.
잠녀들의 괴로움은 현격하게 다르다.
장차 전복 잡는 사람이 없을까 염려해서
균역(均役)하고자 전복잡이를 익히도록 권장.
미역 잠녀에게 추인복(搥引鰒)을 나누어 주었다.
1702년 제주목사 이형상(李衡祥)은
“섬의 풍속이 남자는 전복을 따지 않으므로
다만 잠녀에게 맡긴다.” “관에 잠녀안(潛女案)이
진상하는 전복은 모두 잠녀에게 책임을 지운다.” -기록.
1843년(헌종 9)부터는
포작인이 부담한 진상역은
예리처(禮吏處)가 대행하게 되고,
관아용은 민간에서 구입하게 되면서
제주해녀의 전복 진상은 모두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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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5년(고려 숙종 10) 탐라군 구당사(勾當使)., 윤응균
“해녀의 나체(裸體) 조업을 금한다”는 금지령을 내린 기록.
물속에서 고기 밥이 되지 않으려면, 알몸이 안전한.,제주해녀.
물의 저항을 줄일 수 있어
물 속에서 오래 일할 수 있고
상어가 공격 할 때, 재빨리 피신.
조선 인조 때 제주목사가 비슷한 명을 내린 기록.
“남녀가 어울려 바다에서 나잠((裸潛) 조업을 금지.”
그후로 남자의 잠업이 금지되어 해녀 만 물질하였다.
오늘날, 모든 면에서 세계 최고인.,'제주해녀.'
일본해녀 기량을 압도하는 연구 결과도 나왔다.
조선시대 인조때 남녀유별 유교관 조업 정책이
오늘날과 같이 제주해녀 만 남게 된 근본적 원인.
조선시대 제주해녀들이 조업을 위해 다닌.,,'올레길'
조선시대 제주해녀들의 애환과
삶의 무게가 배여 있는.,'올레길'.
'올레'란 제주 방언으로 좁은 골목이란 뜻이며,
통상 큰길에서 집의 대문까지 이어지는 좁은 길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영감을 받아 명명된.,올레길.
총 길이는 약 422km이며 주로 해안지역을 따라
골목길, 산길, 들길, 해안길, 오름 등을 연결하여
구성되며, 제주 주변의 작은 섬을 도는 코스도 있다.
절반은 아름다운 해안 올레이고,
나머지 절반은 오름과 중산간 올레.
가마리 해녀 올레는 ‘세계 최초 전문직 여성’
제주 해녀들의 삶을 여실히 보여주는 곳이며.
그외 올레길 구간도 원래, 해녀들이 다니던 길.
'가는개' 올레길
물질하기에는 남성보다는 체지방이 많은 여성이 적격.
일본도 우리나라처럼 해남(海男)이 없기는 마찬가지이다.
조선시대 일본 해녀도 알몸 조업은 제주해녀와 다를바 없었다.
'일제강점기 수많은 제주해녀가
일본으로 출가하여 진출한 탓일까?'
'한일 양국이 비슷한 자연환경 탓일까?'
일본해녀
조선시대 유교관에 비해 개방적인.,일본 성풍속.
일본해녀는 일할때 전통적으로 웃옷을 입지 않는다.
예나 지금이나 제주해녀에 비해 일본해녀는 나이가 젊다.
에도시대, 도쿠가와 막부시대까지는
여성을 '남성의 전유물'로 여겼던.,일본.
1930년대까지 성풍습에 대해서는 관대한 편.
일본해녀는 카메라 앞에서도
꺼리낌없이 포즈를 취할 만큼
비교적 자유분방한 모습이었다.
1930년대~1960년대 까지의 일본해녀(海女)는
장비 없이 팬티와 수경 만으로 바다속으로 들어가
제주해녀와 다를 바 없이 각종 해산물을 채취하였다.
'일본해녀의 원조'인.,제주해녀.
이건(李健) 作 《제주풍토기》.,제주 해녀.
그녀들이 관가나 오리(汚吏)들에게 가혹하게
수탈 당하였고, 생활이 매우 비참하였음을 기록.
옛날부터 제주 여성은 밭에서 김을 매지 않으면
바다에서 물질을 해야 하는 운명에 순종하여 왔다.
제주 소녀들은 7∼8세 때부터 헤엄치는 연습을 시작
12∼13세가 되면 어머니로부터 두렁박을 받아 얕은 데서
깊은 데로 헤엄쳐 들어가는 연습을 했고., 15∼16세가 되면
바닷속에서 물질을 시작하여 비로소 잠녀, 즉 해녀가 되었다
17∼18세에는 한몫잡이 해녀.
40세 전후까지 왕성한 전성기.
'옷을 입지 않고 맨몸으로 물질한다.' 하여.,"비바리".
해녀들이 참았던 숨을 길게 내뿜는 날숨이.,'숨비소리'.
휘파람 소리 같지만 이들에게는 생명과 같은.,삶의 소리.
유네스코 인류 무형 문화유산.,'제주해녀 숨비소리.'
제주해녀는 일본해녀보다 잠수 기량이 월등한 편이다.
물속에서 숨을 쉬지 않고 오래 견디는 비결은.,숨비소리.
'밤이면, 천상의 선녀들이 옥피리를 불며 내려와
천제연에서 미역을 감고 하늘로 올라갔다.'는.,전설.
천제연폭포 칠선녀제는 조선시대 '비바리'에서.,유래.
제주해녀가 물질 후 귀가때 몸씻는 곳.,천제연폭포.
천제연폭포는 3단까지 하늘로 올라가듯 펼쳐진 폭포.
수줍음 많은 처녀 비바리는 제일 높이 올라가서 목욕.
‘비바리’는 원래 전복을 따는 사람을 낮추어 이르는 말
물질은 주로 여인들이 하므로, ‘해녀를 얕보아 이르는 말
그 의미가 축소되어 애기상군 ‘소녀'까지 낮보아 이르는 말.
‘계집애’나 ‘가시내’, 혹은 ‘조금 성숙하나
아직 미혼 처녀를 상스럽게 일컫는.,"비바리"
'조선시대 해도인' 제주해녀를 없수이 여기는 말.
'옷을 입지 않고 일한다고, 없수이.,여긴걸까?'
원래, '비바리’ 어원은 ‘비+ 바리’로 분석된다.
‘비’는 12세기 계림유사 문헌에서 ‘복왈필(鰒曰必)’
‘복왈필’의 ‘필(必)’을 ‘빗’ 또는 ‘비’로 읽을 수도 있다.
'비' 또는 '빗'은 제주방언 ‘전복’이란 뜻말.
'빗창'은 전복을 따는데 사용되는 쇠갈고리.
'암핏'은 전복 암컷이고 '수핏.'은 전복 수컷.
'수핏여'는 ‘수핏’이 많이 서식하는., 여.
제주 서귀포시 성산읍 신양리., 바다 이름.
빗여(전복이 많이 서식하는 물속 섬).,도두동.
‘바리’는 ‘꼬바리(꼴찌), 꾀바리(꾀가 많은 사람),
악바리(성미가 깔깔하고 영악스러운 사람),
하바리(품위나 지위가 낮은 사람)’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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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100년 전.,조선시대 제주 해녀들의 사진이다. |
해녀들은 바다 어디에 어떠한 바위와 어장이 있고
어느 곳은 전복이 많이 난다는 것을 훤히 알고 있다.
바다는 해녀들의 밭이다.
위미리 해녀들의 밭은 마을 앞 ‘지꾸섬’ 지귀도(地歸島).
마을 앞 배로 25분 거리에 엄청난 해산물을 보유한 섬이다
위미리 어촌계 연간 소득원 대부분 이 어장에서 나온다고 한다.
소유 어장은 자신들의 밭이므로
어장 청소와 잡초인 ‘바당풀’을 제거
일년에 두세 번 어장 청소를 ‘개딲이’라 하는데,
이러한 작업은 모든 어촌계 회원들의 의무이다.
해녀들은 물질 하다가 돌고래 무리를 만나면
“물알로 물알로”나 “배알로 배알로”를 외친다.
돌고래 뒤에 상어가 뒤따르기도 하기 때문이다.
바다에서 물질 후 육지에 올라오면 장작더미를 태워 불을 쬔다.
불쬐는 장소를 ‘불턱’이라 하는데, 여기서 화제가 만발하게 된다.
요즘은 불턱이 거의 사라지고 현대식 탈의장이 해녀들의 휴식장소.
세종 때 제주목사 기건(奇虔)이 초도순시하는데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겨울에 거의 벌거벗은 여인이
바다로 뛰어드는 모습을 보고 놀라 수행원에게 물었다.
“이것 참 큰일이구나.
이 엄동설한인데도 발가벗고
바닷물 속으로 떼를 지어 들다니
세상에 이런 변고가 다 있는가?
제주에는 왜 이리
미친 여자들이 흔한고.”
수행원들이 해녀의 삶을 자세히 알렸다.
목사의 상에 올려지는 전복, 소라, 미역 등은
해녀들이 목숨걸고 채취한 사실을 알게 된 제주목사.
그후부터 기연은 제주목사로 재임하는 동안에
해녀들이 목숨걸고 캐낸 해산물은 먹지 않았다.
정조도 수라상에 색다른 반찬이 눈에 띄어 물었다.
제주 해녀들이 목숨걸고 캔 진상품임을 알게 되었다.
"그렇게 귀한 식품을 차마 먹을 수 있느냐?" 했다 한다
조선시대 해녀의 물질 기량이나 의지는 초인간적
특별한 장비도 없이 바다 속으로 20m까지 들어가서
2분이나 견뎌내며 추운 겨울에도 각종 해산물을 캤다.
얇은 무명 천 하나로 몸을 감싼., 잠녀
깊은 물속에 들어 가는 것은 어려운 일.
잠녀들이 물 속에 오래 깊이 가라 앉기 위해서는
물의 저항을 줄이려 천조각 하나도 생략해야 했다.
그러므로., 겨울 바다에서도 속곳 하나 만 입어야 했다.
물 속에서 나오면 몸이 퍼렇게 얼었고,
모두 떨며 불가로 모여 몸을 쬐야만 했다.
" 예전에는 참 고생들 많이 했어.
겨울에도 맨 몸으로 물질 했으니..."
1960년대 미국 국무성에서 뉴욕주립대학
허만란 교수와 연세대학 홍석기 교수팀에게
한국과 일본 해녀를 비교 연구하도록 의뢰했다.
한국 해녀들의 탁월한 활동력의 원인을 찾아
심해공사 능률을 높이고 군사력 증강이 주목적.
이들의 연구 논문에 의하면
해녀는 남자나 일반 여자보다
차가운 물속에서 덜 전율한다.
몸을 떨지않고 버티는 능력 탁월.
특히 제주해녀는 한달에 15일 이상 물질하는 능력
분만 직전까지도 물질하고 분만한 다음 3~4일 만에
또 다시 바닷물 속에 뛰어 들기도 한다는.,제주 해녀들
물질하는 동안 배 위에서 분만 사례도 적지 않았다.
생리학적으로나 의학적으로 볼 때 거의 불가능한 사실
배에서 낳은 아이를 ‘베선이’.
축항에서 낳으면 ‘축항둥이’,
물질하다 낳으면., ‘질둥이’
길에서 낳으면 ‘길둥이’
해녀는 수련에 따라 기량이 달라 계층이 있다.
하군으로부터 중군, 상군, 대상군으로 올라간다.
해녀계층에 ‘군(軍)’자를 사용하는 것이 흥미롭다.
목숨 건 잠업 물질이라 상군 명령에 절대 복종.
어린 소녀이면서도 기량이 뛰어나면 ‘애기상군’
해녀 사회에서는 ‘애기상군’을 자랑스럽게 여긴다.
해안가에서 나잠업으로 미역 천초 등 해초와
소라· 전복· 해삼· 문어 등을 캐면서 생계를 유지.
아직도 약 5천명 해녀가 나잠수로 살아가는 제주도.
'칠성판을 등에다 지고 혼백 상자를 머리에 이고’
표현할 만큼 목숨 건 위험한 물질을 해내는 여인들
또한 근대 일본 어선들이 제주 어장을 황폐화시키자
일본· 중국· 러시아 등지 출가(出家) 물질로 경제 활동.
문헌에 나타난 해녀의 기록은 삼국사기 503년(문자왕13)
‘가즉섭라소산(珂則涉羅所産)’의 가(珂)는 제주 진주(패류)
진주 채취는 전복과 같은 해산물을 채취한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사 1079년(문종 33)에 채취한 진주에 대한 기사가 나온다.
탐라 구당사(勾當使) 윤응균(尹應均)이 큰 진주 두 개를 바쳤는데,
별처럼 빛났으므로 당시 사람들은 야명주(夜明珠)라 했다고 한다.
고려사 1276년(충렬왕 2), 원나라에서 임유간(林惟幹)과
회회인(回回人) 아실미리(阿室迷里)를 파견하여 제주 진주를
얻으려고 했으나 실패하자 가을에 제주도민의 진주 100개를 탈취.
성종실록 1489년(성종 20), “신이 듣건대 연해에 와서 사는 제주인,
본래는 농업을 하지 아니하고 온전히 고기를 잡아 자금을 만들고
그래서 여러 읍의 수령들은 복작우 혹은 포작간(鰒作于)...” 기사.
복작우가 어업에 전업하면서
전복을 따던 남성들이라면
이들을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
정의현감이 기록한 『남천록(南遷錄)』(1679)에는
“포작인 수가 대단히 많아 족히 진상에 응할 수 있었고
경신년(1620) 이후로는 거의 사라졌다”고 기록되어 있다.
전복을 따던 남성들이었던 포작인이
여성들에 의해 대체되었음을 알 수 있다.
당시 유교관의 확산이 가장 큰 요인으로 작용.
지금도 남아있는 제주 방언 ‘보재기’는
어부이면서 전복을 따는 사람을 뜻한다.
'세종실록, 지리지'에 제주목 토공 품목으로 나타나는
전복(全鮑)·인복(引鮑)·추복(搥鮑)·조복(條鮑)·곤포(昆布)
등은 바로 해녀와 포작인들의 작업으로 캐낼 수 있었던 것.
이건의 『제주풍토기』에는 잠녀가 미역을 캐는 기록.
“해산(海産)에는 생복(生鰒)·오적어(烏賊魚)·분곽(粉藿)·
옥두어(玉頭魚) 등. (중략) 곽(藿)을 채취하는 여자가 잠녀.
2월부터 5월에 이르기 이전에 바다에 들어가서 곽(藿)을 채취.
잠녀는 적신노체(赤身露體)로 바다에 가득하고
호미를 가지고 바다 밑까지 가서 미역을 채취한다.
남녀 서로가 섞여도 부끄러워하지도 않고
(중략) 생복(生鰒)을 채취할 때도 마찬가지.”
1694년 제주목사 이익태(李益泰)의 『지영록(知瀛錄)』
“미역 캐는 잠녀가 많게는 8백명에 이르는데 물 속에 들어가
깊은 곳에서 미역을 캐는 것은 채복녀(採鰒女)나 다름 없다.
익숙하지 못하다고 핑계대어 위험한 것을 피하려고만 한다.
잠녀들의 괴로움은 현격하게 다르다.
장차 전복 잡는 사람이 없을까 염려해서
균역(均役)하고자 전복잡이를 익히도록 권장하고
미역 잠녀에게 추인복(搥引鰒)을 나누어 정해 주었다.
종전에 한 잠녀가 함께 힘을 합치면
매달 각자에게서 받는 전복이 한두 개
일년을 하더니 익숙해져 전복잡이 100명에게
준비해 바치도록 하고 추인복을 봉하여 진상하였다”
1702년 제주목사 이형상 “섬의 풍속이 남자는
전복을 따지 않으므로 다만 잠녀에게 맡긴다”
“관에 잠녀안(潛女案)이 있는데 진상하는 전복은
모두 잠녀에게 책임지운다”라고 하고 있다.
1843년(헌종 9)부터는 포작인이 부담한 진상역은
예리처(禮吏處)가 대행하게 되고, 관아용은 민간에서
구입하게 되면서 전복 진상은 사라졌다.
구좌읍 해녀들은 30일 중 15일은 물에 들어가 작업.
15일 간격으로 12물에서 6물까지 7~8일은 입어한다.
한 달에 두 번 이뤄지므로 물질 작업은 15일인 셈이다.
15일 간격으로 바닷물의 간조를 헤아리는 것.,‘물찌’
물찌는 음력으로 세어 초아흐레와 스무나흘이.,'한물'이다.
12물 조금 한조금 게마슴 한물 두물 서물 너물, 다섯물 여섯물 등.
전복, 소라, 오분자기 잡는 헛무레는
한조금에서 일곱물까지 작업을 한다.
미역이나 천초 역시 두세물에 시작
여섯물 혹은 일곱물까지 작업한다.
물질 할 수 있는 물찌에는
파도가 너무 거세지 않으면
날씨 궂은 날에도 작업을 한다.
물찌에서 ‘조금’은 세물에서 다섯물,
물이 좋고 물 아래가 맑으면 ‘암조금’
물알이 어두우면 ‘숫조금’이라고 한다.
물때가 일곱물, 여덟물이 되어
물이 거칠어지면 ‘웨살’이라 한다.
해녀의 물질은 무리지어 공동진행.
몰래 하는 해산물 채취를 금하다가
해경(解警: 허치· 허채문)을 하면
주민 누구나 물질에 임할 수 있었다.
그러나, 해녀 수가 제한되고 해녀회와 어촌계가 생긴 후
비록 해경을 하더라도 해녀 만 작업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제주 해녀들은 공동으로 구역 어장을 관리하고 감독한다.
해녀가 입어할 수 있는 구역 어장은 정해져 있고,
입어와 작업 시기는 해산물 종류에 따라 정해진다.
해녀들은 보통 오전 9시쯤에 입어하여
오후 네 시나 다섯 시가 되어서 나온다.
두 시가 지나면 힘에 부친 해녀가 먼저 나오는데,
이때 채취한 해산물은 망시리에 가득 담겨져 있다.
남정네는 지게로 망시리를 공동 판매대로 운반한다.
소라·전복·해삼·성게를 잡는 헛무레는 여름 산란기에는
금어(禁漁) 하다가 음력 10월에서 3월까지 작업을 한다.
4월에서 6월까지는 천초와 닭고달(고장초)를 채취한다.
미역은 5월 늦게 작업한다.
6월 말부터 10월까지 농사철이라
한 달에 세 번 정도 천초 작업을 한다.
전복은 음력 8월이 산란기
8월과 9월에는 금채(禁採).
천초는 우미라고도 하며 수심 5m에서 자란다.
감태는 7월에 작업, 넙미역은 남자들이 배로 채취.
망시리에 담아온 미역을 갯가에 널어놓아 햇볕에 말렸다.
해녀들이 채취한 미역은 육지부에 반출되어 돌미역
양식 미역이 보급되면서 이제는 거의 채취하지 않는다.
해녀는 물질 나가기 전날밤 꿈을 통해 다음날 작업을 예견.
상을 당해서 베로 만든 상복을 입은 사람을 꿈에서 보거나
떡먹는 꿈이나 돼지꿈을 꾸면, 전복을 뗀다는 의식이 있다.
또 물질 나갈 때 만난 사람에 따라 재수가 좋다고 생각한다.
‘재수가 좋다’라는 것은 해산물을 많이 캐거나
특히 크나큰 전복을 하나 떼는 일을 의미한다.
또한 전복을 떼면 침을 뱉거나 혀로 핥아
그 전복에 전복이 잇달아 붙기를 기원한다.
바다는 해녀들의 밭이다.
해녀들은 바다에 들어가면
어디에 어떠한 바위와 어장이 있고
어느 곳에 전복이 많이 난다는 것을 안다.
딸은 어머니 해녀에게서 그 밭을 익혀
물질 작업을 잘하는 상군으로 성장한다.
해녀들의 밭 다툼은 자주 분쟁 원인이 된다.
행원리 해녀 밭은 경계가 속칭 ‘지풍개’
한동과의 경계는 ‘더뱅이물’로 되어 있어
인근 마을에 비해 바다 밭이 훨씬 넓은 편.
해산물 풍부한 행원리 해녀들은
자신들의 바다가 어느 바다보다도
생산물이 풍부하다고 생각하고 있다.
행원리 바다 밭의 이름은 다양하고 재미있다.
주로 물과 여(섬), 덕, 코지 등으로 이루어진다.
여는 물에 잠긴 바위라
밀물 때는 보이지 않지만
썰물 때 나타나는 바닷속 섬
생김새가 사람이 등을 굽힌 것 같아 ‘등 굽은여’,
넙적하고 편편한 모양을 하고 있다 하여 ‘너븐여’,
물새들이 날아와서 새끼를 친다고 해서 ‘오저여’,
연자방아처럼 넙적하게 생겼다고 하여 ‘방앳여.’
코지 역시 육지에서 바닷 쪽으로
길게 뻗어 물위에서 보이는 바위.
해녀들의 소유 어장은 자신들의 밭이므로
어장청소, 해초밭 '잡초' 바당풀을 제거한다.
일 년에 두세 번씩 치르는 어장 청소.,‘개딲이’
이 작업은 모든 어촌계 회원들에게 주어지는 의무.
만일 빠지면 벌금을 내며, 보통 하루 임금 정도이다.
근간에는 20,000원 정도로 책정하고 있고,
회원 모두가 참석하여 공동으로 작업한다.
해녀가 물질 할때 입는 옷은 물소중기(물속곳)
겨울에 너무 추워 30분 내지 2시간 작업을 한 후
불 턱에서 불을 쬐고 몸을 녹여 물질 작업을 했다.
1975년부터 검은 고무옷과 오리발을 착용
해녀들이 사용하는 물질 도구들을 살펴보자.
전복을 뗄 때 쓰는 30cm 날카로운 금속 도구.,'빗창.'
빗창에 녹이 슬어있으면 전복을 뗄 수 있는 운 좋은 날.
빗창이 무디면 개날[戌日]에 대장간으로 가서 갈고 온다.
햇빛에 잘 익은 박을 타서 꼭지를 피해 구멍을 낸.,'테왁.'
모자반, 톳, 미역을 벨 때 쓰는 낫 모양의 호미.,'정게호미’.
억새풀 속껍질로 그물 모양으로 짠.,망시리
채취한 해산물이 새어나오지 못하도록 한다.
오분작을 떼어 담는 작은 망사리.,'조락'.
물고기 잡을 때 쏜다 하여 '소살' or '작살'
오분자기 성게 문어 채취할 때 쓰는.'골각지'.
긴 것은 문어를 잡을 때 사용하고,
짧고 날카롭게 된 것은.,오분자기 채취.
김을 맬 때 사용하는 호미(골갱이)와 비슷.
물질 기구와 채취한 해산물을
넣고 다니는 대바구니.,'질구덕'.
제주해녀는 등에 짊어지고 다녔다.
바다 밑을 들여다보기 위해 쓰는 안경., ‘족세눈.’
1960년대 ‘왕눈’의 둥근 대형 단안경으로 바뀌었다.
행원리 옆마을 한동에서 만든 것을 ‘궷눈’이라고 한다.
고무옷 무게지탱을 위해 다는 무거운 납덩이
나이 들수록 연철의 무게는 많게 하여야 한다.
해녀가 타지로 나가서 물질하는.,출가(出稼).
돈벌기 위해 타지로 나가 물질 작업을 하는 것.
제주 해녀들은 근대에 외국까지 나가 출가 물질.
1876년 강화도조약 이후 일본 어민들이 한반도 출어.
1880년대 일본 잠수기 어선 137척이 전복 200관씩 채취
잠수기 어업은 오랫동안 물질할 수 있어 어장이 곧 황폐화.
1885년 조선인의 전복 채취는 일본 잠수기 어선의 1/10
해녀의 물질 채취량은 잠수기 어선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1895년부터 제주 해녀들은 경상남도로 출가 물질을 떠났다.
이후 제주해녀의 출가 물질은 활발해 범위도 넓었다.
경상도, 강원도, 다도해, 함경도 등 육지부뿐만 아니라
도쿄, 오사카, 칭따오, 따리엔, 블라디보스톡 등지로 출가.
특히 출가 물질 중에서 일본 출가 물질은 극성스러웠다.
일본 출가 물질은 1903년 미야께지마[三宅島]를 시작으로,
주로 미에껜[三重縣]에서 제주해녀를 수입해 가서 이뤄졌다.
미에껜 해녀들이 조선으로 출가했으나
제주 해녀에 비해 일의 능률이 떨어져서
오히려 제주 해녀를 수입해가기에 이르렀다.
일본 해녀
'일본해녀의 조선 출가' 진출은
제주해녀들이 일본으로 출가하여
물질을 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던 것.
1932년 일본에 출가한
제주해녀 수는 1천 6백 명.
일본 지바현 보소반도는 아마 어업활동으로 유명.
'아마'는 바다에 잠수하여 소라와 전복을 잡는 해녀.
일본해녀 어원은 "보자기" "챠무케"라는 고유어가 있다.
옛부터 해녀의 어업이 성행하였던 제주.
그 제주해녀들이 일본으로 이주하였던 것.
돈벌이를 위한 일본에 출가한 제주해녀가 57%.
1938년 경부터 지바현 '카츠우라'에
매년 10명 안팎의 제주해녀들이 출가.
당시 제주해녀 인솔자 중 1인 문만국씨.
"내가 일본에 온 것은 생활 때문이다.
오면, 그만큼 섬의 생활비가 줄어든다."
그때는 제주의 남녀 젊은이는 모두
일제가 군수공장으로 끌어내거나
조선 위안부로 전쟁터로 보냈지.
제주의 젊은 처녀들은
그런 곳에서 도망치려고
나를 따라서 일본으로 왔다 "
제주 해녀들은 조개를 잡아 돈을 번 것이 아니라
'감태'라는 해초를 채취하여 일본군에게 팔았다.
감태는 화약의 원료가 되기 때문이었다.
"1943년 제주해녀는 일본에 왔지만
1944년부터는 감태 채취에 강제동원.
전복을 잡거나 하면 처벌된다 "고 했다.
1945년 일본 패전 후에도, 제주해녀는 돌아가지 않았다.
4.3 항쟁으로 많은 제주민들이 일본으로 탈출해 왔기 때문.
...................제주도 4.3항쟁........................
1947년 3월 1일 경찰의 발포사건을 기점으로 하여
1948년 4월 3일 발생한 봉기사태와 1954년 9월 21일까지
발생한 무력충돌 진압과정에서 제주 양민들이 희생당한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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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일본해녀는 제주해녀로부터 잠수 기량을 배우게된다.
제주해녀는 "보소해녀"의 한 사람으로서 일본인과 공존한다.
한 남편에 아내 몇명이라는 제주도의 전통은 유지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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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 출가한 제주해녀들은
나이를 먹고 이윽고 죽게 되면
일본 땅에 무덤을 만들어야 하였다.
일본 카모가와시 장흥원(쵸코우잉)란 절에는
1970년대 세워진 많은 '제주해녀의 묘'가 있다.
비석에는,"한국 제주도 출신"등이라고 새겨있다.
고향이 제주도 임을 뭔가 남기려 하는 문자를 읽을수 있다 。
이곳으로 이주한 전복업 종사 해녀들과 인솔 책임자의 무덤.
제주 해녀들의 무덤 건립을 받아들인 사원의 존재가 주목된다.
그들은 일본에서 합법적인 체류 생활이 어려웠기에
일본 내에서 그들의 무덤 건립이 불허된 시대였던 때문.
주지 스님 - " 죽으면 일본인도 한국인도 모두 부처입니다."
가족 계보를 소중히 하는 일본인 후손에 의해
일본 출가 후 그곳에 묻힌 그들의 성묘는 행해진다.
제주인 출신 일본 수산업 개척 선각자를 기리고 있는 것.
그곳 묘소의 故 박기만 씨는 몇명의 제주해녀를 데리고
오사카에서 보소 반도로 이주한 일본 수산업 개척 선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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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녀의 출가 물질은 1895년을 기점으로 세 시기로 나눌 수 있다.
첫 시기는 1895~1945년 동안 해녀들은 뛰어난 물질 역량을 바탕으로
한반도 전역, 일본, 중국,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대만 등지로 진출하였다.
살얼음이 채 걷히지 않은 바다에서
무명천 한조각 속옷으로 몸을 가리고
그 추운 겨울 바당밭으로 뛰어든 제주해녀.
"숨비우는 소리는
살멍 죽는 소리여~"
"물소곱에 사는 소리.
칠성판을 짊어진 소리여~"
1940~ 1970년대 제주해녀들은 독도까지 출가 조업.
제주해녀들은 독도에서 물질해 번 돈으로 결혼자금
또는 집안 살림에 보태거나 밭을 사는데 사용하였다.
독도에 침입하는 일본 어선과 순시선 등에 맞서
독도 민간조직인 독도 의용수비대가 1953년 결성.
그 이전부터 제주해녀의 물질이 독도에서 이뤄졌다.
독도로 물질 출가를 가는 해녀들은
물질을 잘하는 '상군해녀'들로 구성.
처음에는 한림읍 해녀들이 독도 물질
1949년 15살에 독도 물질에 나섰던 고정순(81세)
제주 한림읍에서 해방후 가장 먼저 독도를 찾았다.
그당시 바다사자류 '가지'의 자생지였던.,독도(가지섬).
울릉도에서 저녁에 출발해
밤새, 배 타고 새벽이 되니까
조그마한 섬 두 개가 나타났다.
독도를 이루는 동도와 서도.
"독도에 사람이 살지 않을 때라
나와 사촌언니 4명 등 5명이 갔어.
집도 없고 사람도 없어서 무서웠어.
사공이 나무토막을 싣고 오면
그걸로 굴속에 임시 거처를 만들었어.
가마니 깔고 지내며 미역을 널어 말렸지.
내가 제일 어리고,
물질도 언니들보다 못해서
미역 손질하는 심부름만 하다가 왔어."
"1970년대까지 계속된 독도 물질
당시 전복보다 비싸던 미역을 채취.
서도 굴에 가마니를 깔아 집 삼고
수십명이 들어가 2~3 개월씩 살았어.
'수입 좋다.' 소문나자 너도나도
수십년 동안 물질을 하고 살았는데
왜 일본 사람들이 자기네 땅이라 그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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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1960년대는 이민이 제한되어 밀항 방식을 선택
1970년대부터 현재까지는 여전히 불법적인 체류 방식.
오늘날, '제주해녀 축제'에 우정출연 참가하는 일본해녀.
[해녀들의 신앙과 영등굿]
해녀들은 목숨 걸고 물질 하기 때문에
그녀들의 민간 신앙은 진지하고도 강렬하다.
“칠성판을 등에 지고, 혼백상자를 머리에 이고”
제주 해녀들의 공동의례로서 절대 의례는.,영등굿.
대부분 어촌에서는 어촌계 중심으로 영등굿을 한다.
'음 2월 1일~2월 15일' 어부와 해녀들이 함께 참여하다.
영등굿은 그해의 풍어를 기원
관(官)과 주민이 모두 어우러져
축제의 향연을 베푸는 잔치이다.
"영등할망'.,영등신.
영등굿의 주된 신은 영등신으로 ‘영등할망’ 여신이다.
강남 천자국 또는 외눈배기섬에서 왔다가 돌아가는 신
물질이나 어로 활동의 안전, 해산물 풍요를 관장하는 신.
개인 의례로는 음력 정초 ‘할망당’에 가서 빌거나
바다에서 용왕에게 비는 ‘지드림’을 행하기도 한다.
영등굿이 끝난 때이거나 새해가 되어
물질을 시작할 때 밥이나 쌀을 종이로 싼 후
실로 묶어서 바다에 던지는 것을 일컬어 '지드림'
'요왕신 & 바다에서 죽은 영혼'에게 바치는 조그마한 정성
이외에도 구좌읍 동김녕리와 안덕면 사계리는 ‘잠수굿’ 의례.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의 수탈에 대항하여
제주 해녀 수천명이 비창을 들고 투쟁했다.
비창은 전복을 채취할때 사용하는 쇠갈고리.
1932년 약 3개월에 걸쳐 궐기한 연인원 17.000 여명.
권익을 위한 여성 어민들의 항쟁으로는 전국 최대규모.
.....................조선시대 제주해녀 조합사건........................
1932년 1월 7일 하도리 해녀 3백명이 세화리 장터에서 시위행진
면장 강홍칠이 신임 도사 '다구치'와 면담약속 후 오후 5시 해산
다구치가 세화리를 방문·시찰하는 날이자
해녀조합이 패류의 지정판매를 실시한다고
공고한 1월 12일, 640명 해녀들이 모여 시위.
각 마을 해녀 대표들이 연설을 통해 조합에 대한 불만을 성토
동시에 20명 해녀 대표는 세화리 주재소 안에서 다구치와 교섭.
해녀들이 주재소를 둘러싸고 위협하는 분위기에서
다구치는 해녀들이 요구한 '일체의 지정판매 절대 반대'
등 12개의 요구조건을 5일 이내에 실현시킬 것을 약속했다.
이 사건 후 관헌 측에서는 해녀들의 배후로
'민중운동협의회'라는 비밀결사의 구성원을 검거
이에 해녀들은 호송중인 차량이나 주재소를 습격했다.
그 이후에도 청년들의 연행은 계속 이어져
남자 43명, 여자 35명 총78명이 검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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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는 조선시대부터 일제강점기 농민항쟁의 진원지.
물론 사회불의에 맞서 싸우는 항쟁정신으로 이어져왔다.
1800년대 임술년 농민항쟁, 방성칠의 난, 1901년 이재수 난
1947년 3월 1일., 경찰의 발포 사건.
그 사건을 기점으로 일어난 4.3 항쟁.
1948년 4.3 비극은 제주도민 죽음으로만 끝나지 않았다.
희생자 유족들은 공산주의자로 낙인 찍혀 고초를 겪었다.
4.3 비극은 공동체 의식을 파괴한 정신적 피해도 가져왔다. ,
1949년 봄까지, 제주도 유격대는 정부의 골칫거리
반란을 종식시키려 정부는 일련의 조치를 결정했다.
유재홍 대령이 지휘하는 특전사를 제주도로 파견한 것
이 지역에 대한 정부의 통제력 회복을 과시하기 위해
이승만이 방문했고 5월 10일은 국회의원을 뽑는 선거날.
유권자 96%가 선거에 참여하였지만, 투표자 수는 적었다.
제주도 두 개 선거구 중 을 선거구에서 기표한 자는 5,766명
선거인 수가 줄어든 것은 아마도 폭동으로 인한 섬 인구 감소,
투옥된 게릴라 용의자 및 공산주의 동조자에 대한 공민권 정지.
'한미 연합' 남한정부 수립과정에서 벌어진 사태.
사태의 정당성 여부를 떠나 제주도민에게는 비극.
4.3 비극은 제주도민의 죽음으로만 끝난 것이 아니었다.
희생자 유족들은 공산주의자로 낙인 찍혀 고초를 겪었다.
4.3 비극은 공동체 의식을 파괴한 정신적 피해도 가져왔다.
제주도는 조선시대부터 일제시대까지 농민항쟁 진원지.
제주도민은 자신들이 직접 제주도를 만들어 가길 원했다.
그러나, 미국과 우익은 물리력을 사용해 진압하려 했던 것.
제주도 4.3 항쟁은 여순 반란사건을 불러 일으켰고
여순 반란사건은 지리산까지 그 후유증이 확산된다.
1950년대 전후 지리산 '반란의 역사 진원지'는 제주도.
제주해녀들은 19세기 말부터 전국 여러 해안으로 출가.
또 객주(客主)의 인솔에 따라.,일본 각지와 블라디보스토크,
'랴오둥 반도'의 다롄[大連], '산둥성[山東省]'의 칭다오[靑島].
1920년대부터 8·15해방까지 일본 각지에 약 1,500명,
한국 본토 연안에 약 2,500명이 출가한 것으로 전한다.
그 옛날 앳띤 소녀들이 지금은 주름꽃 80노인이 되었다.
그래도, 그들은 할망바당을 향해
힘이 솟는한, 바당 밭으로 뛰어든다.
그것은 삶터가 거기에 있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최고 9,000명까지 이르렀던 해녀는
최근 급격히 줄어 몇백 명에 지나지 않고 있다.
마을마다 영등굿, 잠수굿을 벌여 풍어를 비는 해녀들.
제주도 해녀들 사이에서는 노를 저으며 부르는 민요
‘해녀노래’가 전해져 오며 민속놀이 해녀놀이가 있다.
덧 말.
일본해녀의 메카는 동북부 지방이 아니라
미에(三重) 현 도바(鳥羽) 시와 시마(志摩) 시.
일본 전역의 해녀 2174명 중 절반이 이 지역에 있다.
이들 자치단체는 쇠락하는 고향을 위해
해녀 문화 부흥에 전력을 기울이고 있다.
외신기자들 초청도 이와 같은 노력의 일부.
해녀는 전 세계에 한국과 일본에만 있다.
처음 보는 해녀들의 ‘물질’에 독일 프랑스
스위스 이탈리아 등 유럽의 기자들뿐 아니라
중국 베트남 기자들도 놀라움을 감추지 않았다.
수중 카메라를 들고 함께
물속으로 뛰어드는 기자들.
해녀들이 조업을 끝내고 둘러앉아 이야기꽃을 피우면
외신 기자들이 해녀가 된 이유와 생활에 대하여 질문 공세.
해녀 문화를 이용한 지역 마케팅도 기자에게는 흥미로운 주제.
해녀들의 안녕을 비는 ‘이시가미(石神)상’., 신사.
일본 전국에서 찾아온 여성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여성의 소원이라면 한 가지를 반드시 들어준다는 믿음.
별 표시와 격자무늬를 새긴
부적도 해녀에게 인기가 높다.
.
외신기자 초청행사는 해녀 문화를
유네스코(UNESCO) 인류문화유산에
등재하기 위한 홍보 전략 성격도 있다.
사라져 가는 해녀 문화를 보존하기 위한 한일 공동작전.
문화유산 등재가 필수라는 제주해녀 제안(2007년)에 호응.
"일본해녀 하얀 무명옷은 1900년대 제주 해녀에게서 배운 것."
"그전까지는 상반신을 드러낸 채 물질을 했다는 것."
한일해녀 공동작전은 명맥이 끊길지 모른다는 위기감.
1956년 1만7611명 일본 해녀는 2010년 2174명으로 1/8.
그나마 60대 이상 고령자가 대부분이다.
젊은 여성이 기피하고 있는 데다 바다 오염과
해수 온도 상승으로 고가품인 전복이 급감한 때문.
한때 3만명 제주 해녀도
4800여 명으로 급감했다.
1930년대 항일 운동 제주 해녀들이 일본 해녀와 연대.
문화유산 등재가 이뤄지면 2002년 월드컵 공동 개최후
한일 교류사의 의미 있는 한 페이지를 장식할듯 보인다.
100년전 제주.
1921년 독도 출가물질.,제주해녀.
1982년 독도 최초주민 故 최종덕 할아버지.
제주 미녀 파이터 송가연
제주 스노클링